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들린 루소-허영심 강하고 비열한 괴물
반공자유-교양영어(34): "Intellectuals": Rouss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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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귀신 들린 Rousseau


Rousseau는 기존 사회를 완전히 평등한 사회로 교체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원시 인간사회는 거의 완전히 평등하였는데, 그래서 원시공동사회는 탐욕을 모르는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의 사회였는데, 사유재산제도가 생긴 이후로 계급이 생기고 착취와 탐욕과 권력욕으로 인간이 추악하게 타락하게 되었다고 단정하였다. 인간사회가 에덴에서 지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즉 원시 공동사회로 회귀하면 완전평등이 이루어지고 인간은 다시 고귀한 야만인의 순수를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부자를 없애고 인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가가 국민을 지배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조직적인 문화공작(social engineering)에 의해 국민에게 완전한 도덕성을 주입하기 때문에 국민의 뜻은 즉 총의(General Will)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 될 것이다. 국민은 자발적인 집단의지에 의해 국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복종해야 되고, 국가를 사랑해야 되고, 국가에 의해 강제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은 총의를 대표하는 국가에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총의를 집행하는 지도자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시민들을 아이로 취급하고 그들의 훈육과 사상을 통제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본성’(국가의 통제에 의해 바뀌어버린 본성)에 의해 사회적 사람이 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이 된다. 新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전체 국민이 똑같은 하나가 될 것이고 그들은 행복할 것이고 그들의 행복은 공화국의 행복이 될 것이다.


Rousseau는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중요한 망상과 어리석은 짓들의 청사진을 준비했었다. 사회공학에 의해 인간을 개조하여 국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신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1억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Rousseau의 사상적 자식들이라고 하겠다. 20세기의 공산주의 살인마들인 레닌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김일성도 폴 포트도, 모두 Rousseau의 자손들이다. 국가파괴에 미쳐 날뛰고 있는 한국의 주사파들도 Rousseau의 사생아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위대한 反사회주의 소설 “악령”에서 사회혁명의 이름으로 살인과 방화와 거짓말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자행하는 한 무리의 공산주의자들을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사회주의 악령이 머리에 들어가서 사람을 죄의식이 전혀 없는 악마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원조인 Rousseau를 “귀신 들린 Rousseau”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34. "Intellectuals": Rousseau

Jean-Jacques Rousseau: 'An Interesting Madman' by Paul Johnson


34-1-282

p.1

Over the past two hundred years the influence of intellectuals has grown steadily. Indeed, the rise of the secular intellectual has been a key factor in shaping the modern world. Seen against the long perspective of history it is in many ways a new phenomenon. It is true that in their earlier incarnations as priests, scribes and soothsayers, intellectuals have laid claim to guide society from the very beginning. But as guardians of hieratic cultures, whether primitive or sophisticated, their moral and ideological innovations were limited by the canons of external authority and by the inheritance of tradition. They were not, and could not be, free spirits, adventurers of the mind.


With the decline of clerical power in the eighteenth century, a new kind of mentor emerged to fill the vacuum and capture the ear of society. The secular intellectual might be deist, sceptic or atheist. But he was just as ready as any pontiff or presbyter to tell mankind how to conduct its affairs. He proclaimed, from the start, a special devotion to the interests of humanity and an evangelical duty to advance them by his teaching. He brought to this self­appointed task a far more radical approach than his clerical predecessors. He felt himself bound by no corpus of revealed religion. The collective wisdom of the past, the legacy of tradition, the prescriptive codes of ancestral experience existed to be selectively followed or wholly rejected entirely as his own good sense might decide. For the first time in human history, and with growing confidence and audacity, men arose to assert that they could diagnose the ills of society and cure them with their own unaided intellects: more, that they could devise formulae whereby not merely the structure of society but the fundamental habits of human beings could be transformed for the better. Unlike their sacerdotal predecessors, they were not servants and interpreters of the gods but substitutes. Their hero was Prometheus, who stole the celestial fire and brought it to earth.*



34. “지식인”

Jean-Jacques Rousseau: 흥미 있는 狂人(광인) by 폴 존슨


지난 200년 동안 지식인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진실로, 세속 지식인의 興起(흥기)는 현대세계의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요인이 되어 왔다. 역사의 전체적 시각(perspective)에서 보면 그것은 많은 면에서 새로운 현상이다. 사제로서, 서기로서 점술가로서의 예전(earlier)의 모습[incarnations: 化身(화신)]에서 그들은 바로 始初(시초)부터 사회를 지도할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원시적이든 세련되었던 성직자 계급 문화의 보호자로서 그들의 도덕적 사상적 혁신 활동은 외적 권위의 규범과 전통의 유산에 의해서 제한되었었다. 그들은 정신의 모험가들인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다.


18세기에 성직자 계급의 쇠퇴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스승이 출현하여 그 공백을 채우고 사회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 세속적 지식인은 理神論者(이신론자: deist)거나 회의론자거나 무신론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제사장이나 장로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 인간사를 행하는 방법을 지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인류의 이익을 위한 특별한 헌신과 그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익을 증진시킬 복음주의적 의무가 있다고 선포했었다. 그는 스스로 추천한 이 과업에 성직자 전임자들보다도 훨씬 더 과격한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계시종교의 교리(corpus: 신체, 전집, 자료)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과거의 집단 지혜, 전통의 유산, 조상전래의 규범적 규정은 전체적으로 그 자신의 훌륭한 지각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선별적으로 준수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거부되기 위해서 존재하였다.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漸增(점증)하는 자신감과 대담함을 가지고 그들이 사회의 병들을 진단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unaided) 知力(지력)을 가지고 그 병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분기하여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whereby) 사회구조뿐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습성까지도 보다 더 좋게 변형시킬 수 있는 공식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성직자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신들의 하인이나 해석자가 아니고 代役(대역)이었다. 그들의 영웅은 하늘의 불을 훔쳐서 인간 세상에 가져온 Prometheus였다.


 

34-2-283

p.2

I want to focus on the moral and judgemental credentials of intellectuals to tell mankind how to conduct itself. How did they run their own lives? With what degree of rectitude did they behave to family, friends and associates? Were they just in their sexual and financial dealings? Did they tell, and write, the truth? And how their own systems stood up to the time and praxis?


The inquiry begins with Jean-Jacques Rousseau (1712=78), who was the first of the modern intellectuals, their archetype and in many ways the most influential of them all. Older men like Voltaire had started the work of demolishing the altars and enthroning reason. But Rousseau was the first to combine all the salient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 Prometheus: the assertion of his right to reject the existing order in its entirety; confidence in his capacity to refashion it from the bottom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of his own devising; belief that this could be achieved by the political process; and, not least, recognition of the huge part instinct, intuition and impulse play in human conduct. He believed he had a unique love for humanity and had been endowed with unprecedented gifts and insights to increase its felicity. An astonishing number of people, in his own day and since, have taken him at his own valuation.


In both the long and short term his influence was enormous. In the generation after his death, it attained the status of myth. He died a decade before the French Revolution of 1789 but many contemporaries held him responsible for it, and so for the demolition of the ancient regime in Europe.*


나는 인류에게 올바르게 처신하는 법을 말해주는 지식인에 대한 도덕적 및 판단력의 기준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느 정도로 정직하게 그들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associates)에게 처신하였는가? 그들은 性과 재정의 처리에 있어서 정당하였는가?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글로 썼는가? 그들 자신의 사상적 체계는 시간과 습속을 견뎌냈는가?


이들 질문은 Jean-Jacques Rousseau와 함께 시작하는데 그는 현대적 지식인들 중에 첫 번째이고 지식인들의 원형이고 많은 면에서 그들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Voltaire와 같은 더 늙은 사람들이 祭壇(제단)을 파괴하고 理性(이성)에게 왕관을 씌웠었다. 그러나 Rousseau가 현대의 Prometheus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모든 특성들을 결합한 첫 번째 인물이다: 현존 질서를 전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의 주장; 그 자신이 고안한(devising) 원칙에 따라 밑바닥에서부터 그 질서를 개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정치적 방법(process: 처리, 조작)에 의해서 이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이와 못지않게(not least), 본능과 直觀(직관)과 충동이 인간의 행동에 할 수 있는 거대한 역할(part)에 대한 인식. 그는 그가 인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인류의 至福(지복)을 증가시킬 수 있는 前例(전례)가 없는 재능과 통찰력을 부여받았다(하늘로부터)고 믿었다. 그 자신의 시대와 그 이후로 놀라운 수의 사람들이 Rousseau의 능력평가를 본인이 말한 그대로 받아들였다 (take a person at his own valuation:의 능력평가를 본인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단기 및 장기 양자에 걸쳐 그의 영향력은 거대하였었다. 그가 죽은 후의 세대에서 그의 그것(influence)은 신화의 지위를 획득하였었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0년 전에 죽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가 혁명에 대한 책임(기여한 바가 많다)이 있었고 유럽의 舊體制(구체제)타파에 대한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34-3-284

p.3-4

At a much deeper level, however, and over far longer span of time, Rousseau altered some of the basic assumptions of civilized man and shifted around the furniture of human mind. The span of his influence is dramatically wide but it can be grouped under five main headings. First, all our modern ideas of education are affected to some degree by Rousseau's doctrine, especially by his treatise Emile (1762). He popularized and to some extent invented the cult of nature, the taste for the open air, the quest for freshness, spontaneity, the invigorating and the natural. He introduced the critique of urban sophistication. He identified and branded the artificialities of civilization. He is the father of the cold bath, systematic exercise, sport as character-forming, the weekend cottage.


Second, and linked to his revaluation of nature, Rousseau taught distrust of the progressive, gradual improvements brought about by the slow march of materialist culture; in this sense he rejected the Enlightenment, of which he was part, and looked for a far more radical solution. He insisted that reason itself had severe limitations as the means to cure society. That did not mean, however, that the human mind was inadequate to bring about the necessary change, because it has hidden, untapped resources of poetic insight and intuition which must be used to overrule the sterilizing dictates of reason. In pursuit of this line of thought, Rousseau wrote his Confessions, finished in 1770, though not published until after his death. This third process was the beginning both of the Romantic movement and of modern introspective literature, for in it he took the discovery of the individual, the prime achievement of the Renaissance, a giant stage further, delving into the inner self and producing it for public inspection.


그러나 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그리고 보다 더 긴 기간(span)에 걸쳐서 Rousseau는 문명인의 근본적 생각(assumption: 가정,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일부를 변경하였고 인간정신의 교양(furniture:마음에 갖추어진 것, 지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향력의 폭은 대단히 넓지만 다섯 개의 중요한 표제로 분류(group)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모든 교육사상은 Rousseau의 교리(doctrine)에 의해, 특히 그의 논문 Emile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자연 숭배, 야외에 대한 취향, 신선함, 자발성, 기운 나게 하는 것, 타고난 것(the natural)을 대중화하고 어느 정도까지 창안하였다. 그는 도시의 세련에 대한 비판을 도입하였다. 그는 문명의 인위적인 것들을 찾아 확인하고 낙인을 찍었다. 그는 냉수욕, 체계적 운동, 인격형성으로서의 운동, 주말 시골집(시골별장)의 아버지이다.


둘째, 자연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된 것인데, Rousseau는 물질주의 문화의 느린 발전(march)에 의해 일어나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gradual) 진보에 대한 불신을 가르쳤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 자신이 속했던(part of) 계몽사상을 배척하고 훨씬 더 급진적인 해결책을 추구하였다. 그는 理性(이성) 자체가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심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정신이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인간정신)은 이성의 不姙(불임)시키는 지시를 제압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미개발의 숨겨진 詩的(시적) 통찰력과 直觀(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路線(노선)의 사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비록 그의 死後(사후)까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Rousseau는 1770년에 완성된 그의 “참회록”을 썼다. 이 세 번째 방법(process)은 낭만주의 운동과 內觀的(내관적) 문학의 시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process)에서 그는 르네상스의 중요한(prime) 성취인 개인의 발견을 취하였고 이것은 내적자아를 깊이 파고들고 공적인 검증을 거치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거대한 단계였기 때문이다.


 

34-4-285

For the first time readers were shown the inside of a heart, though―and this too was to be a characteristic of modern literature―the vision was deceptive, the heart thus exhibited misleading, outwardly frank, inwardly full of guile.


The fourth concept Rousseau popularized was in some ways the most pervasive of all. When society evolves from its primitive state of nature to urban sophistication, he argued, man is corrupted: his natural selfishness, which he calls amour de soi, is transformed into a far more pernicious instinct, amour-propre, which combines vanity and self-esteem, each man rating himself by what others think of him and thus seeking to impress them by his money, strength, brains and moral superiority. His natural selfishness becomes competitive and acquisitive, and so he becomes alienated not only from other men, whom he sees as competitors and not brothers, but from himself. Alienation induces a psychological sickness in man, characterized by a tragic divergence between appearance and reality.


The evil of competition, as he saw it, which destroys man's inborn communal sense and encourages all his evil traits, including his desire to exploit others, led Rousseau to distrust private property, as the source of social crime. His fifth innovation, then, on the very ev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was to develop the elements of a critique of capitalism, both in the preface to his play Narcisse and his Discours sur l'inegalite, by identifying property and the competition to acquire it as the primary cause of alienation. This was a thought-deposit Marx and others were to mine ruthlessly, together with Rousseau's related idea of cultural evolution. To him, 'natural' meant 'original' or pre-cultural. All culture brings problems since it is man's association with others which brings out his evil propensities: as he puts it in Emile, 'Man's breath is fatal to his fellow men.' Thus the culture in which man lived, itself an evolving, artificial construct, dictated man's behaviour, and you could improve, indeed totally transform, his behaviour by changing the culture and the competitive forces which produced it―that is, by social engineering.*


비록 이렇게 노출된 마음은 외견으로는 솔직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엉큼함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비전(내면의 모습)은 기만적이었지만 ―이것은 현대문학의 특징이 될 예정이었다―처음으로 독자들에게 마음의 내면이 노출되었다.


Rousseau가 대중화한 네 번째 개념은 어떤 면에서는 5개 표제 중에서 가장 스며들기 쉬운 것이었다. 사회가 자연의 원시상태로부터 도시적 복잡함(sophistication: 정교함, 세련, 교양)으로 진화할 때,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가 amour de soi(自己愛)라고 말한 인간의 타고난(natural) 이기심이 훨씬 더 유독한 amour-propre(이기심)으로 변형이 되고 이것은 허영과 자부심을 결합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각각의 사람은 타인이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게 되고 그러면 그는 그의 돈과 힘과 두뇌와 도덕적 우월성에 의해서 타인에게 인상을 주려고 추구한다. 그의 타고난 이기심은 경쟁적이고 탐욕적으로 되고 그래서 그는 타인을 형제가 아닌 경쟁자로 보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소외감은 외견과 實在(실재) 사이의 分岐(분기)에 의해서 특징 지워지는 심리적인 질병을 인간에게 일으킨다.


Rousseau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의 타고난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욕망을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사악한 특성을 助長(조장)하는 경쟁의 악은 Rousseau를 사유재산을 사회적 범죄의 원천으로서 불신하도록 이끌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다섯 번째 혁신은, 바로 산업혁명의 전야에, 그의 劇本(극본) Narcisse 와 Discours sur l'inegalite(불평등론)의 서문에서 재산과 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소외감의 기본적 원인이 틀림없다고 확인함(identify:틀림없다고 확인하다)에 의해서 자본주의 비판의 원리(elements)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Marx와 다른 사상가들이 Rousseau의 문화혁명의 관련 사상과 함께 무자비하게 채굴하게 될 사상의 鑛床(광상)이었다. 그에게 ‘자연적’이라는 것은 ‘원천적’이거나 문화이전을 의미하였다. 모든 문화는 그것이 인간의 사악한 성향을 나타내는 다른 것들과 인간이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 그가 Emile에서 “인간의 호흡은 다른 동료 인간에게 치명적이다.”라고 말한(put it) 것처럼. 이래서 인간이 그 속에 살았고 그 자체가 진화하고 있는 인공적인 구조물인 문화는 사람의 행동을 규정했었으며(dictated), 그래서 당신은 문화와 그것을 생산한 경쟁세력을 변화시킴에 의해서, 즉 사회공작에 의해서,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고, 진실로 완전히 변형시킬 수 있었다.


 

34-5-286

p. 10-11

It was part of Rousseau's vanity that he believed himself incapable of base emotions. 'I feel too superior to hate.' 'I love myself too much to hate anybody.' 'Never have I known the hateful passions, never did jealousy, wickedness, vengeance enter my heart … anger occasionally but I am never crafty and never bear a grudge.' In fact he frequently bore grudges and was crafty in pursuing them. Men noticed this. Rousseau was the first intellectual to proclaim himself, repeatedly, the friend of all mankind. But loving as he did humanity in general, he developed a strong propensity for quarrelling with human beings in particular. One of his victims, his former friend Dr Tronchin of Geneva, protested: 'How is it possible that the friend of mankind is no longer the friend of men, or scarcely so?' Replying, Rousseau defended his right to administer rebukes to those who deserved it: I am the friend of mankind, and men are everywhere. The friend of truth also finds malevolent men everywhere―and I do not need to go very far.' Being an egoist, Rousseau tended to equate hostility to himself to truth and virtue as such. Hence nothing was too bad for his enemies; their very existence made sense of the doctrine of eternal punishment: 'I am not ferocious by nature,' he told Madame d'Epinay, 'but when I see there is no justice in this world for these monsters, I like to think there is a hell waiting for them.'


자신은 천한 감정은 가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은 Rousseau의 허영심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너무 뛰어나서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누구라도 증오할 수가 없다.’ ‘나는 증오의 열정을 결코 안 적이 없고 질투, 사악, 복수심이 내 마음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 가끔 분노는 들어 왔었지만 나는 결코 교활하지 않으며 원한을 품은 적이 결코 없다.’ 사실은 그는 빈번하게 원한을 품었었고 원한을 추구할 때 교활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았었다. Rousseau는 자신을 모든 인류의 친구라고 반복해서 선언한 첫 번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인류를 사랑하였지만 그는 특히 사람들과 言爭(언쟁)을 하는 강한 성향을 발달시켰었다. 희생자 중의 한 명인 그의 前 친구 제네바의 Dr Tronchin이 항의를 하였다: “인류의 친구가 더 이상 사람들의 친구가 아니고 혹은 거의 그럴 수가 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응답을 하면서 Rousseau는 ‘꾸중(rebuke)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꾸중할 수 있는 그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나는 인류의 친구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진실의 사람은 항상 악의가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그리고 나는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기주의자인 Rousseau는 자신에 대한 적대감을 진리와 도덕에 대한 적대감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적들에게는 어떤 것도 너무 나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바로 그 존재가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날 때부터(by nature) 흉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는 이런 괴물들을 위한 정의는 없다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은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Madame d'Epinay에게 말하였다.

 


34-6-287

p.21

Since a large part of Rousseau's reputation rests on his theories about the upbringing of children… it is curious that, in real life as opposed to writing, he took so little interest in children. There is no evidence whatever that he studied children to verify his theories. He claimed that no one enjoyed playing with children more than himself, but the one anecdote we have of him in this capacity is not reassuring. The painter Delacroix relates in his Journal (31 May 1824) that a man told him he had seen Rousseau in the gardens of the Tuileries: 'A child's ball struck the philosopher's leg. He flew into a rage and pursued the child with his cane.' From what we know of his character, it is unlikely that Rousseau could ever have made a good father. Even so, it comes as a sickening shock to discover what Rousseau did to his own children.


The first was born to Therese in the winter of 1746-47. We do not know its sex. It was never named. With (he says) 'the greatest difficulty in the world', he persuaded Therese that the baby must be abandoned 'to save her honour'. She 'obeyed with a sigh'. He placed a cypher­card in the infant's clothing and told the midwife to drop off the bundle at the Hopital des Enfants­trouves. Four other babies he had by Therese were disposed of in exactly the same manner, except that he did not trouble to insert a cypher­card after the first. None had names. It is unlikely that any of them survived long.


Rousseau의 명성의 큰 부분은 그의 자녀양육에 관한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는 그의 글과 반대로 그가 아이들에게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가 그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동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는 자기만큼 아이들과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능력(아이들과 노는 것을 즐기는)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에 관한 하나의 逸話(일화)는 그의 주장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화가 Delacroix는 그의 Journal(일기)에서 어떤 사람이 Tuileries 정원에서 Rousseau를 봤었다고 그에게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아이의 공이 그 철학자의 무릎을 쳤어요. 그는 벌컥 화를 내면서 지팡이를 들고 그 애를 추격하였어요.’ 그의 성격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판단해 보면 Rousseau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Rousseau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한 짓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은 구역질 나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1746-47년 겨울에 Therese(Rousseau의 동거 하녀)가 첫 아이를 낳았다. 우리는 그 아이의 性(성)은 모른다. 그 아이는 이름이 지어진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Rousseau가 말하였다) 그는 ‘그녀의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아기를 버려야 한다고 Therese를 설득하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복종하였다.’ 아기의 옷에다 신원확인 암호카드를 넣고 조산원에게 Hopital des Enfants­trouves에 아기를 싼 보따리를 버리라고 말하였다. 그가 Therese와 가진 4명의 다른 아기들을 첫째 아이 후에는 비밀 카드를 집어넣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그 아이들 중 한 명도 생존했을 가능성은 없다.



34-7-288

A history of this institution which appeared in 1746 in the Mercure de France makes it clear that it was overwhelmed by abandoned infants, over 3000 a year. In 1758 Rousseau himself noted that the total had risen to 5082. By 1772 it averaged nearly 8000. Two-thirds of the babies died in their first year. An average of fourteen out of every hundred survived to the age of seven, and of these five grew to maturity, most of them becoming beggars and vagabonds. Rousseau did not even note the dates of the births of his five children and never took any interest in what happened to them, except once in 1761, when he believed Therese was dying and made a perfunctory attempt, soon discontinued, to use the cypher to discover the whereabouts of the first child.*


p.23

Rousseau asserts that brooding on his conduct towards his children led him eventually to formulate the theory of education he put forward in EmiIe. It also clearly helped to shape his Social Contract, published the same year. What began as a process of personal self­justification in a particular case- a series of hasty, ill thought­out excuses for behaviour he must have known, initially, was unnatural - gradually evolved, as repetition and growing self­esteem hardened them into genuine convictions, into the proposition that education was the key to social and moral improvement and, this being so, it was the concern of the State. The State must form the minds of all, not only as children (as it had done to Rousseau's in the orphanage) but as adult citizens. By a curious chain of infamous moral logic, Rousseau's iniquity as a parent was linked to his ideological offspring, the future totalitarian state. 


1774년 Mercure de France에 나타난 이 시설(institution)의 역사가 1년에 3000명 이상의 버려진 아기들로 넘쳐났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1758년에 Rousseau 자신이 총계가 5082명까지 올라갔다고 언급하였다. 1772년경에는 그 숫자는 거의 평균 8000명이 되었다. 아기들의 3분의 2는 첫해에 죽었다. 매 100명당 평균 14명이 7세까지 살아남았고 이들 중 5명이 성인기(maturity)까지 자라났지만 그들 중의 대부분은 거지나 부랑자가 되었다. Rousseau는 그의 다섯 아이들의 출생일도 기록해 두지 않았고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으며 단 한 번 예외적으로 1761년 Therese가 죽어가고 있다고 믿고 첫 아이의 행방을 발견하기 위해서 기록카드를 찾아보려고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p.23

Rousseau는 그의 자식들에 대한 그의 행동을 골똘히 생각한 것이 결국 EmiIe에서 그가 提言(제언)한 교육이론을 체계화하도록 이끌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같은 해에 출판된 Social Contract(사회계약론)을 집필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하나의 특별한 사건(case)에서 개인적인 자기정당화를 위한 과정(process: 처리, 방법)으로 시작된 것이―그가 최초에는 부도덕한(unnatural: 천륜에 어긋나는, 변태적인)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행위에 대한 일련의 조급하고 잘못 생각된 변명―반복(변명의)과 증가하는 자부심이 그 변명들(them)을 진심의 확신으로 硬化(경화)시켜감에 따라 교육은 사회적, 도덕적 개량으로 가는 열쇠이며 그래서 교육은 국가의 관심사항이라는 명제로 차차 진화되어 갔다. 국가는 아이로서뿐 아니라 (국가가 Rousseau 자신의 자식들에게 고아원에서 한 것처럼) 성인 시민으로서도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형성(form)해야 한다. 사악한 도덕적 논리의 기이한 사슬에 의해서 부모로서의 Rousseau의 죄악(iniquity)은 그의 사상적 자식인 미래의 전체주의 국가와 연관되었다.


 

34-8-289

p.24

However, once we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state Rousseau wished to create, his views begin to cohere. It was necessary to replace the existing society by something totally different and essentially egalitarian; but, this done, revolutionary disorder could not be permitted. The rich and the privileged, as the ordering force, would be replaced by the State, embodying the General Will, which all contracted to obey. Such obedience would become instinctive and voluntary since the State, by a systematic process of cultural engineering, would inculcate virtue in all. The State was the father, the patrie, and all its citizens were the children of the paternal orphanage. (Hence the supposedly puzzling remark of Dr Johnson, who cut clean through Rousseau's sophistries, 'Patriotism is the last refuge of a scoundrel.') It is true that the citizen­children, unlike Rousseau's own babies, originally agree to submit to the State/orphanage by freely contracting into it. They thus constitute, through their collective will, its legitimacy, and thereafter they have no right to feel constrained, since, having wanted the laws, they must love the obligations they impose.


Though Rousseau writes about the General Will in terms of liberty, it is essentially an authoritarian instrument, an early adumbration of Lenin's 'democratic centralism'. Laws made under the General Will must, by definition, have moral authority. ‘The people making laws for itself cannot be unjust.’ ‘The General Will is always righteous.’ Moreover, provided the State is 'well-intentioned' (i.e., its long­term objectives are desirable) interpretation of the General Will can safely be left to the leaders since 'they know well that the General Will always favours the decision most conducive to the public interest.'


p.24

그러나 Rousseau가 창조하기를 원하였던 국가의 성질(nature)을 이해하게 될 때 그의 관점(view)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존사회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행되었을 때는 혁명적 무질서는 허용될 수 없었다. 명령하는 세력으로서의 부자와 특권층은 모든 사람이 복종하기로 동의한 총의(General Will: 국민의 의지)를 具現(구현)하고 있는 국가(the State)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이러한 복종은 국가가 조직적인 문화공작(cultural engineering) 방법(process)에 의해 전체 국민에게 도덕성을 주입하기 때문에 본능적이고 자발적이 될 것이다. 국가가 아버지이고 祖國(조국)이고 국가의 모든 시민은 아버지 같은 고아원의 자식들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Rousseau의 詭辯(궤변)을 명쾌하게 지적한(cut clean through) Dr Johnson의 “악당의 최후의 피난처는 애국심이다.”라는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논평이 나왔을 것이다.) Rousseau자신의 자식들과는 달리 시민-자식들은 원래 자유의지로 계약함에 의해 국가/고아원에 복종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시민-자식들)은 그들의 집단의지를 통해서 국가의 합법성의 구성요소가 되고(constitute) 그 후에는, 그들이 법을 원했었기 때문에, 법이 강제하는 의무를 사랑해야 하므로 강제당하고 있다고 느낄 어떤 권리도 없다.


Rousseau는 자유라는 표현(terms)으로 총의(General Will)에 대해서 썼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Lenin의 ‘민주적 중앙집권’의 초기 前兆(전조)인 권위주의적 도구이다. 총의 아래에서 만들어진 법은 당연히(by definition: 정의에 의하여) 도덕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 법을 만드는 인민이 정의롭지 않을 수 없다.’ ‘총의는 항상 옳다.’ 더욱이, 국가가 ‘선의로 하는 것이라면’ (즉, 국가의 장기목표는 바람직하다) ‘지도자들은 총의가 항상 공공의 이익을 가장 많이 가져오는(conductive to: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선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총의에 대한 해석은 안전하게 지도자들에게 맡길 수 있다.



34-9-290

p.24-25

Hence any individual who finds himself in opposition to the General Will is in error: 'When the opinion that is contrary to my own prevails, this simply proves that 1 was mistaken and that what I thought to be the General Will, was not so.' Indeed, 'if my particular opinion had carried the day I should have achieved the opposite of what was my will and I should not therefore have been free' We are here almost in the chilly region of Arthur Koestler's Darkness at Noon or George Orwell's 'Newspeak'.


Rousseau's state is not merely authoritarian: it is also totalitarian, since it orders every aspect of human activity, thought included. Under the social contract, the individual was obliged to 'alienate himself, with all his rights, to the whole of the community' (i.e., the State). Rousseau held that there was an ineradicable conflict between man's natural selfishness and his social duties, between the Man and the Citizen. And that made him miserable. The function of the social contract, and the State it brought into being, was to make whole again: 'Make man one, and you will make him as happy as he can be. Give him all to the State, or leave him all to himself. But if you divide his heart, you tear him in two.' You must, therefore, treat citizens as children and control their upbringing and thoughts, planting 'the social law in the bottom of their hearts'. They then become 'social men by their natures and citizens by their inclinations; they will be one, they will be good, they will be happy, and their happiness will be that of the Republic'.


p.24-25

그러므로 총의와 반대가 되는 입장에 있는 모든 개인은 생각이 틀린 것이다: ‘내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이 승리할 때는 이것은 내가 착각했으며 내가 총의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실로 ‘만약 나의 특별한(총의가 아닌 개인적인) 생각이 승리했었더라면 내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을 성취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Arthur Koestler의 “Darkness at Noon”(정오의 암흑) 이나 George Orwell의 'Newspeak'(新언어)의 으스스한 지경에 오게 된다.


Rousseau의 국가는 단순히 권위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상을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인간행위를 명령하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이다. 사회계약下(하)에서는 개인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자신을 공동체 전체 (즉 국가)에 양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Rousseau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심과 그의 사회적 의무 사이에는, 개인과 시민 사이에는 근절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회계약과 그것이 탄생시키는 국가의 기능은 전체를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라. 그러면 그를 가능한 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두를 국가에 주어라 아니면 그를 모두 그대로 놔두어라. 그러나 만약 그의 마음을 갈라놓으면 그를 두 개로 찢어 놓게 된다.’ 그러므로 시민들을 아이로 취급하고 ‘그들의 심장의 밑바닥에 사회적법’을 심으면서 그들의 훈육과 사상을 통제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본성(국가의 통제에 의해 바뀌어버린 본성)에 의해 사회적 사람이 되고 성향에 의해 시민이 된다; 그들은 하나가 될 것이고 그들은 행복할 것이고 그들의 행복은 공화국의 행복이 될 것이다.’

 


34-10-291

p.25

This procedure demanded total submission. The original social contract oath for his projected constitution for Corsica reads: 'I join myself, body, goods, will and all my powers, to the Corsican nation, granting her ownership of me, of myself and all who depend on me.' The State would thus 'possess men and all their powers', and control every aspect of their economic and social life, which would be spartan, anti-luxurious and anti-urban, the people being prevented from entering the towns except by special permission. In a number of ways the State Rousseau planned for Corsica anticipated the one the Pol Pot regime actually tried to create in Cambodia, and this is not entirely surprising since the Paris-educated leaders of the regime had all absorbed Rousseau's ideas. Of course, Rousseau sincerely believed that such a State would be contented since the people would have been trained to like it. He did not use the word 'brainwash', but he wrote: 'Those who control people's opinions control its actions.' Such control is established by treating citizens, from infancy, as children of the State, trained to ‘consider themselves only in their relationship to the Body of the State'. 'For being nothing except by it, they will be nothing except for it. It will have all they have and will be all they are.' Again, this anticipates Mussolini's central Fascist doctrine: 'Everything within the State, nothing outside the State, nothing against the State.' The educational process was thus the key to the success of the cultural engineering needed to make the State acceptable and successful; the axis of Rousseau's ideas was the citizen as child and the State as parent, and he insisted the government should have complete charge of the upbringing of all children. Hence―and this is the true revolution Rousseau's ideas brought about―he moved the political process to the very centre of human existence by making the legislator, who is also a pedagogue, into the new Messiah, capable of solving all human problems by creating New Men. 'Everything,' he wrote, 'is at root dependent on politics.' Virtue is the product of good government. 'Vices belong less to man, than to man badly governed.' The political process, and the new kind of state it brings into being, are the universal remedies for the ills of mankind. Politics will do all. Rousseau thus prepared the blueprint for the principal delusions and follies of the twentieth century.


p.25-26

이 절차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였다. 그가 계획한(projected) Corsica 헌법을 위한 사회계약 서약 원본은 아래와 같다: ‘나는 자신과 몸과 재산과 의지와 모든 권한을 Corsica국가에 바치며 나와 나 자신과 나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권리’를 소유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모든 분야를 통제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삶은 간소하고(spartan), 反사치적이고, 反도시적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특별 허가 없이는 도시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될 것이다. 많은 면에서 Rousseau가 Corsica를 위해 계획한 국가는 Pol Pot정권이 Cambodia에 실제로 창건하기로 계획한 나라를 예상하게 하는 것이고 Paris에서 교육받은 Pol Pot정권의 지도자들이 모두 Rousseau의 사상을 흡수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전적으로 놀랄 것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국가는 국민들이 그것을 좋아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Rousseau는 진지하게 믿었다. 그는 ‘洗腦(세뇌)’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는 者(자)는 사람의 행동을 통제한다.’라고 썼었다. 그러한 통제는 시민들을 乳兒(유아)때부터 國體(국체)와의 관계에서만 자신을 생각하도록 훈련된 국가의 자식으로 취급함에 의해서 확립된다. ‘국가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에 시민들은 국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국가는 그들이 가진 전부이고 그들 존재의 전부가 될 것이다.’ 다시 이것은 Mussolini의 중앙집권적 파시스트 원칙을 예견하고 있다: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으며, 국가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도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적 방법(process)이 국가를 만족스럽고(acceptable)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문화공작의 핵심이었다; Rousseau 사상의 軸(축)은 시민은 자식이고 국가는 부모라는 것이고 그는 모든 자녀의 훈육을 정부가 전적으로 담당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Rousseau사상이 일으킨 진정한 혁명이다―그는 敎師(교사)이기도한 입법자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여 모든 인간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메시아로 만듦에 의해서 정치적 처리방법을 인간존재의 바로 중심으로 이동시켜놓았다. 그는 ‘만사는 근본적으로 정치에 달려있다.’라고 썼다. 미덕은 훌륭한 통치의 산물이다. ‘악덕은 인간에게 보다는 나쁘게 통치 받는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한다.’ 정치적 방법이, 그리고 그 방법이 탄생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국가가 인류가 가진 모든 병폐에 대한 보편적 치료책이 된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해낼 것이다. Rousseau는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중요한 망상과 어리석은 짓들의 청사진을 준비했었다.



34-11-292

p.26-27

Rousseau's reputation during his lifetime, and his influence after his death, raise disturbing questions about human gullibility, and indeed about the human propensity to reject evidence it does not wish to admit. The acceptability of what Rousseau wrote depended in great part on his strident claim to be not merely virtuous but the most virtuous man of his time. Why did not this claim collapse in ridicule and ignominy when his weaknesses and vices became not merely public knowledge but the subject of international debate? After all the people who assailed him were not strangers or political opponents but former friends and associates who had gone out of their way to assist him. Hume, who had once thought him 'gentle, modest, affectionate, disinterested and exquisitively sensitive', decided, from more extensive experience, that he was 'a monster who saw himself as the only important being in the universe'. Diderot, after long acquaintance, summed him up as 'deceitful, vain as Satan, ungrateful, cruel, hypocritical and full of malice'. To Grimm he was 'odious, monstrous'. To Voltaire, 'a monster of vanity and vileness'. Saddest of all are the judgements passed on him by kind-hearted women who helped him, like Madame d'Einay.*


It is all very baffling and suggests that intellectuals are as unreasonable, illogical and superstitious as anyone else. The truth seems to be that Rousseau was a writer of genius but fatally unbalanced both in his life and in his views. He is best summed up by the woman whom, he said, was only his love, Sophie d'Houdtot. She lived on until 1813 and, in extreme old age, delivered his verdict: 'He was ugly enough to frighten me and love did not make him more attractive. But he was a pathetic figure and I treated him with gentleness and kindness. He was an interesting madman.'


p.26-27

Rousseau의 살아 있는 동안의 명성과 그가 죽은 후의 영향력은 인간의 잘 속는 성향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증거는 배척하는 인간성향에 대해 불안스러운 의문을 제기한다. Rousseau가 쓴 글의 용인성은 그는 도덕적일 뿐 아니라 그 시대에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그의 거친 주장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의 약점과 악덕이 공공의 지식일 뿐 아니라 국제적 논쟁의 주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그의 이런 주장이 조소와 불명예를 받으며 무너지지 않았을까? 결국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정치적 반대자들이 아니고 그들의 正道(정도)를 벗어나서 그를 도와주었던 前친구들이거나 동료들이었다. 한때 그를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애정이 깊고, 사심이 없고, 더 없이 예민하다’라고 생각하였던 Hume은 보다 더 광대한 경험을 통해서 Rousseau는 ‘자신을 우주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던 괴물’이었다고 판결하였다. Diderot는 오랫동안의 친교 후에 그를 ‘잘 속이고, 악마처럼 허영심이 강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잔인하고, 위선적이고 악의로 가득 찬’ 사람으로 요약하였다. Grimm에게 그는 ‘밉살스럽고 기괴하였다.’ Voltaire에게는 ‘허영하고 비열한 괴물’이었다. Madame d'Einay처럼 그를 도와준 친절한 마음을 가진 여인들이 그에게 내린 판단이 가장 슬픈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당황스럽고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미신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진실은 Rousseau는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그의 삶과 관점에서 치명적으로 착란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그가 말하기로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인 Sophie d'Houdtot에 의해서 가장 잘 요약되었다. 그녀는 1813년까지 생존하였었고 지극히 늙은 나이에서 그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나를 놀라게 할 만큼 추악하였고 사랑이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感傷的(감상적)인 인물이었고 나는 그를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흥미 있는 狂人(광인)이었다.’

 

[ 2021-02-24, 12: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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