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부두 귀환동포들의 감격적 재회(再會) 담은 곡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29)귀국선(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이인권 노래, 1949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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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12시 일본 천황은 힘 빠진 목소리로 연합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하던 초기 연전연승(連戰連勝)을 했고, 그 이후 미군에게 지면서도 연일 승전을 홍보하던 그들인지라 이렇게 일제가 갑자기 패망한다는 것을 식민지 조선인들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일제의 항복으로 얼떨결에 해방을 맞게 되자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 같이 왔다”고 말했으며, 홍윤숙 시인은 “참으로 거짓말 같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라고 얘기하였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는 그 소식을 듣고 멍하니 있다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여보, 우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력 등 모든 것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장기간 전쟁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힘에 버거운 것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판, 괌, 오키나와 등을 차례로 빼앗기며 미군에게 계속 밀린 일제(日帝)는 이즈음 전 국민의 옥쇄를 통해 본토를 사수하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되자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하였다. 더구나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소련이 그해 8월8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였다.
  
  어찌되었든 8월15일 해방이 되었는데도 일제 강권통치로 주눅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당일에는 그 기쁨을 드러내는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다만 종로구 계동 민족지도자 안재홍 씨 사무소에 모인 경성제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중앙불교전문 학생 40여명이 당일 오후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투사 60여 명이 해질 무렵 석방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밤 사이에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8월16일부터 대대적인 환영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태극기를 휘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였다.
  
  이렇게 해방이 되자 일본이나 중국 등 해외에 나갔던 많은 동포들이 부강한 자주독립국가의 꿈을 안고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해방 전 일본에 있던 240만 명의 동포들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고가는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귀국하였다. 일본 후생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46년 3월18일 현재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인은 64만 7006명이라고 한다. 그 짧은 기간에 150만 명이 이상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엄청난 ‘귀국 러시’가 일어났다. 만주 등 중국에 있었던 200만 명의 재중동포 중 90만 명이 황해(黃海)를 건너는 배를 타거나 아니면 기차에 몸을 싣고 귀국하였다. 심지어 만주에서 걸어서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해방의 기쁨을 담은 노래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1945년 박영호 작사, 김용환 작곡의 <4대문을 열어라>, 1946년 장세정이 노래한 <해방된 역마차>, 1948년 현인이 부른 <럭키 서울>, 그리고 1949년 이인권의 <귀국선>이 해방공간에서 인기를 얻은 노래들이다. 그 중에서 가사의 상징성이나 대중의 인기를 고려해볼 때 <귀국선>이 해방의 환희를 노래한 대표적인 노래이다.
  
  부산부두에서 귀국선을 타고 귀환하고 있는 동포들의 감격적 재회 장면을 보고 손로원이 이 노래의 가사를 작사하였다. 그는 1절에서 조국건설의 희망을, 2절에는 고향과 부모형제의 재회의 기쁨을, 3절은 독립된 조국발전을 위한 포부를 가사에 담았다. 작곡가 이재호 선생은 이 가사의 뜻을 살리는 멜로디를 만들어 처음에는 가수 신세영에게 주었으나 히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49년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가수 이인권이 이 노래를 재취입하여 크게 히트하였다.
  
  이 노래를 작사한 손로원은 1911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작사가인 그는 <봄날은 간다>, <경상도 아가씨>, <에레나가 된 순희>, <고향의 그림자>, <비나리는 호남선> 등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인기곡을 작사하였다. 또한 그는 <샌프란시스코>, <홍콩아가씨>, <페르샤 왕자>, <인도의 향불>,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등 이국(異國)의 풍물을 그린 작품을 많이 작사하였다.
  
  가수 이인권은 1919년 함북 청진 출신으로 본명은 임영일이다. 청진상고 졸업 후 오케그랜드쇼 청진순회공연 때 무대 뒤에 있는 이철 대표와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와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불러 호평을 받았다. 그 후 몸이 좋지 않은 남인수를 대신하여 무대에 등장하곤 하여 ‘청진의 남인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정식 가수로 데뷔한 그는 <꿈꾸는 백마강>, <귀국선>을 불러 히트하였고, 6.25 전쟁 중 사망한 부인을 위해 작사, 작곡한 <미사의 노래>도 인기를 얻었다. 이를 계기를 작곡가로 전신한 그는 송민도의 <카츄사의 노래>, 최무룡의 <외나무 다리>, 현인의 <꿈이여 다시 한번>,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과 <단골손님>을 작곡하여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 2021-04-01, 00: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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