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을 가왕(歌王)으로 만든 20세기 최고(最高) 히트곡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20)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 작곡, 조용필 노래,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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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부터 한반도는 민주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이 충돌하는 전 세계적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곳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고 난 후 남북한은 치열한 갈등과 대립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남한과 북한은 1960년대 말까지 서로 대화를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1970년대가 되면 미국과 중국이 서로 접근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동서화해(東西和解) 국면이 전개되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71년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제의한 이산가족회담을 북한이 수용하면서 남북적십자사회담이 열렸고, 1972년에는 남북당국자회담이 개최되어 남북관계가 종전의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 간의 대화 중에도 남한의 혼란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추진하였다. 그런 조치의 하나로 그들은 남한의 최고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1974년 8월15일 남산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8·15 경축식장에 재일 조총련계 교포 문세광이 연설하는 박 대통령을 저격했으나 그는 이를 피하였고, 불행하게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975년 청와대에서 내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여한 안보회의가 열렸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을 모시고 이 회의에 배석하였다. 동 회의석상에서 박 대통령은 머리는 안 쓰면 녹이 슨다면서 김 국장에게 여러 번 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놓을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남한에 대한 북한의 허위선전이 결국 문세광의 저격으로 이어졌음을 얘기하면서 남한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母國)방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의 현장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고, 회의 참석자들도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는 분위기가 연출되어 그는 매우 우울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 박 대통령이 직접 전화하여 이 안(案)을 극비리에 추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해방 전 240만 명이었던 재일(在日) 한국인은 해방 후 귀국러시가 이어지면서 60만 명 정도가 일본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1947년 9월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朝聯)을 결성했으나 이 조직이 좌경화되자, 박열 등 우익인사 중심으로 1946년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약칭 거류민단)을 만들었다. 1955년 5월 조련은 한덕수가 의장이 되면서 이름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으로 바꾸고, 그해부터 1984년까지 9만 명을 북송(北送)하였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 48개의 지방본부와 23개의 사업체, 300여 개의 교육기관을 거느린 탄탄한 조직력과 재정적 능력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20만 명에 달하는 조총련계 동포들의 90% 정도가 남한 출신이며, 그 중 경남과 제주 출신들이 많았다. 서류 탈취, 관청 출입 방해, 융자금 회수 등 조총련의 갖가지 방해 공작을 뚫고 이들을 고국에 오도록 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등 관련부처에서는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주도면밀하게 집행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5년 9월13일 제 1진 700명이 2주간의 일정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하였다. 남한이 못산다는 북한의 선전을 믿고 있던 그들은 한국으로 올 때 옷가지, 양초, 화장지, 김밥 등 갖가지 생필품을 싸왔다. 9월24일 남산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환영대회에서 야당의 유명한 여류 정치인 박순천 여사는 연설을 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 고국의 흙을 한 줌씩 싸가지고 가서 이 땅을 생각하고, 일본에 묻힐 땐 그 흙과 함께…”라는 말을 하자 그들은 울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진 축하공연에서 코미디언 김희갑은 그의 애창곡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를 부르자 극장 안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진방남이 부른 <불효자는 웁니다>를 리메이크한 김희갑의 이 노래는 30만 장의 레코드를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이후로 1975년에는 1310명, 1976년에는 7800명의 조총련계 동포가 한국을 다녀갔다. 2000년까지 이 사업은 매년 계속되어 모두 4만 9000여 명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북한의 선전에 속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많은 조총련계 동포들이 조총련을 탈퇴하거나, 민단으로 이적하면서 조총련계 동포는 겨우 10만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1969년 경남 충무 출신 김성술이라는 무명가수가 작사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를 황선우 선생의 작곡으로 유니버설 레코드에서 취입하였다. 그 후 김성술은 군(軍)에 입대하였고, 불행하게도 1971년 12월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으로 사망하였다. 이 일이 있게 되자 황선우 작곡가는 노래의 제목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고치고, 가사도 좀 수정하여 1972년 조용필에게 주어 취입했으나 대중의 반응이 별로 없이 끝이 났다. 그러다가 조총련계 모국방문사업이 열광적 반응을 보이며 한창 진행되던 1976년에 조용필이 다시 취입을 하여 발표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이 노래는 거리의 리어카 레코드 판매상과 다방에서 인기를 얻어 마침내 전국을 강타하는 공전(空前)의 히트를 하였다. 이 노래를 계기로 <창 밖의 여자> 등 여러 노래를 히트시킨 그는 국민가수, 혹은 가왕(歌王)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제 시대 부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갔던 조총련계 동포가 조총련계 모국방문사업을 통해 다시 부산에 내려 고향으로 가게 되면서 이 노래는 한국인이 겪은 근현대사의 비극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처럼 일제 시절 애끊는 이별의 장소였던 부산은 해방 이후 6·25 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근대화가 진행되었던 1960년대에는 수많은 이농민(離農民)들이 직장을 찾아 부산에 머물며 여러 가지 시련을 온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던 곳이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수산업과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있어서 부산과 부산항은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이런 상징을 가진 부산을 배경으로 히트한 노래가 많지만 이 노래는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다.
  
  이 노래의 인기를 바탕으로 1978년 김희라, 유정희가 주연하는 동명(同名)의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폴모리아 악단은 라는 이름으로 편곡을 하여 발표하였다. 또한 이 노래는 아쓰미 지로가 번안하여 부른 레코드가 70만 장이나 팔렸고, 일본 엔카의 여왕이라는 미소라 히바리와 도노사마 킹즈라는 일본 엔카그룹, 야시로 아키, 모리 마사코, 흑인 엔카 가수 제로 등도 리메이크할 정도로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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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부산항에>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아섰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 2021-03-18, 18: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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