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난 부토, 우라늄 농축 기술 담긴 CD 北에 건넸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6) / 노동 미사일의 대가는 뭐였을까?…부토의 生前회고 '현금' vs 이스라엘 첩보 “돈 없어 농축 기술 제공”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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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위협에도 다시 총리가 된 부토

1993년 가을 파키스탄에선 또 한 차례의 선거가 치러졌다. 총리를 지내다 해임됐던 베나지르 부토가 다시 한 번 출마했다. 부토의 증언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가했던 람지 유세프가 그를 죽이려는 공작에 나섰다. 유세프는 지아 대통령이 만든 파키스탄의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단체인 SSP의 사주를 받았다. 유세프는 SSP로부터 9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 유세프의 삼촌인 칼리드 모하메드도 돈을 추가적으로 지원했다. 이 칼리드 모하메드는 2001년 9·11 테러에 가담한 인물 중 하나다. 7월 26일 유세프 일당은 부토의 집을 찾아가 폭탄을 설치하려 했다. 그러다 폭탄이 오작동해 그의 눈 앞에서 터졌다. 얼굴과 손을 크게 다친 그는 의식을 잃었다. 유세프 일행은 그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자리를 떴다. 부토 암살 작전은 실패였다. 

이런 테러 위협에도 부토는 총선을 완주해 승리했다. 그는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에 측근인 파루크 레가리를 임명했다. 레가리는 총리를 해임시킬 수 있는 수정헌법 8조를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통령직을 맡았다.

총리 자리에서 한 번 쫓겨난 경험이 있던 부토는 칸 박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총리가 된 뒤에 만난 칸은 과거와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겸손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고집불통이 돼 있었다. 무례했다”고 했다. 또한 “종교에 더욱 빠지게 됐으며 보수적으로 변했다. 조금 광신도 같았다”고 했다.

부토는 여전히 군대를 손보지는 못했다. 그는 군대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또 다시 해임될 수 있다고 봤다. 군대는 부토가 과거처럼 대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그를 조금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 부토는 파키스탄의 원자폭탄 수출 계획인 ‘프로젝트 A/B’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던 군부는 파키스탄이 진행하고 있던 외국과의 비밀스러운 군사협력에 부토가 참여하도록 해줬다. 

부토에게 부탁하는 칸, “북한에 가달라”

1993년 겨울, 칸 박사가 직접 부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몇 년 전 총리를 지낼 때는 만나주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부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칸은 우선 카라치에 있는 ‘인민의 제철소’에 대해 얘기했다. 이 제철소는 재정악화로 문을 닫게 된 상황이었다. 칸은 자신이 이 제철소를 사용해 최상급의 부품들을 만들어 칸연구실험실에서 사용하겠다고 했다. 칸은 1960년대에 이 제철소에 취업하고 싶었으나 실패한 바 있다. 그랬던 칸은 결국에는 이 제철소를 통째로 이어받아 파키스탄 핵프로그램에 없어서는 안 될 곳으로 만들어냈다.

칸이 전화를 걸어온 두 번째 목적은 북한이었다. 부토는 “칸은 내게 북한에 가달라고 했다. 파키스탄은 내 아버지 때부터 매년 문화사절단 형식으로 북한에 사람을 보내왔다. 평양은 (내가 속한) 파키스탄인민당과 항상 연락을 주고받았고 행사가 열리면 우리를 초대해왔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칸은 부토가 1993년 12월에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칸은 중국에서 북한은 가까우니 방문해달라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토의 기억이다.

<그는 내게 ‘더 좋은 미사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미사일로는 인도 미사일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기술 수준에 도달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군대가 한 번도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군대에 대항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칸은 북한 같은 국가만 우리에게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봤다. 나는 칸에게 미사일 개발을 위한 돈은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인도가 미사일 개발이란 도발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해관계가 형성된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알았다, 평양에 잠깐 들르도록 하겠다’고 했다.>

칸은 파키스탄이 북한과 이미 어느 정도의 합의를 해온 사실을 숨겼다. 칸은 1980년대부터 북한과 관계를 맺었다. 1990년에는 미국의 스팅어 미사일을 건네주기도 했다. 북한의 김영남(金永南) 당시 외무상은 1992년 8월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칸 박사는 김영남과 비밀리에 노동 미사일 구입 및 핵기술 교류에 대해 논의했다. 김영남은 당시 시리아와 이란 역시 방문했었다. 북한은 1980년대에 이란에 화성 5호 미사일 160기를 판매한 바 있다. 이때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의 과학자들은 미사일 기술을 같이 연구했다. 칸 박사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1993년 5월 북한을 방문했다. 노동 미사일 실험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북한은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800마일이며 1000kg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고 했다. 파키스탄이 정확히 원하는 기술이었다.

부토, “김일성은 악마 같은 독재자 아닌 수다스러운 사람”

부토의 측근들은 그의 訪北을 만류했다.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며 이른바 ‘1차 북핵위기’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약점을 잡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교훈을 배운 부토는 1993년 12월 29일 북한 방문을 강행했다.

부토가 訪北한 시점이 어느 때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플루토늄을 통한 핵개발을 하기 시작했다. 소련을 통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들여왔다. 1980년대에 들어 우라늄을 통한 핵개발을 시도했으나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991년 南과 北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발표했다. ①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 배비(配備)·사용의 금지, ②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③핵재처리시설 및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 금지, ④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한 상호 사찰, ⑤공동선언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남북핵통제공동위의 구성 등이 합의 내용이다. 북한은 물론 이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10만 명의 인파가 길거리로 나와 부토 총리를 환영했다. 부토는 김일성을 만난 뒤 그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라 놀랐다고 한다. 부토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주석에 대해 엄청 많은 보도가 나오곤 했는데 그는 이에 묘사된 것과 전혀 달랐다. 악마 같은 독재자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통역가를 대동했었는데 매우 개방돼 있고 말이 많았다”고 했다. 부토는 “주체사상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며 김일성을 치켜세웠다. 부토는 “경제 발전 등을 비롯한 평화적 목적으로 핵기술을 보유하고 개발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발언도 했다. 그는 “아시아인들이 아시아의 미래를 독립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김일성은 ‘17년 전 줄피카르 알리 부토를 통해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며 베나지르 부토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라고 치켜세웠다. 김일성과 부토는 만찬을 들기 시작했다. 부토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부토에게 CD를 건네는 북한

<긴장돼서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金에게 가까이 기댄 뒤 ‘당신은 내 아버지와 매우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이 내게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제발 우리나라에 노동 미사일 청사진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미사일이 꼭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계속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그가 이해를 제대로 했는지 몰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통역가는 어떻게 하면 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갑자기 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 실무팀을 구성해 이들이 자세한 내용을 논의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다음날 부토는 김일성을 다시 만났다.

<북한 사람들은 미사일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디스크(CD)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각종 자료들이 담긴 가방 하나를 건네줬다. 김일성은 양측의 실무진이 합의 내용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실무진들이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일뿐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북한은 거래는 현금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측의 실무진 대표는 칸 박사와 가까운 카와자 지아우딘 장군이었다.>

김일성은 부토의 출국 몇 시간을 앞두고 깜짝 이벤트를 제공했다. 부토는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가보자고 했다”고 했다. 부토는 새롭게 조성된 그의 고향을 둘러봤고 아름다운 정원을 봤던 것을 기억했다. 부토는 풍경도 아릅답고 다 좋았지만 그가 건네받은 가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신경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우리가 가는 곳에서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가난하고 삐쩍 마른 것 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내 자신에 죄책감이 들었다. 북한 주민들의 옷은 형편없었다. 먹을 음식도 당연히 없는 것 같이 보였다. 모두 너무 말랐다. 그런데 우리는 엄청난 식사를 대접받았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눈발이 세서 비행기가 뜨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그래, 더 머무세요’라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말이다. 이곳에서는 하룻밤도 더 지낼 수 없었다.>

부토의 측근으로 자문 역할을 맡았던 후세인 하카니는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왔다. 하카니는 “부토는 내게 가방 안을 들여다봤는데 CD와 다른 것들이 있었다고 말해줬다. 그녀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하카니는 군부가 부토에게 일부러 이런 일을 시킨 것으로 봤다. 북한과의 비밀 거래에 부토의 지문을 남기도록 한 것으로 봤다.

“부토, 우라늄 농축 기술 담긴 CD 北에 전달했다”

부토는 북한으로부터 받은 가방을 지아우딘 장군에게 모두 넘겼다. 그는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거래는 현금으로 노동 미사일을 사는 것이었다. 내가 이 거래에 대한 추가 내용을 알고 싶다고 하자 군대는 입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국방비는 여전히 기밀로 유지돼 총리도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총리 내각은 군대가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무역 및 거래에 대한 정보도 확인할 수 없었다.

베나지르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이것이 끝이다. 1993년 파키스탄이 북한에 건넨 것은 무엇일까? 정말 노동 미사일 관련 자료만 받은 것이 끝일까? CD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이는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기자 시암 바티아가 2008년에 출판한 ‘안녕, 부토 총리(Goodbye Shahzadi)’라는 책이다. 이 책은 2003년 부토와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회고록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은 부토가 사망한 1년 뒤에 나왔다.

바티아 기자는 부토와는 죽기 직전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했다. 그는 부토가 2003년 인터뷰에서 “죽을 때까지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중요한 비밀을 털어놨다”고 했다. 부토는 “무엇 하나를 말해주겠다”며 바티아에게 녹음기를 끄라고 했다. 부토는 “나는 파키스탄 군부 그 누구보다도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부토는 평양을 가기 전 호주머니가 가장 깊은 코트를 샀다고 했다. 북한이 원하던 우라늄 농축 관련 과학 자료가 담긴 CD를 이 호주머니에 넣고 북한에 가져갔다고 했다. 부토는 양측의 물건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귀국할 때는 북한의 미사일 자료가 담긴 CD를 들고 왔다는 것이다. 부토는 CD 몇 장을 들고 왔는지, 파키스탄의 자료를 전달받은 북한의 인사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바티아는 이 내용을 계속 외부에 공개하자고 했으나 그는 끝까지 이를 막았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핵 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부토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북한이 1980년대 후반부터 우라늄 농축을 시도했는데 관련 부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바티아를 아는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그가 과거에 쓴 인도의 핵개발 관련 책들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잘 쓰여진 책이라는 것이다. 또한 존경받는 기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들 했다. 미국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은 이 책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오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며 “논평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부토는 이미 죽었고, 북한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1993년 부토-김일성 회담에서 오고 간 실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北-파키스탄 협력

이 때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정치, 과학, 미사일 등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1994년 4월 북한 외교부의 박충국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파키스탄을 찾았다. 1994년 9월에는 북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최희종 등 대표단이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1995년 11월 인민무력부장 최광을 비롯한 북한 군사 대표단이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최광은 칸연구실험실을 방문해 우라늄 농축 시설을 견학했다. 외국 인사가 이 실험실을 방문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최광은 파키스탄에 노동 미사일의 연료탱크와 로켓 엔진 등 8개의 주요부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또한 12~24기의 노동 미사일을 완전체 형태로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이 품목들은 북한의 제 2경제위원회의 제4기계총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는 이듬해 창광신용사를 통해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로 인도됐다.

이같은 사실을 파악한 미국 국무부는 1998년 4월 24일 북한의 창광신용사와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에 대해 무역 제재조치를 내렸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부토 총리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뒤인 1994년부터 1995년 사이 파키스탄에서는 여러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수니파 극단세력을 중심으로 테러 행위가 자행됐다. 파키스탄 국민들은 오랫동안 이어진 군사정권에 반대했고 이로 인해 부토가 총리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혼란사태가 이어지자 민간 출신의 지도자로는 파키스탄 내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의심

경제 상황도 부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파키스탄은 1996년 무렵부터는 거의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 여러 산업이 붕괴했고 물가상승률은 연간 14%에 달했다. 파키스탄의 외화보유액은 5억 달러선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파키스탄이 2주간 수입에 지출하는 돈도 안 되는 것이었다. 돈이 바닥나자 군부는 더욱 절실히 핵기술 구매자들을 찾아 나섰다. 당시 칸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에 따르면 연구소에 마련된 손님용 숙소에는 북한과 중국, 이란, 시리아, 베트남, 리비아 국적의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왔다. 파키스탄 군대는 C-130 수송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여러 지역을 방문했다. 군대가 핵기술을 판매하려 한다는 부토의 의심은 점점 더 커져갔다.

1995년 11월 부토 총리는 레가리 대통령과 함께 이란을 방문했다. 부토는 당시 하셰미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과 만났다. 부토는 라프산자니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는 “우리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혹시 핵 관련 교류가 있느냐”고 물었다. 라프산자니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 역시 이런 상황을 의심하고는 있지만 어떤 정보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부토는 이란의 핵개발 계획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1994년 11월 8일 미국 PBS 방송에 출연한 부토 총리는 핵개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핵폭탄을 폭발시키지도, 갖고 있지도 않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책임감 있는 국가이고 비확산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다섯 번의 정권 동안 평화로운 원자력 개발 계획을 추진해왔을 뿐이다”라고 했다. 부토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첩보 “현금 동난 파키스탄, 노동미사일 건넨 北에 우라늄 농축 기술 제공키로”

이스라엘은 이란과 파키스탄의 핵협력을 면밀히 주시해왔다. 이스라엘 정보군 소속의 8200부대는 파키스탄이 이란에 핵무기 시설을 제공하는 등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훗날 국방장관을 지내게 되는 모셰 야론은 당시 미국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소속으로 근무했다. 야론은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은 부도 상태였고 칸은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이란과 접촉한 사실도 파악했다”고 했다.

1980년대에 칸 박사는 파키스탄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구식 원심분리기인 P-1을 이란에 건네준 바 있다. 당시 칸 박사는 P-1을 비롯해 여러 부품들을 함께 전달했다. 이란은 이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1990년대 초 이란은, 파키스탄이 이미 P-1보다 발전된 P-2 원심분리기를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란은 이를 요구했고 파키스탄은 1995년에 P-2 설계도를 제공했다.

이스라엘은 파키스탄이 시리아와 접촉한 사실도 파악했다. 야론 전 국방장관은 “칸은 (시리아 고위 당국자를 만나) 메뉴판을 보여줬다. 핵개발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거래가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칸이 시리아에 핵기술을 팔려 하는 것인지 이란의 핵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중간창구로 시리아를 사용하려 한 것인지 불확실했다. 당시만 해도 시리아를 핵개발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도청한 내용 중에는 더욱 충격적인 것도 많았다. 파키스탄은 1993년 노동 미사일 거래를 체결하고 북한에 400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996년에 들어 파키스탄은 평양에 대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신 1992년 8월 김영남이 파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제안한 것처럼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부토 총리의 주장과 엇갈린다. 그는 바티아 기자와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북한 미사일을 사는 조건으로 현금을 건넸다고 주장해왔다. 또한 대금은 모두 치러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야론 전 국방장관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1995년인가 1996년에 이런 정보를 접하고 미국 측에 알려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파키스탄이 (이 방법이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노동 미사일에 대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는 나 혼자 떠들어대는 상황이었다. 어느 누구도 (불편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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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3, 06: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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