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T에 불만을 가진 칸 박사, “왜 우리만 核을 못 갖게 하나?”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4)/1975년 갈루치 보고서의 오판 "플루토늄을 통한 개발에서 막혀 여러 해가 필요할 것"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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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해지는 칸 박사

A. Q. 칸의 다음 작업은 우라늄 원광에서 분리된 중간생산물인 옐로케이크를 육불화우라늄(UF6)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옐로케이크는 우라늄 원광을 화학 처리해 순도를 높인 고체 물질이다. UF6는 우라늄 농축을 위해 원심분리기에 주입되는 기체 물질이다. 당시 칸이 필요했던 기술은 형석(螢石) 광석을 불소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또한 이 불소를 옐로케이크와 섞어 우라늄을 농축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칸은 서베를린 기술대학교에서 친분을 쌓았던 하인즈 메부스라는 사람에게 접촉했다. 메부스는 당시 서독의 병원에서 엑스레이 기계를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칸이 접촉한 또 한 명의 사람은 알브레히트 미구엘이었다. 그는 1967년부터 파키스탄에서 사업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버터와 마가린을 만드는 공장을 파키스탄에서 짓고 파키스탄 정부와 관계를 맺어온 사람이다. 그의 사업은 계속 커져갔고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형석을 수출하는 면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는 마가린부터 치약까지 형석을 필요로 하는 유럽 회사들에 이를 판매했다. 그 역시 칸을 돕겠다고 했다. 그는 1976년 11월 13일 100만 달러 계약을 맺고 카라치에 불소 공장을 만들기로 했다. 이듬해 그는 물탄 외곽지역에 우라늄 변환 시설을 만드는 계약도 따냈다. 파키스탄 정부는 미구엘과 하인즈 메부스 등 협력자들을 파키스탄에 초대해 사업을 논의하기도 했다.

칸은 점점 더 대범해졌다. 그는 직원 한 명을 프랑크푸르트에 보냈다. 여행 가방에는 옐로케이크 샘플이 가득 차 있었다. 칸은 독일의 핵 시설에서 파키스탄에서 만든 옐로케이크 샘플이 작동되는지를 직접 실험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 직원은 독일 세관에서 조사를 받게 됐다. 이때 미구엘은 이 직원을 공항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미구엘은 세관 직원에게 가방에 들어 있는 물건은 그냥 평범한 불소 물질이라고 했다. 핵을 모르는 세관 직원은 이들을 그냥 통과시켰다.

칸은 메부스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세계적 전기제품 회사인 지멘스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칸은 지멘스에서 근무하던 터기계(系) 엔지니어 군스 시레라는 사람을 스카우트했다. 칸은 자신의 결혼식에 유일하게 참석했던 대학교 친구인 헨크 슬레보스에게도 연락했다. 1977년 1월, 슬레보스는 직장이 없는 상황이었고 칸이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는 것을 돕게 됐다. 슬레보스는 칸이 심어 놓은 사람들과 함께 물건을 구하기 시작했다. 슬레보스와 시레는 전자기 모터와 발전기. 알루미늄 주조(鑄造)를 구해 파키스탄으로 보냈다.

“왜 우리만 核을 못 갖게 하나?”

앞서 언급한 피터 그리핀이라는 칸의 영국 협력자는 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슬레보스는 칸이 처음부터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혔다고 했다. 그는 199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칸이 “지구의 절반은 핵폭탄을 가져도 되고 나머지 절반은 이들이 멍청하기 때문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핵폭탄을 갖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심기를 크게 거슬리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슬레보스는 칸이 비확산조약(NPT)에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만든 이 조약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들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받지 않는데 다른 국가들만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슬레보스는 파키스탄에 물건을 구입해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핵무기를 위한 기술 및 부품을 제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대범해진 그는 하나의 실수를 하게 된다. 그는 전에 같이 근무했던 회사의 상사인 니코 존다그에게 접촉했다. 슬로보스는 URENCO에서 사용하는 G-2 원심분리기의 시안 관련 자료들을 들고 다니며 이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존다그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URENCO의 네덜란드 협력사인 UCN에 슬레보스와의 접촉 사실을 알렸다. 존다그는 네덜란드 정보당국에도 연락을 해 슬레보스에 대해 알렸다. 존다그는 슬레보스가 파키스탄으로 출국할 계획이라는 사실도 알렸다. 존다그는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내가 들은 유일한 답변은 ‘만약 그가 다시 너를 찾아오면 그의 서류 가방을 꼭 잡고 있어라’였다. 내가 풍차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버터 공장 작전’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 부품 조달 과정을 흔히 ‘버터 공장 작전’이라고 불렀다. 이는 알브레히트 미구엘이 1960년대에 파키스탄에서 마가린 공장을 지은 것에서 따온 이름이다. 칸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은 농담으로 농축 우라늄을 ‘케이크’나 ‘비스킷’이라고 불렀다. 이 농축 우라늄을 UF6라는 ‘버터’로부터 만들어내는 최종 결과물이라고 봤다.

칸과 칸의 협력자들은 이들의 핵개발 계획이 발각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칸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유럽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우선 원심분리기 기술이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련 부품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에 대해서도 유럽 각국 정부가 제대로 문제삼지 않았다. 칸이 주문한 제품들 대다수는 IAEA가 지정한 핵 관련 기기 목록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유럽의 수출 금지품목에 해당되지도 않았다. 가스발생로 및 응고 관련 기기는 크기가 엄청나게 컸음에도 파키스탄으로 수출됐다. 이는 크기가 너무 커서 허큘리스 C-130 수송기 세 대에 나눠져 실려 파키스탄으로 갔다. 당시 이 기기를 판매했던 스위스의 ‘CORA 엔지니어링’ 관계자는 “스위스 정부로부터 이 계약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었다”고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칸의 지도교수였던 루벤 대학 브라버스 교수는 카후타 시설로 초청받은 적이 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칸은 일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관련 기기를 구입하는 과정을 언급하자면 그는 거의 모든 회사들, 엄청나게 많은 언어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다른 파키스탄 사람은 살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사들일 수 있었다”고 했다.

칸 박사는 근속 25주년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방세계는 파키스탄과 같은 후진국이 이(핵) 기술을 마스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팔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사실을 한 번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유럽의 핵시설인) 알멜로와 그로노, 카펜허스트 시설에 기기를 팔았다며 관련 세부 정보를 우리에게 보내오는 내용의 편지와 텔렉스를 수없이 많이 받았다. 이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기기를 사줄 것을 애원하다시피 했다.>

1976년에 들어 부토 총리는 실험 갱도 건설을 지시했다. 파키스탄 곳곳에 8개의 갱도를 건설했다. 이 갱도들은 20킬로톤의 폭발을 버텨낼 수 있게 건설됐다. 이는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의 위력 정도다. 이 갱도들은 1980년에 모두 완공됐다.

키신저의 흥미로운 제안

국제사회는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사용한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파키스탄이 계속 프랑스와 접촉해 재처리시설을 수입,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들려는 줄로만 알았다. 프랑스에 압박을 가해 재처리시설이 파키스탄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당시 미국 정부에서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 문제를 담당했던 사람 중 한 명은 로버트 갈루치다. 그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북핵 문제를 담당했던 사람이고 국무부 북핵 특사를 지냈다. 1970년대의 갈루치는 국무부 비확산 부서에서 근무하던 젊은 직원이었다.

1975년 1월 22일 갈루치가 작성한 보고서가 기밀해제돼 공개돼 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파키스탄의 핵 산업이 현재 우려스러운 상황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핵개발 시작단계에 있다. 인도의 핵실험 이후 파키스탄이 핵을 개발하려는 야욕이 생긴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플루토늄을 통한 개발에서 막혀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할 때까지는 여러 해가 필요할 것이다. IAEA가 이런 과정을 잘 감시한다면 서방세계가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공개된 파키스탄의 정보가 한정적이기는 했지만 이 역시 미국 정부의 정보 실패 사례로 볼 수 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1976년 2월 부토 총리와 뉴욕에서 만난 자리에서 흥미로운 제안을 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부토가 재처리기술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대가로 이란에 미국이 지원하는 핵시설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당시 이란에는 親美 성향의 팔레비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키신저는 지역 국가들이 이 시설에서 나오는 전력 등을 공유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부토 총리는 이런 제안을 거절했다. 파키스탄 등의 국가가 플루토늄을 사용한 핵개발에 나설 것을 우려한 미국 의회도 행동에 나섰다. 미국 상원은 1961년 통과된 해외원조법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 수정안은 1976년에 통과됐다. 핵개발을 하려는 국가에는 경제 및 군사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포함하도록 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연간 1억6200만 달러 상당의 원조를 받았다. 파키스탄이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한 핵개발에 나설 경우 이 원조가 끊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토 총리의 셈법

부토 총리는 그러나 이미 돈이 많이 들어가는 플루토늄 핵개발을 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칸 박사가 지휘하는 우라늄 농축 핵개발 프로그램은 비밀을 유지한 채 순조롭게 진행됐다. 부토 정부에서 정보부 장관을 지낸 카우저 니아지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부토는 재처리시설 구입에 계속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줘 카후타의 (우라늄) 핵시설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고 했다. 부토 총리는 미국의 압박으로 재처리시설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처럼 행동하면 금전적으로도 이익이 있다고 봤다. 프랑스와의 재처리시설 수입 거래 계약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파키스탄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미국의 압박 때문에 계약을 취소한다고 하면 계약 파기 위약금 등을 물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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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9, 06: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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