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공개된 칸 박사의 진술서 全文…“북한은 내게 핵무기를 보여줬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26) / 對국민 사과 내용과 정반대인 칸의 진술서는 비밀에 부쳐졌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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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 칸은 2004년 1월 파키스탄 정보당국 (ISI)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약 10쪽 분량의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는 한 달 뒤 TV에 출연해 對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핵확산에 정부의 개입은 없었다며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칸은 ISI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핵확산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핵개발을 했다는 사실, 북한과 리비아, 이란에 핵기술을 이전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도 많았다. 하나의 예는 북한이 1950년대에 러시아로부터 200kg 상당의 플루토늄을 지원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이미 완성된 핵무기를 보여줬다고도 했다. 그는 이 진술서를 통해 자신의 행동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강조하려 하는 것 같다. 전문가들은 칸 박사가 자신이 핵확산의 주범(主犯)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본다. 

문서는 영국인 기자 출신인 시몬 헨더슨이 2011년 폭스뉴스에 전달해 공개됐다. 헨더슨은 오랫동안 칸과 접촉해온 인물이다. 아직까지도 칸과 접촉이 닿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헨더슨은 칸의 진술서와 칸이 부인에게 쓴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는 칸이 수사를 받기 전인 2003년 12월에 작성됐다. 칸은 파키스탄 정부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경우 대처할 방안을 설명했다. 정부가 핵확산에 개입했다는 증거 일부와 연락을 취할 기자의 이름을 적었다. 7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역사적 문서들이다. 진술서와 편지 전문(全文)을 번역해 차례로 소개한다.

진술서 전문(全文)

<나는 1971년 12월, 파키스탄 군대가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항복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장면을 벨기에에서 봤다. 당시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막 제출한 뒤였다. 파키스탄 장교와 병사들이 손을 등 뒤로 묶이고 머리를 삭발 당하는 모습, 인도 군인들이 이들을 가축 떼처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는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나는 평생 이를 잊지 못할 것이다.

1974년 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FDO라는 회사에서 선임과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문으로 했다. 이는 네덜란드와 독일, 영국이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억 달러를 써가며 완성한 가장 발달되고 가장 복잡한 기술이었다. 지금까지도 우라늄 농축과 관련해서는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1974년 5월 18일, 인도는 처음으로 핵폭발 실험을 했다. 파키스탄의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을 주는 행동이었다. 나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1974년 12월 20일 나는 파키스탄을 잠시 방문해 부토 총리에게 (핵무기)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나는 파키스탄이 핵역량을 갖추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PAEC)의 무니르 아메드 칸 위원장에게도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그런 뒤 나는 네덜란드로 다시 돌아갔다. 1975년 12월 21일 나는 연휴를 맞아 파키스탄을 다시 찾았다. 지난 1년간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진전 상황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나는 이 문제를 총리에게 알렸다. 그는 네덜란드 FDO에 사표를 내고 파키스탄에 남아줄 것을 내게 요구했다. 이는 나와 가족에게 있어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조국 파키스탄에 남기로 결정했다. 1976년 6월 PAEC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됐다. 나는 6개월간 월급을 받지 않으며 근무했다. 당시 근무상황은 참담하고 구역질이 났다. 이후 월급으로 3000루피(약 300달러)를 받게 됐다.

PAEC 밑에서 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부토 총리는 또 다른 협력위원회를 만들어 이 문제를 PAEC와 별개로 진행하도록 했다. 위원장은 A. G. M. 카지가 맡았고 아가 샤히 외무장관과 굴람 이샤크 칸 국방장관이 위원으로 임명됐다. 우리는 총리의 직속 기관으로 일하게 됐다.

내가 수십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기술과 경험, 노트를 파키스탄에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지식과 경험이 없었다면 파키스탄은 절대로, 절대로 핵무장 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추진력과 지식, 그리고 성과 덕택에 파키스탄이 지금 꼿꼿이 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일을 구상하고 시설을 만들었으며 필요한 장비와 기기를 수입하는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낸 과정은 파키스탄 역사의 일부가 됐다. 나는 이 프로젝트의 모든 부문을 직접 감독했다.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들에는 내가 직접 설계도와 세부 특징을 정리해 보내줬다. 이런 고급 기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수백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직접 훈련시켰다. 우리의 작업 속도와 우리가 일궈낸 성과는 우리의 숙적(宿敵)과 반대세력들, 그리고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다. 서방세계는 자전거 체인이나 바느질용 바늘도 만들지 못하는 제3국가가 가장 빠른 기간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핵기술을 완성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궈낸 가장 선진화된 기술 덕에 우리는 중국과 역사적인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중국에 도움을 줬다. 중국은 이에 따른 대가로 무니르 아메드 칸이 몇 년 동안 해내지 못했던 여러 프로젝트에 도움을 줬다. 육불화우라늄(UF6), 재처리기술, 원자로 등이 그 예다.

1984년에 들어 우리는 여러 차례의 모의실험에 성공하고 30개의 핵무기에 필요한 부품을 모두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중국에 개인적으로 부탁을 했다. 중국 원자력기술 담당 장관은 우리에게 50kg 상당의 무기화할 수 있는 농축 우라늄을 선물해줬다. 이는 핵무기 2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선물은 중국이 나로부터 받게 된 농축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나는 인도의 핵협박에 맞서고 조국에 대한 안보 위협을 없애기 위해 중국에 이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개발 작업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나는 주 7일, 매일 14시간에서 16시간을 일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각종 수출 규제와 싸우고 제대로 훈련된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1988년 8월 지아 대통령이 비극적인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선거가 치러졌고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가 됐다. 이미티아즈 장군이 핵프로그램을 감독하게 됐다.

1985년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에 동조하고 사람들이 옷 입는 방법이 바뀐 것을 부러워하는 파키스탄인들이 많았다. (핵시설이 있던) 카후타에는 시아파 근무자들이 많았다. 하니프 카릴이라는 고위급 직원이 있었는데 그는 이란 대사인 무사비와 접촉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그에게 행동을 조심하라며 주의를 줬다.

1989년인가 1990년, 베그 참모총장은 약 10년간의 국방비를 받아내는 대가로 이란에 일부 무기와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란 육군참모총장이던 샴카니가 비행기를 타고 이슬라마바드에 와서 무기와 각종 서류를 가져갔다. 베그 장군은 베나지르 부토 총리와 이미티아즈 장군에게 많은 압력을 가했다. 그가 이란과 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도록 압박한 것이다. 이미티아즈 장군은 하시미 박사에게 연락해 원심분리기 부품 일부와 설계도 등을 이란에 전달하라고 했다. 당시 나는 현장에 없을 때였다. 내가 다시 현장에 복귀하자 이미티아즈 장군은 구식 원심분리기 P-1 두 개의 부품과 더 이상 쓰지 않는 장비들을 포장하도록 했다. 설계도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설계도만 가지고는 어려운 우라늄 농축 기술을 완성할 수 없었다. 부품과 설계도는 니아지 박사에게 전달됐다. 알다시피 니아지 박사는 베나지르 부토와 이미티아즈 장군의 측근이었다.

1994년인가 1995년 언젠가로 기억한다. 니아지 박사는 내게 이란 과학자들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중국을 거쳐 두바이, 이란으로 향하는 길에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들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카라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란 과학자들과 한 시간 반 정도 만났다. 나는 이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들은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이들은 핵프로그램에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며 내가 직접 이란을 방문하거나 전문가팀을 몇 주 정도 이란에 보내줄 수 있겠냐고 했다. 나는 이런 형태의 접촉은 불가능하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들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했다. 나는 세상에 공개돼 있는 전문 과학 서적에 관련 질문에 대한 답이 다 있다고 했다. 이들은 공개된 과학 서적들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내용들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아 장군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 베나지르와 그의 가족, 이미티아즈 장군과 니아지 박사 등은 리비아의 카다피 대령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카다피 대령은 고(故)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핵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2억 달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토 총리의 대변인을 맡았던 칼리드 하산이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는 BBC의 ‘프로젝트 706-이슬람 폭탄’이라는 방송에서 이런 사실을 털어놨다. 나는 설계도와 부품이 실렸던 상자 중 하나는 이란에 넘어갔고 하나는 리비아로 갔다고 생각한다.

니아지 박사는 두바이와 트리폴리, 런던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두바이에서 파룩이라는 스리랑카인과 친해졌다. 그는 영국인 피터를 통해 파룩을 알게 됐다. 니아지는 파룩을 통해 리비아와 접촉한 것 같다. 그는 내가 터키를 방문했을 때 리비아 측과 만날 수 있게 주선하는 일을 파룩에게 시켰다.

나는 이스탄불에 가서 헬링브루너 박사와 러치, 루에그 등과 만났다(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파룩은 내게 니아지 박사의 친구가 근처에 있는 쉐라톤 호텔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해줬다.  우리는 당시 딜선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신을 ‘마기드’라고 소개한 통통하고 피부가 짙은 남성을 만났다. 그는 우라늄 농축 분야의 연구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하려 한다며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했다. 나는 이들에게는 훈련된 인력이나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개발을 할 수 있다며 실험실에서 각종 실험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기술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약 30분 뒤 만남은 끝났다. 그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파룩과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는 기술 전문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몇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터키와 스위스의 부품회사들과 접촉하기 위해 터키로 향한 적이 있었다. 파룩의 조카인 타히르는 그의 삼촌이 리비아에서 온 신사 한 명과 전화통화를 했고 그가 우리를 만나러 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신사를 타히르와 함께 만났다. 그는 평범한 몸매에 머리가 살짝 벗겨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엔지니어라고 소개했으며 이름은 마푸즈(마투크)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진전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지금부터 새롭게 프로그램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작은 연구시설 규모에서부터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핵) 시설은 큰 곳에 지어야 한다고 했다. 각종 시설이 들어서야 하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지하에 시설을 지을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큰 시설을 지하에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작은 시설에서도 핵개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낙타나 염소 농장 규모의 땅만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우선 많은 사람들을 해외로 보내 학위를 받고 훈련을 받고 오게 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에 개발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는 이런 조언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로부터 약 4~5년 후, 두바이에 간 적이 있다. 타히르는 저녁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마푸즈의 가족 약 10명이 왔다. 그는 아직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못했다며 외국에서 물건을 납품해줄 회사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관련 부품과 장비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두바이와 다른 나라를 거쳐서 물건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냥 듣기만 했다. 나는 이들이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 같다고 혼자서 확신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전념하는 마음, 그리고 잘 훈련된 인력이었다. 이들은 둘 다 갖추지 못했다. 

나는 4~5년 사이 이 신사를 타히르의 집에서 한 차례인가 두 차례 더 만났다. 그는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하거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타히르와 사업을 하며 겪는 계약금 지불 문제 등을 가끔 언급했다. 타히르는 마푸즈가 일부 돈을 개인용도로 쓰기 위해 항상 빼돌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푸즈 곁에는 카림이라는 젊은 남성이 항상 같이 있었다. 내가 카림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카사블랑카에서 한 30분 동안 커피를 마실 때였다. 당시 나는 아프리카 팀북투로 가기 전이었다. 타히르는 카림이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했다. 카림은 부품 납품업체들로부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타히르는 카림에게 납품업체에 돈을 최대한 빨리 전달하라고 했다. 마푸즈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내게 알려주거나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타히르가 그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납품회사와 고객 간의 거래였다. 납품회사는 우리가 전달한 설계도를 모두 갖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 이를 수정하기도 하고 가격을 새롭게 책정해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리비아 측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느낀 점은 이들이 장비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우라늄 농축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리비아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들 시설에 대한 자료를 본 적도 없다. 리비아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주 초보적인 작업조차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서방에 있는 납품회사들은 각종 부품을 제공했다. 말레이시아의 한 공장은 정유 관련 제품을 생산했다. 이는 아마드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스위스 엔지니어 한 명이 이 공장에서 필요한 부품들을 만들었다. 이 부품들이 실린 선박이 이탈리아 인근에서 나포됐다. 여기에 실렸던 제품들은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과 칸 연구소(KRL)는 이와 관련해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타히르는 자신의 공장에서 근무할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다. 그는 은퇴했거나 은퇴할 예정인 엔지니어를 찾는다고 했다. KRL에 근무하던 파룩은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나시무딘이라는 엔지니어의 자녀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나는 이들에게 이력서를 말레이시아 쪽에 보내도록 했다. 나시무딘은 말레이시아를 직접 방문했으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는 중동 다른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파룩은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상관이 은퇴를 하면 승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파키스탄에 남기로 했다. 이들은 모두 말레이시아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리비아 측이 우리의 이름이나 서명이 담긴 문서 및 설계도를 갖고 있다면 이는 스리랑카인 파룩이나 타히르, 혹은 다른 납품회사들로부터 구한 것일 것이다.

타히르가 말레이시아, 미국, 그리고 영국 정부 당국자들의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들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수사관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거짓말임에도 말이다.

나는 KRL 어느 누구에게도 리비아 쪽에 핵물질을 보내도록 지시한 적이 없다. 2톤 상당의 기체 핵물질을 카후타 핵시설에서 빼내 리비아로 보내는 것이 발각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가 물질 재고를 기록한 문서는 완벽하게 작성돼 있다. 이 정도의 핵물질이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은 200~300kg 상당의 무기화가 가능한 우라늄이 사라지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을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내가 리비아의 여권을 받으려 했다는 주장도 말도 안 된다. 나는 유럽에서 15년을 살았고 독일이나 네덜란드, 벨기에로부터 시민권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파키스탄 여권을 유지하기로 했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는 나에게 사우디 여권을 내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 아랍에미리트 측에서도 시민권을 주겠다고 했다. 고급 빌라도 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 역시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이런 매력적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파키스탄에서 살며 일해왔다.

이란은 부품과 장비를 직접 구입하고 제작하려 했다. 이란과 마지막으로 접촉한 것은 벌써 몇 년 됐다. 약 10년 전 타히르는 P-1 원심분리기를 요청했다. 정확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사용했으나 더는 사용하지 않는 부품(약 200개)과 새롭게 만들어진 부품이 타히르에게 전달됐다. 타히르는 이를 이란 측에 넘긴 것 같다. 원심분리기 용기나 주입 체계 등 중요 부품은 없었다. 이런 중요 부품이 없으면 나머지 장비는 거의 의미가 없다. 또한 보내진 부품들은 오래된 것들이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부품들로 아무리 잘 해봐야 (원심분리기) 장비 몇 개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성공한다고 해도 (우라늄 농축을 위해) 필요한 수준의 회전 속도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최고 회전 속도(6만3000rpm)를 내기 위해서는 이 장비를 매우 정교하게 조립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미티아즈 장군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 부품이 전달되도록 했다. 이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양국의 우정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란은 15년 동안 어떤 진전도 이뤄내지 못했다. 이는 핵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술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란은 야당 세력의 배신 등으로 인해 진전을 이뤄내는 데 실패했다. 그런 이란이 우리를 지목해 책임을 우리 쪽에 떠넘기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매우 안타깝다. 이란은 파키스탄 측 관계자 이름이나 소식통을 공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이란 대사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했다.

이란이나 리비아에 일부 지원을 제공한 것은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들이 핵기술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들은 필요한 인프라 시설이나 훈련된 기술자들, 그리고 기술적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리와 참모총장의 승인 하에 북한과 계약이 체결됐다. 1500km 사거리의 미사일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5일간 머물렀다. 미안 무쉬타크 장군, 소할리 아메드 칸 제독, 카지 대령, 미르자 박사, 나심 칸 등이 대표단에 포함됐다. 얼마 후 북한 쪽에서도 대표단을 파키스탄에 보내와 계약이 체결됐다. 북한이 물건을 약속대로 보내오면 북한 대표단이 카후타 핵시설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93년인가 1994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북한 측은 미사일과 관련해 우리 측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교육시켰다. 북한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제조 시설에서 주로 근무했다. 북한은 이 기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부 엔지니어들은 회전자 튜브 등을 제작하는 공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P-2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부품들을 만드는 곳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코카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코카르는 액체연료 로켓 엔진을 만들고 있었고 북한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북한인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코카르가 일부 원심분리기 기술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줬을 가능성은 있다.

1996년 즈음 미사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을 때 북한으로 보내야 하는 돈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부의 어떤 사람이 북한 측의 강 장군(注: 강태윤 참사)에게 연락을 해 지아우딘 장군에게 돈을 주면 북한이 받아야 할 돈이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강 장군은 그에게 50만 달러를 가방에 담아 전달했다. 카라맛 참모총장은 이에 대해 알게 됐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강 장군과 만나 육군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자금으로 쓸 수 있게 돈을 달라고 하라고 했다. 그는 이 돈을 받으면 북한에 줄 돈이 집행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몇 번 전화를 걸어 독촉하기도 했다. 나는 강 장군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그는 50만 달러를 현금으로 내게 건넸다. 나는 이를 직접 카라맛 장군에게 전달했다. 카라맛은 돈이 더 필요하다며 강 장군에게 또 연락을 하라고 했다. 강 장군은 며칠 뒤 자신의 상관이 250만 달러를 더 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이에 따른 대가로 북한의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와달라고 했다. 북한은 이미 원자로를 갖고 있었고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강 장군의 상관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일부 무기를 개발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얼마 뒤인 1950년대 중반에 러시아로부터 200kg 상당의 플루토늄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미르자 박사와 내게 완성된 핵무기를 보여줬다. 우리 것보다 기술적으로 더 뛰어났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 기술이) 원자로 가동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디퓨전’ 방식보다 10분의 1의 돈을 들여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기화할 수 있는 수준의 우라늄 농축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또한 무기화에 필요한 ‘캐스캐이드’ 등의 설계도를 요구하거나 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카라맛 장군에게 알려줬다. 그는 내게 그렇게 추진하라고 했다. 

나는 부하들에게 구식 P-1 원심분리기 20개를 준비해 북한에 보내도록 했다. 북한은 이미 파키스탄 시설에서 근무를 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P-2 원심분리기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P-2 원심분리기 4개를 요청했다. 나는 이를 카라맛 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그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카라맛 장군의 관사를 찾아가 250만 달러를 전달했다. 카후타 시설의 선임 엔지니어들이 북한의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북한 사람들과 매일 만나 이곳 저곳을 보여주고 기술과 관련한 토론을 했다. 나는 이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행정적 업무 처리를 위해 3~4시간 정도만 카후타 시설에 갔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나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북한은 (원심분리기) 장비들을 자신들의 비행기에 직접 실어갔다. 이 비행기를 통해 미사일 부품이 파키스탄에 전달됐다. 보안요원들이 파키스탄으로 들어오고 파키스탄을 떠나는 모든 화물을 검사했다. 미르자 박사와 나심 칸 역시 각종 소프트웨어 체계를 만들어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은 육불화우라늄(UF6) 일부를 가져와 분석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를 돌려본 결과 우라늄 농축을 할 정도로 깨끗하지 않았다. 북한은 육불화우라늄 가스 일부를 요구했다. 자신들 것과 비교를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를 그들에게 줬다. 이 가스는 기술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 누구나 해외에서 이 정도의 샘플을 구입할 수 있었다. 파이프에서 흐르는 기체나 액체의 속도를 측정하는 유량계(流量計) 샘플도 하나 전달됐다. 유량계는 UF6를 사용할 때 필요한 장비다. 파키스탄은 이를 수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유럽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장비였다. 북한은 이에 대한 대가로 우리에게 크라이트론(기폭장치 고속 스위치)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는 수입이 금지된 부품이었다. 이는 핵무기를 폭파시킬 때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술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몇 년째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은 이들을 당장 북한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들은 3일 뒤에 북한으로 갔다. 그후 이들과 접촉한 적은 없다.

나는 2001년 3월 31일 KRL을 떠났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일부 서류들과 자료들이 파기됐다는 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 나는 훗날 파키스탄이 북한에 기술이나 장비를 이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는 서류와 기록들을 보관하지 말도록 지시했을 뿐이다. 당시 파키스탄을 상대로 한 여러 로비 공작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서류들이 잘못된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파키스탄을 공격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봤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다.

나는 파키스탄 국익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으로 핵무기 확산이라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국가는 파키스탄을 도와왔던 나라들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지만 나는 절대로, 절대로 이란이나 리비아 영토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1989년 초 베그 장군은 내게 이란의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이란이 핵역량을 갖추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란이 핵역량을 갖추면 파키스탄을 미국이나 다른 서방국가로부터 보호하는 방패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 국가가 파키스탄에 대해 짓궂은, 혹은 모험적인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지시가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티아즈 장군은 내게 필요한 일들을 하라고 했고 나는 총리로부터 직접 승인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고 했다.

리비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니아지 박사는 총리의 승인을 받았다고 내게 알려줬다. 나는 이런 승인을 받고 필요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2003년 12월 10일 칸이 부인 헨리에게 쓴 편지 全文

<여보,

만약 정부가 내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면 강경하게 대응해주십시오.

(1)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중국과 15년 동안 협력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우리는 중국 한중(漢中, 서안(西安)에서 서남쪽으로 250km)에 원심분리기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C-130 수송기에 장비와 인버터, 밸브, 유량계, 압력계 등을 실어 보냈습니다. 우리 연구팀은 몇 주간 그곳에 지냈고 중국 측도 이쪽에 와서 몇 주간을 지냈습니다.

(2) 중국은 우리에게 핵무기 관련 설계도와 50kg 농축 우라늄, 10톤 상당의 UF6(천연)와 5톤의 UF6(3%)를 줬습니다. 중국은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PAEC)가 UF6 시설을 짓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플루토늄과 재처리시설을 위한 원자로용이었습니다.

(3) 베나지르 부토 총리와 베그 장군의 지시에 따라 이미티아즈 장군은 하시미(注: 칸의 동료)와 내게 설계도와 일부 부품을 이란에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직접 접촉한 적이 없었고 누구를 직접 보내거나 누가 우리를 방문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납품회사들의 이름과 주소들도 이란에 전달됐습니다. 이는 니아지 박사(注: 부토의 치과의사이자 측근)를 통해 전달됐습니다.  분명히 이를 통해 돈을 받았을 것입니다(100만 달러).

(4) 카라맛 장군은 나로부터 300만 달러를 전달받았습니다. 이는 북한이 전달한 돈입니다. 카라맛은 북한에 설계도와 장비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5) 우리는 무기들을 리비아와 수단, 말레이시아에 팔았습니다. 보스니아에도 팔았습니다. (注: 재래식 무기)

(6) 이에 대한 증거들은 안전한 곳에 보관돼 있고 대중이나 언론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슬람 소령이나 하시미를 통해 S M 자파르(注: 칸의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그를 통해 이 문제를 법원이나 대중에 공개되게 하십시오.

사이먼 헨더슨(注: 영국 기자)과 연락하시고 세부 내용을 모두 알려주십시오.

헨크(注: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칸의 측근)에게 연락해 텔레그래프(注: 네덜란드 일간지) 사람을 소개받아 필요한 자료를 다 주십시오.

이들에게 개자식들이 처음에는 우리를 이용해먹고 이제는 우리에게 더러운 장난을 치려 하고 있다고 알려주십시오.

사랑합니다.

빨리 타냐(注: 손녀)와 함께 두바이로 가서 얼마 동안 지내십시오. 아니면 타냐를 아예샤((注: 이슬라마바드에 거주하던 딸)에게 맡기도록 하십시오.

영국 주재 파키스탄 고등판무관을 지내고 있던 와지드 하산의 말처럼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이란과 리비아, 북한과 관련해 나를 통해 했던 (더러운) 일들을 감추기 위해 나를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를 미리 알려주는 바입니다.

A. Q. 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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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3, 06: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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