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製 스팅어 미사일로 북한을 유혹하기 시작하는 파키스탄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5) / ‘폭탄의 아버지’로 떠오른 칸 박사…베그 참모총장 “120억 달러 받고 이란에 핵기술 팔자”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美製 스팅어 미사일을 북한에 건넨 파키스탄

이샤크 칸 대통령은 1990년 6월 부토 총리를 해임한 후 그해 10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 선거에선 칸 대통령과 베그 참모총장이 지지한 민주동맹의 나와즈 샤리프 당수(黨首)가 승리했다. 그러나 샤리프 총리 집권 초기에는 부토 때와 마찬가지로 이샤크 칸 대통령과 베그 참모총장, 굴 사령관의 영향력이 훨씬 강했다. 이들은 샤리프를 부토 때와 마찬가지로 길들이려 했다.

1990년대에 들어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다. 베그 참모총장은 미국의 레이더망 밖에 있는 한 우르두語 언론사에 기고문을 썼다. 그는 “한 국가가 평화적인 목적, 그리고 외화(外貨)를 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서 원자력 기술을 판매하는 게 소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이 부채를 탕감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이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이 그랬듯 파키스탄 역시 핵 역량을 해외시장에서 팔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명예로운 방법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려고 한다”고 했다.

새로운 정보당국(ISI) 국장 자리에는 자비드 나시르가 올랐다. 그는 베그 참모총장의 지원을 받는 인물이었다. 베그는 이 즈음 나시르에게 특명을 내린다. 선물을 들고 북한을 방문하라고 한 것이다. 책 ‘디셉션’의 저자는 전직 파키스탄 정보당국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협력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은 1992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협력이 일어나기 전인 1990~1991년에도 두 나라가 핵협력을 염두에 두고 만났다는 것이 이들 저자의 주장이다.

파키스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과 관계를 맺어왔다. 칸 박사 연구팀은 이때부터 북한에 아주 간단한 우라늄 농축 기술 등을 전달했다.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받아낸 기술만으로는 우라늄을 자체 농축할 단계까지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게 두 나라의 핵협력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베그 참모총장은 나시르 정보국장을 북한으로 보내 경제교류를 다시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하도록 했다. 나시르는 미국이 아프간 반군 지원을 위해 제공한 스팅어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북한에 가져갔다. 미사일 기술이 파키스탄보다 앞서 있던 북한에 이를 보여주면서 배터리의 설계를 개조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냐고 물었다. 북한에 이 스팅어 미사일 기술을 보여주면서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다른 무기 역시 구입하고 싶게끔 구미를 당기려는 목적이었다. 이런 물밑 작업을 통해 관계가 다시 회복돼 핵기술 이전까지 이어졌다.

이라크에 핵거래를 제안하다

베그 참모총장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게도 핵기술을 일부 판매했다. 이스라엘은 1981년에 이라크의 이시라크 핵시설을 폭파시킨 바 있다. 이후 이라크는 핵시설을 다시 가동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파키스탄으로부터 핵 관련 기술을 사들이고 있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다. 이렇게 걸프전쟁이 펼쳐졌는데 국제사회는 전방위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압박을 했다. 국제사회가 이라크와 파키스탄의 핵협력 사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전쟁 발발 5년 후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라크에 들어가 조사에 나섰다. 당시 이라크 무기 프로그램 조사 담당자는 영국인 개리 딜런이었다. 이들은 바그다드 인근에 거주하던 사담 후세인의 사위 후세인 카멜 장군의 농장을 습격했다. 딜런의 조사팀은 이 농장에서 한 쪽짜리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 상단에는 ‘1급 기밀 제안’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중간 부분에는 ‘프로젝트 A/B’라는 문구가 있었다.

딜런은 “이 문서는 이라크 정보당국이 1990년 10월 6일 작성한 것으로 보였다. 이 문서에는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입둘 카디르 칸이 이라크가 우라늄을 농축하고 핵무기를 만들도록 도올 수 있다는 제안 내용을 전달한다고 써 있었다"고 했다. 핵폭탄의 설계도와 두바이를 거점으로 하는 판매망을 거쳐 유럽 회사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방법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칸 박사가 현재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할 때 직접 만나 대화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신 그리스에서 믿을 수 있는 중개인들을 통해 협상을 하자고 했다. 이라크 정보당국은 파키스탄의 목적은 돈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딜런의 수사팀은 또 다른 문서 하나도 발견했다. 이라크가 핵개발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의 리스트였다. 파키스탄 측은 대신 구입해주겠다며 500만 달러를 계약금으로 요구했다. 또 한 건의 거래당 10%의 커미션을 이라크가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딜런의 회고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은 파키스탄의 이런 제안이 진심인지 불확실했다. 일종의 공작을 통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딜런의 조사팀이 확인한 이라크의 마지막 답변은 파키스탄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샘플을 받은 뒤 검토를 거쳐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의 교신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딜런은 이 문서에 적혀 있던 ‘프로젝트 A/B’의 뜻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허무하게도 너무 단순한 의미였다고 했다. 이는 ‘프로젝트 원자폭탄(Atomic Bom)’이었다는 것이다. 딜런의 조사팀은 1995년 8월 8일 후세인 카멜과 그의 동생 사담 카멜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요르단으로 탈출한 뒤에 그들 소유의 농장을 습격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들의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고 이듬해 2월 이들을 이라크로 귀국시킨 뒤 총살시켰다.

앞서 언급한 파키스탄-이라크 사이의 협력 제안서 작성 날짜가 중요하다. 이는 1990년 10월 6일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베그 참모총장은 이때부터 샤리프 총리와 칸 박사를 접촉하며 이라크와 협력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들은 모두 거절했다. 베그는 1991년 2월 샤리프를 만난 자리에서 이라크와의 핵협력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며 사담 후세인을 지지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샤리프는 파키스탄이 이미 다른 아랍국가와 연합해 사담 후세인과 맞서 싸우기로 한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칸 박사는 어느 누구보다도 핵기술을 여러 나라에 판매하고 싶었다. 돈도 벌고 파키스탄이 이룬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가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는 과정에서 사우디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칸 박사는 샤리프를 찾아가 사담 후세인이 아닌 사우디 편에 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샤리프는 설득이 필요 없었다. 샤리프 역시 칸과 같은 생각이었다.

“120억 달러 받고 이란에 핵기술 팔자”

샤리프가 군부(軍部)에 대들자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일어났다. 베그 참모총장 등은 샤리프가 속한 민주동맹 내부의 인사들을 설득해 샤리프가 나약한 지도자라고 선동했다. 샤리프의 측근들 역시 샤리프를 설득하게 됐다. 더 이상 군부에 대항하다가는 부토처럼 해임될 수 있다고 했다. 샤리프는 군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사담 후세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베그 참모총장은 마음을 바꿨다. 그는 이샤크 다르 재무장관을 대동하고 샤리프를 찾아갔다. 베그는 “핵기술을 총 120억 달러를 받고 우방국가에 판매하자”고 했다. 그가 말한 우방국가는 이란이었다. 베그는 이 정도의 돈을 받으면 10년 정도의 국방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샤리프는 이 제안도 바로 거절했다. 베그는 샤리프가 거절하자 석유 및 천연자원부 장관을 찾아갔다. 그는 이란에게 핵폭탄을 판매하면 수십억 달러를 벌 수 있다며 샤리프를 설득해줄 것을 요구했다. 샤리프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베그는 끈질겼다. 정치인이 군대의 지시를 받는 파키스탄의 오랜 권력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베그 참모총장은 부토 때와 마찬가지로 샤리프가 자신에 반대하든 말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베그는 총리의 승인 없이 무작정 이란으로 향했다. 1991년 당시 이란은 파키스탄의 구식 원심분리기인 P-1을 제공받아 이를 연구하고 있는 상태였다.

베그 장군은 이란 혁명수비대 측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이란에 핵무기나 핵무기 설계도면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이란은 핵무기 네 기를 수억 달러 정도 금액에 살 의향이 있다고 했다. 이란은 모든 물품이 카자흐스탄을 경유해 들어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카자흐스탄은 소비에트연방 국가였다. 소련제 군수품이 카자흐스탄을 통해 이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서방세계의 감시망 밖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란은 1991년부터 1994년 사이 핵개발에 사용할 예산으로 42억 달러를 배정했다. 파키스탄의 무기를 살 돈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의 핵프로그램의 보안 총책임자였던 사람은 훗날 미국 대사로 근무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베그 장군과 이란 사이의 협상 내용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베그 장군은 이를 끝까지 부인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베그 장군이 진행한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샤크 칸 대통령은 급진적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 이란에 핵무기를 판매했을 시 생길 후폭풍을 우려했다. 베그 참모총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샤리프 총리를 찾아가 A. Q. 칸 박사와 원자력위원회(PAEC)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파키스탄의 국방비는 GDP의 8%, 전체예산의 27%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를 늘려 달라고 한 것이다. 중산층의 표심에 민감했던 샤리프는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 파키스탄의 경제가 더욱 악화되면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핵폭탄의 아버지’

이 즈음 파키스탄 내부에선 베그 참모총장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쿠데타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부토의 실패를 직접 봤던 샤리프는 선수(先手)를 뒀다. 그는 1991년 8월 16일부로 베그를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그의 후임자는 아시프 나와즈 장군이 될 것이라고 했다. 베그가 손발을 쓸 수 없게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샤리프가 말한 예편 일자까지 약 3개월을 남겨둔 베그는 마지막까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는 후임 참모총장 자리에 그의 측근인 굴 장군을 추천한다고 했다. 샤리프는 야전부대 사령관이던 굴 장군을 후방에 있는 탱크수리공장의 소장 자리로 좌천시켰다. 굴은 모욕을 참지 못했다. 그는 1992년 1월 강제 예편하게 됐다.

군대와 정보당국을 재정비한 샤리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미국과 핵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며 떳떳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기로 결심했다. 1992년 8월 샤리프는 선거로 당선된 총리로는 처음으로 칸 박사의 카후타 핵시설을 방문했다. 그는 “국가영웅인 A. Q. 칸 박사와 그의 직원들이 우리 조국의 자긍심을 키워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며 “알라의 은총이 우리에게 가득하길”이라고 했다. 샤리프는 이 자리에서 칸 박사에게 새로운 호칭을 붙여줬다. ‘폭탄의 아버지(Father of the Bomb)’였다. 이 이름은 평생 칸 박사를 따라다닌다.

‘폭탄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전세계 언론에 퍼지고 있었다. 이때 파키스탄이 또 한 번 언론의 관심을 받는 사건이 터졌다. 1987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1987년 미국 FBI는 아샤드 페르베즈라는 파키스탄계 캐나다인 사업가를 필라델피아에서 체포한 바 있다. 그는 핵무기에 필요한 베릴륨과 마레이징 강철을 구입하려다 적발됐다. 그는 이 물건을 파키스탄의 퇴역 장군인 이남 울 하크를 대리해서 구입했다고 했다. 수배를 받던 울 하크가 1991년 독일에서 체포돼 미국으로 송환된 것이었다. 그는 1992년 필라델피아에서 재판을 받았다. 혐의가 모두 인정되면 10년의 징역형과 50만 달러의 벌금형이 부과되는 상황이었다. 1987년 페르베즈의 재판을 담당했던 제임스 길스 판사가 울 하크의 재판 역시 담당했다. 그는 페르베즈 때와 마찬가지로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그는 울 하크가 재판을 받으며 수감됐던 시간 이외의 징역형은 필요 없다며 1만 달러의 벌금형만 내렸다. 재판의 핵심이 돼야 할 울 하크와 파키스탄 정부와의 관계 역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울 하크는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음모공작의 피해자다”라며 “親인도, 親이스라엘, 反파키스탄 공작의 피해자였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미국을 긴장케 한 ‘더티 밤’

이 무렵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를 악화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993년 2월 26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약 600kg짜리 폭탄이 터져 6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다쳤다. FBI는 테러 배후로 람지 유세프를 지목했다. 그는 자신이 이라크 난민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FBI가 유세프의 여권과 지문을 조회해보자 유세프는 가명이고 본명은 압둘 카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카림은 파키스탄 국적자였다. 미국은 쿠웨이트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유세프의 신원을 찾아냈다. 그는 쿠웨이트에 거주했다. FBI는 유세프가 테러 직전에 파키스탄에 국제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세프를 비롯한 테러범들은 사건 얼마 후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 미국은 유세프가 파키스탄 국적자일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던 파키스탄 정보당국(ISI) 요원들에 의해 훈련을 받은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유세프가 과거 ‘더티 밤(Dirty Bomb)’을 만드는 실험도 한 것으로 파악했다. 더티 밤은 재래식 폭발물에 방사능 물질을 결합한 것으로 폭발력 자체에 치중하기보다는 방사능 유출에 따른 대혼란 사태를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유세프가 파키스탄 출신이 아니라며 현재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국은 당연히 이를 믿지 않았다. 파키스탄이라는 국가가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미국은 비로소 깨닫게 됐다. 미국은 샤리프 총리에게 ISI가 운영하는 모든 훈련시설을 폐쇄하라고 했다. 샤리프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ISI는 이미 관련 시설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놨다.

샤리프 총리는 이샤크 칸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 임명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서로 자신의 사람을 앉히려 했다. 이샤크 칸 대통령은 1993년 4월 18일 또 한 번 수정헌법 8조를 발동해 샤리프 총리를 해임시켰다. 칸은 국정운영 실패와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들었다. 샤리프는 칸의 이같은 조치가 위헌이라며 대법원에 문제를 제기했다. 대법원은 샤리프의 손을 들어줬다. 샤리프는 복권된 뒤에도 계속 칸 대통령과 다퉜다. 칸 대통령은 샤리프 총리와의 합의 없이 와히드 카칼 장군을 새로운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카칼은 참모총장이 된 뒤 칸 대통령과 샤리프 총리 사이의 중재역할을 맡았다. 카칼의 중재로 칸과 샤리프는 1993년 7월 동시에 사임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클린턴은 레이건 행정부의 파키스탄 정책을 대부분 이어받았다. 핵무기 개발 상황을 뒤로 돌리면 F-16 전투기를 다시 판매하겠다고 했다. 클린턴 행정부 역시 F-16으로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문제는 의회였다. 의회는 F-16에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다면 이를 절대 파키스탄에 판매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의회는 이미 파키스탄이 미국이 전달한 전투기를 일부 개조해 핵무기를 탑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방부는 레이건 행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에 전달한, 그리고 앞으로 전달할 F-16에는 핵무기 탑재 기능이 없다고 했다.

통제불능이 된 칸 박사

이 무렵 A. Q. 칸 박사는 점점 통제불능 상태가 돼 갔다. 그의 심리치료를 맡았던 아메드 박사는 칸이 ‘폭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뒤부터 그가 하는 일은 모든 정당화된다는 생각에 빠졌다고 했다. 자신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를 이롭게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졌다.

파키스탄 정부 역시 칸을 통제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아사드 두라니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칸이 기밀을 너무 많이 떠벌리고 다니는 것을 우려했다고 했다. 매우 민감한 수출 현황 등을 비롯한 기밀을 너무 많은 사람에게 털어놨다. 그는 칸을 직접 만나 “입을 닫아라. 당신이 진행하는 일은 비밀로 유지돼야 한다”고 경고했다. 두라니는 “그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를 더 많이 필요로 했다. 그런 사람을 검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다.

칸은 국가로부터 여러 훈장과 상을 받았다. 돈이 많아지면서 씀씀이도 커졌다. 심리치료사 아메드는 어느 날 칸이 집을 찾아왔던 날을 기억해냈다. 아메드의 딸은 당시 핵무기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칸은 그녀를 보더니 웃으면서 5만 달러를 현금으로 건네줬다고 한다. 칸은 약속대로 아메드에게 병원을 만들어줬다. 무상(無償)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신병원이었다. 칸은 어느 날 아메드에게 전화를 걸어 에어컨이 배달될 테니 사용하라고 했다. 아메드는 “무상으로 운영되는 병원에서 에어컨을 운영할 돈이 어디 있겠냐”며 거절했다. 칸은 “하라면 해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최고급 기기들이 계속해서 병원에 배달됐다. 병원은 5성급 호텔 수준이 돼 갔다.

1977년부터 칸과 함께 일했던 영국의 피터 그리핀도 달라진 칸을 보게 됐다. 1993년 어느 날 칸연구실험실에서 시설 임원들과 군인 몇 명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칸은 이 방에 있는 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흉을 봤다. 칸이 너무 무례하다고 느낀 그리핀은 “조심해라”라고 했다. 칸이 “왜”라고 하자 그리핀은 “네가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에 대해 나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칸은 가만히 그리핀을 쳐다봤고 이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그리핀은 이만 자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칸은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변했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기 급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폭탄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원격 조종하고 있다”

책 ‘디셉션’의 저자들은 ‘콰이드 이 아잠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퍼베스 후드보이라는 핵과학자를 만나 그가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후드보이는 1993년 파키스탄의 핵무기 보안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는 주제의 논문을 썼다. 그는 참모총장의 호출을 받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얼마 후 칸 박사가 사무실로 들어와 그를 노려봤다. 참모총장은 논문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했다. 자신들은 보안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연구한 적이 없다고 했다. 후드보이는 쿠데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핵무기의 보안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후드보이는 계속 압박을 받았다. 칸 박사는 그가 재직하는 대학교의 이사로 임명됐다. 칸은 대학교의 캠퍼스 부지를 팔기 시작했다. 후드보이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자 캠퍼스 부근에 그를 조롱하는 포스터가 붙기 시작했다. 후드보이는 ‘이슬람과 건국의 아버지 지나를 싫어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과 한 패이며 親美주의자다’는 식의 공격을 받았다.

후드보이는 자신에게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도 알게 됐다. 내무장관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더니 이유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내무장관의 사무실에서 자신에 대한 서류들을 볼 수 있었다. 서류 하나에는 칸 박사가 직접 그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무장관은 “당신은 우리의 핵폭탄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썼다”고 했다. 후드보이는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내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라고 했다. 내무장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후드보이는 “내무장관이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폭탄의 아버지’가 원격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었다”고 했다.
 
(계속)

관련기사

[ 2020-08-22, 07: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