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恩人 朴正熙 대통령 생가 방문기
반공자유-교양영어(32): Africa 40 year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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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민족의 恩人 朴正熙 대통령 생가 방문기


그는 가난에 지친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데도(가난의 지옥에서 고난을 당하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인지) 세상에 나왔다. 그는 보릿고개의 절망을 체험하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한국 민중의 가슴에 맺혀 있는 恨(한)의 原流(원류)가 배고픔이라는 것을 直視(직시)한 분이었다. 그는 보릿고개로 굶주리고 있는 민중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배불리 먹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밖의 것들은 아무리 優美(우미)한 것일지라도 남의 나라 이야기이며 實在(실재)와는 전혀 관계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난에 찌든 민중의 절망과 고통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아파했다. 그는 자신의 榮達(영달)에 自足(자족)하지 않았다. 많은 수재가 일류대학을 나와 자신의 富貴榮華(부귀영화)만 추구하며 민중의 아픔에는 無心(무심)하게 살아가는데도(이것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지나칠 만큼 검소하게 살면서 가난의 서러움을 잊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그는 가난 해결에 全力을 다 하였다. 빈곤퇴치를 최우선의 국가정책으로 삼고 이것의 달성에 방해가 될 때는 그 神聖(신성)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실현에도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는 민주주의는 선동 정치가나 정치 지식인의 권력쟁취의 수단으로 악용되기 쉬우며 서구식 민주주의가 빈곤퇴치를 위한 최선의 처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경제건설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였다. 민주주의를 염불처럼 읊조리며 ‘민주화’에 사생결단의 자세로 뛰어드는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 학생들의 정치적 자유보다는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은 살림살이가 하루하루 나아지는 기쁨 속에 즐겁고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는 국민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고, 보다 더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전국 坊坊曲曲(방방곡곡)에 공장을 건설하고 도로를 닦고, 댐을 건설하고, 수출을 독려해 檀君(단군)이래 최대의 ‘국가건설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전개하였다.


우리 민족이 韓半島(한반도)에 들어 온 이후 처음으로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배고픔 대신 비만이 두려워 적게 먹으려고 애쓰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다. 붉은 민둥산도 푸른 靑山(청산)으로 변하였다. 天地開闢(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세계인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한 위대한 超人(초인)의 ‘가난의 恨(한)’이 빚어낸 감동적인 창조물이다.


그가 피살되었을 때 극소수의 ‘민주투사’ 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哀痛(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민주투사’들은 그를 죽인 자를 義人(의인)이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나도 이 ‘민주투사’들은 권력까지 잡고 여전히 그를 용서 못 할 독재자로 매도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70% 이상이 그를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崇慕(숭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깡그리 무시하며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국가건설이 이루어진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을 암울한 시대라고 끊임없이 卑下(비하)하고 있다. 埃及(애급,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고난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모세처럼 5000년 가난의 桎梏(질곡)에서 우리를 구출하여 先進富國(선진부국)으로 이끈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기는커녕 비난하고 冒瀆(모독)만 일삼고 있는 것이다.


逝去(서거) 20주년이었던 1999년 6월12일, 늦었지만 구미에 있는 그의 生家(생가)를 방문하였다. 집안은 절간처럼 적막하였다. 아무도 없었다. 관리인도 눈에 띄지 않았고 芳名錄(방명록)은 작년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으며 누더기처럼 꾀죄죄하였다. 화장실 소변기에는 누렇게 때가 끼어있었다.


생가를 구미시에서 관리한다는데 직원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현재의 구미시장은 ‘민주투사들’의 政黨(정당)에 속해서 그런지 주민들이 관리 상태가 부실하다고 항의하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단다.


나는 방명록에 ‘5천 년의 가난을 해결하신 민족의 恩人(은인)’이라고 기록하였다. 밖에 나오니 초라한 골목길 한 모퉁이에서 내가 타고 간 흑청색 쏘나타 승용차가 오후의 눈부신 태양 속에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산작로 위에 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트럭 뒤를 다 떨어진 고무신 신은 발로 뒤쫓아 가던 까마득히 먼 어린 시절이 떠오르자 가슴이 찡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32. Africa 40 years on

-John Grimond, our former foreign editor, revisits the corner of Zambia where he taught in 1965


32-1-269

GOD must have been working to a budget when He came to make Zambia, for after the spectacular creation of the Victoria Falls and a few lesser bursts of exuberance, it was nearly all monotonous bush for the rest of the country, and by the time He got to Lundazi the cash was clearly at an end. Lundazi is an unremarkable place, way out east on the Malawi border, and on the road to nowhere much. The only town—township, technically—in an area the size of Ohio, it has just one building of note, a hotel built in imitation of a small Norman castle by a district commissioner in the late 1940s, when the country was run by the British. The Castle is a charming curiosity, but from its battlements the horizons hold none of the views for which Africa is famous. For the most part, Lundazi is quiet, mildly decrepit and, in the dry season at least, always dusty. Yet, for all that, it is unpretentiously welcoming, and its people are delightful.


So it certainly seemed in 1965, when I went there first, as a British 18-year-old filling the gap between school and university, and so it seemed again when I revisited it a few months ago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In 1965 Zambia, hitherto called Northern Rhodesia, was enjoying its first year of independence from Britain. The hated federation with Southern Rhodesia and Nyasaland had been dissolved at the end of 1963, and Ian Smith's Southern Rhodesia had not yet made its 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hich, when it came (in November 1965), was to bring turmoil to the entire region. Zambia, with huge reserves of copper, was potentially rich. It was led by a man of some decency, Kenneth Kaunda, and, all in all, there was a sense of hope. I shared it.


32. Lundazi로 돌아옴

-우리 신문사의 前 외국담당 편집장인 John Grimond, 그가 1965년에 가르쳤던 Zambia의 僻地(벽지: corner)를 다시 찾다


神은 Zambia를 만들러 왔을 때 예산을 아껴서(to a budget) 일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웅장한 Victoria 폭포와 서너 개의 보다 덜 풍요한(빅토리아 폭포보다는) 풍경(bursts)을 창조한 후에 나라(Zambia)의 나머지 지역을 위해서 그가 만든 것(it)은 모두 단조로운 수풀이기 때문이고 그가 Lundazi에 이르렀을 때는 현금이 거의 바닥에 와 있었다. Lundazi는 멀리(way: 훨씬, 매우) 동쪽으로 Malawi국경과 접해 있고, 별로 갈 데도 없는 길가의 눈에 뛰지 않는 곳이다. Ohio 규모의 지역에 있는 유일한 도시(town)―전문적으로 말하면, 郡(군)―인 Lundazi는 나라가 영국에 의해 통치되던 1940년대 말에 작은 Norman城(성)을 모방하여 지역행정관에 의해서 지어진, 한 호텔이 눈에 띄는 유일한 빌딩이다. 그 城은 매력적인 물건(curiosity)이지만, 銃眼(총안)胸壁(흉벽)으로부터 눈에 들어오는 지평선에는 아프리카의 유명한 전망은 하나도 없다. Lundazi의 대부분의 지역은 조용하고 노쇠해 있고 적어도 건기에는 항상 먼지투성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소박하게 환영하는 분위기이고 그곳 사람들은 명랑하다.


1965년에는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그때 나는 학교와 대학 사이(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가기 까지)의 시간을 채우면서 18세의 영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그곳에 갔었고 수개월 전 40년 만에 처음으로 그곳을 재방문하였을 때도 그렇게 보였다. 1965년에 이때까지 Northern Rhodesia로 불려오던 Zambia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차 년도를 즐기고 있었다. 증오를 받고 있던 Southern Rhodesia및 Nyasaland와의 연방은 1963년 말에 해체되었었고 Ian Smith의 Southern Rhodesia는 아직 일방적인 독립선포를 하지 않았었으며 그 선언이 왔을 때(1965년 11월에), 그것은 전 지역에 소란(turmoil)을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막대한 구리 매장량을 가진 Zambia는 잠재적으로 부유하였다. Zambia는 품위가 있는 Kenneth Kaunda에 의해서 영도되고 있었으며 모든 면에서 희망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 희망을 공유했었다.


 

32-2-270

The next decades, though, were not good for Africa. Political instability, economic stagnation, corruption and civil breakdown overtook many of its countries, and Zambia had its share of setbacks. Yet it suffered no military coup (overlooking a little incident in 1997), no civil war and certainly no genocide. To people outside its borders, its travails were portrayed more in the statistics of international reports than in images on the evening news. So how had things changed in out-of-the-way Lundazi?


Not much, to judge by the state of the road I was again travelling, 40 years on. The road is important to Lundazi. There is only one of significance, which runs the 186km (116 miles) from Chipata, which was called Fort Jameson—or, more familiarly, Fort Jim—until 1969. Chipata is the capital of the Eastern province, and pretty much the end-point of the Great East Road from the capital, Lusaka, so virtually everyone going to or from Lundazi uses the road from Chipata. In 1965 it was an unpaved artery, alternately hard and corrugated, then soft and sandy, always dusty and often, when unmarked bends or unseen chasms suddenly appeared, rather dangerous. That was in the dry season. In the rainy season it could be so muddy as to be impassable. Wet or dry, there would be monkeys in the trees, nightjars in the headlights and silent figures walking, running or mounted—often two at a time—on unlit bicycles. Sometimes, too, there would be huge trucks, throwing up clouds of dust and threatening to send any would-be overtaker hurtling into the bush.


그러나 그 다음 수십 년간은 아프리카에 좋은 일이 없었다.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停滯(정체), 부패와 사회 붕괴(civil breakdown=civil unrest)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를 덮쳤고 Zambia는 그런 퇴보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Zambia는 어떠한 군사 쿠데타도(1997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을 제외한다면), 어떤 內戰(내전)도, 그리고 확실히 어떤 집단학살의 고난도 당하지 않았다.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는 Zambia의 고통(travails)은 저녁 뉴스에 나타나는 그림(images)에서 보다는 국제보고서의 통계자료에서 더 많이 묘사되었다. 그래서 외딴곳 Lundazi에서는 상황(things)이 어떻게 변하였는가?


내가 다시 달리고 있는 도로의 상태에 의해서 판단해보면 40년간 계속해서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도로는 Lundazi에 중요하다. 1969년까지 Fort Jameson(fort:요새, 보루)―혹은 더 친숙하게, Fort Jim―이라고 불렸던 Chipata로부터 86km (116 miles)를 달리는 의미 있는(도로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도로가 단 하나 있다. Chipata는 동부 지방의 수도이고 수도인 Lusaka로부터 출발하는 Great East Road의 종점이다. 그래서 Lundazi를 왕래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상 Chipata에서 오는 이 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1965년에는 그 도로는 非포장 동맥이었고 교차적으로 딴딴하고 물결무늬가 있었고 그러고는 부드럽고, 모래였고 항상 먼지가 났고, 표지가 없는 굴곡이나 보이지 않는 깊게 갈라진 넓은 틈이 갑자기 나타날 때는, 상당히(rather) 위험하였다. 그 때는 건기였다. 우기에는 도로는 너무 진흙탕이어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건기이든 우기이든, 나무에는 원숭이가 있었고 전조등 불빛에는 쑥독새가 보였고, 소리 없는 인물들이 걷거나 달리거나 혹은―종종 한 번에 두 명이―불이 없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또 때때로 구름 같은 먼지를 치솟게 하며, 추월하려는 자는 숲속으로 획 던지려고 위협하는 거대한 트럭들이 있었다.



32-3-271

The road has since been tarred, and a 4X4 can now bowl along the first 130km of the approach to Lundazi at some speed. But then, at Kazonde, the tar stops and thereafter, despite the patching and grading in progress, all vehicles must slow to little more than walking pace to navigate the slopes, trenches and pot-holes of the remaining 50km. Repairs had been started before but the contractors stopped work when they were not paid, and in 2004 locals removed many of the new metal culverts in order to fashion tools from them. The people here are so poor that all road signs—there are not many—are deliberately perforated, for otherwise they would soon be removed and turned into pots and pans.


Many sights along the road are unchanged after 40 years: the women carrying huge baskets on their heads, or bundles of logs, or drums of water; the broken-down lorries, one whose driver is asleep beneath the back axle, another whose sackclothed cargo has tumbled off and burst on the ground; the ox-carts, the bicycles, the wayside hawkers selling bananas, charcoal and sugarcane. But there are changes, too. For the first 60km going north, schools, brick houses and tin roofs suggest greater prosperity. The source of this seems to be a new diversification of crops. In the past, farming was almost entirely a subsistence affair with little grown except for maize, and the granaries visible from the road show that this remains the staple food. Now, though, there is evidence of cash crops: the tobacco sheds just outside Chipata and a store 115km beyond; two lorries laden with cotton; people selling sweet potatoes; patches of cassava under cultivation. And minds are evidently fed too. A sign at Lumezi points to a secondary school that was not there in 1965. More sinisterly, after 87km, an orphanage now stands by the road. This turns out to be a portent of one of the biggest changes since the 1960s.


도로는 그 이후 타르가 칠해졌었고 지금은 4X4(4륜 구동차)이 Lundazi 방향 첫 130km 접근로를 약간의 속도로 굴러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Kazonde에서 타르를 칠한 길은 끝나고 땅 고르기와 땜질이 진행 중이지만 모든 차량은 나머지 50km의 경사지와 참호와 움푹 패인 곳을 나아가기(navigate) 위해 걷는 것보다 못한 속도(pace)로 느리게 가야 한다(slow). 전에 보수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업자들(contractors=계약자)은 공사비를 지급받지 못할 때는 공사를 중단해 버렸고 2004년에는 지방민들이 연장(tools)을 만들기 위해 새로 설치한 금속 排水渠(배수거: culverts)를 많이 뜯어가 버렸다. 이곳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여 모든 도로 표지판은―표지판이 많지 않다―고의적으로 구멍을 내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표지판들은 이내 뜯겨 나가서 항아리나 납작 냄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도로에 연해 있는 많은 광경은 4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 거대한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들, 나무 단, 물통들; 고장 난 트럭들, 고장 난 트럭의 뒤 차축(back axle) 밑에서 잠자고 있는 운전수, 짐 자루가 굴러떨어져 땅바닥에서 터져 버린 운전수, 소달구지, 자전거, 바나나와 숯과 사탕수수를 팔고 있는 노변 행상들. 그러나 변한 것도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첫 60km에 보이는 학교와 벽돌집과 양철 지붕은 보다 큰(이전보다도) 번영을 암시했다. 이 번영의 원천은 농작물의 새로운 다양화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농업은 옥수수 외에는 재배하는 것도 거의 없는 거의 전적으로 영세농업이었고 도로로부터 보이는 곡물창고들은 이것(maize)이 主食(주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은 換金(환금) 작물의 증거가 있다: Chipata 바로 외곽에 있는 담배 창고(담배 잎을 건조하는 창고)와 115km 너머에 있는 상점; 목화를 실은 두 대의 트럭; 고구마를 팔고 있는 사람들; 경작 중인 cassava밭. 그리고 정신도 분명히 살찌우고 있었다. Lumezi에 있는 한 표지판은 1965년에는 없었던 한 중등학교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욱 불길하게도, 87km를 간 후에, 지금은 도로가에 고아원이 하나 서 있었다. 이것은 1965년 이후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에 대한 前兆(전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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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had never been a priority for the authorities in Northern Rhodesia. The country had only three secondary schools for Africans in the mid-1950s, and two of those were run by churches. An expansion began in 1960, with talk of a secondary school for the capital of each of the seven rural provinces, but it was not until independence that one was opened in Lundazi. It was a simple affair: two classes to start with, all boys, four teachers (I was the fourth), few books and not much else. The dearth of equipment extended to hymn books, important as they were in a part of Africa which still showed the influence of David Livingstone and his Presbyterian beliefs. One or two hymns, however, had been cyclostyled, taught to the boys and committed to memory. “Courage, Brother, do not stumble” was particularly popular. Each day, morning assembly would start with the words, “We will now sing our hymn.” A pause followed, just long enough to allow the possibility of suspense as to what the choice would be. Then, almost invariably, came, “Let us sing ‘Courage, brother',” and the air swelled with a lowing of deep male voices.


The headmaster was Arthur Lewanika, a scion of the Lozi royal family whose kingdom, Barotseland, lay in western Zambia. He and his deputy, Roger Zulu, had been the only teaching staff until I and another recruit, Alfred Zaranyika, a Southern Rhodesian, arrived. Neither Alfred nor I had had any training as teachers, and I at least had no books for the lessons in French, maths and physics that I was supposed to give. It is difficult to believe that I taught anyone anything. Still, I had heard in Lusaka before returning to Lundazi that about ten of my former pupils had eventually graduated from university and some had become engineers (Alex Barton Manda), accountants (Major Mkandawire) or lawyers (Masuzu Zimba). At independence in 1964, the country had had fewer than 100 graduates.


Northern Rhodesia 당국자들에게 교육은 결코 우선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1950년대 중엽에 흑인을 위한 중등학교는 3개교뿐 이었고 그중 2개교는 교회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7개 농촌지역 각각의 수도에 중등학교 1개교 설립 이야기와 함께 1960년에 확장(중등교육)사업이 시작되었지만 독립이 되어서야 Lundazi에 중등학교 하나가 개교되었다. 그것은 소박한 사업이었다; 시작할 때는 모두 남학생의 2개 학급과 4명의 교사(나는 네 번째였다)와 교과서도 거의 없었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David Livingstone과 그의 장로교 신앙의 영향력이 아직도 현저하였던 아프리카의 지역에서 찬송가책이 중요하였지만 敎具(교구: equipment)의 부족은 찬송가책에 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두 개의 찬송가는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남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암기하게 하였다. “형제여, 용기는 결코 비틀거리지 않습니다.”가 특별히 인기가 있었다. 매일 朝會(조회)는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라는 말로서 시작했었다. 선택할 곡(the choice)이 무엇일지에 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suspense: 미결상태) 우물쭈물할 수 있기에만 충분한 잠깐의 침묵(pause)이 뒤따랐다. 그러고 나서 거의 변함없이 “‘형제여, 용기’를 부르겠습니다”가 뒤따랐고 그러면 공중은 저음의 깊은 남성 목소리로 팽창되었다.


교장은 Lozi王家(왕가)의 자손인 Arthur Lewanika였고 그의 왕국 Barotseland는 Zambia 서부에 있었다. 그와 그의 교감(deputy:부책임자) Roger Zulu은 나와 또 한 명의 신임인 Southern Rhodesia 출신의 Alfred Zaranyika이 부임할 때까지는 유일한 교사진들이었다. Alfred도 나도 교사로서 어떤 훈련도 받은 적이 없었고 나는 내가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불어와 수학과 물리학 수업을 위한 책도 없었다. 내가 누구에게라도 무엇이라도 가르쳤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그래도 나는 Lundazi로 돌아오기 전 Lusaka에서 나의 前 학생들 중에서 10명이 끝내 대학을 졸업하였고 어떤 학생들은 엔지니어(Alex Barton Manda)와 회계사(Major Mkandawire)와 변호사(Masuzu Zimba)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었다. 1964년 독립 당시에 그 나라는 대학졸업자(graduates)가 100명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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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ents, who came from far and wide within the surrounding area, were boarders, and so the school was always busy. But life in Lundazi, a town of perhaps 2,000-3,000 in those days, was quiet. In the evenings, the only noises apart from human voices were the hiss of the Tilley lamps that provided our light—no electricity then—and the calls of the hyenas that sometimes ate the Lewanikas' chickens and often came right up to the house that Alfred and I shared. The main amusements were provided by the trials of daily life: Alfred's mile-long sprint pursued by a swarm of bees; my old car catching alight as I drove past the market one day; Alfred's attempt to extend the life of his car battery by warming it up in the oven, an experiment that caused Arthur huge amusement when “over-baking” led to muffled explosions and quantities of boiling acid that seeped on to our kitchen floor.


It was almost impossible to get a car mended in Lundazi, or even to replace a battery. The shops were basic. Food could be bought in the market and sometimes people would come to the door offering a (live) chicken or some oranges. But Alfred was always scornful about the lack of choice: people were so much more enterprising, he said, in Southern Rhodesia (that was, of course, before Robert Mugabe had done his best to wreck the country). Anything even slightly sophisticated—oil lamps, blankets, cloth for chitenges, the nearly universal garment for women in those days—was available only from the shops owned by “Asians”, notably Mulla Stores, founded by old Mr Mulla, who had made his way to Lundazi from Gujarat via Mozambique in the 1930s. 


주변 지역의 원근에서 오는 학생들은 기숙생들이었고 그래서 학교는 항상 분주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대략 2,000-3,000명의 소도시 Lundazi의 삶은 평온했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불빛을 제공해주는 Tilley 램프 타는 소리(hiss)와 ―당시에 전기가 없었다―하이에나 우는소리였으며 하이에나는 때때로 Lewanika家의 닭을 잡아먹었고 Alfred와 내가 같이 있던 집에까지 다가 왔었다. 주된 즐거움은 일상생활의 시련에 의해서 제공되었다:Alfred가 벌떼에 쫓겨서 1마일이나 질주한 것; 어느 날 장터를 지나가다가 내 고물자동차가 불이 난 것; Alfred가 오븐에 넣고 가열함에 의해서 자동차 배터리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실험, 이것은 “너무 굽는 것”이 소리 죽인 폭발과 부엌 바닥에 계속 스며드는 다량의 끓는 酸(산)으로 이끌었을 때 Arthur교장에게 거대한 즐거움을 주었던 실험이었다. 


Lundazi에서 차를 수리하거나 심지어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였다.가게에는 기본적인 것만 있었다. 식품은 시장에서 구입될 수 있었고 때때로 사람들이 살아있는 닭이나 오렌지를 제공하면서 문 앞에 오곤 했었다. 그러나 Alfred는 가게 수)의 부족에 대해서 항상 조소하였다. 그는 Southern Rhodesia에서는 사람들이 훨씬 더 진취적이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물론 Robert Mugabe가 나라를 난파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전의 일이었다). 심지어 약간 더 정교한 물건은 무엇이든지―오일 램프, 담요, 그 시절 거의 보편적이었던 여성의 옷인 chitenges용 옷감―,“아시아인” 소유의 가게에서만, 특히 그 중에서도 Mr Mulla에 의해서 세워진 Mulla Stores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늙은 Mr Mulla는 1930년대에 Gujarat(인도)로부터 Mozambique를 거쳐서 Lundazi 까지 왔었다.

 


32-6-274

For a drink or a meal out, the place to go was the Castle, which was presided over by Lyn Jonquière, the only other “European”, as whites were then called, in Lundazi. The Castle was where visiting politicians, contractors and civil servants would stay. It was kept spick and span by Mrs Jonquière. Of an evening, she could be found behind the bar, genially dispensing cold Castles (the hotel shared a name with a popular beer) or Portuguese wine brought in from Mozambique, Zambia's neighbour to the east, while Jim Reeves played on the gramophone. Thanks to its generator, the Castle had electricity.


You do not need a generator today in Lundazi: electricity is (usually) available from the Malawian national grid across the border, and the Castle now has television. It does not, however, have running water—except through the roof in the rainy season. The building is in a sad state, though its new leaseholder, Chifumu Banda, promises improvements.


Mr Banda, a native of Lundazi who is now a prominent lawyer in Lusaka, had warned me that I would see that Lundazi was now “worse off”. The school, though, is vastly improved. The four teachers and 70 or so students have become 43 teachers and 864 students, and they occupy a bigger site. Though no one remembers any of the original staff, Arthur's name is memorialised in the name of one of the four boarding houses. As for the students' names, neither their first nor their surnames seem to have changed much: there are Ndhlovus, Phiris, Nyirendas and Bandas galore, preceded perhaps by Best, Gift, Major, Mercy or Memory, even if, on this occasion, I meet no Time, Meat or Section Eight. 


한잔하거나 외식을 위해서 갈 곳은 Castle호텔이었으며, 호텔은 그때 Lundazi에서 백인들이 불렸던 것처럼, 유일한 우리 외의 다른 “유럽인”인 Lyn Jonquière에 의해서 관장되고(preside over) 있었다. Castle은 내방 중인 정치인과 계약자들과 공무원들이 머물곤 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Mrs Jonquière에 의해서 깔끔하게 유지되었다. 대부분의 저녁에는 축음기에서 Jim Reeves의 노래가 나오는 동안, 차가운 Castles 맥주(호텔은 인기 있는 어떤 맥주와 이름을 공유하였었다)나 혹은 동쪽으로 Zambia와 이웃인 Mozambique에서 들여온 포르투갈産(산) 포도주를 상냥스럽게(genially) 배분하면서 그녀가 카운터(bar)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호텔이 가지고 있는 발전기 덕택에 Castle은 전기가 있었다. 


오늘날 Lundazi에는 발전기가 필요 없다: 전기는 국경 너머 Malawi 국가배전망(grid)으로부터 이용 가능하며(대체로), 그래서 지금은 Castle호텔에 텔레비전이 있다. 그러나 상수도는 없다―우기에 지붕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 비록 호텔 차용인인 Chifumu Banda는 개보수를 약속하고 있지만 호텔 건물은 슬픈 상태에 있다.


Lundazi의 원주민이며 Lusaka의 저명한 변호사인 Banda사장은 (내가 여기 도착하기 前전에) Lundazi는 “더 열악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내가 보게 될 것이라고 나에게 경고했었다. 그러나 그 학교는 크게 개선되었다. 4명의 교사와 70명 정도가 43명의 교사와 864명의 학생이 되었고 그들은 더 큰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아무도 원래의 교사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Arthur교장의 이름은 4개의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의 이름 속에 기억되고 있다. 학생들의 이름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름이나 家名(가명: surname)은 많이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이번 경우(방문)에는 Time, Meat 혹은 Section Eight 같은 보지 못하였지만, Best, Gift, Major, Mercy 혹은 Memory 다음으로 Ndhlovus, Phiris, Nyirendas 그리고 Bandas galore같은 이름이 있었다.



32-7-275

The school has its own water (pumped from three boreholes), a fish pond, four plump pigs and several sheep and goats. It grows its own vegetables. But only rarely do the students eat meat, and the relentless diet of nshima—maize porridge—has apparently provoked protests in the not-too-distant past. Little money has been available for maintenance, but broken windows are being replaced, prefects now have “executive neckties”, the library contains a modest variety of books and there are ten computers, though not, as yet, an internet connection. (High telecoms charges and an overburdened relay station still keep most of Lundazi offline, though mobile phones have just arrived.) Another sign of change is that, in place of the “Procrastination is the thief of time” written on the blackboard by Alfred in 1965, a notice on a door now reads, “Don't trust corrupt politicians.”


Basic tuition is provided free, but the fees for boarding and any extra lessons come to nearly $200 a year, and uniform costs almost another $40. For most families, that is a fortune: about 70% of Zambians live on less than $1 a day. But in the past a family that could muster enough to start sending a child to school would usually be able to see the endeavour through. Today that is often untrue, simply because so many families are falling apart. In the list of students, the letter S (for a “single” orphan, ie, a child who has lost one parent) or D (for a “double” orphan) occurs ever more often against the names as the classes grow older: 14 in Grade Nine, 60 in Grade Ten. The cause is AIDS. In total, over 120 of the 864 students have lost one or both parents to this latter-day plague.


학교는 자체의 수돗물(3개의 시추공으로부터 퍼 올리는)과 하나의 물고기 연못과 네 마리의 살찐 돼지와 여러 마리의 양과 염소를 가지고 있다. 학교는 자체적으로 채소를 재배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고기를 매우 드물게만 먹고 있으며 무자비한 nshima식단은―옥수수죽― 분명히 멀지 않은 과거에 항의 행위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유지를 위해 이용 가능한 돈은 거의 없지만, 부서진 창문은 교체되고 있었고, 학급반장(prefects)은 “간부 넥타이”를 매고 있고, 도서실은 적당히 다양한 책을 所藏(소장)하고 있고 비록 아직 인터넷 연결은 되지 않지만 10대의 컴퓨터가 있다. (비록 휴대폰은 방금 도착하였지만 높은 통신료와 과부하 송신소는 Lundazi의 대부분을 여전히 오프라인 지역으로 묶어 놓고 있다). 또 변화에 대한 또 하나의 표시는 1965년에 Alfred에 의해 흑판에 써 놓았던 “延期(연기)는 시간 도둑이다.” 대신에 문에 붙여 놓은 벽보에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믿지 마라,”가 적혀 있었다.


기본 수업료는 무료로 제공되지만 기숙사비와 여타 학습에 대한 수업료는 연간 거의 200달러에 달하고 교복대금은 또 거의 40달러이다. 대부분의 가족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재산이다. Zambia인 약 70%는 하루 생활비가 1달러 미만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시작할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muster: 용기를 불러일으키다) 가족은 대체로 그 노력을 끝까지 해 낼 수 있었다(see〜through: 끝까지 해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순히 너무나 많은 가족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학생명부에서 알파벳 S(“single" 고아, 즉 한 쪽 부모를 잃은 아이) 혹은 D("double" 고아)가, 학년(classes)이 올라갈수록, 이름(성명)과 비교해서(against the names) 더 자주 발생한다: 9학년에서 알파벳수 14개가 10학년에서는 60개가 된다. 그 원인은 AIDS이다. 총계 학생 864명 중에서 120명 이상이 이 현대의 역병에 부모 한쪽 또는 양쪽을 잃었다.



32-8-276

Lundazi is far from insouciant about AIDS. The district has an AIDS co-ordinator, Christa Nyirenda, who struggles to carry out her work in the face of a constant lack of money. The churches also do their best. The Rev Frighted Mwanza's Presbyterian church, for example, is helping to look after several orphans and 55 others who are HIV-positive, some of them chronically ill. And along the road from the Castle, the Thandizani (meaning “Let's help one another”) centre also offers advice, support and HIV testing. Set up in 1999 in a former cocktail bar, whose name is still clearly legible outside, it is considered a model non-governmental organisation, but it does not offer treatment.


That is done at Lundazi district hospital, or rather it is meant to be done there. The difficulty is that the hospital is old (1950s vintage), has only two doctors (for all the 290,000 people in the district) and has to charge for the anti-retroviral drugs that can arrest the ravages of AIDS in infected people. The very poor, about 20% of those who receive these drugs, get them free; the others must pay about $10 a month. The result is that only 114 people are getting treatment out of more than 500 who are known to need it. In reality, hundreds, if not thousands, should be receiving drugs. That is evident both from the number of orphans in the school and from a sign not far from the hospital: “Coffin Workshop”.


Lundazi는 AIDS에 대해서 결코 마음이 태평하지 않다. Lundazi지역에는 자금의 지속적인 부족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업무를 수행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Christa Nyirenda라는 AIDS 조정관이 있다. 교회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Frighted Mwanza목사의 장로교회도 몇몇의 고아와 HIV양성이고 이들 중 일부는 만성인 55명의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the Castle로부터 시작되는 도로에 연해 있는 Thandizani (“서로 도와줍시다”를 의미하는) 센터도 조언과 지원과 HIV테스트를 제공하고 있다. 아직도 밖에서 이름을 선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이전의 칵테일 바였던 곳에 1999년에 세워진 그곳(센터)은 모범적인 非정부기구로 간주되고 있지만 치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치료는 Lundazi 지역병원에서 행해진다. 혹은 그곳에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병원이 낡았고(1950년대에 지어진. vintage:년대에 지어진), 의사는 2명뿐이고 [그 지역의 290,000명의 인구에도 불구하고(for all)], 감염자 체내에 있는 AIDS균의 파괴 활동을 잡을 수 있는 anti-retroviral 약값을 받아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다. 이 약을 받는 사람들 중 약 20%의 극빈자는 약을 무료로 받는다. 나머지는 한 달에 1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그 결과는 약이 필요하다고 알려진 500명 이상의 환자들 중에서 114명만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수천 명은 아닐지라도 수백 명이 약을 받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학교에 있는 고아의 수로부터 그리고 학교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棺(관) 공장”이라는 표지판으로부터 판단해 보면 명백해진다.

 


32-9-277

Fortunately, coffins are not the only source of new jobs in Lundazi. The second-hand clothes market that has sprung up is another. On a dusty patch of ground now stands rack upon rack of western clothes, made perhaps in China or other parts of Asia but already worn in Europe or America and then given away to charities to be sold, for very little, all over Africa, even in places like Lundazi. This phenomenon, known as salaula, explains why so few of the women along the road now wear chitenges, and also why a man on a bicycle too poor to have shoes may be wearing a formal dress shirt. The trade provides T-shirts and skirts and trousers for many who could not afford them in the past, and jobs for those who sell the clothes. But it has made it difficult for Zambian textile producers to compete; this is dumping in the true sense of the word.


More hopeful for Lundazi is the slow, belated improvement in agriculture. On the outskirts of town are some new tobacco sheds, built by Stancom, an American multinational. It provides loans to small farmers, trains them in agronomy and sells them seeds and fertiliser, as well as the saplings they must plant if they cut other trees down for fuel to flue-cure their crop. A Malawian company, Limbe Leaf, has also come to Lundazi, as have several cotton companies—Dunavant, an American firm, Clark Cotton, from South Africa, and Chipata Cotton, a Chinese joint-venture. Lundazi now accounts for about 12% of Zambia's cotton production, and there is talk of Dunavant building a ginnery.


For all these welcome developments, agriculture around Lundazi is woefully undeveloped. Many people have gone hungry in the past few months thanks to a poor harvest: instead of falling evenly through the 2004-05 growing season, the rains came all at once, mostly early on. Yet the land is good. It could provide much more food and cash crops too, perhaps two harvests a year, with proper irrigation. But only now are some of the dams of the colonial era being restored to use, after years of neglect and silting up. 


다행히도, 棺(관)은 Lundazi에서 새로운 직업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지금 싹이 트고 있는 헌옷 시장도 또 하나의 원천이다. 흙먼지 이는 좁은 땅 조각(patch) 위에는 서양 옷이 걸려 있는 선반이 줄줄이 서 있는데, 이들 옷들은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졌지만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 착용된 후에 자선단체(charities)에 기부가 되어 매우 저렴한 값으로 아프리카 全域(전역)에, 심지어 Lundazi같은 곳에서도 팔리고 있었다. salaula로 알려진 이런 현상이 오늘날에는 길가에 나와 있는 여인들 중에서 극소수만이 chitenges(전통의상)을 입고 있고 또 너무 가난해서 신발을 가질 수 없는 자전거 탄 남자가 정장 드레스 샤쓰를 입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무역이 과거에는 그것들은 살 수 없었던 많은 사람에게 T샤쓰와 스커트와 바지를 공급하고 있고 그 옷들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Zambia 직물생산업자들에게 경쟁하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이것은 단어(dumping)의 진정한 의미에서 덤핑인 것이다.


Lundazi로서는 늦고 느리지만 농업의 개선이 더 희망적이다. 도시의 외곽에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Stancom에 의해서 건설된 담뱃잎 창고들이 있다. 회사는 小農(소농)들에게 대부금을 제공하고 그들에게 농업기술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종자와 비료를 판매하고 그들의 작물(담뱃잎)을 flue-cure(나무를 태워서 담뱃잎을 천천히 건조하는 것)하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자른다면 그들이 심어야 되는 묘목도 판매한다.


Limbe Leaf라는 한 Malawi회사도 다른 목화회사―미국 회사 Dunavant, 남아프리카 공화국 회사 Clark Cotton, 그리고 중국과의 합작회사인 Chipata Cotton―들처럼 Lundazi에 왔다. Lundazi는 지금 Zambia의 목화생산의 12%를 담당하고 있고 Dunavant이 繰綿(조면) 공장을 건설한다는 말이 있다.


이 모든 기쁜 발전에도 불구하고 Lundazi 주위의 농업은 비참할 만큼 저개발 되어 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빈약한 收穫(수확)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 2004-05년간 농작물 성장기간 동안 비는 골고루 내리는 것 대신 초기에 한꺼번에 다 내려버렸다. 그러나 땅은 선한 존재이다. 적절한 灌漑(관개)만 있으면 (관개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물을 제 때에 공급한다면), 땅은 훨씬 더 많은 식량과 換金(환금) 작물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오랜 기간의 (years of) 태만과 토사가 쌓인 후에야, 식민지 시대에 건설한 댐이 사용할 수 있도록 복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32-10-278

It is time to leave Lundazi. Outside Mulla Stores, which seems to have had not even a lick of paint in 40 years, a few people are chatting. One or two others are bicycling from the direction of the boma, the administrative centre. Here again not much has changed. The impression is reinforced on the journey back along the pot-holed road to Chipata, even after a brief stop to greet Father Morrison and the other Catholic Fathers at Lumezi mission. But then there are the signs, really quite a lot of them, to the schools: primary schools, “basic” schools (which give a couple of years of secondary education) and Lumezi's secondary school. That is encouraging. So is the farming. But every so often are reminders of a darker side of the new reality: branches, laid down on the road to indicate a funeral. Bicyclists are expected to dismount, and trucks and cars to slow down, out of respect. I assume, perhaps wrongly, that AIDS has claimed another vicitm.


I had been prepared for most of what I found in Lundazi: I knew that half a century ago Zambia and South Korea had had roughly the same income per person, and now Korea's was 32 times greater. So I was expecting the accumulated evidence of 40 years of needless poverty, misgovernment and dashed hopes. Many of those dashed hopes I shared. But my main regret was that, back in 1965, I had not been able, instead of French and physics, to teach Korean studies, even if I had had no books. Perhaps it is not too late for someone else.


Lundazi를 떠날 때이다. 40년 동안 페인트를 한 번도 칠하지 않은 것 같은 Mulla Stores밖에서 몇몇 사람이 잡담을 하고 있다. 행정사무소(boma) 방향으로부터 한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여기에서도 변한 것이 별로 없다. 그 인상은 움푹 패인 도로를 따라 Chipata까지 가는 旅程(여정)에서, 심지어 Lumezi 선교본부에 있는 Morrison신부와 다른 카톨릭 신부들과 인사하기 위해 잠깐 멈춘 후에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학교를 가리키는 많은 표지판, 정말로 매우 많은 표지판이 있었다: 초등학교들, “기초” 학교들(2년간의 중등과정을 가르친다), 그리고 Lumezi 중등학교. 그것은 鼓舞的(고무적)이었다. 또한 농업도 그랬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reality)에 대한 하나의 더 어두운 측면을 상기시키는 것들(reminders)이 너무나 자주 눈에 띄었다: 도로가에 놓여있는, 장례식을 가리키는, 나뭇가지들이었다. 弔意(조의)를 표하기 위하여(out of respect), 자전거 탄 사람들은 내리고 트럭과 승용차는 천천히 가도록 요망되었다. 나는 AIDS가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내었을 것이라고, 아마도 틀리게, 추정하였다. 


나는 Lundazi에서 내가 본 대부분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半世紀(반세기) 전에는 Zambia와 South Korea는 대강 1인당 같은 소득을 가졌었으며,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소득이 34배나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오기 전에) 40년간의 불필요한 가난, 失政(실정:misgovernment), 상실된 희망의 누적된 증거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 많은 상실된 희망을 나도 공유했었다. 나의 주된 悔恨(회한)은, 1965년으로 돌아가서, 불어와 물리학 대신에, 한국학(studies)을, 비록 책이라고는 없었지만, 가르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 다른 누군가가 가르치기에 너무 늦지는 않을 것이다.

 

출처 : The Economist, Dec 20th 2005
[ 2021-02-09, 17: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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