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서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은 중국, 핵개발 지원으로 보답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6)/사형(死刑) 직전에 쓴 부토 총리의 핵개발 관련 비밀 문건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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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해진 네덜란드

1979년 3월 28일, 칸 박사는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게 됐다. 서독 공영 TV 방송국 ZDF는 압둘 카디르 칸의 핵개발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내보냈다. 파키스탄이 네덜란드의 알멜로 시설에서 훔친 원심분리기 청사진을 통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고 네덜란드 정부는 조사에 착수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작성된 네덜란드 경제부의 기밀 문건에는 “네덜란드가 파키스탄의 (핵개발) 시도를 도와준 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라고 적혀 있다. 우라늄 콘소시엄 회사인 URENCO는 칸을 애초에 채용한 FDO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FDO는 URENCO의 네덜란드 회사인 UCN 잘못이라고 했다. 기밀 인가가 떨어지지 않은 칸을 내부에 출입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들 회사들은 네덜란드 정부가 칸에게 초급 기밀 인가라도 내준 것부터 잘못된 것이었다며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1979년 5월 네덜란드 정부의 초동 수사보고서가 발표됐다. 보고서는 “칸이 URENCO 원심분리기 기술 및 연구 프로그램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종의 책임 회피를 한 것이다. 이 시기 칸과 FDO 회사에서 함께 사무실을 썼던 프리츠 비어먼은 네덜란드 정보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네덜란드 정보당국은 비어먼에게 “이 문제에 대해 절대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의 문제가 아니라 네덜란드에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공개적으로 칸이 취득한 정보는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안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네덜란드 정보당국은 칸이 1975년 12월 네덜란드를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정보들을 훔쳤다고 관계 부처에 보고했다. 원심분리기인 CNOR과 G-2의 기술 역시 이에 포함됐다고 했다.

URENCO 컨소시엄 참여국인 영국과 독일은 네덜란드에 분노했다. 왜 문제를 처음 파악했던 1975년에 이를 알리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프리츠 비어먼은 1975년에 칸이 정보를 훔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부에 알렸다. 1976년 당시 칸은 FDO 직원들에게 원심분리기 사용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네덜란드는 1977년에는 운영이 중단된 CNOR 원심분리기의 부품 납품업체가 파키스탄에 물건을 수출한 사실을 파악하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미국도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했다. 카터 대통령은 네덜란드 정보당국의 수사보고서를 믿지 못하겠다며 CIA가 자체조사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1979년 3월 칸 박사는 지아 장군에게 핵프로그램 진전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 그는 10쪽 분량의 편지를 들고 지아를 찾아갔다. 부토 총리의 사형을 재고해달라는 요구가 담긴 편지였다. 지아는 이 역시 무시했다. 지아는 부토가 저지르지 않은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토를 풀어주게 되면 그가 정치적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부토 총리의 최후

1979년 4월 3일 부토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사형은 원래 이날 오전에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하루 연기됐다. 사형장에서 그의 가족 장지(葬地)가 있는 지역까지 비행기로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일 오전 그는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부토는 딸 베나지르에게 파키스탄을 떠나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고 한다. 베나지르는 “당신이 시작한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4월 3일 저녁. 부토는 종이와 펜, 그리고 면도도구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지아 장군의 비서실장인 아리프 장군은 부토의 사형을 집행하는 임무를 받았고 부토의 최후를 지켜보게 됐다. 부토는 오후 8시 15분부터 9시 40분까지 종이에 무언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그는 매우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9시 55분 그는 양치를 했고 10시부터는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11시가 조금 지나 그는 침대에 누웠다. 1979년 4월 4일 새벽 1시 45분, 그는 그의 감방에서 사형집행장소로 이동했다. 밧줄이 그의 목에 감겨지고 얼굴에는 천이 씌워졌다. 2시 정각에 그를 떨어뜨리는 레버가 당겨졌다.

1979년 4월, 런던에 있는 한 인쇄소에서 근무하던 인도 출신 이민자는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얼마 전 사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감옥에 있을 때 쓴 글로 보였다. 이 글은 300쪽 분량이었고 파키스탄에서 밀반출된 것이었다. 이 인쇄소 직원은 인도 당국에 이 글을 전달했다. 당시 이 글을 분석한 것은 인도 정보당국에서 근무하던 기레시 삭시나였다. 삭시나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삭시나는 라지브 간디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맡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는 사람이다. 삭시나에 따르면 이 글의 제목은 ‘내가 암살된다면(If I Am Assassinated)’이었다. 부토는 지아 정부가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며 억울하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이 글 중에는 파키스탄의 핵개발 계획을 소개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

<내가 이 사형수 감방에 갇히기 직전에 우리는 완전한 핵역량을 갖추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완전한 핵역량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힌두교 문명이 이런 역량을 갖췄다. 공산당도 이를 보유하고 있다. 이슬람 문명만이 이를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상황이 바뀌려고 하고 있다. (중략)

내 공직생활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11년간 지속된 집요한 협상을 끝내고 합의를 이뤄낸 것이다. 내가 이뤄낸 이 합의는 1976년 6월에 이뤄졌다. 이는 우리 국민과 조국의 생존에 가장 큰 성과이자 가장 크게 기여한 일일 것이다.>

부토가 남긴 미스터리

이 문서는 부토가 핵개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남겼다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는 이 문서에서 ‘11년 협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인도 정보당국으로서는 파키스탄이 핵개발에 나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토의 이런 수수께끼 같은 발언을 토대로 핵개발의 시발점을 파악할 수 있다고 봤다.

삭세나 분석관은 인도가 1976년부터 파키스탄이 유럽을 통해 핵 관련 기술을 들여오고 있는 것과 칸 박사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나라가 카후타 우라늄 농축 시설을 도대체 어떻게 건설했는지, 다른 기술들을 어떻게 다 들여왔는지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인도는 또 다른 걸프 국가나 소련이 파키스탄에 자금을 지원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소련은 당시 인도를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도는 부토가 언급한 ‘1976년 6월 합의’가 처음에는 프랑스를 의미하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프랑스와 재처리시설 구입 합의를 이뤄낸 것은 1976년 3월 17일이었다.

부토가 11년 동안 협상을 해왔다고 한다면 협상은 1965년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는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난 해다. 인도는 당시 비밀리에 운영하던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에서 나온 사용 후 연료를 제거하다가 국제사회에 적발됐다. 1965년은 부토가 “풀만 먹더라도 핵개발”이라는 발언을 해 미국의 군사원조가 중단된 해이기도 하다. 이 해는 중국과 파키스탄이 처음으로 무역협정을 맺은 해이고 중국이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싸우는 파키스탄을 도와줬을 때다. 삭세나는 부토가 말한 합의가 중국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중국,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돕다

1965년 중국과의 협상에 나섰던 인물 중 한 명은 지아 정권에서 외교장관이 된 아가 샤히였다. 샤히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1965년은 파키스탄에 있어 결정적인 해였다”며 “다른 곳으로부터 받아낼 수 없었던 수십 년간의 지원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내는 합의를 이뤄냈다”고 했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1971년에 들어 더욱 가까워진다. 당시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두고 서로 갈라졌다. 미국은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대만을 밀고 있었다. 샤히는 당시 駐유엔 파키스탄 대사였다. 파키스탄은 중국을 밀었다. 당시 미국의 유엔 대사는 조지 H. W. 부시였다. 부시는 샤히에게 장개석의 대만을 밀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중국은 이때 국제적 로비에 성공해 유엔에 입성하게 됐다.

이듬해 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과의 문제로 인도와 또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이때 인도는 중국이 개입 움직임을 보이면 중국의 핵무기 시설을 폭파하겠다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파키스탄과 중국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였다. 1976년 5월 부토 총리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중국은 파키스탄이 카라치에서 운영하고 있던 KANUPP 원자력 시설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파키스탄은 1960년대에 이 시설을 캐나다로부터 들여왔으나 미국의 압박으로 제대로 된 운영이 불가능했다. 이 시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중국이 돕겠다고 한 것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부토가 중국을 방문한 얼마 뒤 카라치 원자력 시설에 중국 기술자들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중국 “파키스탄의 도움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공개된 미국 정보당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중국은 파키스탄에 UF6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파키스탄은 UF6를 자체 개발할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이를 수입했는데 1977년 6월 미국은 UF6 지원을 끊겠다고 압박했다. 이때 중국이 UF6를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샤히에 따르면 중국은 핵개발에 필요한 삼중수소와 동위원소, 그리고 핵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 기술을 제공하겠다고도 했다. 중국의 이런 행동은 비확산조약(NPT)을 대놓고 무시한 행동이었다.

지아 정권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2인자 아리프 장군 역시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협력 관계를 털어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때 파키스탄과 중국은 매우 다른 국가다. 중국은 신(神)을 믿지 않는 사회이고 자유로운 시장이나 선거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중국이 파키스탄의 국내정치에 개입하거나 우리가 반대로 중국 국내정치에 개입했던 적은 내 기억에 한 번도 없다. 중국은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했다. 지아 대통령이 1977년 중국을 방문할 때까지 파키스탄이 중국의 지원에 답례로 돈을 제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아는 ‘감사하지만 우리가 답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었다. 중국은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가 유엔에 참여하지 못했을 때 당신들이 우리에게 준 지원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톨이였는데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줬습니다’라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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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1, 05: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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