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파키스탄, 핵무기 7기 분량의 우라늄농축” vs 미국 “농축 완성까지는 몇 년 더 걸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8)/지아 장군 “파키스탄은 4억 달러 정도에 사들일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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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상태에 빠진 美-파키스탄 협상

1980년 1월 카터 대통령은 이른바 ‘카터 독트린’을 선포했다. 소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던 대통령이 첫 번째 임기 마지막 해를 앞두고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것이다. 카터는 “북쪽에서 오는 위협으로부터 파키스탄이 독립성과 안보를 지켜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사와 식량을 포함한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은 파키스탄이 외부의 도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했다. 이때 파키스탄은 미국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했다. 미국은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해 파키스탄의 도움이 필요해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핵개발을 하는 국가에는 원조를 하지 않는다’는 미국 국내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키스탄의 핵개발 문제를 숨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처음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1980년 1월 9일 카터 행정부는 파키스탄에 앞으로 2년 동안 4억 달러 상당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군사원조에는 9000만 달러 상당의 군용 수송기, 헬리콥터, 방공레이더, 소총 등 군사무기가 포함됐다. 미국 언론들은 파키스탄이 깜짝 놀랄 수준의 원조를 받게 돼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파키스탄의 지아 장군은 미국의 이런 제안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당시 파키스탄은 소련제 미그기와 싸울 수 있는 전투기가 필요했지 수송기나 헬리콥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수송기 등은 아프간의 사막과 고산지대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체계였다.

 파키스탄은 당시 미국이 나토 회원국에만 판매하던 F-16 전투기를 파키스탄에 팔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자신들이 필요하지 않은 부품을 제공하지 않는 지금 식의 원조는 미국의 신뢰성을 의심케 한다고 했다. 지아 장군은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이런 원조 패키지를 ‘땅콩’이라고 불렀다. 카터 대통령이 땅콩 농장 출신이라는 것을 비꼰 것이다. 지아는 “파키스탄은 4억 달러 정도에 사들일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미국의 군사원조와 파키스탄의 아프간 반군 지원을 맞바꾸는 협상은 계속 이어졌다. 지아 장군은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난 자리에서 파키스탄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무조건 군사 지원을 한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브레진스키는 이런 합의는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해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미국과 파키스탄의 협상은 반 년이 지나도록 제자리에 머물렀다.

위기를 모면한 칸의 부인

1980년 6월 영국의 BBC 방송은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내보냈다. 칸 박사가 어떻게 핵기술을 유럽에서 빼돌릴 수 있었는지를 자세히 담았다. 이 방송은 며칠 후 칸이 기술을 빼돌린 네덜란드에서도 방송됐다. 당시 칸의 부인 헨리는 네덜란드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헨리는 네덜란드 방송에서 관련 보도가 나온 지 얼마 안 돼 네덜란드 이민국을 방문했다. 헨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네덜란드 이민국 직원은 내가 파키스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다른 직원들과 (BBC) 방송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직원은 내가 칸 박사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했다. 이 직원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칸이라는 사람이 이런 장난을 쳐 수백만 달러를 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 조용히 있으려 했고 내가 칸 부인(Mrs. Khan)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내 남편이 다른 파키스탄 공무원과 같이 한 달에 3750루페(400달러)밖에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이를 꾹 참았다.>

칸 박사는 네덜란드에서 수배명단에 내려진 사람이다. 그의 부인 역시 체포 대상이 됐어야 했으나 네덜란드 이민국은 부인 헨리의 여권에 연장 승인을 내려줬다. 헨리는 그렇게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80년 10월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에 돌입했다. 파키스탄의 지아 장군은 자신이 이란과 이라크 대통령과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10월 3일 미국 뉴욕의 유엔을 방문했다. 카터는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었다. 그는 파키스탄과 합의에 도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카터는 지아 장군을 백악관으로 불러 F-16을 파키스탄이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지아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했다. 카터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였다. 파키스탄은 1981년에 취임할 로널드 레이건과 합의를 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고 봤다. 임기가 끝나가는 미국의 대통령이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닉슨 前 대통령, “파키스탄이 핵개발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

레이건 대선 캠프를 비롯한 공화당 측 인사들은 선거 전부터 파키스탄 측에 접촉을 하고 있었다. 이중 하나의 예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1980년 10월 지아 장군과 약 한 시간 동안 전화통화를 했다. 대화의 주제는 아프간 문제였으나 파키스탄의 핵문제도 언급됐다. 당시 대화에 참여했던 아리프 비서실장은 닉슨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리프의 주장에 따르면 닉슨은 지아 장군에게 “당신 국가의 핵개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당신들이 핵무기 역량을 갖고 있다면 이를 완성하든 말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닉슨은 자신이 레이건 대통령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했지만 파키스탄은 이를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였다. 현직을 떠나긴 했지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핵개발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건 행정부도 전임 카터 행정부와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소련發 위협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아프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파키스탄이 중요하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핵을 개발하고 있다,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것이었다. 국무부를 중심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파키스탄에 엄청난 원조를 제공하면 파키스탄이 핵을 가지려는 시도를 멈추거나 최대한 늦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미국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소련 편을 들어주며 파키스탄을 처리하거나 파키스탄 편을 들어주며 소련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핵폭탄과 소련을 모두 적대시할 수 있는 옵션은 아예 없었다고 당시 정책 결정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밝혔다.

파키스탄의 샤히 외무장관은 1981년 4월 20일 워싱턴을 방문했다. 샤히 장관은 알렉산더 해이그 국무장관이 이날 핵문제가 미국-파키스탄 정책의 핵심은 아니라고 했다고 전했다. 또한 핵 폭발 실험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레이건이 파키스탄의 핵무기와 공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받았다. 18개월 사이 파키스탄의 핵개발 프로젝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격 대상으로 논의되던 최우선 과제에서,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게 됐다.

레이건의 등장

1981년 5월 1일, 지아 장군은 칸 박사의 카후타 핵시설을 깜짝 방문하기로 했다. 얼마 전 칸 박사는 지아 장군에게 우라늄을 무기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농축하는데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지아 장군은 이날 방문 이후 카후타 핵시설의 이름을 ‘기술연구실험실’에서 ‘A. Q. 칸 박사 연구 실험실’로 바꿨다. 아직 살아있는 과학자의 이름을 딴 연구소는 매우 드물었고 칸 박사는 지아의 이런 결정에 크게 감동했다. 지아 장군은 칸 박사에게 실제 핵실험이 아닌 모의실험 및 시뮬레이션 실험을 시행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아는 칸에게 더 많은 예산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이런 진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은 1981년 5월, ‘핵개발 국가에 원조를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파키스탄에 한해 6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이런 유예 조치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표결을 통해 결정됐다. 미국은 파키스탄에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고 F-16 전투기 역시 판매하기로 했다. 미 상원은 원조 방침을 1981년 12월에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총 원조 금액은 32억 달러로 책정됐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다음으로 많은 금액이었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활동하던 CIA 지부장은 하워드 하트였다. 그는 오랫동안 이란에서 근무했던 베테랑이었다. CIA는 하트에게 파키스탄 국내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핵개발을 포함한 파키스탄의 내부 문제는 모두 무시하고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만 수집할 것을 지시받았다. 핵개발 문제는 국무부가 담당하겠다는 방침이었다. 하트는 파키스탄 정보국과 공조해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 조직(무자헤딘) 29곳 중 어떤 조직을 선택해 소련과 싸우도록 할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스라엘의 폭로

미국과 파키스탄의 이런 밀월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1년 6월 2일 예후다 블럼 유엔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총회 연설에서 파키스탄의 핵개발 문제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그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수없이 많다”고 했다. 그는 ‘칸 박사 연구 실험실’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기술연구실험실’이라는 장소도 직접 언급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원심분리기를 사용해 무기화할 수 있는 수준의 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14개 국가에 있는 회사들을 통해 필요 부품을 수입했다고 했다. 블럼 대사는 파키스탄이 벌써 약 1000개의 원심분리기를 만든 상황이고 1만 개로 숫자를 늘리려 한다고 했다. 그는 원심분리기 수가 그 수준으로 늘어나면 일 년에 약 150kg의 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고 이는 매년 7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했다. 블럼 대사의 이런 발언에 각국 대표부는 크게 놀랐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지난 수년간 알고 있었음에도 국제사회에 알리지 않았던 사안들이었다.

국무부는 이스라엘에 자신들이 분석한 핵개발 현황을 전달했다. 기밀 해제된 관련 문서의 내용을 소개한다.

<파키스탄이 오랫동안 원심분리기 기기를 만드는 데 실패했고 주목할 정도의 농축우라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파키스탄이 농축 부문에서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핵무기 한 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할 정도로 충분한 핵물질을 만들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에 보낸 편지에서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만들고 이를 운반할 수 있는 미사일 기술을 개발하고 이에 핵무기를 탑재하기까지는 1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들을 축소해 해석했다. 또한 칸 박사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있다고 한 발언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칸 박사는 얼마 전 원심분리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지낸 모셰 야론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은 미국의 약점이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더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자신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행동에 나서는 이스라엘

1979년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인도 정보당국을 통해 미국의 기밀 문서 하나를 입수했다. 이 기밀문서는 인도 뉴델리의 미국 대사관에서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電文)이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파키스탄이 2~3년 안에 핵폭탄을 터뜨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스라엘과 인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파키스탄이 실험 갱도를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에 이들 국가는 파키스탄에 대한 선제공격을 검토하게 된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핵무기 기술을 완성했다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전쟁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1981년 6월 7일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시설을 파괴시켰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가 핵을 보유하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세계에 알렸다. 이라크 오시라크 시설 폭파를 비밀리에 진행한 이스라엘의 정보국인 모사드는 칸 박사에게 물건을 납품하는 기업들을 먼저 처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타깃이 된 사람은 하인즈 메부스였다. 그는 칸이 서베를린 기술대학교에서 만나 친분을 쌓아왔던 사람이다. 메부스는 파키스탄에서 버터 공장을 만들었던 알브레히트 미구엘과 함께 파키스탄의 불소 공장 및 우라늄 변환 시설 건설을 도왔다. 이들 시설은 1979년에 만들어졌다. 메부스는 서독의 에를랑겐 지역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는데 이 편지는 폭탄이었다. 메부스는 폭탄이 터졌을 때 집을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집에 있던 그의 애완견이 폭발로 숨졌다. 유럽 수사당국은 이 사건이 스위스 베른에서 발생한 폭탄 사건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폭탄은 ‘CORA’라는 회사에서 관리국장으로 근무하던 에드워드 게르만이라는 사람의 집 앞에서 터졌다. CORA는 1979년에 가스발생로 및 응고 관련 기기를 파키스탄에 수출한 회사였다. 당시 CORA에서 근무하던 한 직원은 이 폭탄 공격이 발생하기 얼마 전 익명의 전화 한 통이 왔었다고 했다. 파키스탄과의 거래를 중단하라는 협박 전화였다.

베른 경찰은 공격 배후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들은 공격이 자신들을 ‘南아시아의 비확산단체’라고 부르는 단체와 연관돼 있다는 점은 파악했다. 스위스 경찰은 인터폴 등과 공조해 공격 배후를 수사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에 금속 부품을 납품하던 한 이탈리아 회사에도 거래를 중단하라는 협박 편지가 왔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회사는 편지를 받은 뒤 파키스탄과의 거래를 끊었다. 1981년 5월 18일 독일 마르크도르프 지역에서 또 한 차례의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이 폭탄은 1976년부터 파키스탄에 각종 부품을 납품한 회사 앞에서 터졌다. 오랫동안 칸 박사를 도와온 피터 그리핀은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직접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술집에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당신이 피터 그리핀이지’라고 했다며 “이 사람은 ‘우리는 당신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당장 멈춰라’라고 말했다”고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리핀은 이후부터 모든 사업 관련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자신의 상세한 일정을 일기장에 기록해뒀다.

속속 드러나는 칸의 네트워크

칸의 네트워크에 대한 수사는 유럽과 북미 지역으로 확산됐다. 1980년 8월 세 명의 파키스탄 출신 캐나다인이 파키스탄에 핵 관련 부품을 불법 수출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 중 한 명은 A. Q. 칸 박사의 오랜 친구인 아지즈 칸이었다. 캐나다 세관당국은 아지즈의 집에서 이슬라마바드에서 온 편지들을 발견했다. 이 편지들에는 파키스탄의 비밀스러운 핵개발 계획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재판은 1981년 10월에 열렸다. 이 세 명은 파키스탄에 보안상 민감한 물건을 수출한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파키스탄 핵개발 관련 내용은 모두 기밀에 붙여졌다. 캐나다 정부는 재판부에 직접 증거 공개금지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핵기밀과 관련된 비밀이 너무 많이 담겨 있고 파키스탄에 핵 관련 부품을 제공한 미국 회사들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사실이 미국 의회에 알려지면 원조를 추진한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아지즈 칸은 파키스탄의 가공식품 공장 및 방직 공장에 물건을 수출했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모든 수출품은 무해(無害)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은 아지즈의 이런 주장을 믿어줬다.

아지즈의 재판이 진행될 때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는 5000파운드(약 2268kg) 상당의 지르코늄이 압수됐다. 이는 회색의 금속물질로 타이타늄과 비슷하다. 이는 원자로의 연료봉을 만드는 데 쓰인다. 지르코늄을 해외로 반출하려다 적발된 사람은 파키스탄인이었다. 그는 박스 안에 들어간 물건은 산악용품이라고 했다. 항공사 직원이 박스 안에 있는 물건을 파악하려 하자 이 사람은 현장에서 사라졌다. 추후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미국 오레곤에 있는 한 미국인 사업가가 파키스탄에 있는 ‘SJ 엔터프라이스’를 대신해서 지르코늄을 구입했다. 현장에서 사라진 이 파키스탄인은 전직 파키스탄 군인 출신으로 지아 장군과 매우 가까웠다. 파키스탄 측은 관련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미국은 이후 어떤 내용도 듣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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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3, 07: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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