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幕間)가수 이애리수의 히트곡…<황성의 적(跡)>이란 이름으로 5만 장 발매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27)황성옛터(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1928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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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가 되면 국권을 상실하고 ‘헌병통치’라는 일제의 강압적 지배를 받은 지 10년이 넘으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구구절절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피식민지 2등 국민으로서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고,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데가 없으니 억울한 심정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우리 가요계에서 이런 수난기에 짙게 나타난 민족적 비애감과 절망적 심리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즉,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애수의 소야곡>,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바로 그런 노래들이다. 이런 노래들은 일제(日帝)의 검열과 통제를 피하기 위해 고향과 님의 상실, 항구의 이별, 나그네와 같은 제재를 사용하여 망국의 한과 서러움을 드러내었다.
  
  그 중에서 노래의 등장 시기와 그 상징성, 그리고 유행가의 파급효과 등을 고려해 볼 때 <황성옛터>가 나라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표현하는 데 가장 으뜸인 것 같다.
  
  1927년 순화악극단 연극사는 취성좌의 천한수가 쓴 대본에 그가 연출한 <유랑의 남녀>를 가지고 봉천 등 만주와 평양, 진남포, 개성 등을 거쳐 온천으로 유명한 황해도 배천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그 공연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전수린은 비가 내려 공연을 하지 못하고 여관방에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는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다 마침 지난 날 방문했던 개성 황궁터가 생각이 났다. 한때 고려 왕궁터로서 영화(榮華)를 떨치다가 이제 폐허가 된 그곳은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는 생각을 하며 즉시 악상(樂想)을 가다듬었다. 곡이 완성되자 그는 이번 순회공연에 동행한 포리돌 레코드사 문예부장인 왕평에게 들려주었다. 이에 동감한 왕평이 곡의 이미지를 살리는 가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노래는 1927년 가을에 극단 취성좌의 단성사 공연 중 막간 가수 이애리수가 불러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 특히, 토월회가 주최하는 공연에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부르자 공명한 관객들이 합창을 하는 바람에 극장 안에 있던 일제의 임석(臨席) 경찰이 이를 제지하면서 무대에 있는 이애리수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리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민족의 노래로 전화되는 것을 본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를 금지가요로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황성의 적(跡)>이라는 이름으로 1932년 4월 빅터레코드사에서 발매되어 5만 장이나 팔렸다. 그 당시로는 엄청난 레코드 판매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1933년에는 <황성옛터>로 제목을 바꾸어 다시 발표하였고, 같은 해 이경설이 <고성(古城)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재취입하기도 하였다.
  
  해방 전이나 후에도 이 노래는 한국 사람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특히,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이 이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인수, 신카나리아, 김정구, 이미자 등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였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는 1910년 개성 출생으로 본명은 이음전이다. 어릴 때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막간(幕間)가수로 등장하다 <황성옛터>를 부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1930년대부터 가수로 주로 활동하며 <황성옛터>, <고요한 장안>, <에라 좋구나> 등을 발표하여 인기가도를 달렸다. 이에 따라 일어판 신문인 경성일보는 1933년 1월 7일부터 20일까지 4회에 걸쳐 ‘가희 이애리수와 그’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치솟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본처가 있는 명문가의 아들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2차에 걸쳐 자살소동을 일으켰다. 결국 본부인을 정리한 배동필과 결혼을 하여 2남 7녀를 낳고 평생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작곡가 전수린은 1911년 서울 태생으로 14세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한 음악가이자, 연극단체 토월회에도 관여한 예술인이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대중가요도 작곡하여 박단마의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등 히트곡을 만들었다.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왕평는 본명이 이응호이며, 편월, 이호 등을 예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배재중과 조선배우학교에서 공부한 후 극단 연극사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가요시 작사, 연극대본 집필, 만담 창작과 출연, 영화배우, 포리돌 레코드 문예부장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황성옛터>, <조선팔경>, <고도의 정한>, <항구의 일야> 등 모두 159편의 가사를 남긴 그는 1941년 평안도 강계에서 <남매>라는 연극의 배우로 공연 중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 이권조가 수습하여 자신이 주지(住持)로 있었던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근처에 안장하였다.
  
  
[ 2021-03-30, 04: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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