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치 “미국 등지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파키스탄이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것”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29) / 칸 박사와 軍部는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합심해서 핵기술을 팔아넘겼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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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치 “파키스탄이 전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이다”

정확한 이유야 어찌됐든 파키스탄은 큰 수모를 겪지 않으며 핵개발과 핵확산을 했다. 물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제재 대상에 오르고 원조가 끊기기는 했지만 핵개발 및 핵확산의 책임자가 국제무대에서 심판을 받은 적은 없었다. 파키스탄 군부는 국제사회가 자신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욱 대범해졌다. A. Q. 칸 박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우라늄 농축 및 핵폭탄 제조 노하우를 팔았다. 설계도와 필수 부품 등을 전달했다. 2000년대에 들어 파키스탄은 핵 원료를 비롯한 핵심 장비까지도 판매했다. 노하우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핵개발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칸 박사는 1960년대에 카라치에 있는 ‘인민의 제철소’에서 근무하고 싶어했다.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국가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그는 네덜란드 핵 연구소에서 최고의 핵기밀을 빼돌렸다. 파키스탄은 그제서야 그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인민의 제철소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1994년 베나지르 부토 총리 재임시절 이 제철소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이를 운영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제철소를 통해 카후타 핵시설에 필요한 기본 부품을 마련했다. 국제사회의 감시가 심해지던 때 이 제철소를 통해 ‘자력갱생’의 길을 간 것이었다. 이 제철소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나 만들 수 있었던 마레이징 강철 역시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다.

무샤라프는 1999년 이 제철소를 직접 관리했다. 엄청난 재정을 투입해 유럽 수준의 시설로 탈바꿈했다. 그는 현직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 제철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때는 2005년 5월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지아 대통령 밑에서 비서실장을 지냈던 아리프 장군은 핵개발에 깊숙이 관여해 온 인물이다. 그는 퇴임 후에도 파키스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이 이뤄낸 성과에 감동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거 몰래 숨어서 활동했다. 이제 파키스탄은 고주파 인버터를 만들고 있다. 영국 같은 나라로부터 사왔는데 이젠 우리가 이를 해외에 팔고 있다. 마레이징 강철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 인민의 제철소에서 이를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파는 것보다 훌륭하다.>

파키스탄의 핵개발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봤던 로버트 갈루치 전 對北 특사는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키스탄은 위험국가 명단 맨 위에 있다. 현시점에서 전세계의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국가는 파키스탄이다. 핵폭탄이 미국이나 유럽 어느 도시에서 터지는 일이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파키스탄 쪽을 가장 먼저 조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무샤라프의 추락

2007년에 들어 무샤라프 대통령의 권력은 크게 약화됐다. 그는 대법원장 직무 정지, 과격 이슬람세력에 대한 과잉 진압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때 망명 중이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2007년 10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무샤라프가 재선출됐다. 부토를 위시한 야당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육군 참모총장을 겸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온 것에는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헌법 소원을 기각했다. 그러나 무샤라프 대통령은 거세진 비판 여론의 압박에 따라 육군 참모총장직을 사임했다. 무샤라프는 11월 3일 사법부의 월권 행위로 국가기관의 업무가 마비되고 테러 위협이 증가했다는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는 다음달에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2008년 1월 8일 파키스탄은 새로운 총선을 치르기로 했다. 약 한 달 전인 2007년 12월 27일 부토 전 총리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총선은 2월로 연기됐다. 무샤라프는 부토 총리 암살에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돼 지지율은 계속 추락했다. 총선에서는 야당이 크게 승리해 무샤라프의 권력은 계속 약화됐다. 야당은 8월에 들어 부패 등 각종혐의를 적용, 무샤라프의 탄핵을 추진했다. 무샤라프는 8월 18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9년간 파키스탄을 이끌었던 무샤라프는 11월에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퇴임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3%가 그의 사임을 환영한다고 했다. 15%만이 사임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는 약 4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2013년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귀국한다는 소문은 이미 돌고 있었다. 파키스탄 사법부는 그를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따른 반역 혐의와 부토 암살 의혹과 관련된 두 가지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척추질환 치료를 이유로 2016년 3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출국했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나의 침묵이 파키스탄을 살려냈다’

2008년 초부터 무샤라프의 권력이 약화되자 A. Q. 칸 박사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택 연금 상태였던 칸 박사는 2008년 4월 초 한 언론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자신이 조국을 살려낸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을 핵무장국가로 만들었을 때 나는 조국을 처음으로 구해냈다”며 “내가 자백을 하고 모든 책임을 지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조국을 또 한 번 구해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더 자세한 내용은 털어놓지 않았다.

칸 박사의 변호인단은 파키스탄 대법원에 가택 연금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했다. 제대로 된 혐의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택 연금 조치를 가한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2008년 7월 21일 칸 측의 요청을 기각했다. 핵과 관련된 어떤 내용도 언론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이를 지인들과 논의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칸 박사는 이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불복하면 감옥에 수감될 수도 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만날 수 없게 될 수 있었다.

칸은 꾀를 썼다. 무샤라프의 권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했다. 무샤라프가 2006년 출간된 회고록 ‘사선(射線)에서’를 통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넘긴 것에 대해 분노했다. 칸은 부인의 입을 이용하기로 했다. 칸의 부인 헨리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자필 원고를 보냈다. 슈피겔은 이 원고를 2008년 8월 11일에 全文 게재했다. 원고에 담긴 내용 일부를 번역해 소개한다.

<그는 파키스탄을 위한 핵폭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주 7일, 매일 12시간에서 15시간씩 일했다. 그는 1년에 5개월 정도를 해외에서 보냈다.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나는 것을 비롯해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을 보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다.

그는 지난 4년 반 동안 이슬라마바드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고 있다. 어떤 혐의로 기소가 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소한 나는 지난 몇 개월 사이 경호원의 감시 없이 집밖을 나설 수 있게 됐다. 그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회고록에 실린 말도 안 되는 거짓말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진실 왜곡에 대해 변호할 기회를 전혀 허락받지 못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회고록 ‘사선(射線)에서’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2003년부터 2004년 사이 실시한 조사로 볼 때 파키스탄 군부나 과거의 정권 모두 압둘 카디르의 확산 활동에 대해 개입하거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없다는 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쇼’는 완전한 압둘 카디르의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당시 남편이 받았던 경호 조치만 생각해도 금방 반박할 수 있다. 남편 사무실과, 칸 연구소, 카후타 핵시설 등에는 항상 보안 요원이 있었다. 무샤라프 장군의 주장과는 달리 이 프로젝트는 처음 시작한 날부터 군부의 통제를 받았다. 군부가 보안과 사업계획들을 관리했다.

(중략. 注: 칸 여사는 핵시설의 보안과 관리는 군부와 정보기관이 맡았는데 어떻게 칸이 혼자 할 수 있었겠느냐고 주장한다. 또한 무샤라프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 등 군부의 핵심에 있었는데 이를 모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가택 연금 상황에서 칸 박사가 제대로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한 점 등을 언급하며 부당성을 주장한다.)

무샤라프 장군이 회고록에서 주장한 많은 내용들은 거짓이고 KRL 사무실에 보관된 자료들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물론 정부는 이런 자료들을 조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 대부분은 군부가 2006년 4월 우리 집을 급습해 모두 가져갔다. 하지만 나는 일부의 문서를 아직 갖고 있다.

내 남편에게 있어 최악은 그가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나는 내 남편이 실제로 저지른 범죄가 무엇이냐고 종종 묻곤 한다. 그의 임무는 파키스탄 정부가 내린 지시사항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은 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파키스탄 국내법에 위배되는 일도 없었다.

내 남편은 북한을 두 차례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은 무샤라프 장군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파키스탄과 북한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가 1976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내 남편은 이란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는 리비아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에게 제기되는 의혹과는 달리 그들과의 어떤 거래에도 개입한 적이 없다.

무샤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내 남편이 돈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파키스탄이나 외국에 있는 은행계좌에 수백만 달러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한 장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의 세금신고 내역에서도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리비아와 북한과의 거래에서 누가 진짜로 이익을 봤는지를 알고 있다. 정부와 군대도 이를 알고 있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특정인의 이름을 밝힐 마음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이 따를 것이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어떤 나라도 핵폭탄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핵을 갖고 있는 국가와 핵이 없는 국가 사이에 있는 불공정함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 핵을 갖고 있는 나라가 계속해서 핵무기 수를 키우고 계속 개발해 나간다면 핵이 없는 국가는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중압감이 그들에게 닥치게 된다면 그들이 믿을 것은 자신들뿐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른 국가와 얼마나 많은 조약을 맺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정치라는 것은 더러운 게임이다.

그렇다면 왜 전세계는 파키스탄의 핵폭탄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왜 이것은 ‘이슬람의 핵폭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걸까? 미국의 무기는 ‘기독교의 핵폭탄’이었나? 이스라엘 것은 ‘유대인의 핵폭탄’이었나? 중국 것은 ‘불교의 핵폭탄’, 아니면 ‘무교(無敎)의 핵폭탄’이었나? 인도 것은 ‘힌두교의 핵폭탄’이었나? 파키스탄이 핵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세계는 팔을 걷어붙이고 우리의 성공을 막으려 했다. 언론은 이에 덩달아 흥분해 문서를 훔쳤다는 주장부터 제임스 본드와 같은 스파이 소설로 확대해 보도했다.

파키스탄의 정보당국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동원해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을 것이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남편이 죽는 날까지 그를 이런 상황에 가둬 놓는 것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위해 고생했던 모든 사람들 중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바친 헌신이 이들의 이름에 새겨진 오명으로 기억되는 것을 걱정한다.>

칸의 부인 헨리의 주장에는 사실과 다른 점이 꽤 있다. 우선 미국 정보당국 등은 칸이 최소한 12회 이상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파악했다. 칸의 부인은 칸이 북한을 방문한 것은 두 번뿐이라고 했다. 또한 이란과 리비아와의 거래에도 직접 가담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선 엇갈린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칸이 이란 등과의 거래에 가담했다는 측근들의 증언이 있다. 리비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유롭지 않은 ‘자유시민’

한편 파키스탄 대법원은 2009년 2월 칸 박사에 대한 가택 연금 조치를 해제한다고 했다. “칸은 이제 자유시민이다”라고 했다. 칸은 대법원의 이같은 결정이 나온 직후 “기분이 좋고 걱정이 사라졌다”고 했다.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정치에 발을 담근 적이 없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나중에는 교장을 지냈다. 우리 가족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농업과 교육, 물부족 문제와 같은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했다. “암에 걸리는 등 몇 번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것 이외에는 괜찮았다. 바쁘게 지내왔다. 코란을 비롯한 많은 책을 읽었다”고 했다.

미국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파키스탄 대법원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칸 박사는 “여전히 중대한 핵확산 위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은 파키스탄 대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한 달 전 칸 박사를 비롯해 그와 연계된 개인 12명, 회사 3곳에 대한 자산 동결 조치를 내렸다. IAEA도 칸 박사가 해외로 이동할 경우 다시 핵 확산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2009년 법원이 칸 박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해제하는 데 따른 조건은 훗날 공개됐다. 칸 박사는 핵 관련 기관을 방문하지 않으며 정부의 승인 없이 관련 기관 관계자들과 접촉하지 않겠다고 했다. 수도 이슬라마바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부에 이를 신고하기로 했다. 그가 집이나 식당, 호텔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전에 정보당국의 검토를 받아야 했다. 외국인은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의 승인 없이 국내외 언론에 의견을 전할 수 없도록 했다.

‘칸은 자유시민이 됐다’는 파키스탄 정부의 발표와는 차이가 있었다. 파키스탄 내무부는 대법원의 판결 직전에 관련 사실을 미국에 미리 알렸다. 이런 조건을 칸이 따르게 된다면 핵확산 위협도, 기밀이 유출될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묻으려 했다.

칸의 이동 및 행동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2020년 현재까지도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칸의 변호인단은 칸이 삼엄한 경비 속에 외부와 단절돼 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러 차례 법원에서 칸에 대한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칸은 여전히 신체적 위해 위협 속에 살고 있고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칸 박사는 2020년 5월 대법원에 낸 청원서에서 “나는 이동의 자유도 없고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죄수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칸은 2020년 현재 84세다.

무샤라프 대통령 이후 파키스탄에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가 회복됐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어떤 정권도 칸 박사가 IAEA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칸의 핵 밀수출 네트워크는 모두 폐쇄돼 더 이상 확산의 위협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파키스탄은 칸의 네트워크를 성공적으로 소탕해냈고 그가 더 이상 파키스탄의 민감한 분야에 대해 할 말은 없다’는 주장이다.

핵확산은 칸의 단독 행동이었을까?

핵확산이 칸 박사 개인의 독단적 결정인지, 아니면 정부의 지시하에 진행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무래도 칸에 대한 직접적인 수사가 진행되지 않아 공개된 자료가 제한적인 것이 이유일 것이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와 미국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등에서 활동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칸 박사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맞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정보가 제한돼 있다는 점은 여지로 남겨두면서도 ‘파키스탄 정부가 아닌 칸이라는 범죄자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로 보고 있다. 그러나 ISIS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만약 정부가 비밀리에 칸 박사와 함께 확산을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는 더욱 더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사례들을 보면 칸 박사가 KRL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핵확산 활동이 벌어졌다. 남아 있는 칸의 측근은 해가 갈수록 줄었고 영향력도 약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가 계속해서 핵확산 네트워크를 가동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국방대학교의 하산 아바스 교수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핵확산 활동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없었다’라는 두 가지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핵협력이 일어난 때와, 거래 세부 내용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의 거래가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북한과 리비아, 이란에 대한 핵기술 이전 사례를 검토해봤을 때 서로의 성격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하나의 국가에 기술을 이전하면서도 때에 따라 성격이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아바스 교수는 단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주도했을 때도 있고 칸 박사가 독단적으로 했을 때도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파키스탄 정부가 1987년 이란과 맺은 핵 관련 합의와 1993년부터 1994년 사이 칸 박사의 네트워크가 이란 혁명수비대와 맺은 합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1987년의 경우 칸 박사는 지아 대통령과 베그 장군의 지시를 받았다. 베그 장군은 1988년 참모총장이 된 이후 파키스탄의 핵 관련 프로그램을 총괄하게 된다. 베그 장군은 여러 나라가 핵무기를 갖는 것이 파키스탄에 유리하다고 봤다. 미국을 비롯한 특정 국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세상은 미국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 경우는 정부 혹은 군부가 앞장서서 핵확산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93년부터 시작된 파키스탄과 이란의 핵협력은 이전과 달랐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프간 문제를 두고도 파키스탄과 이란은 정반대 입장이었다. 파키스탄은 아프간의 탈레반을, 이란은 소련을 지지했다. 파키스탄 군부 입장에서 이란에 핵무기를 파는 것은 큰 위험이었다. 그럼에도 칸 박사는 이란에 접촉해 핵기술을 팔려고 했다. 그가 사익(私益)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진실은 언제나 그랬듯,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북한의 경우는 이란과 정반대였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노동 미사일 기술이 절실했다. 북한은 처음에는 이를 제공할 마음이 없었다. 이때 칸 박사가 북한 문제에 직접 개입해 핵기술을 전달하고 노동 미사일을 받아냈다. 이란과의 합의 때에는 칸의 네트워크가 총동원돼 돈을 전달받고 관련 기술을 전달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칸 박사가 혼자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북한과 관련한 자료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진실은 아직 알 수 없다. 파키스탄의 총리였던 베나지르 부토는 노동 미사일 수입 대가로 현금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핵기술은 넘어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부토가 숨진 후 발표된 그의 인터뷰를 엮은 책에서 그는 핵기술 역시 북한에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만약 후자(後者)가 사실이라면 파키스탄 정부와 칸 박사가 어느 정도의 이해 관계를 형성한 후에 확산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리비아는 모든 자료를 공개했기 때문에 간단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칸의 해외 조직망이 총동원돼 리비아에 물건을 팔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2000년 리비아를 방문한 것이 석연치 않다. 핵 관련 부품이 집중적으로 리비아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교류가 없던 두 나라의 정상(頂上)이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만난 것이다. 일부는 무샤라프가 리비아로 떠날 때 세관을 통과시킨 장비들이 얼마 후 다른 비행기에 실려 리비아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공개된 자료로만 보면 칸 박사 혹은 그의 조달책들의 주도하에 합의가 이뤄졌고 이들이 금전적 이익을 위해 핵기술을 넘긴 것이다. 그러나 칸 박사 퇴임 이후에도 포착된 리비아와 파키스탄의 핵 관련 부품이 실린 화물 이송은 거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낳게 한다.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2008년 1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A. Q. 칸이 아는 것’이라는 제하(題下)의 칼럼에서 “김정일이나 무샤라프 둘 중의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2020년 상황에 적용하면, 무샤라프와 파키스탄의 현재 및 역대 정부, A. Q. 칸,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 중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역시 관련 질문이 나오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서 당신들은 파키스탄제 P-2 원심분리기를 사용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 파키스탄 핵문제를 다뤘던 여러 전문가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사이먼 헨더슨이라는 영국인 기자가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칸의 자필 진술서 등의 자료를 세상에 처음 공개한 것도 그다. 그는 아직도 칸 박사와 연락이 닿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헨더슨은 칸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건네받았다. 칸이 죽고나면 이를 공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칸 박사의 딸 디나는 그의 아버지가 써놓은 폭로문건을 외부에 공개하려다 멈춘 뒤 이렇게 말했었다. “진실은 언제나 그랬듯,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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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6, 06: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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