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얻은 듯했던 철권통치자 지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지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2) /아리프 비서실장 “神의 계시, 아니면 조종사의 자살행위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파키스탄의 해명을 요구하는 미국

영국 옵저버의 “파키스탄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다”는 기사는 전세계로 퍼졌다. 미 의회에 관련 사실을 숨겨오던 레이건 행정부는 큰 고민에 빠졌다. 파키스탄은 칸 박사가 계획보다 너무 센 수위의 발언을 하는 바람에 발생한 외교문제의 뒷수습을 해야 했다. 관련국인 인도와 이스라엘은 분노했다.

기사가 나온 다음 날인 1987년 3월 2일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에서 매년 진행해 온 비확산 관련 정책을 소개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핵심 목표는 핵무기가 다른 나라들에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며 “이 목표를 계속 추구할 것”이라고 했다. 파키스탄 관련 기사에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는 않은 채 원론적인 얘기만을 했다.

표면적으로는 별일 아닌 듯 넘어가는 듯했으나 비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외교의 장(場)에서는 심각한 논란이 됐다. 우선 문제 중 하나는 옵저버가 한 달 동안 기사 내용을 검증하는 사이 지아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해 국경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밝혔던 것이었다. 군사적 긴장이 거세지자 지아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선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얼마 후 “파키스탄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 지아 대통령의 철수 의사에 라지브 간디 총리 역시 인도군을 철수시키기로 했었다. 간디 역시 지아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백악관은 지아 대통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지아 대통령은 칸 박사가 인터뷰 과정에서 나야르 기자의 꾐에 넘어가게 됐다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 정부는 핵무기를 생산할 어떤 의사도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밝힌다”고 했다. 미국은 물론,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던 인도 역시 이런 주장을 믿지 않았다. 간디 총리는 국제사회가 적극적인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와심 사자드 파키스탄 과학기술부 장관은 “파키스탄은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를 가질 마음도 없고 이를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고 했다. 파키스탄 외무장관 등 고위 인사들은 비슷한 내용의 성명을 반복해 발표했다.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칸 박사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당시 파키스탄에서 영향력이 있던 언론인인 자히드 말릭을 찾았다. 말릭은 칸의 회고록 작성을 돕던 사람으로 과장된 기사를 자주 써온 사람이었다. 칸과 말릭은 나야르 기자가 인도 정보당국(RAW) 요원이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야르의 기사를 전달받아 옵저버에 실은 바티아 기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돈을 받는 힌두교의 개(dog)”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들은 말릭의 기사를 통해 확산됐다. 말릭은 옵저버의 편집장인 도널드 트렐포드가 파멜라 보데스라는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다고도 했다. 보데스는 인도계 여성이며 그녀의 설득으로 인해 트렐포드가 거짓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고 했다. 이런 음해성 프로파간다에 파키스탄 국민들은 동요했지만 서방세계는 넘어가지 않았다. 파키스탄 정부는 칸을 비롯해 핵시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한동안 이들에 감시를 붙여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게 했다.

또 한 번 적발되는 칸 네트워크…“파키스탄 정부와는 무관(無關)”

미국과 파키스탄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FBI와 세관 당국은 1987년 7월 아샤드 페르베즈라는 파키스탄계 캐나다인 사업가를 필라델피아에서 체포했다. 그는 25톤 상당의 마레이징 강철(강도 높은 강철의 일종)을 구입하려다 적발됐다. 페르베즈는 자신이 물건을 구입하려 한 상대가 잠복한 FBI 요원인 것을 알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1986년 11월부터 페르베즈를 감시했다. 그는 당시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 있는 ‘카펜터 스틸’이라는 곳에서 강철을 구입하려 했다. 페르베즈가 구입하려던 물건은 수출 규제 물품이었다. 카펜터의 직원은 관련 내용을 미국 에너지부에 신고했다. FBI와 세관당국은 카펜터의 세일즈 직원으로 위장해 정보를 캐냈다. 페르베즈는 파키스탄에 있는 ‘이남(Mr. Inam)’이라는 사람을 대리해서 물건을 구입하고 있다고 했다. 페르베즈는 상무부 직원들에게 접촉해 약 5000달러의 뇌물을 제공하려고도 했다. 1000달러를 미리 지불하고 수출 허가 승인이 떨어지면 잔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페르베즈가 구입하려던 강철은 터빈을 만드는 용도였다. 터빈은 물과 가스 등의 에너지를 추출해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회전식 기계장치다. 페르베즈가 구입하려던 강철은 파키스탄식 원심분리기의 회전장치에 필요했다. 페르베즈는 강철 이외에 다른 부품도 구입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11개의 다른 부품을 추가로 구입할 의사가 있다며 200만 달러 정도를 쓸 의향이 있다고 했다.  페르베즈가 요구한 품목에는 베릴륨이라고 불리는 금속도 포함돼 있었다. 이는 원자로의 감속재(減速材) 및 반사재(反射材)로 쓰인다. 베릴륨을 사용하면 핵탄두의 무게를 낮추면서도 비슷한 위력을 갖도록 할 수 있다. 미국 정보당국 입장에서는 파키스탄이 핵탄두 개발을 완료한 상황에서 이를 소형화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됐다.

레이건 행정부는 페르베즈와 파키스탄 정부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 세관 당국 역시 정부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마이클 아마코스트 국무부 정무차관이 앞장서서 이런 주장을 했다. 그는 파키스탄을 압박하기 위해 이슬라마바드로 향하는 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기자들에게 “지아 대통령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조달 네트워크를 근절하도록 설득할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차원’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 아마코스트는 파키스탄 정부가 직접 핵 관련 부품 조달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뉘앙스를 전하려 했다. 미 의회는 정보당국자들을 소환해 페르베즈 사건이 파키스탄 정부와 무관하냐는 질문을 퍼부었다. 정보당국자들은 의회에서의 위증이 연방법 처벌 대상임을 인지했음에도 파키스탄 정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페르베즈가 거래한 ‘이남’이라는 사람의 정체는 파키스탄의 퇴역 장군인 이남 울 하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페르베즈에게 접근해 강철을 구입하도록 했다. 이남은 1980년 초부터 CIA의 감시대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칸 박사를 도와 해외에서 물건을 조달하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미국을 우습게 보게 되는 파키스탄

미 의회의 계속된 조사로 인해 미국 행정부는 증거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재판부는 페르베즈가 파키스탄을 위해 강철과 베릴륨을 밀수출하려 했다는 혐의에 대해 유죄 판단을 내렸다. 유죄가 확정됨에 따라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는 중단됐다. 개정된 해외원조법은 핵개발을 하는 국가에 원조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이미 여러 차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세상에 공개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페르베즈라는 사람이 미국 본토에서 핵 관련 부품을 밀수출하려다 적발된 것이다. 파키스탄 정부가 페르베즈와 어떤 관계이고 어떤 방식으로 개입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미 의회 입장에서는 원조에 제동을 걸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8년 1월 15일 의회의 이런 노력을 무산시켰다. 그는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 중단 방침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런 규정을 유예하는 이유로 국가 안보를 꼽았다. 대통령은 자신이 여전히 핵확산을 막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3월에 실시된 연례(年例) 비확산 관련 연설에서도 핵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원론적 발언을 이어갔다.

파키스탄은 미국을 점점 더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원조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 매달려야만 하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 들어 미국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아프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철수에 따라 아프간 문제에서 손을 떼는 것이 목표였다.

조지 슐츠 당시 국무부장관은 회고록에서 지아 대통령의 변심을 소개했다. 지아 대통령은 8년간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을 지원한 파키스탄 입장으로서는 아프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을 완전히 끊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지아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아프간 평화 협정에는 찬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소련 철수 이후 무장 게릴라 조직에 대한 외부의 지원 역시 중단돼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지아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국제사회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고 경고했다. 지아는 “우리는 그곳(아프간)에서 우리가 한 활동을 8년 동안 숨겨왔다. 무슬림은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돼 있다”고 했다. 책 ‘디셉션’의 저자에 따르면 프랭크 칼루치 당시 국방장관도 지아와 만난 뒤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아 대통령은 칼루치를 만나 “지난 10년간 거짓말을 해왔듯 앞으로도 거짓말을 하겠다. “당신들이 핵 관련 사업에 대해 거짓말을 했듯이 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

아프간 평화 협정 체결 이후 지아 대통령은 더욱 대범해졌다. 그는 1988년 4월 26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핵개발을 언급하며, “파키스탄이 성공해내는 것을 봤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편안하게 쉬면서 이를 즐기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는 며칠 뒤 미국의 싱크탱크인 카네기 기념재단에서 한 연설에서도 핵 역량을 언급했다. 그는 “억제력을 갖췄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한 수준이 됐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동했던 지아 대통령에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8년 8월 17일, 지아 대통령은 바하왈푸르 지역을 방문해 미국이 제공한 M1 에이브럼스 탱크의 시연(試演)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뒤 그는 허큘리스 C-130 수송기를 타고 약 300마일(약 480km) 떨어진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오후 4시 30분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약 2분 뒤 관제소와의 교신이 끊겼다. 그리고 얼마 후 기수(機首)가 고꾸라지며 땅으로 추락했다. 탑승했던 30명은 모두 숨졌다.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인 아놀드 라펠도 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숨졌다. 쿠데타 이후 11년간 파키스탄을 이끌어온 64세 철권통치자의 최후였다.

이 사건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항공사고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 우선 이 비행기는 격추되지도 않았고 공중에서 폭발하지도 않았다. 비행기가 땅에 추락하기 전까지는 기체에서 화재가 목격되지도 않았다. 아리프 비서실장은 훗날 인터뷰에서 “신(神)의 계시, 아니면 조종사의 자살행위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수사 결과 발표 당시 비행기가 공격당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고 했다. 이 비행기에는 블랙박스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큘리스 수송기를 파키스탄에 제공한 미국 국방부는 비행기의 자체결함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파키스탄 정부의 수사 과정에서 일종의 신경가스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비행기에 숨겨놓았던 신경가스가 이륙 직후 퍼지기 시작해 비행기가 추락하게 됐다는 설(說)이었다. 바하왈푸르 공항에서 수송기에 여러 화물이 새롭게 실렸는데 이들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신경가스 테러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중 하나다.

이 공격의 배후에 대한 여러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지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이익을 보는 국가 및 세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배후로 지목된 국가 중 하나는 소련이다. 소련은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이 반군(叛軍)단체를 지원해온 사실에 불만을 가져왔다. 또한 소련 정보당국(KGB)은 아프간 등지에서 VX 신경가스를 사용한 테러 공격 연습을 해온 바 있었다.

인도와 이스라엘도 의심을 받았다. 파키스탄 핵개발에 가장 반대해온 이들 국가는 카후타 핵시설에 대한 선제타격도 검토했었다. 이스라엘의 정보당국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칸의 조력자들에 협박을 하고 편지 봉투를 사용한 테러 위협을 해온 전례가 있었다.

차고 넘치는 살해동기 

미국 역시 의심을 받았다. 우선 지아는 여러 차례 미국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비행기 추락사고 직전에는 핵무기 완성을 운운하기도 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아프간 반군 지원을 위해 기를 쓰고 파키스탄의 핵개발 사실을 의회에 비밀로 해왔으나 이런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쉽게 말해 레이건 행정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레이건에게 창피를 주는 행동을 했다. 또한 미국의 원조금을 경제개발 등 지원 목적이 아닌 카후타 핵시설 등에서 사용했다는 정황도 미국은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이 공격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은 미국에 또 다른 동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아프간의 무장 게릴라 단체 중에는 반미(反美) 성향의 극단주의 세력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보당국은 여러 차례 미국에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가 미국이 지원한 무기의 총구를 미국 쪽으로 돌릴 수도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키스탄 대사 역시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면 미국 배후설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다른 배후로는 파키스탄 내부에서 지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지목됐다. 우선 사형된 부토 총리의 아들 무르타자가 이끄는 테러그룹이 배후로 거론됐다. ‘알 주피카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이 단체는 부토 총리의 복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여러 차례 지아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 또 다른 배후로는 군부(軍部)의 지아 반대 세력이 지목됐다. 이들은 지아 대통령이 수십억 달러의 미국 원조금을 받고서도 경제개발을 등한시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지아 측근들의 부정부패에도 반발하는 입장이었다.

지아 대통령은 육군 참모총장직을 겸직했다. 당시의 참모차장은 미르자 아슬람 베그 장군이었다. 그는 지아와 함께 C-130 수송기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에 계획을 수정해 사고를 면했다. 지아의 사망으로 베그는 자동적으로 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군대가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온 파키스탄에서 순식간에 권력 1인자가 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베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고가 난 수송기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쿠데타의 배후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론은 또 다른 군인이 정권을 잡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파키스탄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들어서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당시 상원의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굴람 이샤크 칸이다. 그는 前 재무장관 출신으로 A. Q. 칸 박사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파키스탄 헌법 규정에는 권력에 공백이 생기면 상원의장이 이를 대체하도록 돼 있다. 지아의 사고로 굴람 이샤크 칸은 파키스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됐다. 이샤크 칸과 베그 장군은 협력 관계를 맺고 새로운 총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계속)

관련기사

[ 2020-08-19, 06: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