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세계의 全방위적 제재 시행되자 自力으로 부품 생산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7)/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파키스탄의 도움 필요해진 美, 딜레마에 빠지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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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만 더 있었다면…”

A. Q. 칸 박사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됐다. 언론들은 파키스탄과 칸의 핵개발 계획을 ‘신밧드의 모험’ 등으로 묘사하며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1979년 6월 4일 칸 박사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친구 아지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세계에서 자신에게 보내는 관심을 언급했다. 그는 “(언론의) 왜곡에는 정말 끝이 없다”며 “전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우리에겐 한 가지 기쁜 일이 있다. 지구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에 있는 사람들을 잠 못 들게 했고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영국과 미국 등에서 파키스탄에 물건을 수출하던 회사들은 파키스탄과의 거래를 끊었다. 미국 정부는 부토 총리가 사형된 이틀 후 파키스탄에 제재를 부과했다. 핵개발을 하는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끊는 수정법안은 상원을 통과해 1976년 4월부터 시행됐다. 전방위로 압박을 받은 칸은 아지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에겐 딱 6개월만 더 있었으면 됐는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나라로부터 핵 관련 부품을 수입해올 수 없게 되자 칸 박사는 파키스탄 내에서 직접 필요 물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사들인 부품과 관련 기기들을 연구해 자체 생산하기로 했다. 중국은 계속해서 핵개발에 필요한 원자재와 폭탄 및 미사일 설계도를 제공했다. 하나의 문제는 중국이 옛날 방식인 ‘디퓨전’ 방식으로 우라늄을 농축했다는 점이었다. 파키스탄은 원심분리기를 통해 우라늄을 농축하려 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칸은 원심분리기 역시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칸은 아지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물건들을 북미(北美) 지역에 판매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가격은 다른 나라들보다 절반 이하로 저렴할 것이기 때문에 외화를 벌어들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가격 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지즈는 칸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전세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파키스탄에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토마스 피커링 차관이 (미 상원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중계됐다. 피커링은 (파키스탄의 진전 상황과 관련) 꽤나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는 “우리는 이를 멈출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우유 앞에서 울어봐야 소용없다”고 했다.>

미국은 당시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러 문제가 겹쳐 파키스탄 핵문제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1978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당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됐다. 소련은 인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파키스탄은 카터 행정부에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일반적인 심리전 정도의 행동만 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개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졌는데 또 다시 군사 조치에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親美 성향의 팔레비 정권도 무너졌다. 이슬람 시아파 원리주의 노선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다. 파키스탄도 위기감을 느꼈다. 파키스탄은 팔레비 정권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가 더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파키스탄의 지아 장군을 싫어했다. 부토 총리의 부인은 시아파였는데 부토 총리를 사형시킨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 약 20%는 시아파였다. 지아 장군은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은 이후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시아파의 혁명 움직임이 일어나게 될까 우려했다.

갈루치의 잠입취재

파키스탄과 미국은 공통된 이해관계를 찾게 됐다. 이란 호메이니는 취임 후 이란에서 활동하던 미국 정보국의 사무실 두 개를 폐쇄시켰다. 당시 미국은 이란을 중점지로 삼고 중동 및 인근 아시아 지역의 정보를 수집했으나 이런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정보 수집 능력에 타격을 받은 미국은 불안해졌다. 미국은 파키스탄과 협력해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있어 더욱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파키스탄은 이 과정에서 미국의 새로운 눈과 귀가 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카터 행정부는 파키스탄과의 협력은 이어가면서 이 국가의 핵개발을 멈추도록 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은퇴한 베테랑 협상가 제럴드 스미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소련과의 군축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다. 국무부의 로버트 갈루치는 스미스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3년간 파키스탄의 핵개발 움직임을 관찰해온 갈루치는 파키스탄의 진전 속도에 거듭 놀랐다. 갈루치는 파키스탄의 카후타 핵시설에 잠입해 이를 확인하려 했다. 갈루치는 미국 대사관 차량을 빌려 카후타 지역으로 향했다. 파키스탄 경찰은 갈루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갈루치는 외교관들의 소풍 지역을 가보려 한다고 했다. 카후타 핵시설은 외교관들의 소풍 장소였으나 핵시설이 건설된 이후에는 모두 폐쇄됐다. 경찰은 갈루치를 그냥 보내줬고 갈루치는 카후타 시설 외부 사진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갈루치는 직접 촬영한 사진을 비롯, 파키스탄의 핵개발 관련 내용을 시그바르드 에크룬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

에크룬드 사무총장은 이런 사실을 외부에 공개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파키스탄과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외부에 공개해 생길 외교적 파장을 우려했다. 미국 측 협상담당자였던 스미스는 에크룬드에게 이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만들기까지는 아직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이즈음 카후타가 또 한 번 전세계 언론에 소개되는 일이 발생했다. 파키스탄 주재 프랑스 대사와 직원 한 명이 갈루치처럼 카후타 핵시설을 방문하려다 파키스탄 정보요원들한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었다. 파키스탄과 프랑스는 서로의 행동을 규탄했고 이들의 외교관계도 크게 악화됐다.

“왜 우리만 악마(惡魔)인가?”

제재로 인해 파키스탄은 못과 나사도 수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칸은 자체적으로 생산한 부품들을 사용해 핵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79년 독일 잡지사 슈피겔에 기고문을 보내 서방세계의 제재를 규탄했다.

<나는 자신들만 고결한 척 행동하는 미국인과 영국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자식들은 신(神)이 임명한 전세계의 수호자로서 수십만 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다. 그리고 신이 부여한 권한으로 매달 (핵) 폭발 실험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간단한 (핵) 프로그램만을 시작했을 뿐인데 사탄이자 악마로 보여지고 있다.>

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이 너무 많이 진행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카터 대통령의 군축 관련 자문위원회에서 부의장을 맡았던 사람은 찰스 반 도렌이었다. 그가 1979년 9월 14일 열린 회의에서 한 발언은 기밀로 분류되다 나중에 공개됐다. 그는 “인도의 (핵실험) 재앙과 같은 일이 또 한 번 일어날 것 같다. 이 기차는 선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어떤 것도 이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조금 늦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79년 10월, 미국의 협상가 스미스는 파키스탄의 아가 샤히 외무장관과 비서실장 아리프 장군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샤히는 카터 대통령과 면담한 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다. 샤히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브레진스키와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샤히는 “미국은 핵확산에 그렇게 반대한다고 했으나 인도가 폭탄을 터뜨렸다. 핵이 없는 국가들에 유엔 안보리 차원의 핵우산을 제공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1974년 키신저가 단번에 이런 제안을 거절했듯 브레진스키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브레진스키와의 면담 이후 미국의 핵심 참모들이 여럿 참여한 확대회의가 열렸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과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부 副장관 등이 참석했다. 크리스토퍼는 파키스탄이 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는 것을 제안했다. 샤히는 “인도가 가입하면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크리스토퍼는 “파기스탄은 무조건 가입을 해야만 한다”고 압박했다. 샤히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 및 재래식 무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크리스토퍼는 한 발 물러섰다. 그는 “파키스탄이 다른 나라에 관련 기술을 이전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싶다”고 했다. 샤히 장관은 이를 약속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는 파키스탄이 핵 폭발 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샤히는 “우리는 아직 그런 실험을 할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역량을 갖추게 된다면 (핵실험에 따른) 장단점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죽음의 계곡’으로 치닫는 파키스탄

밴스 국무장관은 샤히를 다른 곳으로 불러내 스미스를 소개시켜줬다. 샤히에 따르면 스미스는 “당신들은 안보 능력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도가 얼마나 앞서 나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인도는 당신들을 완전히 파괴시킬 수 있다. 당신들은 지금 ‘죽음의 계곡’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라고 했다. 샤히는 “당신은 핵무기와 관련한 최고의 전문가이고 이런 당신과 얘기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런데 핵무기를 가졌을 때 갖게 되는 전략적 중요성은 핵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핵무기의) 가치는 보유하고 있는지에 달렸지 사용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샤히의 이런 발언에 회의장은 오랫동안 고요해졌다.

이런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이던 1979년 11월, 미국의 이란 대사관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었다. 이란 인질 사건이 발생한 얼마 뒤인 11월 21일, 파키스탄의 자맛-에-이슬라미 단체가 이슬라마바드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에 불을 질렀고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카라치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대한 공격 시도도 발생했다. 얼마 후에는 리비아 트리폴리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파키스탄 대사관 방화 사건으로 분노했지만 파키스탄이 역내(域內)의 유일한 우방국이라는 판단에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샤히 외무장관은 유엔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란에서 호메이니를 만났다. 그는 미국인 인질을 석방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호메이니는 이들은 대사관 직원들이 아니라 모두 미국의 스파이라며 석방할 뜻이 없다고 했다.

딜레마에 빠진 미국

미국은 소련이 남아시아와 중동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반전(反戰) 여론이 심해 지상군을 투입할 수 없었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해 소련과 싸우는 대리전(代理戰) 전략을 택했다. 대리전을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979년 12월 26일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훗날 공개된 이 기밀문서에서 브레진스키는 앞으로의 대(對)파키스탄 전략을 결정짓게 되는 중요한 정책 변환을 제안했다. 그는 “(아프간 관련)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이 반군(反軍)을 도울 수 있도록 안심을 시키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對파키스탄 정책을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군사 원조 및 약속을 해줘야 한다. 파키스탄에 대한 정책은 우리의 비확산 정책과 별개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브레진스키는 비확산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에게 비확산 정책을 뒤로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한 것이다. 카터도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이 아프간에 지원한 금액은 50만 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이 돈은 액수가 워낙 적어 CIA의 예산 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 반군 지원금을 제공했다. 미 의회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아프간 반군 지원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부터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의회는 해외원조법에 따라 핵개발을 하는 나라에는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카터 행정부는 이런 법을 피해 파키스탄에 돈을 집어넣는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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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2, 04: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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