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카슈미르 반군(叛軍) 지원 대가로 이란에 핵기술을 팔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4) / 미국, 10년 만에 對파키스탄 원조 전면 중단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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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고립된 부토 총리

파키스탄은 1988년 5월 전세계를 또 한 번 충격에 빠뜨렸다. 하트프(Hatf)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50~200마일이었다. 인도의 주요 도시인 뉴델리와 뭄바이가 사정권 안에 들어갔다. 핵탄두도 탑재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베그 참모총장은 파키스탄이 지대공(地對空)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도 발표했다.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이런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부토는 축제 분위기인 여론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그는 “미사일 발사는 파키스탄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 세웠다. 알라의 은총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지한 부토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토가 군부를 장악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됐다. 파키스탄에는 핵무기가 없다는 부토의 발언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인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도는 아그니(Agni)라 불리는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이 미사일 역시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었다. 사정거리는 1500마일에 달했다. 중국 남부 지역까지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었다. 부토가 추진한 인도와의 평화 협상 역시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또 한 차례의 군축경쟁이 펼쳐졌다. 국제사회는 핵을 가진 두 나라의 경쟁에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부토는 사방으로 고립됐다. 그는 하미드 굴 ISI 국장이 오사마 빈 라덴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아버지의 측근이던 이프티카르 길라니 장군에게 연락을 했다. 길라니 장군에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우디가 공식적으로 이런 공작 혹은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사우디 국왕은 “베나지르는 나의 딸과 같은 사람”이라며 그를 죽이는 공작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부토는 굴 국장을 해임시켰다. 국장 자리는 그의 측근인 샴수르 레만 칼루에 장군에게 맡겼다. 굴 장군은 정보 수장(首長)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일선 부대의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부토에게 파키스탄 핵폭탄 모형을 들이민 미국

1989년 6월 부토는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했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인사들은 부토의 방문을 그리 반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윌리엄 웹스터 CIA 국장은 부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는 미국이 직접 만든 파키스탄의 핵폭탄 모형 등 미국이 갖고 있는 증거를 들이밀었다. 부토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들이 제시한 자료의 절반 이상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모르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식의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총리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미국의 메시지는 A. Q. 칸을 비롯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받아들였다.”

부토는 부시 대통령과 만나 협상을 이어갔다. 부토는 미국이 원조를 계속하는 대신 우라늄을 무기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농축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토에 따르면 부시는 “부토 당신이 처한 어려움을 알고 있다.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유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핵무기가 없다고 (의회에) 보고할 것”이라고 했다. 부시는 파키스탄이 핵폭탄 폭발을 위한 최종 단계까지는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미국은 파키스탄에 60대의 F-16 전투기를 판매하겠다고 했다. 부토는 원조 연장과 전투기 판매 승인이라는 결과물을 가지고 귀국하면 그에 반대하던 군부 세력도 조금은 마음이 돌아설 것으로 봤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내부 상황은 부토에게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다. ISI 국장 자리에서 쫓겨난 하미드 굴 장군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서구화된 여성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역량을 관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부토는 ‘이슬람 전체의 첫 핵폭탄’보다 미국인의 지지율을 더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베그 참모총장도 부토가 미국에서 약속하고 온 평화조성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역대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에겐 미사일이 있고 핵을 개발했다는 점을 말이다.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파키스탄, 美製 F-16 전투기에 核 탑재 능력 갖춰”

부시 대통령이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발언을 해가며 의회의 원조 승인을 받았으나 파키스탄은 또 한 번 대놓고 창피를 줬다. 미국이 F-16 전투기를 판매하는 혜택까지 줬는데 이를 핵무기 운반 용도로 사용하려는 정황이 포착됐다. 1989년 7월 독일 정보당국은 “파키스탄은 기존에 보유한 F-16 전투기에 핵무기를 탑재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새로 도입된 F-16 전투기에도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지 파악하기 위해 바람굴(풍동, 風洞) 실험을 했다”고 했다. 이는 인공으로 바람을 일으켜 기류가 물체에 미치는 작용이나 영향을 실험하는 터널형 장치를 뜻한다.

얼마 후 아서 휴스 국방부 副차관보가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했다. 그는 ‘미국이 판매한 전투기에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느냐”는 한 의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휴스는 “F-16을 사용해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은 파키스탄의 역량 밖의 일이다”라고 했다. 이날 의회에 출석한 또 다른 국무부 고위 관리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파키스탄이 현재 보유하고 있거나 구입할 예정인 F-16 전투기들에는 핵 운반 기술이 없다. 미국의 허가 없이 비행기의 기능을 바꾸는 것은 계약 위반이다.” 당시 정보부서에서 근무하던 요원들은 미국의 고위 관리들이 의회에서 또 위증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베그 참모총장은 1989년 11월 어느 날 부토 총리를 찾아갔다. 베그는 부토에게 카슈미르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단체들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들이 인도 정부와 독립을 놓고 싸우는 것이 파키스탄에 이익이 된다고 했다. 베그는 전쟁에 대한 모든 권한을 군대로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부토는 힘이 없는 총리였으나 헌법이 명시한 전쟁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부토는 이 지휘권을 넘겨줄 수는 없다고 했다. 대신 소규모의 작전 등에 있어서는 군대가 총리의 승인을 받지 않고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베그는 카슈미르 반군 지원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토는 “베그 장군이 칸실험연구소의 기술을 판매하겠다고 말한 것을 들은 건 이때가 처음이다”라고 했다. 부토는 당시 대화 내용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의 발언을 믿을 수 없었다. 굴 장군과 베그 장군이 이끄는 세력들이 미국과 전세계 금융 시스템을 통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금줄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다. 베그는 IMF의 돈도 필요 없다고 했다. 핵무기나 핵 관련 기술을 판매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IMF가 매년 2억 달러를 지원해준다고 했다. 우리 핵무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려 하겠느냐고 했다.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리비아 정도나 이런 거래에 참여할 것 같았다. 누가 우리에게 2억 달러를 지불하겠냐고 했다. 이들이 2~3년 후에 모든 기술을 갖게 되고 나면 돈은 어디에서 마련할 것이냐고 했다.>

軍部의 核수출 계획을 알게 된 부토

부토는 베그 장군의 제안을 거절했다. 부토는 오클리 미국 대사로부터 칸 연구소에서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클리 대사는 칸 연구소의 과학자들과 군인들이 군수송기를 타고 예상치 못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비밀리에 해외를 방문하는 사례가 많은데 의심이 든다고 했다. 부토는 핵기술을 팔고 있다고 짐작은 했으나 베그 장군으로부터 이런 계획을 직접 듣게 돼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계속 악화됐다.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며 파키스탄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는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무장세력을 대규모로 잡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베그 참모총장은 이란 혁명수비대의 초청을 받고 이란을 방문했다. 베그는 이란이 카슈미르 반군 지원에 나서 달라는 요청을 하러 이란에 갔다.

오클리 대사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을 방문한 이후 베그는 완전히 돌변했다고 말했다. 오클리에 따르면 베그는 “카슈미르에서 일어나는 대리전에 이란이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며 파키스탄은 이에 따른 대가로 이란의 핵프로그램을 돕기로 했다”고 했다. 오클리 대사는 군사력이 약한 이란이 어떻게 돕겠다는 것인지, 파키스탄이 왜 이런 예측 불가능한 국가에 핵무기라는 위험한 기술을 넘기려고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베그와 만나 들은 얘기를 워싱턴에 바로 보고했다. 워싱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클리는 “엄청난 뉴스였고 매우 걱정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중대한 실수 중 하나다”라고 했다.

파키스탄, 1987년 이란에 구식(舊式) 원심분리기 제공

베그 장군은 1990년 1월 해리 로웬 국방부 국제안보 차관을 만나 비슷한 발언을 했다. 로웬의 기억에 따르면 베그는 “미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이란에 핵기술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로웬은 만약 파키스탄이 그렇게 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로웬은 “파키스탄이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베그 장군은 이란에 군사적 도움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파키스탄이 F-16을 보유한 이상 인도가 전쟁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가 원한 건 이란이 농축 우라늄을 더 많이 사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름과 돈을 이란으로부터 받아내 카슈미르 무장단체를 지원할 계획이었다.

파키스탄과 이란은 1987년 핵 기술 공유 합의를 맺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파키스탄은 칸의 해외 네트워크를 이란에 소개해 직접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구식 원심분리기를 이란에 전달하기도 했다. 베그 장군은 1993년 미국 ‘뉴요커’誌와의 인터뷰에서 원심분리기 전달 사실을 부인하며 파키스탄에 핵확산 혐의를 씌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범죄가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납품업체를 찾아가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말해줬을 뿐이다. 핵기밀이나 노하우를 직접 전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1990년에 들어 인도와 카슈미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더 많은 물자가 파키스탄을 통해 카슈미르로 들어갔다. 당시 CIA 부국장을 맡고 있던 딕 커는 1993년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정부에서 근무하게 된 이래 발생한 가장 위험한 핵 사태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보다 더욱 심각했다”고 했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계속 카슈미르 사태에 개입하면 파키스탄의 군시설을 폭격할 것이라고도 했다.

베그 장군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인도에 위협을 주기로 했다. 그는 칸 박사에게 우라늄 농축을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군부는 부토 총리를 압박해 칸 박사에게 훈장을 내리도록 했다. 인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 목적이었다. 부토는 1990년 3월 23일 칸 박사에게 훈장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키스탄은 A. Q. 칸 박사라는 인물을 갖게 돼 영광스럽다. 그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더 많이 탄생하기를 바란다. 그는 핵 분야뿐만 아니라 국방력 강화를 비롯한 많은 부문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파키스탄과 사우디의 비밀 합의

오클리 대사는 부토 총리를 압박했다. 핵시설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고 했다. 부토는 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그는 계속 만나주지 않았다. 부토는 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며 우라늄 농축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려 했다. 오클리 대사는 1990년 10월 1일부로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칸 대통령, 베그 참모총장에게 알렸다. 베그는 “우리가 핵폭탄을 가진 지 벌써 수 년째인데 미국은 한 번도 원조를 끊은 적이 없다. 왜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칸 대통령은 1990년 8월 6일 수정헌법 8조를 발동, 부토 총리를 해임시켰다. 해임 사유는 부정부패 및 친족 등용이었다. 파키스탄이 미국에 전한 메시지는 확실했다. 또한 이날은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3일 뒤였다. 미국은 부토 총리의 해임 문제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0년 가을. 미국 CIA는 파키스탄이 ‘이중용도’로 분류된 핵 관련 부품들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사실을 파악했다. 미국의 수출규제를 계속 회피해 물건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가 파키스탄에 어느 정도 금액의 자금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사우디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돕고, 사우디가 외부로부터 핵 공격 위협을 당하면 파키스탄이 핵으로 도와준다는 모종의 합의를 맺은 것으로 파악됐다.

부시 대통령과 오클리 대사는 이샤크 칸 대통령과 베그 참모총장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한 것을 알고 있다. 당신들이 하는 행동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매우 많다.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다.” 칸 대통령과 베그 장군은 별다른 해명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1990년 10월 1일 부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시켰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1991년 전달될 예정이던 5억 6400만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가 곧바로 동결됐다. 파키스탄이 추가로 주문한 30대의 F-16 전투기 역시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가 완전히 끊긴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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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1, 07: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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