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핵개발 묵인한 서방세계에 대한 반발심이 파키스탄 핵개발 불렀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3) / 칸 “그들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항상 한 발짝 앞서갔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이슬람의 첫 여성 총리 탄생

1988년 지아 대통령이 의문의 사고로 숨진 뒤 파키스탄 정국은 크게 요동쳤다. 새롭게 치러진 총선거를 통해 사형됐던 부토 전 총리의 딸 베나지르가 총리에 오르게 됐다. 회교국가 최초로 여성 총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소개하게 되겠지만 베나지르의 역할은 내치(內治)로 국한됐다. 외교 및 국방, 그리고 핵개발은 지아 정권에서 상원의장을 지내던 굴람 이샤크 칸이 맡게 됐다. 이샤크 칸은 총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이샤크 칸 주변은 군부를 비롯한 강경론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베나지르 부토와도 여러 갈등을 빚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토는 사실상 형식적인 총리에 불과했다. 정책과 관련한 중요 결정은 칸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내리게 됐다.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등장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파키스탄이 이뤄낸 핵개발 진전 상황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지아 장군이 물러난 시점과 레이건 행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 맞물렸다. 이샤크 칸과 부토 총리의 파키스탄과,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어떤 위험요소를 안고 정책을 펴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의 국방대학교 교수인 하산 아바스는 ‘파키스탄의 핵무기’라는 책을 통해 A. Q. 칸 박사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이뤄내는 데 사용한 전략을 크게 여덟 가지로 꼽았다. 그가 꼽은 전략별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1. 인맥: 칸 박사는 유럽에서 근무하다 파키스탄으로 귀국한 후 그가 대학교와 회사에서 만났던 인맥들과 꾸준히 연락을 하며 도움을 얻었다. 대학을 같이 다니다 사업가가 된 하인즈 메부스, 헨크 슬레보스가 그런 예다. 그는 런던에서 직접 만나 인맥을 쌓은 피터 그리핀, 독일의 기술자 고타드 러치 등과도 긴밀한 사업 관계를 맺고 필요한 물건을 구했다.

2. 제약 없는 예산: 칸은 예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의 공식적, 비공식적 지원금을 칸 박사에게 전달해 핵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칸은 해외로부터 물건을 구입할 때 시가보다 50% 이상을 지불하는 경우도 잦았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의심이 들어도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았다. 칸이 사용하는 자금에 대해 파키스탄 정부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칸 박사의 자금 지출과 관련해 파키스탄 정부가 감사를 실시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3. 각국의 수출규제 연구: 칸 박사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각국 정부의 수출규제 방침에 대해 꾸준히 연구를 한 덕분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에 들어 핵관련 기술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칸 박사는 이들 국가의 수출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품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개별적으로 구입했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 내부에서 이들 부품을 완성품으로 만들어냈다. 또한 아랍에미리트연방(두바이)과 터키 등 국제사회의 감시가 덜 심한 지역을 중개지로 삼아 무역을 했다.

4. 자력갱생: 칸 박사는 여러 차례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서방세계의 선전선동으로 파키스탄은 남에게 해(害)를 주지 않는 물건조차 수입할 수 없게 됐다’는 발언을 해온 바 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웬만한 기본부품은 자체적으로 생산했으며 해외로부터 사들인 부품들을 조립하는 방법도 자체적으로 연구했다.

5.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 통한 물품 조달: 칸 박사는 해외에서 알게 된 인맥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파키스탄계 이민자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사업을 하는 파키스탄 사업가들을 접촉해 물건을 사들였다. 그는 이 사업가들을 금전적으로 유혹했다. 또한 파키스탄에 대한 애국심을 언급하며 이들이 사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끔 했다.

6. 파키스탄 대사관 활용: 유럽과 북미 지역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은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말까지 핵무기 개발 부품을 조달하는 중개지 역할을 맡았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이 특히 그랬다. 이들은 인버터와 알루미늄봉, 진공펌프 등을 사들여 파키스탄으로 보냈다.

7. 언론플레이: 칸은 여러 차례 언론에 등장해 사실과 다른 정보를 흘렸다. 때로는 문제를 과장하고 때로는 축소해가며 전세계의 관심을 핵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칸이 언론에 인터뷰를 하도록 해 핵개발 능력을 과시하려 하기도 했다. 칸의 인터뷰로 큰 외교적 문제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8. 직원관리: 칸 박사는 칸연구실험실(KRL) 직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정부를 설득해 직원들이 최상의 교육과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칸과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고 비밀유지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칸은 KRL 내부에서도 부서를 여러 분야로 나눠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게끔 했다.

“우리는 그들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갔다”

칸 박사는 2009년 8월 31일 파키스탄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위에 언급된 그의 전략을 파악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히 물건을 훔친 것 하나로 핵개발을 이뤄낸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총동원, 수출규제 회피 방안 연구 등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람들은 내가 유럽의 납품업체들의 명단을 훔쳤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쓰레기 같은 소리다. 나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모든 납품업체들의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뒤 나는 이들 회사로부터 물건을 구입했다. 이들이 파키스탄에 대한 수출을 금지할 때까지 말이다. 그들이 수출을 막자 우리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물건을 구입했다. 쿠웨이트와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싱가포르 같은 곳으로부터 물건을 샀다. 그들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항상 그들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갔다.>

1985년 11월에 작성된 CIA의 ‘파키스탄 핵무기 프로그램: 관계자 및 조직 현황’이라는 보고서가 있다. 최근 기밀해제 된 이 보고서에는 칸 연구소 직원들이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는 고위 과학자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핵심 역할을 하는 물리학자와 기술자, 화학자들은 서방세계에서 대학원 이상의 과정을 밟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파키스탄의 핵과학자 대부분은 파키스탄에서 교육을 받은 뒤 해외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

“서방세계에 대한 반발심이 과학자들을 똘똘 뭉치게 했다”

파키스탄이 핵개발 목표를 세운 것은 부토 총리 재임 시절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개발 과정은 지아 장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에 이뤄졌다. 지아 재임시절의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칸 박사라는 민간인이 지휘하는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은 사실이다. 정권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에 칸의 핵시설이 예속돼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軍-民의 협력 사업이었다. 아바스 교수는 1970~80년대 파키스탄의 독특한 정치상황이 핵개발에 있어서는 이점(利點)으로 작용했다고 본다고 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 관계가 아닌 단독적인 프로젝트의 개념으로 유지됐기 때문에 칸 박사가 몰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여러 차례 협박과 회유를 하며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막으려 했다. 이런 협박 및 회유 전략이 먹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군대와 민간 프로젝트가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아 대통령은 여러 차례 압박을 받으면서도 민간차원의 평화로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거짓 해명을 할 수 있었다. 칸 박사의 해외 네트워크가 적발되더라도 파키스탄 정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을 수 있었다. 아바스 교수는 파키스탄이 핵개발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세계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파키스탄의 핵과학자들은 특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서방세계가 인도의 핵개발은 묵인하고 파키스탄의 핵개발에만 제동을 걸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들이 더욱 똘똘 뭉칠 수 있었다는 게 아바스 교수의 주장이다.

권력을 잡은 강경파…“핵개발 멈춰선 안돼”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지아 대통령 사망 이후의 파키스탄 상황을 짚어보자. 지아 대통령 사망 이후 권력을 잡게 된 사람은 대통령이 된 이샤크 칸과 베그 참모총장이다. 이 둘은 인도는 물론 서방세계에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또한 핵무기 개발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베그 장군은 A. Q. 칸 박사를 국민영웅으로 생각했다. 권력의 3인자가 되는 인물은 정보당국의 새로운 수장(首長)이 된 하미드 굴 장군이다. 굴 장군은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더라도 계속해 아프간 반군 세력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굴 장군은 이샤크 칸을 만나 파키스탄이 핵개발을 계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핵 프로그램을 동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기술적으로 봤을 때 핵무기를 어느 정도 완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미사일을 비롯한 운반체계에 핵탄두를 부착하는 기술, 그리고 폭탄을 정확한 목표지점에 터뜨리도록 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굴 장군은 파키스탄이 지금 시점에서 핵개발을 멈춘다면 인도 역시 파키스탄의 핵 역량이 아직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을 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수준에서는 완벽한 억제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베그 참모총장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핵폭탄을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됐다. 다른 국가들에 우리가 핵폭탄을 갖고 있고 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터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미사일이나 전투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1988년 11월 16일 총선거를 앞두고 칸 대통령과 베그 참모총장, 굴 장군의 눈엣가시가 되는 사람은 총선 출마 계획을 밝힌 35세의 베나지르 부토였다. 베나지르는 그의 아버지가 만든 파키스탄인민당(PPP)의 당수 자리에 올랐다. 베나지르는 하버드와 옥스포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칸 대통령 등 집권세력과 비교하면 親美주의자였다. 굴 장군은 총선에 나서는 이슬람민주동맹(IJI) 소속 출마자들에게 부토를 공격하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핵폭탄이 필요하다. 부토에게 핵폭탄을 맡길 수는 없다. 그녀의 충성심은 그녀가 교육받은 미국을 향해 있다. 그녀는 우리를 미국에 팔아버릴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핵기밀을 팔려고 하는 스파이다. 그녀는 인도에 대항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민주동맹의 흑색선전에도 불구하고 부토가 이끄는 인민당이 근소한 차이로 다수당이 됐다. 부토가 아버지에 이어 총리직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칸 대통령은 부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론을 의식했다. 또 한 번의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우려했다. 칸은 몇 가지 조건을 걸고 그녀를 총리로 인정하기로 했다. ‘인민당이 무리한 정책을 취하려 하지 말 것’, ‘군대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 ‘핵문제에는 관여하지 말 것’이 칸이 요구한 조건이었다. 부토는 이를 받아들였다.

허울뿐인 총리

부토는 총리라는 권력을 잡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 그녀의 위에는 대통령이 존재했다. 칸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부토를 무시하는 발언을 해왔다. 또한 파키스탄 헌법에 따라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총리를 해임할 수 있었다. 외무장관을 비롯한 내각 인사들 역시 칸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로버트 오클리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부토 당선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부토는 베그 참모총장과 정보수장인 굴 장군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달라고 오클리에게 부탁했다. 오클리는 “부토는 무서워서 굳어 있었다. 그들은 부토가 군대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핵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총리로 인정해준다고 했다”고 했다. 군부 세력은 부토를 대놓고 무시했다. 부토는 전임 정권으로부터 어떤 자료도 인수받지 못했다. 책상에는 볼펜이나 종이도 없었다고 한다. 사무실 직원도 한 명뿐이었다. 부토는 국가정책 관련 중요 사안을 언론을 통해 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허울뿐인 총리였다.

부토를 무시한 건 칸 대통령을 위시한 군부세력만이 아니었다. 부토 총리는 취임 얼마 후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의 무니르 칸 의장과 A. Q. 칸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총리실로 오라고 지시했다. 부토는 “당신들은 우리 아버지의 오랜 친구들이다. 그가 당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줬고 내가 지금 당신들 월급을 주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무니르 칸과 A. Q. 칸은 공손하게 전화에 응대했지만 총리실에 오라는 지시는 거부했다.

얼마 후 부토는 무니르 칸과 A. Q. 칸의 연락을 받았다. 칸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부토 총리는 이때 처음으로 핵 관련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회의에는 이샤크 칸과 베그 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샤크 칸과 베그 장군, 부토 총리는 ‘핵지휘통제권’이라는 이름 하에 세 명이 함께 핵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는 사안에 합의했다. 부토는 이날 카후타 시설의 우라늄 농축 농도를 낮추는 등 핵무기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미국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이샤크 칸과 베그 장군은 이에 동의한다며 이날 마련된 전략을 ‘베나지르 독트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다 ‘쇼’에 불과했다. 베그는 1989년 2월 워싱턴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親美성향으로 분류되는 부토와 함께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토 총리는 계속해서 군대 및 핵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 인도와의 갈등을 줄이고 아프간에서 조속히 철수해야 한다고 군대를 압박했다. 칸 박사 역시 부토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부토 총리의 지시로 카후타 핵시설의 우라늄 농축이 일시 중단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핵프로그램을 다시 가동시켜 진전을 이뤄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미드 굴 파키스탄 정보당국(ISI) 국장에게 연락을 해 부토가 더 이상 정책에 개입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등장

굴 장군은 칸의 요청을 받기 전부터 부토를 거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토가 자신을 찾아와 아프간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아프간 국내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일장연설을 한 것이 화근이 됐다. 부토는 이 자리에서 ISI가 아프간 반군에 지원한 무기들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1989년 초. 굴 장군은 더 이상 부토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주요 산길인 카이버 고개에 위치한 파페샤와르에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이자 자금원을 접촉했다. 당시만 해도 서방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사마 빈 라덴이 그였다. 그는 사우디 출신이다. 그의 가족은 건설업으로 큰 돈을 벌었으며 정재계(政財界)에 인맥이 탄탄한 사람이었다.

부토 총리 역시 굴 장군이 빈 라덴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빈 라덴과 굴의 만남을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사람은 후세인 하카니였다. 그는 ‘무슬림’이라는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다 ISI로 자리를 옮긴 사람이다. 그는 굴 장군이 오사마 빈 라덴을 데리고 나와즈 샤리프를 찾아갔다고 했다. 샤리프는 민주동맹 당수로 총선에 출마했다가 부토에게 패배한 인물이었다. 하카니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리에 동석했다고 말했다. “굴은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 부토를 축출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도록 했다.” 굴 장군은 오사마 빈 라덴이 부토 축출 작전에 대한 자금을 대줄 것을 요구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0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하나였다. 샤리프가 총리 자리에 오르면 파키스탄을 엄격한 이슬람 국가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했다. 훗날 아프간의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국가를 만든다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샤리프는 이에 동의한다고 했다. 부토 총리는 몇 년 후에 총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샤리프는 이후 총리가 되는 인물이다.

(계속)

관련기사

[ 2020-08-20, 06: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