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의 思想편력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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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金大中의 초조한 생존투쟁
  
  40년에 걸친 김일성-김정일-김대중 관계의 총정리. 연방제로 맺어진 질기고 질긴 관계.
  
  
  趙甲濟(月刊朝鮮 2006년 12월호)
  
   『미국이 못살게 굴어 核실험』
  
   지난 10월9일 金正日이 核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그동안 對北 굴종적 태도를 보여 왔던 盧武鉉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은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우선 인책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과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金正日 추종 공산주의 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 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盧武鉉씨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金正日의 對南 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核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金正日 정권의 4大 對南 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 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다. 盧武鉉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지난 10월11일 金大中 前 대통령은 전남大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核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對北 포용정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닙니다.
  
   北核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길을 열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核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2007년의 內戰的 상황
  
   이는 누가 보아도 盧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고 곧 효력을 발휘했다. 盧대통령은 기존의 對北정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금강산관광을 계속하고 통일부 장관에는 이종석 現 장관보다 더 「왼쪽」인 이재정씨를 내정했다. 한때 「脫김대중」을 모색했던 盧대통령은 金大中씨 집을 찾아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盧대통령이 급조했던 열린당이 스스로 수명이 다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前·現職 대통령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주도권을 金·盧 두 사람이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권력을 쥔 현직 대통령과 유권자의 약 25%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악수하면 한국의 左派(좌파)와 호남세력이 연계되어 막강한 표집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문제는 「盧武鉉+金大中」 연합세력이 金正日 요소를 선거판에 끌어들여 다시 從金정권을 만들어 내려고 무리를 할 가능성이다. 金大中씨의 이념성향과 지역기반이 金正日의 對南 적화공작과 결합된다면 한국은 지금의 「말로 하는 內戰的 상황」에서 피를 부르는 內戰상태로 갈지 모른다는 악몽이 생긴다.
  
   애국행동 단체에선 「金正日+金大中+盧武鉉은 核개발 共犯이고 대한민국의 3敵」이란 표현을 쓴다. 일부 호남사람들은 金大中씨를 호남사람들 손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도 한다.
  
   10월9일 核실험 이후 한국의 국정방향을 對北굴종 쪽으로 이끈 키 플레이어는 金大中씨이다. 그의 역할에 의해서 盧대통령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마저 불질러 없애 버린 느낌이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당연히 韓美동맹을 강화하고 유엔과 협력해 對北압박과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盧대통령은 이런 결속이 요구되는 순간 결정적인 反美親北 노선을 취하고 만 것이다.
  
   金正日·金大中·盧武鉉 세 사람의 이런 노선은 필연적으로 이 세 사람을 공동운명체로 묶고 있다. 金大中씨의 연결고리 역할에 의해서 남북한 정권이 공조하여 국제사회,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도전하는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金正日에게 돈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합의한 2000년 6·15 선언으로 좌익득세의 사변적 상황을 만든 金大中씨의 위험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鮮于宗源 검사와 보도연맹 강사
  
   여기서 큰 의문이 하나 생긴다. 金大中씨가 盧武鉉 대통령을 끌어당겨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힘과 의지는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金正日의 작용이 들어간 힘과 의지인가? 金大中씨가 보여 준 金正日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訪北(방북)을 추진하다가 金正日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해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金正日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 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核실험을 예고하자 金大中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金正日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북한의 核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을 피력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더 놀라운 발언들에 묻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그의 생명을 두 번 살려 주었다.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다.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金正日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核실험을 하도록 했다」고 공격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적」·「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金大中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金正日을 사모하든지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金大中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 말에 기자는 鮮于宗源(선우종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4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鮮于변호사는 광복 직후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保導(보도)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들은 한 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에 좌익 前歷者의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해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鮮于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鮮于변호사는 4년 전 기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서소문의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됩니다. 전국에서 道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청산유수로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통통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추궁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 6·25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金大中씨였습니다』
  
  
   총무차장인가 운영위원인가?
  
   金大中씨는 광복 직후 좌익 신민당에 입당해 목포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0월 전국적으로 번진 좌익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받고 각서를 쓴 뒤 풀려난 적도 있다. 그는 「신민당이 다른 좌익 2당과 함께 남로당을 만들 때는 따라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좌익 前歷者 조직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는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 2대 위원장 趙○○, 부위원장 薛○○(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자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보도연맹의 핵심인물?
  
   보도연맹 시절의 金大中씨에 대해 증언한 鮮于宗源 당시 검사.
  
   鮮于宗源 변호사의 증언은 金大中씨의 주장보다는 趙씨의 진술에 더 가깝다. 전남도 전체를 대표하여 강사로 추천될 정도라면 돈만 내는 운영위원이 아니라 보도연맹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金大中씨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할 만한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감상적으로, 즉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란 뜻이다. 그의 좌익교육 前歷에 대해선 좀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권상직)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1980년에 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權씨의 진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産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6·25 때 인민재판 목격』
  
   1980년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다.
  
   장금성은 좌익계 民靑(민청)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교도)하기 위해 조직된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 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民靑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金大中씨는 6·25 남침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공산군이 우익 청년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1980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술서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金日成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천주교와 張勉 아래로
  
   6·25 직후 서울에서 목포로 돌아온 金大中씨는 좌익 前歷으로 해서 보도연맹 처형 때 국군에 붙들려갔으나 「호명착오」로 살았다는 안기부 기록이 전한다. 한편으로는 북한군 측에 붙들려 옥중에 있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했다는 자신의 증언이 있다.
  
   6·25 戰後 「좌익 前歷者」라는 꼬리표가 붙은 그는 반공의 보루이던 천주교 세력에 접근해 보호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친구인 崔書勉(최서면)씨의 회고담이다. 대한매일 1999년 6월12일자 金大中 대통령 인터뷰 기사에 崔씨가 거명되어 있다. 金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崔書勉씨라고, 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張박사를 代父(대부)로 소개해 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張박사하고 영적으로 代父·代子의 관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저는 新派(신파)의 총수인 張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崔書勉씨에 따르면 당시 웅변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은 金相賢(김상현) 前 의원과 함께 경향신문 4층에 있던 자신의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 방으로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그때 金대통령은 崔書勉씨에게 『천주교 신자가 됐으면 좋겠으니 신부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崔書勉씨는 당시 崔南善(최남선), 金性洙(김성수), 吳華英(오화영)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명성이 높은 尹亨重(윤형중) 신부를 소개했다.
  
   金大中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리학습을 했다고 한다. 尹亨重 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자네가 보낸 그 사람 똑똑해. 질문하는 거 신랄하고…』 했다고 한다. 영세를 받은 金大中씨는 崔書勉씨에게 「토마스 金大仲」(金大中 대통령의 改名 전 이름―편집자 注)이란 사인이 적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영세를 받고 나서 金大中씨는 『뭐가 되고 싶냐』는 尹亨重 신부의 질문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직속 상관이 張勉 박사니까 자네가 소개하라』고 이야기했다. 崔씨는 金大中씨를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張勉 박사에게 소개했다. 崔씨의 증언.
  
   『張勉 박사와 盧基南(노기남) 주교는 천주교의 가장 큰 고민이 人材難(인재난)이라고 말해 왔어요. 3·1 운동 때 천주교 대표가 참가 못 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으니까요. 인물을 길러 보자는 의미에서 李弘圭(이홍규: 李會昌씨의 선친. 당시 검사), 金大中씨 등을 환영한 겁니다』
  
   崔씨는 張勉 박사에게 『저는 정계 진출을 안 하니 저를 생각하시듯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깊은 내용이 있어선지 張勉 박사와 盧주교는 金大中씨를 각별히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金大中씨가 하루아침에 민주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말했다.
  
   『1972년 金大中씨가 망명한 뒤 美 CIA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駐日(주일) 미국대사 로버트 잉거솔의 특별보좌관인 아마코스트(駐日 美대사 역임)가 직접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로 「金大中 종교는 가짜 아니냐. 金大中 자신은 가톨릭에 다니면서 부인이 개신교에 나가는 것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는 전략 아닌가」 등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공격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다」고 했어요. 나와 金大中의 관계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신앙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1960년 4·19 학생의거로 李承晩 대통령이 물러난 뒤 민주당이 집권하고 張勉씨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李承晩 대통령 아래 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이던 鮮于宗源씨는 張총리派로 몰려 탄압을 받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8년간 망명생활을 보낸 뒤 귀국해 조폐공사 사장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보도연맹 교육요원이던 金大中씨가 국회의원이 아닌 데도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張勉 총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鮮于씨가 張총리에게 金씨의 사상문제를 지적했다. 張총리는 『나도 그런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 의원총회할 때 해명하도록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鮮于씨가 다시 張총리를 만났는데 총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金大中 대변인에게 이야기를 시켰더니 한 시간 동안 해명을 하는데 모두가 말솜씨에 감탄했다. 의심이 풀렸다』
  
  
   북한공작원들과 만든 反국가단체
  
   북한정권이 金大中씨에게 주목하고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촉을 시도한 최초의 사건은 1967년이었다. 金大中씨의 목포상업고등학교 1년 선배인 鄭泰默(정태묵)은 金씨가 목포에서 좌익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원으로 일하다가 구속되어 7년형을 복역 중 6·25를 만나 풀려났다. 그는 1960년대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간첩이 되어 내려왔다.
  
   鄭씨는 1967년 총선 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大中씨에게 접근해 선거전략을 가르쳐 주고 선거운동원을 소개해 주었다. 鄭씨는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범으로서 1968년에 구속,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보부는 金大中 의원이 鄭씨를 간첩으로 알고 만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기소하지 않았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진 金大中씨를 金日成 정권은 공작대상으로 삼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후 일본과 미국을 무대로 反정부 활동 중이던 金씨에게 접근한 것은 在日民團 파괴공작에 앞장선 조총련계 북한공작원들이었다. 金大中씨가 이들과 합세해 만든 것이 「韓民統(한민통)」이었다. 金大中씨는 이 단체의 의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납치되었다.
  
   李厚洛(이후락) 정보부장은 『그를 납치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韓民統이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金大中씨를 의장으로 추대해 對南공작에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대법원은 이 단체가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對南적화에 종사하는 反국가단체라고 규정했다.
  
   법원과 검찰은 이 단체의 핵심인물인 조직국장 郭東儀(곽동의)의 경우 북한에 잠입해 공작원 교육을 받고 온 인물이라고 보았다. 金大中씨가 1981년 대법원에 의해서 사형이 확정된 이유는 反국가단체 韓民統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이다. 2004년 서울고등법원은 金大中씨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 관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韓民統 결성 부분에 대해선 유죄인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金大中 납치에 대한 北의 보복
  
   金大中씨가 韓民統 결성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의 對南적화 노선과 맥을 같이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이 통일방안은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우리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즉, 한반도의 유일合法국가인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과 同格으로 놓겠다는 것이 이 통일방안의 핵심이다.
  
   여기서 金大中씨가 무슨 변명을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좌익적인 대한민국觀과 거기에 기초한 현대사觀이 드러난다. 그는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이며 민족사의 정통국가란 대한민국헌법 제3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북한을 자유민주체제로 흡수하는 자유통일이어야 한다는 점도 수긍하지 않는다. 여기서 金大中과 대한민국의 타협할 수 없는 不和가 생긴 것이다.
  
   이런 反헌법적·反국가적·親北的 성격을 가진 김대중式 통일안은 반드시 북한정권의 對南공작에 이용될 소지가 있었다. 그 우려는 2000년 6·15 선언에서 金大中씨가 金正日의 對南적화 노선을 받아들인 反헌법적인 연합연방제 통일방안에 동의함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그 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좌익득세와 남북한 左派정권 공조현상, 그리고 反美狂風(반미광풍)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973년 8월의 金大中 납치사건 이후 일본에선 정부, 언론 할 것 없이 反박정희-反韓 태풍에 휩쓸렸다. 1987년 김현희에 의한 대한항공 폭파 사건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韓·日 간에 정보교류가 재개될 때까지 양국 간엔 안보적 협력이 거의 단절되었다. 당시 對南공작의 지휘자로 등장한 金正日은 이런 反韓 무드를 십분 활용했다.
  
   북한은 韓民統을 중심으로 金大中 구출운동을 벌이고 韓民統의 행동부대 韓靑 소속 활동가 文世光을 포섭했다. 북한공작원은 만경봉號(호)에서 文에게 朴대통령 암살을 지령했다. 최근 기자가 만난 前 북한통일전선부 요원은 『북한정권이 朴대통령 암살을 기획한 것은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했다. 1974년 8월 文은 朴대통령 대신 陸英修 여사를 사살했다.
  
   朴대통령은 이듬해 조총련 와해공작인 조총련 동포 母國방문사업을 허용했다. 발전해 가는 한국을 구경하고 간 조총련 동포들이 이런 소식을 조총련 사회에서 확산시키자 이탈자가 속출했다.
  
   북한정권은 이에 대응해 조총련 동포들에게 북한 방문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보고 돌아왔다. 한국의 발전상과 북한의 지옥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조총련은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승리가 패배로, 패배가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어지는 남북대결의 한 드라마였다.
  
  
   계급투쟁적 시각
  
   1977년 12월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에서 열렸던 金日成-호네커(東獨 공산당 서기장) 회담에서 金日成은 흥미 있는 말을 했다.
  
   『남한에서 朴正熙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반공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朴正熙를 고립시키고 남한의 민주화 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어쨌든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金日成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지면 비록 金泳三 대통령과 같은 反共민주주의자가 집권해도 언론자유나 선거의 자유를 악용해 공산세력을 침투시킬 수 있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부보다는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상당히 적중한 예언이 되었다. 북한정권이 金大中씨를 지원한 것도 그가 집권하는 것이 對南적화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에 나온 「김대중 語錄集」에는 그가 한국 사회를 계급투쟁적, 또는 계층갈등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게 하는 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만 소개한다.
  
   <경제건설이란 이름 아래 국민은 세계 최고율의 조세부담을 강제당하고 있는데 농촌과 근로자의 생활상태는 날로 궁핍해지고 중산계층의 생활은 항시 불안 속에 있다. 민족자본으로 육성해야 할 중소기업은 사양일로를 걷는데 일부 특권분자들은 官權 및 외국자본과 결탁해서 식민지적 매판건설로 천문학적 재벌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농촌과 도시의 이중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지역 간 격차는 민족 내부의 대립조차 조장하고 있으며, 전반적 빈부 양극화 현상은 사회계층 간의 대립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카멜레온 같은 인물
  
   金大中씨는 우리가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朴正熙가 주도한 開發年代(개발연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권력자와 약자」, 「농촌과 도시」, 「근로자-농민-중소계층 對 매판재벌 및 특권층」. 이런 二分法으로 사회를 대치시키고 있다. 아래 李哲 前 의원의 진술서(1997년 12월 안기부 작성)에도 金大中씨의 계급혁명적 시각이 등장한다.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金大中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날 오후 5시경 동교동 金大中씨 자택을 방문하여 金大中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金大中씨가 저를 보고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富(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제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때 金大中 총재가 「나를 공산혁명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金大中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7년 金大中씨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盧泰愚, 金泳三 후보에 이어 제3위 득표로 낙선했다. 이 선거 직전 북한정권이 金大中씨에게 공작했다는 증언이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로부터 나온 적이 있다. 黃씨는 1997년 12월18일 안기부 직원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장엽·김덕홍 1일 동정 보고(국가안전기획부, 1997년 12월18일)
  
   1. 1(黃長燁 지칭)은 집필보조원과의 대화시 북한이 오익제 편지 등을 통해서 金大中 지지 용의를 보인 것은 지금까지 金大中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확실히 대통령에 당선시켜 경제원조 등을 얻어내려는 의도임.
  
   2. 1987년 大選 당시 허담이 1에게 金大中이 양쪽(북한·조총련?)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음>
  
   黃선생이 기자에게 부연설명한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국제비서를 할 때인데, 아마도 1987년 大選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許錟(허담)이 그 전에 어디 갔다가 와서 金日成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어요. 許錟과 나, 金容淳, 金正日이 (보고차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金日成이 나오면서 許錟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수염을 훑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그건 「시치미를 뗀다」, 즉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지요. 許錟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었어요』
  
   (金大中씨 측은 위의 李哲·黃長燁씨 주장을 부인했다)
  
  
   연방제 받으란 협박 편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도 북한은 북경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한국 선거판에 개입했다. 金正日 정권은 당선이 유력시되던 金大中 후보를 상대로 일종의 협박작전을 폈다.
  
   北京우체국의 1997년 11월11일자 消印(소인)이 찍혀 있는 편지가 金大中 진영에 들어가 있던 金元吉(김원길) 의원에게 배달되었다. 이 편지는 金大中 후보에게 전달되도록 보낸 것이다.
  
   국민회의 측은 怪편지가 도착했다고 발표한 뒤 이 편지를 안기부로 우송했다. 이 편지를 보낸 인물은 김장수로 되어 있다. 편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본인은 다행히도 일본에서 인연이 깊고 지금은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계시는 金炳植(김병식) 선생님과 상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분도 이번 大選(대선)에서는 金大中 선생께서 꼭 당선되시기를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를 건네시면서 선생님이 가장 어려운 때인 1971년 가을 도꾜(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선생님과 조용히 만나 우의를 깊이하여 선생님의 反독재운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저 트렁크를 넘겨드리던 그때를 감회 깊이 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주」와 「통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오신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 대성하면 금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나라의 통일도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을 보리라 확신하시며 선생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인사와 후원의 뜻을 전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對共수사 관계자는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金大中씨는 역대 정부가 對南적화전략으로 규정해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6·15 선언 제2항에서 사실상 수용하는 수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편지 공작을 추진했던 북한 측 對南공작부서에서는 아마도 이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의 편지에 등장하는 金炳植은 1919년 전남 신안(무안說도 있음)에서 났다. 그는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 패망 뒤 조총련 간부로 일했다. 1967년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3년 뒤엔 조총련 중앙위원회 제1부의장이 되었다. 1972년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서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해 11월부터 북한에 머물면서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국가부주석으로 있다가 1999년 7월에 사망했다.
  
  
   건네줬다는 돈의 액수 언급
  
   1997년 12월 大選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북측은 金大中 후보 측뿐 아니라 反김대중 진영으로도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는 金炳植 명의의 타자로 친 편지였다. 北측은 김장수 명의의 편지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도 보도되지도 않은 데 실망한 듯 이번에는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다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편지를 여기저기 뿌린 것이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20만 딸라(달러)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는 선생이 大選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확약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 86(1997)년 12월5일 평양〉
  
   金大中씨는 1971년 11월 도쿄에서 金載華(김재화) 등 나중에 한민통을 함께 만들게 되는 친북계 인물들과 만났다는 진술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사실만으로는 그가 金炳植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다.
  
  
   실정법에 「다소」 어긋난 것
  
   6·15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의 金大中과 金正日.
  
   북한통전부 前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金正日은 金大中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들고 나오자 「역이용 전략」의 수립을 통일전선부에 지시했다고 한다. 金正日은 1999년 康仁德(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 특강에서 『우리 체제를 악랄하게 헐뜯었다』면서 『중앙정보부 對北담당 국장, 심리전 국장, 북한문제연구소 소장,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경력을 볼 때도 대단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니 통일부 장관 자리에서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통전부는 즉각 3위1체 무기를 꺼내들었다. 3위1체란 다름 아닌 통전부, 金大中 정부, 그리고 한국內 親北 및 左派세력의 일심체였다. 북한은 우선 노동신문을 통해 康仁德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듭 천명했는데, 그 논조는 단순히 규탄이 아니라 명령 같은 것이었다.
  
   한편 통전부는 노동신문과 동일한 내용을 26연락소가 운영하는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한국內 親北 및 좌익세력들에게 거의 매일 방송으로 지시했다.
  
   그들은 북한과 한 목소리로 「北南관계의 개선과 통일의 앞길에 새로운 장애를 조성했다. 걸림돌이다」 하는 식으로 康仁德 퇴진 캠페인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金大中의 지시로 1999년 5월24일 통일부 장관직에서 康仁德이 해임됐다.
  
   그 시간에 金正日은 강원도에 있는 갈마초대소에서 통전부 간부들과 함께 康仁德 해임 작전을 자축하는 파티를 성대히 벌였다. 남북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통전부 요원의 手記)
  
   2000년 6월 金大中-金正日 평양회담은 李長春(이장춘) 대사의 표현을 빌리면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매수한 것」이다. 2003년의 對北불법송금사건 特檢수사기록을 精讀(정독)한 기자는 이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한 비밀회담이 민족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흥정판이란 인상을 받았다. 현대그룹을 내세워 金正日 정권에 뇌물을 얼마나 주느냐 하는 깎고 올리기 흥정이었다.
  
   金大中 당시 대통령이 현대그룹을 창구로 하고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마카오內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 준 행위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再수사하여 단죄되어야 할 세계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희대의 對국민 사기극이었다.
  
   金大中씨가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위험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그에 대한 북한정권의 오랜 투자와 접촉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46년에 그는 좌익사상을 청산했다고 말했지만 권력을 잡은 뒤 그의 언동과 정책에선 이념적 本色(본색)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매도되어 온 그의 행동엔 이념적 자발성과 소신이 발견된다.
  
   그는 金正日의 비자금 계좌로 보내는 돈이 군사비로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불법임을 인식하고도 송금을 지시했음이 확실하다. 林東源(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金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송금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主敵의 수괴가 해외에 숨겨 놓은 비자금 계좌로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核무기 개발이나 對南공작비로 쓰도록 하는 것이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는 정도라면 金大中씨는 자신의 死活이 걸린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돈 먹고 약점 잡은 金正日의 공갈
  
   金正日의 對南적화전략을 다 받아들인 6·15 선언이 어떤 분위기 아래서 나왔는지는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6월14일 오후 평양. 金大中-金正日 회담이 열렸다. 金正日은 對坐(대좌)하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배석자의 증언).
  
   『오늘 아침 남조선 텔레비전을 보니까 대학에서 인공기를 걸었다고 검사가 학생들을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서 頂上회담이 열리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분위기에선 회담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시고 푹 쉬신 다음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金대통령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돈 먹은」 金正日이 「돈 바친」 金大中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막말은 세계 어느 頂上회담에서도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김일성대학교에 태극기를 올린 학생들이 있었다면 金正日은 현장 사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인간적 윤리에도 어긋난다. 20세나 연장자인 金대통령이 아닌가.
  
   이는 도저히 「돈 먹은」 자의 미안해 하는 태도가 아니다. 돈 먹고 약점 잡은 깡패의 태도이다. 金大中씨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이 자를 「효심 있는 지도자」라고 평했다. 金正日로서는 金大中씨와 현대가 함께 만들어 준 5억 달러가 고맙지 않았을 수도 있다. 「文藝春秋」 2000년 12월호에 실린 金正日의 간부회의 육성 기록(1999년도 작성)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권을 쥐고 있는 金大中은 야당시대를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美帝의 등에 타고, 反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 있다. 수령님은, 「金大中은 민족주의자임과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서, 오늘의 金大中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金大中은 야당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 접근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신뢰와 의리를 모두 저버리고, 反사회주의와 反통일정책에 미친 듯이 나아가고 있다>
  
   金大中씨는, 따라서 대한민국은 金正日이 내민 6·15 선언이란 독약을 마셨다. 그 뒤 한국 사회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의 안보불안, 경제불황으로 심화되었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2항은 북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對南적화전략을 金大中 대통령이 수용한 셈이었다. 이 선언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용어는 남북한 左派정권이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하는 행태로 나타났다.
  
   2000년 6월 이후 金大中씨는 일방적으로 金正日에게 굴종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 왔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독재자와 임기가 있는 민주국가 지도자가 밀실거래를 하면 반드시 독재자가 이긴다. 金大中씨는 金正日의 직접 지령을 받고 일본인을 납치했던 거물공작원 辛光洙(신광수)까지도 북송해 주었다. 그러면서 辛이 납치했던 일본인의 송환은 커녕 生死확인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억 달러를 北에 퍼주고도 국군포로, 납북어부를 단 한 사람도 데려오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런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金正日에게 돈을 주고 약점 잡힌 사람의 강요된 행태인가, 좌익사상에서 나온 자발적 행동인가? 아마도 양쪽 다일 것이다. 좌익이념의 세례를 받았던 그는 대한민국 편에서 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담·냉소·적대감밖에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이념은 가치관이고 감정이다.
  
  
   회복 불가능한 조치 주문
  
   퇴임 이후 金大中씨의 金正日에 대한 低자세는 더 심해졌다. 核실험이란 도저히 변명이 불가능한 도발행위를 金正日이 저질러도 金大中씨의 「金正日·햇볕정책 감싸기」와 「미국 때리기」는 도를 더해 갔다. 그는 지난 10월 말 목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核실험 했다」고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짧은 문장에 사실이 아닌 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金正日과 金大中씨뿐일 것이다.
  
   첫째,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자가 남북관계를 개선했다고 주장한다. 간첩을 보내고, 서해상에서 두 차례 도발하고, 한국을 겨냥한 核실험을 하고, 金大中씨의 訪北마저 불허한 북한정권을 놓고서 「개선」이란 말을 쓴다면 金大中씨는 노예근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과거 판문점에서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를 했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1976년 도끼만행 때,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정신으로 대응했다. 그때 도대체 누가 피란 갈 준비를 했단 말인가.
  
   셋째, 核실험을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말은 김대중類의 從金세력에게만 해당된다. 국제깡패가 核무기를 들었는데 한국인이 안심하고 산다니? 안심하고 산다는 인간들은 반역자들, 정신차려야 할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이 필요한 인간들이지 정상적인 국민들은 아니다. 일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이유는 金大中씨 덕분이 아니라 李承晩·朴正熙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구축한 韓美동맹과 국군의 對北억지력 때문이다.
  
   넷째, 북한, 즉 金正日이 한국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들었단다. 감사의 표시가 核실험이고 미사일 발사인가?
  
   金正日의 核실험 이후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盧대통령을 압박하여 親김정일 노선으로 몰아간 金大中씨는 여러 번 무시무시한 충고를 했다. 金正日-盧武鉉 회담을 열어서 남북관계가 右派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합의를 하라는 요지였다. 지금의 한국은 약 30도 좌경화된 상황이다. 이 정도에서 멈추어도 과연 정상적인 사회로 복원될 것인가 의문인데 더 좌경화를 하라는 충고인 것이다. 國體(국체)와 헌법에 회복이 불가능한 타격을 주라는 뜻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한국은 20~30% 정도의 赤化현상을 보이고 있다. 골수 從金(金正日 추종) 좌익은 유권자의 약 10%이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親北세력을 합치면 약 20%이다. 이들은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 있으며, 방송·노조·사회단체 등에 포진해 있다. 정권과 대중조직, 즉 한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실제로 행사하는 동원력은 40~50%쯤 될 것이다. 요지부동의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약 30%이다. 나머지 50%는 不動層(부동층)이다. 정권이 KBS·MBC 등 선동기구를 총동원해 50%의 流動層(유동층)을 집중공략하면 뻔한 거짓말도 믿게 만들 수 있다.
  
   청와대·국회·열린당엔 전향하지 않은 386 극좌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들은 영혼이 없는 관료집단을 부려서 反헌법적 정책을 밀고나간다. 여기에 「실내 정당」 한나라당은 대중조직이란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입으로만 싸운다.
  
  
   5·31 선거, 국민들의 대각성
  
   그럼에도 盧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고 열린당이 해체단계로 접어들도록 만든 것은 5·31 선거를 통해서 극적으로 확인된 국민들의 대각성 흐름이었다. 金正日에게 굴종하면서 국가를 분열시키고 경제의 동력을 망가뜨린 盧정권의 무능과 악랄함에 치를 떠는 국민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정상적인 선거가 치러진다면 左派의 再집권은 어렵다.
  
   이런 위기감은 盧대통령보다 金大中씨를 더 불안하게 만든 듯하다. 盧대통령이 對北굴종정책에서 이탈하면 金大中씨는 소외되고 매도될 구도였다.
  
   내년에 金正日-盧武鉉 회담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대선用일 수밖에 없다. 盧대통령은 金正日에게 탈출로를 뚫어 주고, 金正日은 盧대통령과 金大中씨 세력의 정권연장을 도와주는 쇼를 하고 공작을 약속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반발한 右派세력이 행동하면 左派의 대중조직과 어용언론이 궐기할 것이다. 공무원 조직마저 左右로 분열되고, 유력 후보자 저격과 같은 돌발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경찰과 군대마저 분열되고 여기에 북한이 개입하면 대한민국은 內戰으로 들어간다. 이런 악몽은 과연 상상에 그칠 것인가?
  
   한국인은 金日成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죽는 것을 보고 「빨갱이는 안 돼」란 결단을 내렸다. 그 약효는 30년으로 끝나고 1980년대 학원을 중심으로 다시 공산주의가 퍼져 갔다. 바로 그때 동구 및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됨으로써 「좌파는 쓰레기이다」는 사실을 再확인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허점을 틈탄 좌경세력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역사는 세 번째의 경종을 울렸다. 즉, 1995년 이후 5년간 북한주민 300만 명이 金正日 수령독재의 실패로 굶어 죽었다. 공산주의가 惡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국인 약600만 명이 죽은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2代에 걸친 左派정권을 탄생시켰다. 左派정권 8년간 한국인의 정신이 병들었다. 다수 한국인이 金正日보다 부시를 더 미워한다. 강도 金正日 정권에 인질로 잡힌 셈인 한국인이 그 강도와 손잡고 경찰에 대항하자는 취지의 소위 민족공조론에 속고 있다.
  
  
   金大中이냐, 대한민국이냐
  
   盧武鉉-金大中 연합세력은 내년 선거판에서 양극화와 같은 계급적 선동, 민족공조론과 같은 말장난, 그리고 지역주의를 부추겨 깨어나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려 들 것이다. 한국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두 개의 守舊的 이념이 계급투쟁론과 지역주의이다. 盧武鉉-金大中 세력이 이를 다시 살려내어 한국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열시키는 것도 모자라 지역적으로 2중 분열시킨다면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란상태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지난 60년간 근면성실한 국민들이 李承晩·朴正熙·李秉喆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손잡고 韓美동맹의 튼튼한 뒷받침을 받아 가면서 발전시키고 뿌리 내린 자유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의 민주적 시스템이 「언론자유」·「선거의 자유」·「사유재산제도」라는 3大 기능을 동원해 이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느냐, 국가분열 내지 赤化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 2006년 12월의 대한민국이다.
  
   일본에선 올해 일종의 탐색전이 있었다. 在日한국民團의 집행부 내부로 조총련 출신, 한민통 출신이 슬며시 들어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이 망해 가는 조총련과 「민족화해」란 美名下에 야합을 시도했다. 이 야합을 중계한 것은 金大中씨가 만든 한민통(지금은 한통련) 세력이었고, 盧정권도 지원했다.
  
   이 공작엔 신분이 공개된 조총련 간첩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金正日·金大中·盧武鉉 세력이 손을 잡고 다 이긴 民團을 죽어 가는 조총련 앞에 굴복시키는 형식으로 억지 화해를 만든 것이다. 일종의 좌익 쿠데타였다.
  
   民團 지휘부의 좌경화에 분노한 民團 구성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民團의 親조총련 집행부를 몰아내고 새 집행부를 선출했다. 순수한 애국심과 정의감으로써 좌익 쿠데타를 진압한 셈이다. 이런 일이 2007년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호남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이냐, 金大中이냐」의 결단을 애국적으로 한다면 대한민국은 위기에서 구제될 것이다.●
  
[ 2021-01-18, 22: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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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21-01-19 오전 4:35
한마디로 쉽게 요약하면 빨갱이란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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