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성공…“기대수명 122위, 문맹률 162위인 우리가 핵무기 부문 세계 7위가 됐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7) / 샤리프 총리 “핵실험 실패하면 우린 다 죽는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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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파키스탄으로 향하던 ‘천성號’에 실린 로켓 추진체 적발

이 무렵 중국은 파키스탄에 M-11 미사일을 판매하고 있었다.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이번에도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 1996년 초에 들어 미국 정보당국은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돕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포착했다. 중국이 파키스탄에 원심분리기 부품을 만들어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원자력산업회사’가 파키스탄에 5000개의 ‘고리 자석(ring magnet)’을 판매한 사실이 적발됐다. 이는 원심분리기의 회전자에 필요한 부품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 문제도 침묵했다.

또 한 번 의회가 들고 일어났다. 국무부는 중국과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정부가 자석을 판매하는 것을 통해 파키스탄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자의적으로 도와줬거나 방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적발된 파키스탄 밀수출자들, F-16 전투기의 핵탑재 가능 여부 등 때와 똑같이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은폐하는 방법을 택했다.

1996년 3월 북한에서 파키스탄으로 향하던 ‘천성號’가 대만에서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배에는 15톤 상당의 로켓 추진체가 실려 있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깜짝 놀랐다. 양국 정보기관은 “파키스탄이 북한, 그리고 아마도 이란에 (무기를) 판매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이미 판매하고 있다”는 정보를 교류했다. 영국 주재 파키스탄 고등판무관을 지내던 와지드 하산은 영국 당국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던 일을 기억했다. 영국 정부는 “파키스탄 정보국이 핵프로그램을 사고팔고 있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파키스탄 대사관에 근무하던 한 직원을 특정해 그가 대량살상무기 확산에 가담했다고 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살렘이라는 직원이 칸의 명령을 받고 활동하는 유럽의 중개인이라는 것이었다.

1996년 1월 10일 존 도이치 CIA 국장은 6명의 리투아니아 국적자와 1명의 그루지아(조지아)인이 리투아니아에 구금돼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우라늄 100kg을 밀수출하려다 적발됐다. 이들은 카자흐스탄을 통해 우라늄을 밀반입해왔다. 앞서 카자흐스탄은 파키스탄이 이란에 핵기술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중간창구 역할을 맡기로 한 바 있다. 도이치 국장은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체포된 사람들은 우라늄을 파키스탄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구매자에게 판매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CIA는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이 우라늄을 구입하려 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 단체는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돼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얼마 후 미국과 영국 정보당국은 오사마 빈 라덴의 훈련시설 인근에서 우라늄원광(原鑛)이 거래되고 있는 사실을 파악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한 람지 유세프처럼 누군가가 ‘더티 밤’을 만들려 하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물러나게 되는 부토 총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요사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5년 파키스탄 주재 이집트 대사관 폭탄 테러사건에 이어 1996년 펀자브주에서 폭탄 테러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파키스탄의 치안은 더욱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부토 총리는 자신이 임명한 레가리 대통령과 불화를 겪게 됐다. 경찰의 진압과정, 총리의 판사 임명 등 사법부에 대한 개입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1996년 11월 5일 레가리는 총리해임권을 뜻하는 ‘수정헌법 8조’를 발동해 부토를 해임시켰다. 대통령 지명 당시 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해임 사유는 부정부패와 국정혼란 등이었다.  1997년 2월 4일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동맹의 샤리프 전 총리가 다시 승리를 거뒀다. 샤리프는 총리에 당선된 뒤 대통령에 부여된 총리해임권과 의회해산 권한을 박탈했다. 레가리 대통령이 자신을 해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1997년 12월 레가리는 사임했다. 샤리프는 측근인 무하마드 라피크 타라르를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해 1997년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1997년 1월 클린턴과 샤리프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서로를 상대하게 된다. 샤리프는 파키스탄 내 권력을 총리 중심제로 바꾸며 내부 결속을 다졌다. 그는 군대와는 물론, 미국과도 강력한 위치에서 맞서려 했다. 이 무렵 칸 박사는 무역 중개지로 사용했던 두바이에 대한 규제가 늘어나고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게 돼 아프리카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무역 중개지를 찾고 있었다. 1998년 초, 칸 박사는 서부 아프리카 말리의 사막에 있는 팀부쿠(Timbuktu) 마을을 눈여겨봤다. 칸은 말리 정부가 방문 목적을 묻자 팀부쿠에서 작은 사업거리를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팀부쿠에 있는 호텔을 하나 사들인 뒤 이름을 ‘헨드리나 칸 호텔’로 지었다. 헨드리나는 부인 ‘헨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오랫동안 칸을 도와온 영국의 피터 그리핀은 “칸의 사업방식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대놓고 알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北 노동미사일 개조한 ‘가우리’ 실험 발사 성공

칸 박사가 귀국한 얼마 후 파키스탄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1998년 4월 6일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가우리’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이는 북한의 노동 미사일을 기반으로 했다. 1993년 부토-김일성 회담 이후 북한은 파키스탄에 노동 미사일 기술을 전달했다. 앞서 언급했듯 파키스탄에는 원자력위원회(PAEC)라는 기구와 칸 연구소(KRL)라는 기구가 따로 있었다. PAEC는 파키스탄의 초창기 핵개발 때 플루토늄을 통한 핵개발을 시도한 곳이다. 그러다 칸이라는 사람이 등장해 우라늄 농축 기술을 선보였고 파키스탄은 우라늄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핵개발은 칸의 KRL이 담당했으나 PAEC는 여전히 미사일과 각종 폭탄 등의 군수품 생산 및 개발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이런 과정에서 칸 박사는 PAEC보다 뛰어난 미사일 기술을 북한으로부터 들여와 만든 것이었다.

칸은 PAEC를 이겨냈다는 기분에 크게 들떴다. 그는 노동 미사일로 만들어낸 파키스탄 미사일의 이름을 12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왕 술탄 무하마드 가우리에서 따왔다. 앞서 인도는 1988년 2월 ‘프리트비’라는 이름의 핵 탑재 중거리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 프리트비는 12세기 인도의 왕 프리트비 라즈 차우한에서 따온 것이었다. 가우리 왕은 1192년 인도의 프리트비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인도 북부지역을 점령했다. 칸 박사는 인도의 ‘프리트비’를 파키스탄의 ‘가우리’가 이긴다는 의미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샤리프 총리는 칸에게 “이 미사일은 파키스탄이 증강하는 인도의 핵 역량에 대한 억제력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다”라고 격려했다. 시험 발사에 사용된 미사일이 파키스탄식으로 개조한 ‘가우리’가 아니라 그냥 ‘노동 미사일’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KRL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에 따르면 칸 박사는 노동 미사일 기술을 자체적으로 완전히 터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노동 미사일에 페인트를 새로 칠해 파키스탄 무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뒤 이를 발사해 ‘가우리’ 실험 성공이라고 발표했다고 한다. 

인도의 핵실험에 들끓는 파키스탄

1998년 3월 인도에는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라는 정치인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파키스탄의 도발을 잠재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의 측근과 지지자들은 인도가 실제 핵실험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지파이 총리는 1998년 5월 11일 라자스탄주 포크란 사막에서 핵실험을 했다. 1974년 첫 번째 핵실험 때와 같은 장소였다. 미국은 인도의 핵실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인도는 총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이날 실시했다. 바지파이 총리는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지역 등에서 도발을 계속한다면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南아시아의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파키스탄이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파키스탄에게는 남아 있는 옵션이 없었다. 순종하며 살아가거나 핵실험에는 핵실험으로 대응하는 것뿐이었다. 핵이 있는 상황에서 파키스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하나뿐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샤리프 총리가 핵실험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러 채널로 설득했다. 클린턴은 샤리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중단된 F-16 전투기 판매와 원조를 재개하겠다고 했다. 또한 미국 워싱턴에 초청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당근’은 과거에 이미 써먹었던 것들뿐이었다. 미국 행정부에서 파키스탄 회유 협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미션 임파서블’, ‘파키스탄이 미국의 52번째 주(州)가 되지 않는 이상 이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었다’ 등으로 설명했다. 미국은 고위급으로 구성된 협상팀을 직접 파키스탄에 보내기도 했다. 샤리프 총리는 단호했다.

미국 협상팀이 파키스탄을 방문하고 있던 1998년 5월 15일, 샤리프 총리는 내각 주요인사들을 비롯해 원자력위원회와 칸 연구소의 담당자들을 불러 회의를 진행했다. 당시 PAEC 의장은 이샤크 아메드였으나 해외에 있던 관계로 사말 무바라크만드 박사가 대신 회의에 참석했다. 무바라크만드는 1972년 아버지 부토 총리 시절의 핵개발 때부터 함께 해온 인물이다. 칸 연구소를 대표해서는 물론 칸 박사가 참석했다.

핵실험에서 배제되는 칸 박사

주요 의제는 두 가지였다. 핵실험을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PAEC와 KRL 중 어느 기관이 이를 담당하느냐가 논의 사안이었다. 살타즈 아지즈 재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내각 인사들은 핵실험 강행에 찬성했다. 아지즈는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게 되면 경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했다. PAEC와 KRL 둘 중 어느 곳이 핵실험을 주관하느냐는 점을 놓고 몇 시간의 논의가 이어졌다.

무바라크만드 박사는 PAEC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 핵실험 때 사용된 폭발규모에 이르기 위해서는 PAEC가 만든 폭탄 장치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0일 이내에 핵실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칸 박사도 10일 이내에 준비를 끝낼 수 있다고 했다. 칸 박사는 PAEC는 아버지 부토 시절부터 플루토늄으로 핵을 개발한다며 시간과 돈을 낭비한 부서라고 비판했다. 칸은 “우라늄을 농축하고 이를 원자폭탄으로 만들어 모의 실험에 성공한 곳은 KRL”이라고 했다. 또한 KRL이 가우리 미사일을 개발해 인도에 본때를 보여줬었다고 했다.

샤리프 총리는 결정을 보류했다. 우선 PAEC가 갖고 있는 이점(利點)이 있었다. 발루치스탄주 차가이에 이미 실험용 갱도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음날 미국의 협상팀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날 PAEC의 이샤크 아메드 의장은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해 총리를 찾아갔다. 그는 PAEC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꼭 성공해내겠다고 했다. 다음날인 1998년 5월 18일, 총리는 아메드에게 전화를 걸어 핵실험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칸 박사는 제항기르 카라마트 참모총장에게 항의를 했다. 카라마트는 칸 박사와의 갈등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칸 박사와 KRL 직원들이 실험을 참관할 수 있게끔 해줬다.

샤리프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의 많은 국민들은 압둘 카디르 칸을 ‘핵프로그램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신조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칸 박사가 이끄는 팀은 핵실험을 하는 데는 최적화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핵개발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참관을 허락했다”고 했다.

1988년 5월 19일 100여 명의 PAEC 기술진들은 발루치스탄주 차가이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갱도는 실험을 위해 개방되고 있었다. 실험에 필요한 물자와 다른 연구진들은 헬기와 트럭을 타고 차가이로 향했다. 미국은 아직까지 파키스탄의 핵실험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갱도 입구와 관련 시설들을 캔버스로 가렸다. 군수품의 이동 현황을 기록에서 모두 지웠다.

“핵실험 실패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PAEC의 무바라크만드 박사는 “실험 장소는 아도브 벽돌(注: 진흙과 짚으로 만들어서 굽지 않고 햇볕에 건조한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마을 같이 보이게끔 위장했다. 위성사진으로 시설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실험 직전 샤리프 총리가 자신에게 “선생님, 제발 실패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실패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샤리프는 핵실험이 실패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공격해 올 것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PAEC는 C-130 수송기에 폭탄 체계와 고농축 폭발물 HMX를 싣고 실험 지역으로 보냈다. 실험에 사용될 핵물질인 베릴륨/우라늄-238과 우라늄-235는 따로 운반됐다. F-16 전투기 4기가 수송기를 엄호했다. 관측소와 7마일 떨어진 실험장소 사이를 잇는 전선들이 서로 연결됐다. 5월 26일에는 갱도에 젖은 시멘트 6000포와 모래 1만 2000포가 채워졌다. 실험 준비는 완료됐다.

1998년 5월 27일, 샤리프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망시켜 미안하다고 했다. 오후 2시 30분, 실험 관계자들은 폭발 현장을 떠나 관측소로 이동했다. PAEC와 칸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사 버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누르도록 했다. 기폭장치 설계를 맡았던 젊은 과학자 무하마드 아샤드가 역할을 맡게 됐다.

오후 3시 16분. 아샤드는 “모든 영광을 알라에게”라고 말했다. 그는 발사를 위해 필요한 여섯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전력을 가동시키고 컴퓨터에서 발사 신호를 인식, 5기의 핵무기에 연결된 폭발물 HMX까지 전류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샤드가 버튼을 누른 30초 뒤, HMX가 터졌다. 우라늄 235를 감싸고 있던 베릴륨/우라늄-238 보호막에 진동이 전달됐다. 원자와 중성자가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갱도 인근의 라스코山이 크게 흔들렸다. 엄청난 먼지가 솟아올랐다. 짙은 회색이던 산바위가 하얗게 변했다. “알라는 위대하다(Allah-o-Akbar)”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다. 무바라크만드 박사는 “파키스탄의 기대수명은 세계 122위다. 문맹률은 162위다. 이제 우리는 핵무기 부문에서 세계 7위가 됐다”고 했다. 칸 박사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실험 주관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던 사람들이었지만 폭발 성공 이후엔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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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4, 06: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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