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記者의 도발에 이성을 잃은 칸 박사, “원자폭탄 보유” 선포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1) / “건국대통령 지나는 파키스탄을 만들었고 나는 이를 살려냈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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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기술 수출을 고려하게 된 계기 

이 시점에서 가난한 파키스탄이 어떻게 자금을 구해 핵개발에 나섰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공개된 각국 정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1984년부터 1985년 사이 미주(美洲) 지역과 유럽에서 핵 관련 부품을 사들이는 데 5억 5000만 달러에서 7억 달러 정도를 썼다. 파키스탄 정부가 공식적으로 칸연구실험실(KRL)에 배정한 예산은 연간 1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국제통화기구(IMF) 등의 당시 자료에 따르면 파키스탄이 해외에 숨겨둔 자산은 물론, 다른 국가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용도 자체가 없었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미국이 파키스탄에 제공한 원조 금액 및 비공식적으로 제공한 아프간 게릴라 훈련지원비가 핵개발에 쓰였다고 보고 있다. CIA가 파키스탄 정보국에 비밀자금을 전달하고 파키스탄이 이를 금(金)으로 세탁, 혹은 여러 은행을 통해 돈세탁을 해 사용했다는 내용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미 의회는 물론 레이건 행정부 내 일각에서도 파키스탄이 미국의 돈으로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로 봤다. 전방위적인 조사와 파키스탄 측의 해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금이 필수이지만 이것이 끊길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강구해야 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간 전쟁이 끝나면 미국의 지원금은 끊길 가능성이 높았다. 지아 대통령은 또 다른 자금 확보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아가 샤히 당시 외무장관은 파키스탄이 핵무기 기술을 외부에 판매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은 이 즈음이라고 회고했다. 1985년 초부터 핵기술 판매를 검토했다는 것이다. 당시 우라늄 농축 기술을 완성한 국가는 미국과 소련, 프랑스, 중국, 파키스탄 정도였다. 이중 NPT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과 파키스탄뿐이었다. 국제사회의 압박은 받겠지만 원칙적으로는 핵기술을 확산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없었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1985년 9월 이란과 시리아, 리비아 정부의 외교당국자와 만나 전략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리프 비서실장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관련해 유연한 모습을 보여온 것을 오랫동안 봐왔다. 우리 모두는 미국이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핵확산이 적발된다고 해도 각종 제재 등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아리프는 “NPT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외교 정책이 인정하는 하에서 핵무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서방세계가 파키스탄에 대해 갖고 있던 우려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국내 정치적 혼란 사태가 발생해 핵기술을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파키스탄이 인도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우려는 파키스탄이 이란 등 다른 중동 국가에 핵기술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지아 장군은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파키스탄 것만이 아닌 ‘이슬람의 핵무기’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이슬람이 공유하는 핵무기를 갖기 위해 파키스탄이 앞장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니파인 파키스탄이 시아파인 이란과 핵기술을 공유할 가능성은 낮다고 서방세계는 파악했다. 핵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수억 달러에 달했다. 서방세계는 파키스탄의 경제력을 생각보다 과대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은 핵 프로그램을 계속 유지하고 이를 고도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자금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파키스탄과 이란의 핵협력은 약 1986년부터 2007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칸 박사는 1986년 2월 이란을 직접 방문해 핵 관련 사안들을 논의했다고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주장한다. 칸 박사는 2011년 발표한 성명에서 자신은 이란을 직접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칸 박사가 이란을 방문했다는 주장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우선 파키스탄과 이란 두 나라의 핵 협력 과정을 짚어보겠다.

이란-파키스탄 커넥션

이란의 핵개발 계획은 1950년대부터 시작됐다. 팔레비 정권은 부시르 지역에 핵 연구시설을 만들었다. 독일 원자로 기술을 도입해 1974년부터 가동했다. 이 시설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호메이니가 집권하자 가동이 멈췄다. 핵시설 근무자와 독일 과학자들에 대한 임금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다. 호메이니는 이후 부시르 시설을 재가동시켜 핵개발을 하려 했다. 이라크는 전쟁 중이던 이란이 핵을 보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84년 4월 부시르 시설을 폭파시켰다. 이 즈음 독일과 프랑스 정보당국은 이란의 핵 야욕이 실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란 당국자들이 ‘2년 안에 핵을 개발하자’는 목표를 세운 사실을 알게 됐다. 프랑스 정보당국은 이란이 파키스탄과 합의, 핵기술을 수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이런 과정에서 칸 박사가 이란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 인도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칸이 이 시점에 이란을 방문해 이란 원자력위원회 및 혁명수비대 관계자들과 만났다고 했다. 당시 칸과 동행했던 사람 중 한 명은 카후타 시설의 관리 책임을 맡았던 사자왈 사령관이었다. 사자왈 사령관의 아들인 샤히크 박사는 아버지의 기록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은 이미 만들어진 농축 우라늄을 구입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우라늄을 직접 농축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고 했다.

칸의 방문 얼마 후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 대통령(훗날 최고지도자)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지아 대통령과 협상을 했다. 지아는 하메네이에게 카후타 핵시설에서 개발하는 기술을 공유하겠다고 했다. 지아와 칸은 기본적인 핵 기술을 이전한다고 해도 이란이 바로 핵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봤다. 팔레비 정권 붕괴 이후 국가 엘리트층이 대거 이탈한 상황이었던 이란엔 제대로 된 과학자도, 연구시설도 없었다. 두 나라는 핵 문제와 관련한 인적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이란의 과학자들이 1986년과 1989년 두 차례 파키스탄의 핵 연구시설을 방문했다. 이때만 해도 기본적인 정보 교류 차원 수준이었다. 원심분리기 등 제대로 된 핵 관련 기술이 이란에 넘겨진 것은 1993년 이후의 일이다.

이 무렵 칸 박사는 두바이를 물품 조달의 허브로 사용했다. 경제특구 성향을 띤 두바이는 유럽이나 미국보다 수출 규제가 덜 까다로웠다. 칸에게 물건을 조달해준 유럽 협력자들 역시 두바이로 자리를 옮겨 사업을 이어갔다. 1980년대에 들어 칸은 ‘R’이라는 파키스탄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 그는 두바이 출장을 핑계로 ‘R’과 자주 만났다. 부인 헨리는 유럽 여성 특유의 까칠하고 성격이 민감한 면이 있었다. 반면 ‘R’은 헨리와는 정반대로 매우 내성적이며 조용한 성격이었다.

일촉즉발의 인도-파키스탄

헨리와 불화를 겪었던 칸의 정신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칸은 이미 국가적인 영웅의 위치에 올라섰지만 여전히 그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심리치료를 담당했던 아메드는 칸이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뒤따르지 않는다며 불만을 가졌다고 했다. 칸은 “(건국 대통령) 지나가 파키스탄을 만들었지만 이를 살려낸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며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계속 미국을 압박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미국이 멈추지 못하면 인도가 직접 나설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계속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핵개발과 같은 민감한 정보 사안에 대해서는 추측하거나 앞서 나가지 않는다는 수준의 논평만 내놨다. 레이건 행정부는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늘리겠다는 발표도 내놨다.

인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라지브 간디 총리는 1986년 12월 대규모 군사훈련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인도의 전략 핵무기를 국경 접경지역에 배치하는 등 최고 수위로 준비됐다. 40만 명 이상의 병력과 수천 대의 장갑차가 투입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훈련이었다. 1987년 1월이 되자 인도와 파키스탄 군 병력은 100마일을 사이에 둔 채 신경전을 벌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지아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인도 군대와는 싸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아는 칸을 통해 인도군을 철수시키는 방법을 강구했다. 지아는 칸에게 인도 언론 등과 인터뷰를 할 것을 요청했다. 칸연구실험실과 관련한 비밀 내용들을 조금 더 흘리라고 했다. 파키스탄이 공격을 당하면 언제든 핵으로 반격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했다. 지아는 칸에게 미국이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칸을 흥분시킨 記者의 질문

칸 박사는 인터뷰의 화제성을 최대한 키울 수 있는 기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더 무슬림’이라는 잡지의 쿨딥 나야르라는 언론인이 가장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힌두교인인 그는 영국 식민지 시절 당시 무슬림이 거주하던 지역(지금의 파키스탄)에서 태어났다가 인도로 탈출할 사람이다. 우르드어와 영어를 배웠던 그는 인도 지역으로 이주한 후 인도의 공용어인 힌디어를 배웠다.

나야르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에서 칸을 만난 것은 1987년 1월 29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도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사람을 인터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터뷰 조건은 딱 두 개였다. 녹음을 하지 말고 받아 적지도 말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나야르는 인터뷰를 위해 파키스탄으로 오기 전 인도의 핵무기 개발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라자 라마나 박사와 얘기를 나눴다고 말을 시작했다. 라마나가 ‘어디를 가느냐’고 해 나야르는 ‘칸 박사를 만나기 위해 이슬라마바드로 간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자 라마나가 “시간 낭비하지 말라. 파키스탄에는 아무것도 없다. 폭탄도, 이를 만들 사람도, 상식적인 근거도 없는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칸은 파키스탄을 무시하는 듯한 이런 발언에 인터뷰 시작부터 이성을 잃었다고 한다. 나야르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본다.

<칸: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해줘라. 꼭 말해줘라.
나야르: 칸 선생님,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쉽지만 실험을 해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칸: 더 이상 지상(地上)에서 테스트를 해볼 필요가 없다. 실험실에서도 테스트를 할 수 있다. 확실하게 말해주겠는데 우리는 실험을 했다. (무척 흥분한 채) 우리는 이를 갖고 있고 농축 우라늄도 갖고 있다. 이를 무기화해서 다 결합을 했다.
나야르: 실험을 했다면 인도에 있어서는 심각한 경고를 주는 것일 텐데요?
칸: 우리를 그렇게 해야만 하는 코너로 밀어 넣는다면 우리는 폭탄을 사용할 것이다. 재래식 무기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나야르의 편집장은 이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기로 했다. 파키스탄이 핵폭탄을 제조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큰 뉴스였기 때문에 우선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나야르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옵저버’의 기자 시얌 바티아에게 연락을 했다. 그와는 과거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옵저버 역시 나야르가 전달한 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한 달 이상을 기다렸다. 결국 옵저버는 칸의 주장이 사실이라 판단했다. 옵저버는 1987년 3월 1일자에 “파키스탄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다(Pakistan Has the A-Bomb)”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칸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우리가 폭탄을 갖고 있다고 CIA는 말해왔는데 이는 사실이다. 그들은 파키스탄이 절대 폭탄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며 나의 역량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우리가 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세계적인 특종의 대가로 나야르가 받은 돈은 350파운드(약 450달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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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8, 06: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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