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사기꾼 사회주의 악령을 경계하라
반공자유-교양영어(25): The idea of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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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사기꾼 사회주의 악령을 경계하라
  
  지상에 나타난 이후 영겁의 세월 동안 인간은 겨우 20 내지 30세 까지만 살았었다.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아테네 시민들의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18세기 산업혁명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 절반 이상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의 죽음을 슬퍼하였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인 평균 수명은 40세였다. 오늘 날 인류의 평균 수명은 65세이고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80세 이상까지 산다.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자식의 죽음은 자비로울 만큼 드물다.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소득은 수백 년 동안 연간 약 200달러에 머물렀었다. 오늘날 부유한 나라의 대표적인 주민의 하루 소득이 그 정도에 이른다.
  
  중세 유럽에서는 10명 중 1명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 날에는 인도와 아프리카 일부를 제외하고 전 세계의 문자해득률은 10명 중 8명이 넘는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0%가 넘는다.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이 자기들의 통치자를 투표로 선출한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죄가 없다면 누구라도 마음 놓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다. 세상이 모든 면에서 나아져 왔다는 말이다. 인류는 건강과 소득에서 지금처럼 풍부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발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물질적 풍요 이상이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풍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GDP가 인간복지의 유일한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산과 행복이 동등하지는 않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보다는 대체로 더 행복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GDP와 행복사이에는 아주 미약한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록 지난 반세기동안 사람들의 富(부)는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행복감은 거의 변동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지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지만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상승하면 기분이 훨씬 덜 좋게 된다. 사람이란 일단 배를 채우고 집을 가지게 되면 “위치적 상품”을 더 원하게 된다. 최고의 부자는 한 명 뿐이다. 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똑 같이 거부가 되고 모든 사람이 똑 같이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모두가 평등해지면 인간은 행복감을 덜 느끼게 된다. 불평-불만이 생긴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부유하고 지위가 더 높아야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소꼬리 보다는 닭대가리가 되기를 더 원한다. 천하를 손에 쥐고 있어도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면 행복감을 크게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할 수도 없지만 설혹 평등해져도 본능적으로 남보다 차이가 나지 않으면 행복감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에덴에 살게 하여도 만족하지 못하고 神의 지위를 탐하다가 쫓겨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행복의 순간은 있을지라도 지속적이고 영원한 행복은 없다.
  
  한국은 거지나라에서 개와 고양이도 비만에 걸릴 만큼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대통령도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가고 거지도 죄가 없으면 대로를 활보할 수 있는 법치의 나라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 무슨 말도 할 수 있는 언론자유의 나라이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길이 四通八達(사통팔달)이어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여행자유의 나라이다. 병이 나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보험제도가 있는 나라이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지상낙원이다.
  
  그래도 불만의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람들이 향유불가능의 지속적 행복을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정치인들이, 특히 사회주의 악령들이 행복사기를 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복추구 증세는 더욱더 악화되고 있다. 사람들아,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이니 행복은 포기하라.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자유에 만족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자유롭고 풍요한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사회주의 행복사기꾼 악령들을 박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물질적 풍요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북한처럼 빵도 자유도 없는 생지옥의 깡패나라가 된다.
  
  
  
  
  
  25. The idea of progress: Onwards and upwards
  Why is the modern view of progress so impoverished?
  
  25-1-170
  THE best modern parable of progress was, aptly, ahead of its time. In 1861 Imre Madach published “The Tragedy of Man”, a “Paradise Lost” for the industrial age. The verse drama, still a cornerstone of Hungarian literature, describes how Adam is cast out of the Garden with Eve, renounces God and determines to recreate Eden through his own efforts. “My God is me,” he boasts, “whatever I regain is mine by right. This is the source of all my strength and pride.”
  
  Adam gets the chance to see how much of Eden he will “regain”. He starts in Ancient Egypt and travels in time through 11 tableaux, ending in the icebound twilight of humanity. It is a cautionary tale. Adam glories in the Egyptian pyramids, but he discovers that they are built on the misery of slaves. So he rejects slavery and instead advances to Greek democracy. But when the Athenians condemn a hero, much as they condemned Socrates, Adam forsakes democracy and moves on to harmless, worldly pleasure. Sated and miserable in hedonistic Rome, he looks to the chivalry of the knights crusader. Yet each new reforming principle crumbles before him. Adam replaces 17th-century Prague’s courtly hypocrisy with the rights of man. When equality curdles into Terror under Robespierre, he embraces individual liberty-which is in turn corrupted on the money-grabbing streets of Georgian London. In the future a scientific Utopia has Michelangelo making chair-legs and Plato herding cows, because art and philosophy have no utility. At the end of time, having encountered the savage man who has no guiding principle except violence, Adam is downcast-and understandably so. Suicidal, he pleads with Lucifer: “Let me see no more of my harsh fate: this useless struggle.”
  
  25. 진보사상: 계속해서 위쪽으로
  현대의 진보관은 왜 그렇게 빈약한가?
  
  진보에 관한 현대 최고의 우화는 적절하게도 현대시대에 앞서 나타났었다. 1861년에 Imre Madach는 산업시대의 “失樂園(실락원)”을 그린 “인간의 비극”을 발표하였다. 아직도 헝가리 문학의 초석으로 통하는 이 詩劇(시극)은 Adam이 Eve와 함께 에덴에서 쫓겨나서 Adam이 神을 비난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에덴을 재창조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경위를 묘사한다. 그는 “나의 神은 나다. 내가 〈잃어버린 에덴에 대하여〉도로 찾게 되는 것은 모두 당연히 나의 것이다. 이점이 나의 모든 힘과 자부심의 원천이다.”라며 뽐낸다.
  
  Adam은 잃어버린 에덴 중에서 어느 정도를 “도로 찾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그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11개의 장면을 통과하여 얼음으로 막힌 인류의 황혼기에서 끝을 낸다. 그것은 경고의 이야기이다. Adam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자랑하지만 그것이 노예들의 고난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노예제도를 배격하고 그 대신 그리스의 민주주의로 나아간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이 Socrates를 징벌한 것처럼 어떤 영웅을 징벌할 때, 그는 민주주의를 버리고 무해한 세속적인 쾌락으로 이동한다. 그는 충분히 만족하였지만 향락적인 로마 때문에 마음이 슬퍼져서 십자군용사들의 기사도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채택하는 모든 방침은 번번이 박살난다. Adam은 17세기 Prague 궁중의 위선을 인권으로 대체 한다. 평등이 Robespierre의 공포정치로 굳어질 때 Adam은 개인주의적 자유를 채택 한다― 그러나 이것은 George 王시대의 악착같이 돈에만 집착하는 런던(영국)에서 부패로 오염 된다. 미래의 과학적 Utopia에서는 예술과 철학이 소용이 없기 때문에 Michelangelo가 의자 다리나 만들고 Plato(플라톤)이 소떼를 몰고 있을 것이다. 종말에는 폭력 외에는 지침이 없는 야만족을 만나기 때문에 Adam은 意氣銷沈(의기소침)해 진다―Adam이 이 지경이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자살할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마왕 Lucifer에게 “저로 하여금 저의 거친 운명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이 무용한 투쟁을.”라고 간청한다.
  
  
  25-2-171
  Things today are not quite that bad. But Madach’s 19th-century verse contains an insight that belongs slap bang in the 21st. In the rich world the idea of progress has become impoverished. Through complacency and bitter experience, the scope of progress has narrowed. The popular view is that, although technology and GDP advance, morals and society are treading water or, depending on your choice of newspaper, sinking back into decadence and barbarism. On the left of politics these days, “progress” comes with a pair of ironic quotation marks attached; on the right, “progressive” is a term of abuse.
  
  It was not always like that. There has long been a tension between seeking perfection in life or in the afterlife. Optimists in the Enlightenment and the 19th century came to believe that the mass of humanity could one day lead happy and worthy lives here on Earth. Like Madach’s Adam, they were bursting with ideas for how the world might become a better place.
  
  Some thought God would bring about the New Jerusalem, others looked to history or evolution. Some thought people would improve if left to themselves, others thought they should be forced to be free; some believed in the nation, others in the end of nations; some wanted a perfect language, others universal education; some put their hope in science, others in commerce; some had faith in wise legislation, others in anarchy. Intellectual life was teeming with grand ideas. For most people, the question was not whether progress would happen, but how.
  
  오늘날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Madach의 19세기 詩는 21세기에 매우 적합한 견식을 담고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 진보의 개념은 퇴색해 버렸다. 자기만족과 비통한 경험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의 범위가 축소되어버렸다. 비록 기술과 국민총생산은 증가하지만 도덕과 사회는 퇴락과 야만으로 되돌아가면서 제자리걸음하고 있거나 구독하는 신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진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오늘날 정치적 좌파에게는 “진보”는 냉소적인 인용부호가 붙어 다니고 우파에게는 “진보적”이라는 것은 악용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 완벽의 추구가 이승의 일인지 아니면 저승의 일인지를 두고 兩者(양자)사이에 오랫동안 긴장이 있어왔다. 계몽주의시대와 19세기의 낙관주의자들은 인류대중은 언젠가는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Madach의 Adam처럼 그들은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神이 New Jerusalem〈지상낙원을 상징〉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일부는 진화와 역사에 기대를 걸었다. 일부는 사람들을 그대로 외부의 간섭이 없이 놔두면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일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를 믿었고 일부는 국가의 종말을 믿었다. 완벽한 언어를 원하였고 일부는 교육의 보편화를 원하였다. 일부는 과학에 희망을 걸었고 일부는 통상에 희망을 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현명한 입법을, 어떤 사람들은 무정부상태를 믿었다. 사람들의 지적인 삶은 웅대한 아이디어로 넘쳐나고 있었다. 문제는 진보가 있을 것이냐가 아니고 어떻게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냐는 것이었다.
  
  
  25-3-172
  The idea of progress forms the backdrop to a society. In the extreme, without the possibility of progress of any sort, your gain is someone else’s loss. If human behaviour is unreformable, social policy can only ever be about trying to cage the ape within. Society must in principle be able to move towards its ideals, such as equality and freedom, or they are no more than cant and self-delusion. So it matters if people lose their faith in progress. And it is worth thinking about how to restore it.
  
  Cain and cant
  
  By now, some of you will hardly be able to contain your protests. Surely the evidence of progress is all around us? That is the case put forward in “It’s Getting Better All the Time”, by the late Julian Simon and Stephen Moore then at the Cato Institute, a libertarian think-tank in Washington, DC. Over almost 300 pages they show how vastly everyday life has improved in every way.
  
  For aeons people lived to the age of just 25 or 30 and most parents could expect to mourn at least one of their children. Today people live to 65 and, in countries such as Japan and Canada, over 80; outside Africa, a child’s death is mercifully rare. Global average income was for centuries about $200 a year; a typical inhabitant of one of the world’s richer countries now earns that much in a day. In the Middle Ages about one in ten Europeans could read; today, with a few exceptions, such as India and parts of Africa, the global rate is comfortably above eight out of ten. In much of the world, ordinary men and women can vote and find work, regardless of their race. In large parts of it they can think and say what they choose. If they fall ill, they will be treated. If they are innocent, they will generally walk free.
  
  진보의 사상은 사회의 배경을 형성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어떠한 종류의 진보도 없으면 어느 한 사람의 이득은 다른 한 사람의 손실이 된다. 인간의 행동이 개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회정책은 단지 꼬리 없는 원숭이를 동물의 우리 안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회는 원칙적으로 평등과 자유와 같은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상은 빈 말이나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면 심각한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그 믿음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카인과 빈 말
  
  지금쯤은 독자 여러분은 항변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진보에 대한 증거는 우리 모두의 주변에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故Julian Simon과 Washington 所在(소재)의 자유의지론 두뇌 집단인 Cato 연구소에 재직하였던 Stephen Moore의 共著(공저)“It’s Getting Better All the Time”에 제시되어 있는 주장이다. 거의 300 페이지 이상에 걸쳐서 저자들은 모든 면에서 일상생활이 엄청나게 개선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영겁의 세월 동안 인간은 겨우 20 내지 30세 까지만 살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의 죽음을 슬퍼하였었다. 오늘 날 인류는 65세까지 살고 일본과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80세 이상까지 산다.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자식의 죽음은 자비로울 만큼 드물다.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소득은 수백 년 동안 연간 약 200달러에 머물렀었다. 오늘날 부유한 나라의 대표적인 한 주민의 하루 소득이 그 정도에 이른다. 중세 유럽에서는 10명 중 한 명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 날에는 인도와 아프리카 일부를 제외하고 전 세계의 문자해득률은 10명 중 8명이 넘는다.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보통 남녀들은 투표를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병이 나면 치료를 받는다. 죄가 없다면 누구라도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다.
  
  
  25-4-173
  It is good to go up in the world, but much less so if everyone around you is going up in it too. It is an impressive list-even if you factor in some formidably depressing data. (In the gently dissenting foreword to her husband’s book Simon’s widow quotes statistics claiming that, outside warfare, 20th-century governments murdered 7.3% of their people, through needless famine, labour camps, genocide and other crimes. That compares with 3.7% in the 19th century and 4.7% in the 17th.) Mr Moore and Simon show that health and wealth have never been so abundant. And for the part of humanity that is even now shedding poverty, many gains still lie ahead.
  
  The trouble is that a belief in progress is more than just a branch of accounting. The books are never closed. Wouldn’t nuclear war or environmental catastrophe tip the balance into the red? And the accounts are full of blank columns. How does the unknown book-keeper reconcile such unknowable quantities as happiness and fulfilment across the ages? As Adam traverses history, he sees material progress combined with spiritual decline.
  
  Even if you can show how miserable the past was, the belief in progress is about the future. People born in the rich world today think they are due a modicum of health, prosperity and equality. They advance against that standard, rather than the pestilence, beggary and injustice of serfdom. That’s progress.
  
  세상이 모든 면에서 나아지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의 형편이 모두 좋아진다면 기분이 그렇게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인상적인 발전목록이다―심지어 대단히 우울한 자료로 인수분해 하더라도 그렇다. (남편의 책에 대한 다소 의견을 달리하는 서문에서 Simon의 미망인은 20세기 각국의 정부는 전쟁을 제외하고도 불필요한 기근과 강제노동과 인종 학살 및 여타 범죄를 통해서 국민의 7.3%를 살해하였다고 주장하는 통계를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의 3.7%와 17세기의 4.7%와 비교가 된다.) Moore 와 Simon 는 건강과 소득에서 지금처럼 풍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심지어 이제야 가난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많은 소득의 가능성이 앞에 놓여있다.
  
  문제는 진보에 대한 믿음은 단지 금전(회계)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회계장부는 결코 닫히지는 않는다.〈손익계산에는 종결이 없다.〉 핵전쟁이나 환경 재앙은 수지계정을 적자로 만들지는 않을까? 그리고 대차계정은 공란으로 가득 차 있다. 미지의 경리직원이 행복이나 만족 같은 不可知(불가지)의 양을 시대를 가로질러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역사기행을 하면서 Adam은 물질적 발전이 정신적 쇠퇴와 결합하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
  
  과거가 대단히 비참하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하더라도 진보에 대한 믿음은 미래에 있다. 오늘날 부유한 세계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건강과 부와 평등을 향유할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농노사회의 질병과 극빈과 不正義(부정의) 보다는 이러한 기준(건강과 부와 평등)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런 것이 진보이다.
  
  
  25-5-174
  Every day, in every way…
  
  The idea of progress has a long history, but it started to flower in the 17th century. Enlightenment thinkers believed that man emancipated by reason would rise to ever greater heights of achievement. The many manifestations of his humanity would be the engines of progress: language, community, science, commerce, moral sensibility and government. Unfortunately, many of those engines have failed.
  
  Some supposed sources of progress now appear almost quaint. Take language: many 18th-century thinkers believed that superstitions and past errors were imprinted in words. “Hysteria”, for example, comes from the Greek for “womb”, on the mistaken idea that panic was a seizure of the uterus. Purge the language of rotten thinking, they believed, and truth and reason would prevail at last. The impulse survives, much diminished, in the vocabulary of political correctness. But these days few people outside North Korea believe in language as an agent of social change.
  
  Every time someone tells you to “be realistic” they are asking you to compromise your ideals. Other sources of progress are clothed in tragedy. The Germanic thought that individual progress should be subsumed into the shared destiny of a nation, or volk, is fatally associated with Hitler. Whenever nationalism becomes the chief organising principle of society, state violence is not far behind. Likewise, in Soviet Russia and Communist China unspeakable crimes were committed by the ruling elite in the pursuit of progress, rather as they had been in the name of God in earlier centuries. As John Passmore, an Australian philosopher, wrote: “men have sought to demonstrate their love of God by loving nothing at all and their love for humanity by loving nobody whatsoever.”
  
  매일 每事(매사)에
  
  진보의 사상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7세기에 와서야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계몽주의사상가들은 이성으로 해방된 인간은 성취의 고지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인간성을 명시하는 많은 것들이 ―언어, 공동체, 과학, 상업, 도덕적 감수성과 정부―발전의 엔진이 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그 엔진 중에서 많은 것이 실패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진보의 원천은 이제 거의 진기한 것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생각해보자. 18세기의 많은 사상가들은 미신과 과거의 오류는 단어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서, womb(자궁)을 의미하는 그리스 語 hysteria는 당황하게 되는 것은 자궁의 발작 때문이라는 잘 못된 인식에 기원한다. 타락한 사상의 언어를 정화시키면 결국 진리와 이성이 승리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었다. 그들의 영향은 매우 줄어들었지만 정치적 관행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나 오늘 날 北韓(북한) 외의 지역에서 사회적 변화의 요인으로 언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현실적이 되어라”라고 말할 때 마다, 당신의 이상을 타협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다른 원천은 비극 속에 포함되어 있다. 개인의 진보는 민족의 공동운명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독일적 사상은 Hitler와 운명적으로 연결 된다. 민족주의가 사회의 주된 조직원리가 되면 국가폭력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소련과 공산중국에서는 이전 시대에 神의 이름으로 그랬던 것처럼 진보의 추구과정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범죄가 국가 지배계급에 의해서 恣行(자행)되었다. 호주의 철학자 John Passmore가 쓴 것처럼: “인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神의 사랑을, 그리고 아무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려고 시도해왔다.”
  
  
  25-6-175
  The 20th century was seduced by the idea that humans will advance as part of a collective and that the enlightened few have the right-the duty even-to impose progress on the benighted masses whether they choose it or not. The blood of millions and the fall of the Berlin Wall, 20 years ago this year, showed how much the people beg to differ. Coercion will always have its attractions for those able to do the coercing, but, as a source of enlightened progress, the subjugation of the individual in the interests of the community has lost much of its appeal.
  
  Instead the modern age has belonged to material progress and its predominant source has been science. Yet nestling amid the quarks and transistors and the nucleic acids and nanotubes, there is a question. Science confers huge power to change the world. Can people be trusted to harness it for good?
  
  The ancients thought not. Warnings that curiosity can be destructive stretch back to the very beginning of civilisation. As Adam and Eve ate from the Tree of Knowledge, so inquisitive Pandora, the first woman in Greek mythology, peered into the jar and released all the world’s evils.
  
  Modern science is full of examples of technologies that can be used for ill as well as good. Think of nuclear power-and of nuclear weapons; of biotechnology-and of biological contamination. Or think, less apocalyptically, of information technology and of electronic surveillance. History is full of useful technologies that have done harm, intentionally or not. Electricity is a modern wonder, but power stations have burnt too much CO2-producing coal. The internet has spread knowledge and understanding, but it has also spread crime and pornography. German chemistry produced aspirin and fertiliser, but it also filled Nazi gas chambers with Cyclon B.
  
  20세기는 인간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진보하며 개화된 소수가 몽매한 대중에게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진보를 강요할 권리―심지어 의무까지도―가 있다는 사상에 매료되었었다. 수백만 명이 흘린 피와, 20년 전 Berlin 장벽의 붕괴는 대중은 이와는 대단히 다른 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강압은 강압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항상 매력적인 것이지만 개화발전의 원천으로서 공동체의 이익에 개인을 복속시키는 방법은 이제 매력을 상실하였다.
  
  그 대신 현대는 물질적 발전의 시대에 속하며 발전의 주된 원천은 과학이었다. 그러나 쿼크와 트랜지스터와 핵산과 나노튜브에 안주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과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준다. 인류가 과학을 이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고대의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기심이 파괴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인류 문명의 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Adam 과 Eve는 善惡果(선악과)를 따 먹었고 또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인 호기심이 강한 Pandora는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고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세상의 모든 악을 풀어 놓았다.
  
  현대과학은 좋게는 물론 나쁘게도 이용될 수 있는 기술의 例(예)로 가득 차 있다. 핵 發電(발전)에 대해서-그리고 핵무기와 생명공학에 대해서-그리고 생물학적 오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혹은 보다 덜 종말론적이지만 정보기술과 전자감시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역사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해악을 끼친 유용한 기술로 가득 차 있다. 전기는 현대의 기적이지만 발전소는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석탄을 태우고 있다. 인터넷은 지식과 이해를 확산시키지만 또한 범죄와 春畵(춘화)도 확산시킨다. 독일의 화학은 아스피린과 비료를 생산하였지만 또한 나치의 가스실을 Cyclon B 독가스로 채우기도 하였다.
  
  
  25-7-176
  The point is not that science is harmful, but that progress in science does not map tidily onto progress for humanity. In an official British survey of public attitudes to science in 2008, just over 80% of those asked said they were “amazed by the achievements of science”. However, only 46% thought that “the benefits of science are greater than any harmful effect”.
  
  From the perspective of human progress, science needs governing. Scientific progress needs to be hitched to what you might call “moral progress”. It can yield untold benefits, but only if people use it wisely. They need to understand how to stop science from being abused. And to do that they must look outside science to the way people behave.
  
  It is a similar story with economic growth, the other source of material progress. The 18th century was optimistic that business could bring prosperity; and that prosperity, in its turn, could bring enlightenment. Business has more than lived up to the first half of that promise. As Joseph Schumpeter famously observed, silk stockings were once only for queens, but capitalism has given them to factory girls. And, as Mr Moore and Simon argue, prosperity has brought its share of enlightenment.
  
  The Economist puts more faith in business than most. Yet even the stolidest defenders of capitalism would, by and large, agree that its tendency to form cartels, shuffle off the costs of pollution and collapse under the weight of its own financial inventiveness needs to be constrained by laws designed to channel its energy to the general good. Business needs governing, just as science does.
  
  요점은 과학이 유해하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발달이 인류의 발달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2008년 일반대중의 과학에 대한 태도에 대한 영국의 공식적인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 〈질문을 받은 사람들〉의 단지 80%만 “과학의 성취”에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46%만이 과학의 혜택은 과학의 어떤 유해한 결과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하였다.
  
  인류발전의 견지에서 보면 과학을 다스려야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발달은 소위 “도덕적 발달”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과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혜택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인간이 과학을 현명하게 이용할 때만 그렇다. 인간은 과학의 악용을 막는 방법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과학을 벗어나서 인간들의 행동양식을 주목해야 한다.
  
  물질적 발전의 또 다른 원천인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과학과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18세기는 비즈니스가 번영을 가져오고 亦(역)으로 번영은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비즈니스가 번영을 가져온다는 약속은 기대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Joseph Schumpeter가 이전에 관찰한 바와 같이 옛날에는 여왕 같은 여인들만 비단 스타킹을 신었으나 지금은 자본주의 덕으로 공장에 다니는 여성도 신는다. 그리고 Moore 와 Simon 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경제적 번영은 계몽사상의 확산에도 一翼(일익)을 담당하였다.
  
  Economist誌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비즈니스에 더 많은 신뢰를 둔다. 그러나 가장 완고한 자본주의 옹호자도 카르텔을 형성하고 오염의 비용에 대한 책임을 轉嫁(전가)하며 자신의 금융적 성취(창의) 때문에 오히려 붕괴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자본주의의 에너지를 전체 인류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고안된 법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비즈니스도 과학처럼 통제를 받을 필요가 있다.
  
  
  25-8-177
  Nor does economic progress broadly defined correspond to human progress any more precisely than does scientific progress. GDP does not measure welfare; and wealth does not equal happiness. Rich countries are, by and large, happier than poor ones; but among developed-world countries, there is only a weak correlation between happiness and GDP. And, although wealth has been soaring over the past half a century, happiness, measured by national surveys, has hardly budged.
  
  That is probably largely because of status-consciousness. It is good to go up in the world, but much less so if everyone around you is going up in it too. Once they have filled their bellies and put a roof over their heads, people want more of what Fred Hirsch, an economist who worked on this newspaper in the 1950s and 1960s, called “positional goods”. Only one person can be the richest tycoon. Not everyone can own a Matisse or a flat in Mayfair. As wealth grows, the competition for such status symbols only becomes more intense.
  
  And it is not just that material progress does not seem to be delivering the emotional goods. People also fear that mankind is failing to manage it properly-with the result that, in important ways, their children may not be better off than they are. The forests are disappearing; the ice is melting; social bonds are crumbling; privacy is eroding; life is becoming a dismal slog in an ugly world.
  
  과학적 발전이 인간의 발전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광범위하게 定議(정의)된 경제발전〈일반적으로 말하는 경제발전〉도 인간의 발전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GDP가 인간복지의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재산과 행복이 동등하지는 않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보다는 대체로 더 행복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GDP와 행복사이에는 아주 미약한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록 지난 반세기동안 사람들의 富(부)는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행복감은 거의 변동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地位意識(지위의식)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지만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상승하면 기분이 훨씬 덜 기분 좋게 된다. 사람이란 일단 배를 채우고 집을 가지게 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本紙(본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경제전문가 Fred Hirsch가 말한 “위치적 상품”을 더 원하게 된다. 한 사람만이 최고의 巨富(거부)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Matisse의 그림이나 Mayfair의 아파트를 소유할 수는 없다. 사람들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지위를 상징하는 상품에 대한 경쟁은 더욱더 치열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 발전이 감정적 상품(지위를 상징하는 상품)을 전달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또한 인류가 물질적 발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그 결과 그들의 자식들이 그들보다 더 잘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삼림이 사라지고 있으며, 빙하(얼음)는 녹고 있고, 사회적 유대는 산산 조각이 나고 있으며, 프라이버시는 침식당하고 있고, 삶은 추악한 세계에서 하나의 음산한 고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25-9-178
  All this scepticism, and more, is on display in “Nineteen Eighty-Four” and “Brave New World”, the two great British dystopian novels of the 20th century. In them George Orwell and Aldous Huxley systematically subvert each of the Enlightenment’s engines of progress. Language-Orwell’s Newspeak-is used to control people’s thought. The individuals living on Airstrip One are dissolved by perpetual war into a single downtrodden “nation”. In both books the elite uses power to oppress, not enlighten. Science in Huxley’s London has become monstrous-babies raised in vitro in hatcheries are chemically stunted; and the people are maintained in a state of drug-induced tranquillity. And in the year of our Ford 632, Huxley’s world rulers require enthusiastic consumption to keep the factories busy and the people docile. Wherever the Enlightenment saw scope for human nature to improve, Orwell and Huxley warned that it could be debased by conditioning, propaganda and mind-control.
  
  Crooked timber
  
  The question is why neither Orwell’s nor Huxley’s nightmares have come to life. And the answer depends on the last pair of engines of progress: moral sensibility in its widest sense, and the institutions that make up what today is known as “governance”. These broadly liberal forces offer hope for a better future-more, indeed, than you may think.
  
  이 모든 회의적 태도와 그 이상의 것이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2편의 결함사회 소설 “Nineteen Eighty-Four”〈1984년〉과 “Brave New World”〈멋진 신세계〉에 나타나 있다. 두 소설에서 George Orwell과 Aldous Huxley는 계몽사상의 발전 엔진들을 체계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언어― Orwell의 Newspeak(新語)―는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Airstrip One에 거주하는 개인들은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 하나의 학대받는 “국민”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두 소설에서 집권 엘리트는 계몽보다는 억압하기 위해서 권력을 사용한다. Huxley의 런던에서 과학은 극악무도하다―부화장의 시험관에서 양육되는 아기들은 성장이 저지되도록 화학처리 된다. 그리고 국민은 약물로 유도하여 평온한 상태에 있도록 한다. Ford 632년에 Huxley의 세계지배자들은 공장을 바쁘게 돌아가게 하고 국민을 유순하게 하기 위하여 열광적인 소비를 요구한다. 계몽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곳 마다 Orwell과 Huxley는 인간성은 심리조작과 선전선동과 심리통제에 의해서 저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굽은 나무
  
  의문점은 Orwell과 Huxley의 악몽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이다. 해답은 최후의 두개 발전 엔진에 달려있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감수성과 오늘날 “통치”로 알려진 것을 구성하는 제도 이다. 이 두 가지 자유로운 힘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을 제공한다.
  
  
  25-10-179
  The junior partner is governance-not an oppressive Leviathan, but a democratic system of laws and social institutions. Right and left have much cause to criticise government. For the right, as Ronald Reagan famously said, the nine most terrifying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are: “I’m from the government and I’m here to help.” For the left, government has failed to tame the cruelty of markets and lift the poor out of their misery. From their different perspectives, both sides complain that government regulation is often costly and ineffectual, and that many decades of social welfare have failed to get to grips with an underclass.
  
  Yet even if government has scaled back its ambitions from the heights of the post-war welfare state, even if it is often inefficient and self-serving, it also embodies moral progress. T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assertion, in the Americ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It is the significance of laws guaranteeing free speech, universal suffrage, and equality before the law. And it is the significance of courts that can hold states to account when they, inevitably, fail to match the standards that they have set for themselves.
  
  도덕적 감수성의 하급 파트너(발전엔진)는 통치인데 이것은 억압적인 레비아단이 아니고 민주적인 법과 사회제도이다. 좌파와 우파는 통치행태를 비판할 많은 명분을 가지고 있다. 우파에게는 Ronald Reagan의 유명한 말처럼 영어의 가장 무서운 단어 9개는“I’m from the government and I’m here to help.”(저는 정부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드리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는 필요악이기 때문에 작을수록 좋다는 뜻 〉이다. 좌파가 볼 때는 통치(정부)는 市場의 잔인성을 순치하고 가난의 비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출하는데 실패하였다. 좌우익 양쪽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정부규제는 종종 고비용이고 비효율적이고 수십 년간의 사회복지는 빈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정부가 비록 복지의 고지에 도달하려는 야망의 크기를 줄였다 하더라도, 그리고 통치(정부)가 종종 비효율적이고 이기적일지라도, 그것은 도덕적 진보를 체현한다. 그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神으로부터 천부의 권리들을 부여받았다”는 주장의 의미이다. 그것이 언론자유와 보통 선거권과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들의 의미이다. 그것이 국가가 불가피하게 스스로 세운 기준에 미달할 때는 국가를 각성시킬 수 있는 법정의 의미이다.
출처 : The Economist, Dec. 17th, 2009
[ 2020-12-26, 08: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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