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라덴, 파키스탄 核과학자에게 “고농축 우라늄 확보” 실토…세상을 뒤흔든 9·11 테러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20) / 알 카에다의 ‘더티밤’ 테러 가능성을 우려하는 미국…“파키스탄은 우리 편에 설지 말지 결정하라”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빈 라덴과 파키스탄 核과학자의 밀회(密會)

미국 정보당국은 2001년 초중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가 미국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나설 것이란 여러 첩보를 입수했다. 미국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알 카에다의 은신처 등을 도청해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2001년 여름 파키스탄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는 파키스탄 정보국(ISI) 국장 마모드 아메드 장군을 만나 알 카에다 수장(首長)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 아프가니스탄은 1996년부터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세력인 탈레반에 의해 통치됐다. 빈 라덴은 탈레반과 이념과 사상을 공유하는 알 카에다라는 테러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의 아메드 ISI 국장 역시 탈레반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테닛 국장에게 빈 라덴 관련 정보를 넘길 마음이 없었다.

아메드 국장은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국에 숨겼다. 2001년 8월 무렵, ISI는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 출신 핵 과학자 두 명을 아프가니스탄의 비밀 은신처에서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술탄 바시루딘 마흐무드였다. 그는 1960년대에 영국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한 파키스탄의 인재(人材)였다. 그는 1972년 줄피카르 알리 부토 당시 총리의 핵개발 추진 계획 때부터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는 우라늄 농축 전문가였으며 20년 넘게 A. Q. 칸 박사의 연구실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했다. 1990년대 초, 마흐무드는 칸과 사이가 멀어졌고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PAEC)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PAEC가 운영하는 쿠샵 핵 시설의 설계를 도우며 그곳에서 근무했다.

마흐무드는 핵 분야에서는 권위를 인정받는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종교에 빠지게 됐다. 그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강조하는 탈레반의 통치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탈레반의 모델이 파키스탄에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8년 파키스탄의 핵실험 성공 이후에는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이슬람 전체의 자산’이라고 했다. 그는 칸 연구소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원심분리기와 농축 우라늄을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다 결국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빈 라덴을 만난 또 한 명의 파키스탄 과학자는 차우디리 압둘 마지드였다. 그 역시 유럽의 핵 연구시설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벨기에의 플루토늄 핵시설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전문적으로 핵물리학을 연구했다. 귀국한 후 그는 파키스탄핵과학기술연구소(PINSTECH)에서 근무했다. 그 역시 극단주의적인 이슬람 사상을 갖게 됐다. 그는 1996년에 은퇴했다.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마흐무드와 마지드는 2000년에 들어 아프가니스탄의 구호활동을 돕는 목적의 자선단체인 ‘무슬림커뮤니티재건(UTN)’을 설립했다. 이들은 2001년 8월 빈 라덴을 만났다. 빈 라덴은 이들에게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단체를 통해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는 이를 무기화하기 위해 두 과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흐무드와 마지드는 이 같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들은 우라늄 농축 및 핵 물리학 전문가였지 무기를 만드는 방법은 잘 알지 못했다. 빈 라덴은 이들을 아이만 알 자와히리라는 사람에게 소개했다. 알 자와히리는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알 카에다의 2인자였다. 최고의 전략가이자 이론가였다. 알 자와히리는 파키스탄 과학자들에게 농축 우라늄을 무기화할 수 있는 과학자의 연락처를 전달해달라고 했다.

아메드 ISI 국장은 이런 사실을 군부의 소식통을 통해 파악했다. UTN이라는 단체의 이사진에는 여러 파키스탄 군(軍) 출신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하미드 굴 전 ISI 국장도 명예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굴 장군은 빈 라덴과 두 명의 과학자가 만난 자리에 동석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는 칸 박사의 은퇴 이후 농축 우라늄을 저장한 캐니스터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을 파악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와 아프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 라덴과 파키스탄 과학자들의 접촉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면 미국에 큰 도움이 됐을 수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이런 사실을 모두 숨겼다.

9·11 테러와 미국의 對파키스탄 최후통첩  

얼마 후인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단체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 자살 테러를 가했다. 大폭발 테러로 약 90여개국 출신 3000여 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일었다.

사건이 발생한 날 아메드 ISI 국장은 공교롭게도 워싱턴에 있었다. 그는 테닛 CIA 국장과 만나 알 카에다 및 빈 라덴 소탕 작전에 파키스탄이 동참할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었다. 아메드는 파키스탄이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며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다 이런 세계적 테러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副장관은 다음날 아메드 국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아미티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 편이나 우리 편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오랫동안 도와온 것을 알고 있다고 압박했다. 파키스탄은 물라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 정권과 유일하게 외교관계를 체결한 국가였다. 아미티지는 “파키스탄은 우리 편에 설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지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메드는 소련과 맞서기 위해 미국이 ISI를 통해 오랫동안 아프간의 무장단체를 지원해온 것 역시 사실이 아니냐고 했다. 아미티지는 그의 말을 자르며 “역사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했다.

아미티지 부장관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만나 파키스탄에 무엇을 요구할지에 대한 리스트를 정리했다. 이날 밤 파월 장관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샤라프는 주지사들과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샤라프는 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했으나 파월은 지금 바로 회의를 끝내라고 했다. 파월 역시 “우리 편에 서거나 우리의 반대편에 서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했다. 무샤라프는 미국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그는 훗날 “최후통첩과 같았다. 나는 그에게 파키스탄은 테러와 싸우는 미국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어떤 것도 협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다음날 아메드는 다시 한 번 아미티지를 만났다. 아미티지는 미국이 파키스탄에 요구하는 사항들을 설명했다. 모든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막을 것, 미국이 파키스탄 상공에서 공군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 탈레반에 제공하는 모든 연료와 원조·군수품을 끊을 것,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 카에다 조직을 파괴하는 데 있어 미국을 도울 것 등을 요구했다. 파월과 아미티지는 파키스탄에 대한 요구사항에 A. Q. 칸 박사 문제를 포함할지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테러조직 소탕에 집중해야지 핵확산 문제로 전선(戰線)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메드 ISI 국장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메드는 아미티지가 파키스탄이 미국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돌아갈 정도의 폭탄 공격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파키스탄에 옵션은 없었다.

고민하는 파키스탄

아메드 국장이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뒤 무샤라프 주재의 참모회의가 열렸다. 아메드 국장과 우스마니 참모차장은 미국에 도움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의 훗날 증언에 따르면 아메드는 “더러운 일은 미국이 다 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적(敵)은 우리의 동지다”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입장에서는 미국이 1990년에 원조를 끊은 것에 큰 적개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도움을 원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무샤라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했다. “파키스탄은 수십 년 동안 테러에 휩쓸려왔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미국 역시 ‘피의 맛’에 적응될 필요가 있다.”

무샤라프는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 도움을 줌으로써 파키스탄이 받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수 있는 장소를 내어줄 수 있는 곳은 파키스탄뿐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있는 지역에 침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곳도 파키스탄뿐이었다. 무샤라프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샤라프는 그렇게 미국의 편에 서게 됐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를 일부 해제했다. 1998년 핵실험과 1999년 무샤라프 쿠데타에 따른 제재가 모두 없어졌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소탕 작전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26억 4000만 달러의 군사 및 민간 원조를 받게 됐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국내정치에도 최대한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무샤라프가 정식 선거 없이 그의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장하겠다는 방침도 인정하겠다고 했다.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고려해 논란이 되던 ‘핵확산’ 문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아리 플래셔 백악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파키스탄과 북한의 커넥션에 대해 더는 우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9월 11일 이후 많은 국가들의 행동이 바뀌게 됐다고 했다. 9∙11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는 뉘앙스였다. 파키스탄이 리비아와 북한에 핵기술을 전달했다는 테닛 CIA 국장의 과거 브리핑 내용은 이미 잊혔다. 미국은 1981년 소련이 아프간에 침공했을 때처럼 파키스탄의 모든 어두운 측면을 무시,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했다. 

2001년 10월 7일. 미국과 영국군은 이른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에 돌입했다. 알 카에다의 훈련시설에 크루즈 미사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아프간의 탈레반에게 더 이상은 테러단체를 보호해주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파키스탄을 걱정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9∙11 테러 당시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납치해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모하메드 아타라는 사람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 그의 계좌에는 아랍에미리트연방의 은행으로부터 송금된 10만 달러가 확인됐다. 돈을 보낸 사람은 아메드 우마르 셰이크로 전직 파키스탄 군인 출신으로서 ISI의 중요한 정보원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항공 여객기를 납치,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다 붙잡혀 인도에서 징역을 살았다. 그는 1999년에 풀려났다. 이들은 출소 이후 파키스탄 정보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메드 ISI 국장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됐다. 아메드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요원들을 아프간에 보내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만나게 했다. 그는 빈 라덴을 넘기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취재한 언론들은 아메드의 요원들은 사전에 미국의 공격이 있을 것이란 소식을 알려주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고 보도했다. 무샤라프는 아메드를 경질했다. 반기(叛旗)를 들 가능성이 있는 장군들 역시 해임시켰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을 정보당국과 군부 핵심 위치에 앉혔다. 무샤라프는 권력을 공고히 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상황은 피한 것으로 보였다.

미국, 추가 ‘더티밤’ 테러 첩보에 충격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확산 문제를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2001년 10월 11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일일 정보보고서에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공개된 서류 등을 토대로 당시 보고 내용을 정리했다.

<‘드래곤플라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CIA 요원이 교신 감청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알 카에다 테러조직이 미국에 10킬로톤 규모의 핵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는 내용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폭탄이 실린) 조그마한 기기가 미니밴 뒷자리에 실린 채 이미 맨하튼을 돌아다니고 있다. 타임스퀘어와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내 중심부에서 폭탄이 터질 경우 수천만 도(度)의 (뜨거운) 화염이 반경 0.5마일에 있는 인구 50만 명을 삼키게 될 것이다. 또한 구겐하임 박물관을 비롯한 모든 명소가 파괴될 것이다.>

‘드래곤플라이’가 입수한 정보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할 추가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CIA는 1992년부터 빈 라덴이 핵물질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빈 라덴은 파키스탄 등을 통해 핵물질을 구하려 한 바 있다. 정보당국은 9∙11테러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해 3000명의 목숨을 잃게 됐다는 일종의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번에는 선제적인 대응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수백 명의 연방 공무원들과 함께 워싱턴을 떠나 비밀장소로 이동할 것을 명(命) 받았다. 이들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하게 되면 비밀장소에서 대체 정부 역할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핵 감시 전문 요원들이 뉴욕에 투입됐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을 비롯한 민간에는 관련 정보를 모두 숨겼다. 미국 정부는 관련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발생할 2차 주식시장 충격 및 국민들의 혼란 사태를 최소화하려 했다.

결국 ‘드래곤플라이’의 정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알 카에다가 핵물질을 구입하려 한 정황이 파악된 이상 이런 공포스러운 사건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었다. 10월 중순 조지 테닛 CIA 국장은 비밀리에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미국은 9∙11 이전 빈 라덴을 만났던 두 명의 파키스탄 과학자를 우선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관련 사실을 어느정도 인지했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를 사전에 미국에 알리지 않았었다. 빈 라덴을 만났던 두 과학자 술탄 바시루딘 마흐무드와 차우디리 압둘 마지드는 칸 연구소가 운영하는 퇴직자 전용 시설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테닛 CIA 국장의 압박

테닛은 무샤라프를 만나 행동에 나서라고 압박했다. 무샤라프는 이에 동의, 2001년 10월 23일 이들을 체포했다. CIA와 ISI는 공동으로 이들을 조사했다. 마흐무드와 마지드는 처음에는 모두 발뺌했다. 이들은 빈 라덴을 만난 적도 없고 알 카에다와 접촉한 적도 없다고 했다. 수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회고록 ‘폭풍의 한복판에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파키스탄) UTN 관계자들은 모두 잘못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파키스탄 당국은 그들을 적절하게 격리해서 신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매일 조사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은 UTN 관계자들을 사회적 지위에 맞게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들은 파키스탄에 커다란 공헌을 한 과학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수사에 진전이 없는 것을 확인한 테닛은 무샤라프를 직접 만나 압박했다. 다시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나는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한 다음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단히 중대한 첩보를 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 나는 오사마 빈 라덴 및 알자와히리와 UTN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캠프 파이어 모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각하, 파키스탄이 빈 라덴의 핵무기 입수를 돕고 있는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질 경우, 미국에서 터져 나올 분노를 상상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장치가 사용될 경우 미국 국민의 분노는 누구든 알 카에다를 도와준 사람에게 집중될 것입니다.”

무샤라프는 신중하게 내 말을 검토했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테닛 국장, 그 사람들은 지금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그런 무기를 보유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전문가들은 그것이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다고 확언해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보좌관들 중에는 ‘죽음의 核商人(핵상인)’ A. Q. 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점에서 토의 주제를 칸 쪽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문제는 다음에 토의할 수 있었다. 당면 과제는 UTN이었고, 칸은 다른 문제였다.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나는 파키스탄 정부가 신속하게 시행해야 할 일련의 긴급조치 항목을 열거했다. 나는 파키스탄 군부 안에 있는 특정 그룹과 정보기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UTN에 대한 더 철저한 조사와 함께 파키스탄은 면밀하게 핵물질의 在庫(재고)조사를 할 시기가 되었다고 건의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각하를 믿을 수 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CIA 수사에 협조하는 척만 하는 파키스탄

테닛의 압박은 성공했다. 파키스탄은 미국 수사팀과 함께 UTN 간부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흐무드는 계속 거짓말탐지기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나왔다. 마흐무드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린 건 그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들 아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 자랑을 했다. 그는 빈 라덴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핵폭탄 같은 것들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결국 마흐무드는 빈 라덴을 만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당시 논의된 내용은 학술적인 측면에 그쳤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사실일 수도 있다. 이들은 핵 전문가였지 빈 라덴이 원하는 폭탄 제조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마흐무드와 마지드가 파키스탄 핵프로그램에 관여하는 기술진들과 여러 관계를 맺어왔고 이들을 통해 기밀 사안을 빼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은퇴 후 UTN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어 탈레반과 알 카에다를 후원했다. 테닛 국장은 UTN의 이사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모하마드 나심과 후마윤 니아즈 등의 과학자들 역시 알 카에다와 접촉한 사실을 파악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 역시 핵심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무하마드 알리 무크타르와 술래이만 아사드를 조사하고 싶어했다. 단순 핵 전문가가 아니라 이를 무기화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무크타르는 핵물리학 박사로 PAEC에서 무기 프로그램 전문가로 활동했다. 아사드는 KRL에서 무기 설계를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ISI와 CIA의 조사를 피해 사라졌다. 미국은 이 두 과학자가 빈 라덴에게 핵물질을 무기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라며 파키스탄을 압박했다. 무샤라프는 이들이 현재 최고 기밀의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해외를 간 상황이라 귀국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현재 버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뉴욕타임스 등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미국은 전 ISI 국장이던 하미드 굴 장군을 조사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은 굴이 물라 오마르 탈레반 지도자와 만남을 가졌고 빈 라덴과 두 명의 파키스탄 과학자가 만나는 자리에 동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굴 역시 무샤라프의 도움을 받아 CIA의 조사를 피하게 됐다. 언론들은 무샤라프가 군부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굴 장군을 소환하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UTN-알 카에다-파키스탄의 연결고리

2001년 11월 13일 미국 중심의 연합군은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입성(入城)했다. 카불에 들어간 서방세계의 정보부대와 기자들은 알 카에다가 챙기지 못하고 놓고 간 여러 자료들을 찾아냈다. 폭탄제조법, 각종 무기의 공식 매뉴얼들이 발견됐다.

카불에 도착한 CIA는 마흐무드가 운영하는 자선단체 UTN의 본부를 찾아냈다. CIA는 UTN 본부에서 수백 개의 문서를 찾아냈다. 마흐무드의 주장대로 인도주의 및 인프라 개발을 위한 문서들도 많이 발견됐다. 도로 공사 방법, 밀가루 공장 건설 방법, 학생들을 위한 교육자재가 보관돼 있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알 카에다가 ‘대량살상무기’를 취득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도 여럿 발견됐다고 했다. 탄저균 운반체계의 설계도와 방독면, 각종 화학물질이 담긴 유리병이 발견됐다. 헬륨 가스라고 적혀 있는 컨테이너도 찾아냈다. 풍선에 탄저균을 넣고 공격하려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파키스탄에서 활동하는 무장단체와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자료도 발견됐다. UTN과 알 카에다, 그리고 파키스탄 내의 무장단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CIA와 ISI는 카불에서 찾은 증거들을 마흐무드와 마지드에게 들이밀었다. 이들은 알 카에다 관계자들과 핵무기 및 생화학 무기와 관련해 논의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UTN을 테러지원단체로 지정했다. 마흐무드와 마지드 등 UTN 관계자들의 자산은 모두 동결됐다.

파키스탄은 미국이 과잉대응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마흐무드와 마지드에게 테러 혐의를 물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들은 핵무기 및 생화학무기 기술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의 자산과 수십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런 기술 이전은 하루 아침에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이 두 명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정상적인 국가 對 국가간의 교류에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알 카에다가 원한 것은 A. Q. 칸 박사가 북한과 리비아 등에 핵기술을 전달할 때처럼 조심스럽고 전문적으로 진행되는 방법이 아니었다. 알 카에다가 원한 것은 핵물질 일부만을 구해 도시 하나를 방사능에 오염시키는 ‘더티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판단한 미국으로서는 파키스탄이 진심으로 미국을 돕고 있는지 의심이 들게 됐다. 파키스탄 과학자들에 대한 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무샤라프는 결국 마흐무드나 마지드를 재판에 넘기지 않았다. 또한 A. Q. 칸을 불러 조사하지도 않았다. 파키스탄 전문가들은 무샤라프가 이들 과학자들이 파키스탄의 비밀 핵 활동을 모두 공개하는 상황이 닥칠 것을 우려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분석했다.

“알 카에다가 ‘더티밤’ 제조법을 알고 있다”

2001년 말, CIA는 카불 와지르아크바르칸 지역에 위치한 아부 알마스리의 집을 찾아냈다. 이집트 출신의 화학전문가인 그는 알 카에다의 대량살상무기 책임자였다. CIA는 그의 집에서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폭탄 설계도를 비롯해 서방의 과학자들이 성공해낸 ‘더티밤’ 제조법을 찾아냈다. 이 시설에서 확인된 자료를 분석한 IAEA 조사단은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수준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알마스리는 이런 내용들을 알 카에다 요원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보였다.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자 미국은 공개적으로 알 카에다의 위험성을 대중에 알렸다. 럼스펠드 장관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미 일부의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이 그들의 증오를 홀로코스트로 바꿔버릴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찾고 있다”고 유엔 연설에서 밝혔다.

2002년 봄에 들어 알 카에다는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공개하며 또 한 번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알 카에다의 3인자로 알려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알자지라TV의 요스리 푸다 기자와 비밀 장소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푸다 기자는 눈이 가려진 채 차를 타고 비밀장소로 이동해 모하메드를 만났다. 모하메드는 9∙11 테러 계획을 총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미국의 수배명단에 올라 있었다. 모하메드는 “9∙11 테러의 기존 목표는 핵시설 몇 곳이었다”고 했다. “우선은 핵시설을 타깃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푸다 기자는 ‘우선은’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했다. 모하메드는 ‘우선은의 의미는 우선은’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모하메드의 이런 발언에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실제로 미국에 있는 핵시설을 공격하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실제로 더티밤 등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찾아낸 자료들을 보면 알 카에다가 어느 정도 수준의 핵물질을 결합한 폭탄을 사용할 역량을 갖췄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2003년 3월 파키스탄에서 ISI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CIA에 넘겨져 텍사스주로 갔다가 관타나모 감옥으로 이송됐다.

‘더티밤’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계속 커져만 갔다. 알 카에다에서 작전 계획을 점검하고 조달책 역할을 했던 아부 주바이다가 2002년 3월 28일 파키스탄 동부 페샤와르에서 체포됐다. 그는 그의 존재를 숨기지도 않은 채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미국은 테러가 일어나기 전인 2000년 1월부터 그를 체포하려 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정보당국은 주바이다의 핸드폰 통화 내용을 추적하다 그의 주거지를 파악했다. 그는 미국의 수감시설로 이송돼 FBI의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그는 ‘알 카에다가 더티밤을 생산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계속)

관련기사

[ 2020-08-27, 06: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