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박사 “서방세계가 20년 걸린 것을 나는 7년 만에 해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0)/무죄로 풀려난 칸 박사…네덜란드 총리 “CIA가 개입해 칸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다, 미국에 사기당했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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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방세계의 核 독점을 끝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숨기려고 했지만 칸 박사는 점점 더 대범해졌다. 칸은 1984년 1월 ‘콰미 다이제스트’라는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는 기자에게 미리 질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칸은 기자의 질문 수준이 너무 낮다며 자신이 직접 질문과 답변을 작성해 기자에게 넘겼다. 그는 자신이 과학자로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서방세계는 우라늄을 무기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농축하는 데 20년이 걸렸으나 나는 이를 7년 만에 해냈다”고 답했다. 미국이 가장 싫어할 만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이다. 미국은 파키스탄 원조를 위해 의회에 이런 사실이 없다고 재차 강조해왔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칸은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칸 박사는 1984년 2월에는 또 다른 신문사인 ‘나와이와크트’와 인터뷰를 했다. 이번에도 칸은 자신이 직접 질문을 만들고 답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그는 “우리(파키스탄)에게 핵폭탄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질문은 나를 코너로 몰았다. ‘그렇다’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다’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건 우리의 원자력 프로그램은 평화로운 목적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어려운 분야에서 중대한 진전을 이뤄냈다. 우리에겐 애국적인 과학자들과 매우 유능한 기술자들이 있다. 40년 전에는 어느 누구도 원자폭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다 미국인 과학자들이 이를 성공해냈다. 오늘날 우리는 (서방세계의) 모노폴리(독점)를 끝장냈다.>

인도와 이스라엘의 분노

칸의 이런 도발적 행동에 분노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더 분노한 것은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도와 이슬람의 핵무기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이었다. 인도와 이스라엘은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불만을 갖게 됐다. 미국이 파키스탄 핵개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하나였다. 또 하나는 미국이 인도와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의 핵시설을 폭파시키려고 한 계획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도의 정보당국 수장(首長)이던 수브라만얀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반대로 핵시설을 공격할 수 없었다며 미국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인도가 1년 넘게 파키스탄 핵시설 공격 계획을 세워왔다고 했다. 저공비행을 하는 전투기에 2000파운드(907kg) 규모의 폭탄을 탑재해 공격하는 훈련도 했다. 1983년 2월 인도 정부는 이스라엘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스라엘로부터 파키스탄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전자방해 기기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인도의 원자력위원회 대표와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의 대표가 오스트리아에서 비밀 회담을 했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시설을 공격하면 인도의 핵시설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인도는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인도가 주저하자 이스라엘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인도의 비행장을 사용해 파키스탄 핵시설을 공격하겠다고 했다. 카슈미르 지역에서 저공비행을 해 방공망을 피할 계획이었다. 1984년 3월 인도는 이스라엘의 계획에 찬성한다며 비행장 사용을 허가하기로 했다. 이때 미국이 중재 역할을 맡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핵개발에 성공했다’는 인상을 주는 칸의 발언이 언론을 통해 연달아 공개됐다. 이스라엘 역시 핵기술을 완성한 국가를 공격하는 데는 부담감을 느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인도 모두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됐다.

칸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파키스탄은 이미 여러 핵시설을 만들 능력을 갖췄다고 했다. 카후타 핵시설이 공격당해도 다른 곳에서 핵개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인도주재 파키스탄 대사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인도가 공격하면 파키스탄은 인도에 포화를 빗발처럼 퍼붓겠다고 했다.

중국이 파키스탄 핵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 역시 인도와 이스라엘이 선제 타격을 하는 데 부담을 주게 됐다. 중국의 공식 입장은 “핵 없는 南아시아를 지지한다”였다. 인도는 중국이 자신들의 핵시설에서 핵실험을 했는데 이 실험은 파키스탄의 핵기술이 작동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실험에는 파키스탄의 외교장관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 핵개발 문제에 중국까지 개입한 것이 알려지자 미국 정부는 더 곤란해졌다. 미 의회는 중국-파키스탄의 핵협력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레이건 행정부를 압박했다.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어졌다. 파키스탄은 오히려 도발적으로 나섰다. 미국에 더 많은 원조 및 지원을 요구했다. 아프간에 투입시킬 게릴라 조직을 훈련시키고 필요한 무기를 갖도록 하는 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CIA의 비밀 공작금으로 파키스탄을 지원하기로 했다. 약 3년간 미국은 비밀리에 매년 6000만 달러를 파키스탄에 전달했다. 이 금액은 2억 5000만 달러로 늘었다가 1985년에 들어서는 3억 달러까지 인상됐다.

미국, 기폭장치 밀수출범 체포

1984년 6월 22일 파키스탄인이 또 한 번 해외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미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미국 세관 직원은 나지르 아메드 바이드를 포함한 세 명의 파키스탄 국적자를 휴스턴 공항에서 체포했다. 이들은 크라이트론 한 상자를 들고 나가려고 하다 적발됐다. 크라이트론은 핵무기 폭발에 쓰이는 기폭 장치용 스위치에 들어가는 부품이다. 이 물건은 핵폭탄에 필수적이며 당연히 수출 규제 명단에 올라 있었다. 크라이트론이 필요하다는 뜻은 핵개발의 최종 단계라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1983년 10월부터 바이드 일행을 감시해왔다.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 있는 ‘EG&;;;G’라는 회사는 KN22라는 크라이트론을 만드는 미국의 유일한 회사였다. 이 회사 직원인 존 맥클라퍼티는 바이드가 KN22를 구하려고 하는데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FBI에 신고를 했다. 바이드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KN22를 구입하겠다며 돈이 아닌 금(金)으로 지불해도 되느냐고 했다. 바이드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연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크라이트론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아 대통령은 나중에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크라이트론의 용도는 구급차의 비상등을 밝히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바이드의 나이는 33세였다. 맥클라퍼티는 바이드가 매우 어리숙하고 외국에서 비즈니스를 해본 경험이 없어 보였다. 맥클라퍼티는 FBI에 신고를 했으나 신고가 접수됐을 때 바이드는 이미 행적을 감췄다.

바이드는 11일 후 텍사스주 휴스턴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EG&;;;G’의 판매대행사인 ‘일렉트로텍스’를 방문했다. 일렉트로텍스는 업계 전문가들이나 알 수 있는 회사였는데 파키스탄 국적자가 대뜸 찾아온 것이다. 그는 KN22 크라이트론 50개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1000 달러를 보증금으로 맡겼다. 일렉트로텍스의 직원이던 제리 시몬스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본사 ‘EG&;;;G’에 연락을 했다. 바이드가 크라이트론을 수출하는 허가증을 받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바이드는 물론 허가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시몬스는 FBI에 이런 사실을 신고했다. 크라이트론의 용도는 매우 제한적인데 이를 너무 많이 구매하는 것이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FBI는 바이드가 물건을 받으러 오는 날 체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미국 법에 따르면 세관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사전에 수출법 위반으로 체포할 수 없었다. 5개월 뒤 살림 아메드 모하메디라는 파키스탄인 사업가가 일렉트로텍스에 접촉했다. 그는 바이드의 계약을 자신이 대리하게 됐다고 했다. 시몬스는 모하메디와 여러 차례 만나 물건을 전달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잠적했던 바이드는 6월 19일 파키스탄에서 떠난 비행기로 휴스턴에 도착했다.

크라이트론은 ‘인쇄물 및 사무도구’라는 표시와 함께 포장돼 있었다. 이 상자가 세관을 통과한 직후 세관 직원들은 바이드 일행을 체포했다. 이들이 받은 혐의는 ‘수출품목 허위 신고’ 및 ‘군수품 관련 수출법’ 위반이었다. 미국 사법부는 바이드 등을 체포한 후 발표한 성명에서 “바이드가 파키스탄 정부의 지시를 받고 활동했으며 크라이트론 구입 목적은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미 ‘레드라인’을 넘은 파키스탄

미 의회는 아직도 파키스탄 핵개발의 심각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 행정부가 계속 이를 축소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의회는 그해 9월 파키스탄에 6억 3500만 달러의 원조를 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원조가 의회에서 통과되자 백악관은 파키스탄을 적극적으로 압박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직접 지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레이건은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우라늄을 5% 이상으로 농축하는 ‘레드라인’을 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민간용도 이외의 핵개발을 하는 것이 파악되면 ‘중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레이건의 이런 편지는 월스트리트저널 등 언론에 공개됐다.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파키스탄이 이미 ‘레드라인’을 넘었고 핵무기 모의 실험을 두 차례나 성공했다는 사실을 백악관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중국이 파키스탄을 대신해서 실제 핵실험을 했다는 사실, 국방부가 파키스탄 핵무기 모델을 만들어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대중은 알지 못했다.

바이드가 크라이트론을 밀수출하려다 적발된 시기는 1984년 하순이다.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아리프 비서실장의 회고에 따르면 칸 박사는 이즈음 지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칸은 카후타 핵시설의 모든 것이 준비가 됐다며 실제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아리프에 따르면 지아 장군은 파키스탄이 드디어 실제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럼에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는 수십억 달러의 원조가 끊길 것을 우려했다. 지아는 칸에게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아리프는 칸 박사의 요청이 거절되는 경우는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고 했다. 칸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당시 지아 행정부가 실제 실험을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원조 때문만이 아니다. 우선 미국 의회 대표단이 파키스탄을 직접 방문해 핵 관련 상황을 보고받겠다고 했었다. 미국 대표단이 와 있는데 핵실험을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소련이 아프간에서 아직 활동하는 상황에서 핵실험을 하면 실제 전쟁으로 치닫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 의회 대표단은 파키스탄을 방문해 핵 관련 브리핑을 받았다. 이들은 지아 대통령이나 칸 박사를 만나지는 못했다. 파키스탄은 무니르 아메드 칸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 의장을 미국 대표단에게 보내 설명을 하도록 했다. 무니르 칸은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미국 대표단 입장에서도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무니르 칸에게 미국이 입수한 정보를 미리 꺼내 보여줄 수 없었다. 대표단은 별다른 성과없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의문의 솜방망이 처벌

이런 과정에서 미국 의회가 또 한 번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라이트론 밀수출 혐의를 받던 나지르 아메드 바이드가 실형(實刑)을 피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존 글렌 상원의원실 등은 휴스턴 지방법원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모든 재판 내용에 공개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고 했다. 훗날 확인된 바에 따르면 바이드에 대한 연방대배심의 기소장에 우선 변화가 생겼다. 수정된 기소장에는 바이드가 핵개발에 필요한 크라이트론을 밀반출하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파키스탄 정부와 연루돼 있다는 점 등이 삭제됐다. 바이드는 수출허가증 없이 핵 관련 물건을 밀반출하려고 했다. 미국 법에 따르면 이는 최대 20년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죄목은 미국 수출법 위반이라는 경미한 항목이었다. 휴스턴 지방법원은 “바이드는 자신이 비즈니스라고 생각한 일을 빠르게 해결하려고 한 사업가였다”며 최소 형량을 내렸다. 3주 후 바이드는 파키스탄으로 출국할 수 있었다.

당시 바이드의 변호를 맡았던 윌리엄 버지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기소장이 처음에 바뀌게 됐을 때부터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파키스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법무부가 이를 그냥 넘어가게 해준 것 같다”고 했다.

1985년에는 칸 박사 역시 범죄 혐의를 벗게 됐다. 1983년 10월 네덜란드 재판부는 칸이 URENCO에서 핵기술을 훔쳤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칸 박사의 변호를 맡은 유럽 변호인단은 네덜란드 재판부가 칸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한 지 13일 만에 그를 기소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따졌다. 칸이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네덜란드 검찰은 1976년부터 1977년 사이 칸이 전직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를 토대로 그의 유죄를 입증하려 했다. 칸이 자신이 필요한 핵관련 기술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이를 빼내려 했다는 것이었다. 칸의 변호인단은 이런 모호한 편지만을 가지고 칸을 기소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검찰은 결국 소(訴)를 취하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새로운 정보를 모아 칸을 다시 재판에 넘기려 했다.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네덜란드 총리였던 루드 루버스는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CIA가 개입해 칸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루버스의 인터뷰 내용이다.

<미국 CIA는 칸 박사를 자유롭게 놔둔 상황에서 계속 감시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CIA는 기소를 해서 유죄판결을 이뤄내더라도 파키스탄과 범죄인 인도협약을 체결하지 않은 네덜란드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 엄청난 압박이 들어왔고 이를 결국 받아들였다. CIA가 칸을 감시하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사실은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인해 파키스탄으로 들어가는 원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칸을 자유롭게 풀어준 미국 행정부에 사기를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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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7, 06: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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