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음(鼻音) 섞인 애수 넘치는 음색(音色)으로 대히트…5만 장 발매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15)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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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인의 한을 담은 <목포의 눈물>이 나올 때에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1931년)하고, 괴뢰 만주국을 건설(1932년)한 후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시절입니다. 토지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식량증산계획 등으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강화되어 먹고살기가 힘든 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나 만주 혹은 일본으로 이주가 증가하던 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목포는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한 곳입니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호남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이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이렇게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지던 시점에서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사는 향토사랑이 곧 조국사랑이고 민족사랑이며 나라사랑임을 인식하고 1934년 제1회 향토찬가 현상 공모전을 실시했습니다. 이 공모전에서 <목포의 노래>로 1등을 한 사람이 바로 목포 출신 문일석입니다.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이 공모전의 의도에 딱 들어맞은 문일석의 가사를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는 흥행 등을 고려하여 노래의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이 노래의 작곡을 누구로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경남 진주 출신 작곡가 손목인은 가수 고복수에게 주려고 작곡한 <갈매기 항구>라는 노래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노래의 곡조가 <갈매기 항구>의 가사보다는 <목포의 눈물> 가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어 마침 이철 사장을 만나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철 사장은 정말 잘 되었다고 손목인에게 말하면서 적시에 작곡가를 결정하였습니다. 이제 누가 이 노래를 부르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철 사장은 목포 사람이 쓴 목포의 노래를 목포 사람이 부르도록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를 목포 출신 가수를 누구로 할까 생각하던 이철 사장은 토월회 박승희 단장이 자신에게 소개한 이난영(본명 이옥례)으로 낙점했습니다. 그는 비음(鼻音)이 섞인 애수가 넘치는 그녀의 음색이 매혹적이라 판단했습니다. 레코드와 공연 흥행의 천재답게 이철 사장의 예상은 완전히 적중했습니다. ‘망국의 비애’를 담은 이 음반이 발매되자마자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어 5만 장의 레코드를 판매하며, 이 노래는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가요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 레코드가 인기를 얻자 종로서 고등계 형사는 작사가 문일석을 불러 작품 의도를 물으며 엄하게 취조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목포의 눈물> 제 2절에 나오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을 문제 삼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짚과 섶으로 이 노적봉을 둘러 군량미가 산더미처럼 많이 쌓인 것을 위장했던 곳이라 일제 형사는 이 문제를 예민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문일석은 이 고장의 전설이라며 삼백년 된 원앙새가 원한을 품어 눈을 감지 못하고 연못에서 허우적댄다고 변명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납득하지 않고, 계속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폐병 말기 환자인 문일석이 취조를 당하면서 연신 피를 토하자 마지못해 그를 석방했습니다. 그 후 이 노래의 가사는 일제의 검열 때문에 ‘삼백년 원한풍’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목포의 눈물>이 자신의 예상대로 크게 히트하자 이철 사장은 이난영의 고향인 목포에 관한 노래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의도하에 다시 만들어진 목포 노래가 1942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으로 탄생한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입니다. 이 노래 역시 히트하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이난영은 1916년 목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작곡가 이봉룡이 그의 오빠입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한 이난영은 태양극단에 입단한 후 <향수>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그녀는 <목포의 눈물>, <다방의 푸른 꿈>,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등 인기 가요를 양산한 일제 하 대표적인 인기 여가수입니다. 1936년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으나 6·25 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난영을 위로하던 가수 남인수와 한때 동거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자녀들은 미국에 진출하여 가수로 인기를 얻었던 김씨스터즈, 김보이즈 등이 있으며, 그녀는 1965년 미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작곡가 손목인은 1913년 경남 진주 출신으로 도쿄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타향살이>, <짝사랑>, <목포의 눈물>, <바다의 교향시>, <해조곡>, <아내의 노래> 등 인기 대중가요를 남겼으며, <춘향전>, <백설공주> 등 50여 편의 뮤지컬을 작곡하였습니다. 또한 가요작가협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본명이 윤재희인 작사가 문일석은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과 친구였습니다. 그는 <목포의 추억>(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 노래), <뒷골목 청춘>(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 <향수의 휘파람>(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곡, 이인권 노래)를 작사하였습니다. 그는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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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 2021-03-10, 09: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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