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 핵실험에 성공하는 파키스탄…美 극비보고서 “중국이 핵개발을 도왔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9) / 심리치료사 “칸은 ‘히틀러 콤플렉스’ 환자였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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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미국과 파키스탄

레이건 행정부는 공개적으로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이 없다는 발언을 했지만 내부적으로 칸 박사의 네트워크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미국을 포함한 미주지역 및 유럽에서 어떻게 핵 관련 부품들을 수입하고 있는지 조사했다. 1981년 6월 28일 미국 국무부는 터키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파키스탄의 핵개발 진전 상황을 전하는 기밀 전문(電文)을 보냈다. 국무부는 “우리는 파키스탄이 핵폭탄 역량을 개발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파키스탄은 핵폭탄의 기폭장치 관련 기술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와 AP 통신 등은 이 전문을 입수해 “미국이 터키에 파키스탄 핵개발 움직임을 알려줬다”고 보도했다.

CIA는 1981년 5월 지아 장군(대통령)이 칸 박사에게 모의 핵실험을 시행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파악했다. 폭탄 개발 등 군사적인 분야는 원래 다른 연구 시설에서 담당했으나 칸 박사에게 폭탄으로 만드는 과정까지 담당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이런 사실을 파악했음에도 파키스탄을 압박하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지아 대통령을 1982년 12월 7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레이건은 이날 기념만찬 건배사에서 “앞으로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이견(異見)이 생길 수도 있고 과거에도 이런 이견이 있었을 수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협력관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견고해지고 있다”고 했다. 미국 언론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해 계속 의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미국 행정부가 이를 은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쏟아냈다. 지아 장군은 기념만찬이 열린 다음날 미국 N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우리의 민간 원자력 프로젝트에 존재하지도 않는 군사 목적이 있다는 거짓 주장으로 우리를 음해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평화로운 핵폭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칼과 같다. 자신의 목을 벨 수도, 자신을 방어할 수도 있다. 우리는 둘 중 어떤 것도 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미국, 증거를 들이밀다

미국 정부가 파키스탄이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국가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영국 정보당국은 파키스탄이 영국을 통해 베릴륨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베릴륨은 핵폭탄의 강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물질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군 출신으로 CIA 부국장을 지낸 버논 워터스를 파키스탄에 특사(特使)로 보냈다. 특사단에는 국무부 동남아시아국 국장을 맡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가 포함됐다. 이들은 1982년 10월 파키스탄으로 갔다. 갈루치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에 여러 차례 핵개발을 멈추라고 경고했었다고 했다. 그는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이런 말을 해 정말 유감스럽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사람들이 매우 나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식의 경고를 했지만 파키스탄은 계속 발뺌했다고 했다.

워터스와 갈루치는 지아 장군을 직접 만나 파키스탄 정부측 사람들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많다고 압박했다. 지아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이런 증거는 자신들을 음해하기 위해 인도가 조작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워터스와 갈루치는 지아에게 위성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카후타에 있는 핵시설 사진이었다. 지아는 “핵시설일 리가 없다. 아마 염소 가축 우리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워터스와 갈루치는 씁쓸하게 자리를 떴다. 이들은 지아 장군이 자신들한테까지도 거짓말을 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아 장군 모르게 이런 핵개발 움직임이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당시 미국이 왜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했는지에 대해 확실한 이유가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미국이 파키스탄의 눈치를 보고 강력하게 핵포기를 요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있다. 갈루치가 몰랐던 사실 중 하나는 백악관이 워터스에게 비밀리에 전달한 지시사항이었다. 파키스탄 정부에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충고를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국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워터스 특사와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당시 워터스는 “(백악관으로부터) 지아 장군에게 핵개발 움직임이 우리 레이더에 잡히지 않도록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이 고위 관리에 따르면 워터스는 파키스탄에 ‘핵 프로그램을 숨기지 않으면 레이건이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갈루치 보고서의 충격

1983년에 들어 레이건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지 않다고 또 한 번 의회에 보고한다. 해외원조 승인을 위해 대통령은 매년 의회에 해당 국가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갈루치는 1983년 6월 23일 권력기관 최상부만 볼 수 있는 극비 보고서를 작성했다. 기밀해제된 문서의 내용을 소개한다.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핵폭탄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파키스탄의 단기 목표는 핵폭탄을 터뜨리는 핵실험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인) 지아가 외교적으로나 국내정치 측면에서 이익을 본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면 이같은 행동에 나설 것이다.>

갈루치는 이 보고서에서 파키스탄이 핵폭탄의 기폭장치를 개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의 진전상황을 봤을 때 파키스탄이 이미 이를 만들 역량을 갖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갈루치는 칸 박사측이 외국에서 물건을 구해주는 지인들에게 보낸 각종 설계도면들을 보고서에 첨부하며 모든 것이 핵개발 용도라고 했다. 갈루치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협력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파키스탄의 핵프로그램 관련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중국의 기술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과학자들은 파키스탄의 핵기술이 1964년 중국의 4차 핵실험 때 보여준 기술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갈루치는 “파키스탄이 핵무기 역량을 만드는 것을 중국이 도와줬다”고 보고서에 썼다.

미국, 파키스탄 핵폭탄 모델 만들어 실험

미국은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이 만들려고 하는 핵폭탄의 모델을 직접 만들어서 미 국방부 통제 구역에 보관해놨다. 이를 통해 파키스탄의 정확한 핵역량을 파악하려고 했다. 훗날 파키스탄의 총리가 되는 베나지르 부토(사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 前 총리의 딸)는 이 핵폭탄 모델을 미국이 직접 보여줬다고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미국 국방부 전문가들은 이 모델을 가지고 여러 모의 실험을 실시했는데 매번 성공적이었다. 파키스탄이 결국에는 기술적 문제로 인해 핵개발 완성에는 실패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 미국 정보당국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중국이 파키스탄에 무기화할 수 있는 농축우라늄의 샘플을 전달한 것을 파악했다. 당시 중국이 어느 정도의 농축우라늄을 전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직 정보당국자들은 훗날 인터뷰에서 중국이 핵무기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정도의 농축우라늄을 전달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했다. 당시 파키스탄 문제를 담당했던 정보당국자들은 이때 파키스탄이 농축우라늄을 중국식 폭탄 체계에 주입해 핵무기를 만들려는 실험을 했다고 회고했다. 중국이 4차 핵실험을 했을 때의 폭탄 기술을 사용한다면 폭발 강도는 20~25킬로톤 수준에 달했다. 이런 폭탄이 인구밀집도가 높은 지역에서 터지면 1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중국으로부터 핵심 기술을 들여왔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또 한 번 이를 묵인했다. 1983년 2월 25일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에 기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레이건은 “파키스탄이 이른 시일 내에 핵실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키스탄은 폭탄을 만들기 위한 핵물질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카후타의 우라늄 농축시설이나 새롭게 지어진 파키스탄과학기술연구소(PINSTECH)에는 재처리시설이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모의 핵실험에 성공하는 파키스탄

1983년 3월, 파키스탄은 사르고다 지역에서 핵무기 모의실험을 준비했다. 파키스탄은 미국과 독일제 수퍼컴퓨터를 사용해 폭탄의 기폭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핵물질을 폭탄에서 제거한 상황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실험은 기폭장치가 제대로 작동해 핵물질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중성자를 생성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첫 번째 실험은 실패였다. 폭발 스위치를 눌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폭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일 수 있어 긴장했다. 이들은 연결장치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파악해 이를 보완했다. 보완한 상태에서 폭탄이 제대로 터지는 것을 파악한 과학자들은 아리프 비서실장과 무니르 칸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 위원장, 굴람 칸 재무장관을 실험장소로 초청했다. 아리프 실장은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당시 실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흥분한 상태였고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파키스탄은 이제 명실공히 (핵) 폭탄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우리 과학자들이 해낸 일들은 영웅적이라는 표현 이외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약 24회의 모의실험이 추가로 진행됐고 이를 통해 기폭장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A. Q. 칸 박사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83년 10월 18일 파키스탄 주재 네덜란드 대사는 파키스탄 외무부를 통해 칸 박사에 대한 소환장을 전달했다. 칸이 1975년 네덜란드의 URENCO 시설에서 핵 관련 기술을 훔쳐간 것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했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이런 사실을 칸에게 전달하는 대신 법무부를 통해 관련 법령을 검토해줄 것을 요구했다. 파키스탄 법무부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칸 박사를 궐석재판에 넘겨 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칸은 네덜란드 정부의 이런 결정에 분노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다며 네덜란드로부터 구해온 자료들은 대중에 공개된 자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포함한 다른 유럽 국가에 다시는 발을 디디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지아 장군에게 관련 사건에 대한 항소심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지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칸 박사는 영국의 유명한 변호사인 데이비드 내플리 경(卿)을 변호사로 선임해 오랜 법적 공방에 들어가게 된다.

심리치료사의 증언

핵개발에 대한 압박감, 각국 정부에서 좁혀오는 수사망으로 인해 칸은 정신적으로 불안해졌다. 이런 정신적 불안으로 생긴 문제 중 하나는 부인과의 불화였다. 칸의 부인 헨리는 네덜란드 재판부의 결정 이후 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범죄자와 생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칸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칸은 헨리를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단계까지 갔다. 이때 칸 부부는 파키스탄의 정신과 권위자인 하룰 아메드 교수를 찾아가 상담을 받게 된다. 하룰 아메드 교수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평화를 좋아하고 親인도 성향이며 핵폭탄에 반대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A. Q. 칸이라는 사람과 엮이게 됐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칸과 헨리는 문제가 많았다. 헨리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고집불통이었다. 칸은 완벽주의자였다. 이들의 불화는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 폭발한 것이었다. 헨리는 더 이상 칸을 참아줄 수 없다고 했다. 칸은 분노한 상태에서 우울증까지 겪었다. 칸은 딱 조울증 환자였다.

칸은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PAEC) 사람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우라늄 개발에 성공한 그는 이를 무기화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앞서 나가려 했다. 그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는 직원이 아니라 레이싱카의 운전자가 되고 싶었다.>

아메드 교수는 칸 부부의 주치의이자 심리치료사가 됐다. 칸은 수시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매우 중요한 일이 있다며 자신을 만나달라고 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그렇게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냥 말동무가 필요한 사람처럼 아메드를 찾았다고 한다. 칸은 아메드에게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주겠다고 했다. 아메드는 파키스탄 최초의 무상(無償) 정신과 치료소를 설립하려 했다. 칸은 정부를 설득해 아메드가 이 치료소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칸은 ‘히틀러 콤플렉스’ 환자였다”

칸과 헨리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헨리는 칸의 주변에는 그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예스맨’뿐이었던 것이 그의 성격을 악화시킨 한 원인으로 봤다. 헨리는 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도 했다. 칸은 실제로 파키스탄 정보당국에 요청해 헨리와 자식들을 미행하도록 했다. 칸은 헨리와 자식들이 파키스탄이 아닌 유럽에 충성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봤다. 이들이 유럽으로 도주해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칸은 이스라엘이나 미국 정보당국이 가족들을 납치해 파키스탄이 핵을 포기하도록 협박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시설을 폭파한 얼마 뒤라 칸의 강박 증세는 더욱 심했다. 아메드 교수의 증언은 이어진다.

<칸은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젊은 시절 파키스탄 정부와 카라치의 학교 친구들 등으로부터 무시를 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는 URENCO의 농축 기술이라는 남들이 갖지 못한 특이하고 자신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갑자기 그의 심장은 그의 육체가 따라오지 못할 수준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히틀러 콤플렉스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무시당하던 가난한 예술가가 폴란드를 침략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유형이었다.

정부는 그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정부보다 위에 있었다. 군대도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정보당국도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칸의 야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칸의 유일한 적(敵)은 그 자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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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4, 07: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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