“바느질용 바늘도 못 만드는 나라가 핵개발에 도전하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3)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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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시설 부지로 선정된 외교관들의 소풍장소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A. Q. 칸 박사는 무니르 아메르 칸 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 위원장과 갈등을 빚었다. 칸 박사와 칸 위원장 모두 핵개발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기를 원했다. 미안 압둘 와히드 전 주독(駐獨) 파키스탄 대사는 2016년 11월 ‘파키스탄 핵폭탄을 만들다’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회고록에는 칸 박사가 직접 쓴 회고록이 일부 포함돼 있다. 칸 박사는 1976년 파키스탄으로 돌아왔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을 때, 부토 총리는 티카 칸(197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군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 주라고 지시했다. 내가 파키스탄에 남아 달라는 부토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유럽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 대가로 나는 한 달에 고작 3000루피(당시 환율로 약 300 달러)의 월급을 받는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 고문으로 임명됐다. 내가 1975년 12월~1976년 7월 PAEC에서 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만약 핵 프로젝트가 PAEC하에 있으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PAEC의 의장 무니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독립 조직의 책임자가 되지 않으면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면서 내 입장을 고수했다. 부토 총리는 M. 임티아즈 알리 칸(부토 총리의 군사보좌관) 장군을 통해 나에게 PAEC 의장을 맡으라고 제의했다. 나는 “내가 PAEC 의장이 될 경우 유럽에서 꽤 알려진 핵농축 전문가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장 여러 가지 제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후 관계관들과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나는 부토 총리의 지시로 기술연구실험실(ERL·Engineering Research Laboratories)이라는 이름의 독립 조직에서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파키스탄 부토 정부는 1976년 7월 31일 ERL 건설 프로젝트를 칸 박사에게 모두 일임했다. 당시 붙여진 암호명은 ‘프로젝트 706’이었다. 칸 박사는 7년 안에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던 과학자들을 불러들여 팀에 합류시켰다. 칸은 농축우라늄 시설을 건설할 부지로는 카후타를 선정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동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인도와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와 매우 근접해 있었다. 인도 전투기가 출격하면 4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칸은 총리가 있는 이슬라마바드와 가까이 있는 것이 자신이나 프로젝트 모두에 유리할 것으로 봤다. 원래 이 장소는 해외에서 파키스탄에 온 외교관들이 소풍을 자주 가던 지역이었다. 이 자리에 펜스가 세워지고 군부대식의 출입 저지선이 만들어졌다. 외교관들의 소풍 장소는 사라지고 파키스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늘도 못 만드는 나라가 핵개발에 도전하다”

칸 박사의 팀은 농축시설 건설과 부품 조달, 시안 제작, 실험 시설 제작 등을 동시에 진행했다. 칸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개의 원심분리기가 필요할 것으로 봤다. 그는 그가 습득한 두 개의 원심분리기 기술 중 CNOR을 만들기로 했다. CNOR은 새롭게 만들어진 G-2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우선 만들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URENCO가 CNOR 개발을 그만두고 G-2에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에 CNOR 관련 부품을 구하기가 보다 쉬웠다. CNOR 원심분리기의 하단부에 있는 회전자를 정상적으로 돌리게 하는 베어링 부분이 우선 문제였다. 회전이 빨라지면 이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문제였다. 이 베어링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합한 바늘을 만들어내야 했다.

칸은 훗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바느질용 바늘, 좋은 자전거, 하다못해 포장도로도 만들지 못하는 국가가 가장 새롭고, 가장 어려운 기술들을 만들어 가려 했었다.>

카후타 핵시설은 빠르게 건설돼 갔다. 작은 발전소가 핵시설만을 위해 설치됐다. 파키스탄의 전력시설은 취약한 상황이라 여름이 되면 정전(停電)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 시설에서 필요한 부품을 자체 생산하는 공장도 만들었다. 감시타워와 경보장치, 외부인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만들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이란 테헤란 사무소는 “카후타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공사가 평소 파키스탄과 같지 않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매일 매일 진전 상황을 볼 수 있을 정도다”라고 보고했다.

조력자 그리핀과의 만남

군대가 주도한 핵시설 건설은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됐다. 칸 박사는 원심분리기 제작을 직접 담당했다. 그는 1976년 가을, 네덜란드와 독일, 영국,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의 국가를 방문해 자신의 인맥들과 접촉했다. 칸 박사는 이때 파키스탄식 원심분리기인 ‘P-1’을 개발하려 했고 이에 필요한 부품을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칸은 영국 웨일스 출신의 피터 그리핀이라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된다. 그리핀은 웨일스 남부 항구 도시인 스완지에 있는 기계부품 회사인 ‘시미타(Scimitar)’에서 근무하던 젊은 판매 담당자였다. 1976년 여름, 그리핀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지만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됐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파키스탄 출신의 사업가 압두스 살람이었다. 살람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선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공하는 미국 회사 ‘락웰 인터내셔널’의 영국 지사 전화번호를 연락하려다 번호를 잘못 확인해 그리핀에게 전화를 걸게 됐다. 그리핀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살람은 락웰에서 만드는 전동 공구 100만 유로어치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이는 미국에서 만드는 최고의 제품이었다. 내가 락웰 소속은 아니었지만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런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살람은 런던에서 그리핀을 만나 자신이 구입하려고 하는 부품은 “압둘 카디르 칸이라고 하는 젊고 똑똑한 파키스탄 과학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그는 “칸은 그의 조국을 산업화하고 현대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살람은 락웰에서 만드는 기기뿐만 아니라 더 많은 물품을 유럽에서 구입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핀은 파키스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와 사업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당시 그리핀은 자신이 다니던 스완지의 회사의 임금이 적어 불만이 많았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웨어게이트’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는 이곳에서 살람이 운영하는 ‘살람 라디오 콜린대일’이라는 회사에 물건을 납품해주는 일을 했다. 이듬해 그리핀은 살람이 운영하는 회사의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회사 이름을 ‘SR 인터내셔널’로 바꾸게 된다. 당시 칸이 필요한 물품을 구해 파키스탄으로 보내는 회사는 약 십여 곳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이다.

“중국은 우리의 친구다”

1977년 8월 살람은 그리핀을 칸에게 소개했다. 그리핀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칸 박사와 파키스탄의 핵시설을 담당하던 관계자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핀은 칸이 이 자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리에 있던 장군들은 그리핀에게 파키스탄 산업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라며 사업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리핀은 한 장군에게 “당신이 책임자냐”라고 물었다. 장군은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칸이라는 젊은 사람이 책임자라고 했다. 그리핀은 “초창기의 칸은 멋진 친구였다. 친절하고 똑똑했으며 다정했다”고 당시의 칸을 설명했다. 칸과 그리핀은 그렇게 서로 알게 돼 거의 매주 전화통화를 하는 사이가 됐다.

칸 박사는 라시드 알리 카지 대령을 런던으로 보내 물건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리핀은 당시 칸과 겪었던 일화를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그리핀은 칸에게 중국으로부터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사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스라엘에서 만든 것을 중국이 수입해 재판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로부터 직접 구입하는 것이 저렴하다는 이유였다. 칸은 “싫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다. 중국은 우리의 친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핀은 칸이 요구한 부품을 구입해 파키스탄으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그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이 부품들로 무엇을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자동차를 팔 때 이 사람에게 자동차를 은행털이에 사용할 계획이냐고 물어보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물건을 사면 포장을 해서 파키스탄에 보낼 뿐이었다.”

칸은 순조롭게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부품들을 구입했지만 P-1 하부에 있는 베어링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1976년 8월 위험한 행동에 나섰다. 네덜란드에서 함께 근무했던 프리츠 비어먼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로 곧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비어먼은 두려웠고 자신이 네덜란드에 없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칸은 1976년 9월 네덜란드로 갔다. 그는 FDO의 판매 담당자에게 사용이 중단된 CNOR 원심분리기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판매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비어먼에게도 다시 편지를 썼다. 핵심 기밀 사안들을 자신에게 제공해달라고 요구했다. 칸은 “이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비어먼이 답하지 않자 칸은 또 한 번 편지를 보냈다. FDO에 있는 다른 직원과 함께 파키스탄 여행을 올 생각이 없냐고 했다. 칸은 파키스탄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잠시 쉬면서 돈도 벌어가지 않겠냐고 했다. 비어먼은 이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FDO 전직 동료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한 칸은 URENCO에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와 직접 접촉했다. 칸은 서독의 유명한 기계회사인 ‘레이볼드 헤라우스’의 세일즈 담당자 고타드 러치를 알게 된다. 칸은 CNOR과 G-2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진공 펌프와 가스 정제 기기, 그리고 밸브 등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칸은 처음에는 레이볼드 측이 당국에 신고할 것을 우려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러치라는 사람은 기존 사업과 별개인 파키스탄과의 사업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파키스탄과 거래를 하게 됐다. 그는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과의 거래 문제로 독일 당국에 체포됐다. 그는 파키스탄에 약 130만 마르크화 상당의 물품을 수출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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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8, 07: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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