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외에 다른 神들은 네게 두지 말라”
반공자유-교양영어(40): The mathematics of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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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나 외에 다른 神들은 네게 두지 말라”


아담의 原罪(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은 거짓말하고 속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탐욕에 빠지고 증오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타인의 불행을 즐기고 타인을 괴롭히고 심지어 살인도 할 수 있는 악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이성적인 존재라고 자랑도 하지만 그 이성도 불완전하다. 그래서 오판과 착각과 편견과 맹신과 망상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거의 없다. 요약하면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완벽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무오류의 완벽한 존재라거나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고 착각이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이 완전자이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처럼 지상낙원에 살아도, 죄를 짓고 쫓겨나게 되어있다. 인간은 원죄를 짊어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천국에 살아도 감옥이 필요할 만큼 죄 많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의 피로 贖罪(속죄)를 받아 重生(중생, rebirth)하지 않는 한 인간은 완벽해질 수 없고 천국을 건설하거나 천국에 살 수가 없다. 인간구원은 신앙을 통한 인간惡의 극복에만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영혼이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한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체제를 아무리 변혁하여도, 아무런 효용이 없으며 신앙만이 인류를 인간악에서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거나 독선과 독단에 빠져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로 간주하게 되면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람에서 악마로 변형하게 된다. 


唯我獨尊(유아독존)적 무신론자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사상이나 이념을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며 악의 제거에 나서게 되면 목적을 위해서 수단에 도덕적 제한을 두지 않게 된다.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살인마저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인간에서 악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무오류의 신적인 초인으로 생각하고 정의를 독점하는 者는 필연적으로 악마로 전락한다. 정의를 독점하는 초인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악마적 초인이 권력을 잡고 가치를 독점하면 대재앙이 일어난다. 초인의 이름으로, 미래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혁명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평등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것이 합법적이 되고 고상한 목적이나 위대한 이상의 실현을 위해 그 초인이나 그 초인을 神으로 광신하는 집단의 이름으로 모든 행동이 허용된다. 대량학살 같은 극악의 만행도 당연시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민중혁명에 반대하였다. 그는 혁명은 인간성에 내재하는 惡이 善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라며 민중혁명의 악마적인 속성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경고는 당대의 러시아를 사로잡았던 사회주의혁명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무시되었다.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우상을 神으로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레닌과 스탈린 같은 공산주의 살인마를 대제사장으로 떠받들며 러시아를 기만과 폭력과 살인의 생지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3500만 명의 無辜(무고)한 인민이 학살되었다. 


레닌은 지적으로 우수한 모범생이었고 스탈린은 훌륭한 司祭(사제)가 되기를 꿈꾸던 신학생이었다. 이들이 “나 외에 다른 神들은 네게 두지 말라”라는 계명을 어기고 공산주의라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 때 살인 악마로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도 착한 우등생이었지만 공산주의 독충에 물려서 악마가 되었다. 그는 캄보디아 국민 3분의 1이 넘는 200만 명을 학살하고도 죽을 때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일성도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공산주의에 영혼을 팔면서 사람에서 악마로 변질되었다. 그와 그의 아들-손자 3대는 우리 민족 역사상 한국인을 가장 많이 살해한 살인마들이다. 지금 북한은 말할 것도 없이 남한에도 공산주의를 神으로 숭배하는 악마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심지어 교회에도 있는 것 같다.


 


40. The mathematics of death

- Comrade Duch died on September 2nd

- The supervisor of killings for Cambodia’s murderous Khmers Rouges was 77


40-1-318

AS THE VIETNAMESE army closed in on Phnom Penh in January 1979, Comrade Duch was ordered to kill the prisoners remaining in his charge. He just about had time to supervise that. (Killing was not usually done in his prison, only in the fields he had designated at Choeung Ek, seven kilometres away. Unless someone slipped up.) He also started to destroy his archive, but did not get far. The orders from Brother Number Two, Nuon Chea, had not specifically requested that. Besides, he did not greatly want to.


The archive was well over 100,000 pages, containing meticulous details of the detainees who had passed to death through his prison, Tuol Sleng, or S-21, over the previous four years. (The most exact figure given later was 15,101, but the archive was by then incomplete.) Prisoners’ weight on entering. Their photographs, with the blank look of people at the end of the line. And their confessions, in as many versions as were needed to condemn them. He kept all the versions, with defective parts crossed out in red. In the margins, neatly, he put comments. “Do not write these words.” “Do not play tricks.” The final acceptable confession was typed and sent to “Angkar”, the high leadership of the Communist Party of Cambodia, to Brother Number Two and Brother Number One, Pol Pot himself. That was the rule. He kept at least two copies. Each carried his decision about the prisoner: “Can be destroyed.” “Take away.” “Keep for medical experiment.” His preferred word was “smash”. That too was the party rule. At once, or later.


40. 죽음의 수학

- Duch 동무는 9월 2일에 죽었다

- 캄보디아 Khmers Rouges 살인정권의 지휘자는 77세였다 


1979년 1월 베트남 군대가 Phnom Penh(캄보디아 수도)에 다가올 때 Duch 동무는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나머지 죄수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것(죽이는 것)을 감독할 시간만 겨우 있었다. (통상적으로 살해는 그의 감옥이 아닌 7km 떨어진 Choeung Ek의 그가 지명하였던 들판에서 실행되었다. 누가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는 또 그의 문서를 파괴하기 시작하였지만 성공하지(get far) 못하였다. Brother Number Two, Nuon Chea로부터 온 명령은 그것(문서파괴)을 명확하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도 파괴하기를 크게 원하지도 않았다.


그 문서는 10만 쪽이 훨씬 넘었고 지난 4년 이상동안 그의 감옥 Tuol Sleng 혹은 S-21을 통해서 죽음으로 갔던 수감자들에 대한 아주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뒤에 밝혀진 더 정확한 수는 15,101이었지만 그때쯤 그 문서는 완벽하지 못하였다.) 수감될 때 죄수들의 체중. 사진 뒷줄에 있는 사람들(people)의 멍한 표정이 있는 죄수들의 사진. 그리고 그들의 자백서, 그들을 유죄 선고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많은 改作(개작)된 것들(version). 그는 모자라는 부분은 붉은색으로 삭제한 모든 판들(자백서)을 보관했었다. 자백서 여백에 그는 깔끔하게 논평을 붙였다. “이런 단어는 쓰지 마라.” “속이지 마라.” 최종적으로 인정된 자백서는 타이프로 쳐서 캄보디아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Angkar”와 Brother Number Two와 Brother Number One인 Pol Pot에게 발송되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그는 적어도 2개의 사본(자백서)을 보관하였다. 각 사본은 죄수에 대한 그의 판정을 가지고 있었다: “죽일 수 있다.” “끌고 가라.” “의학 실험을 위해 보관하라.” 그가 선호하는 단어는 “박살내라.”였다. 그것은 또한 당의 규칙이었다. 즉시 혹은 나중에.



40-2-319

The system he had devised at S-21 was simple, logical and perpetual. It could feed unceasingly Comrade Pol Pot’s hunger (which had become his own hunger) to root out the bourgeois oppressor class and purge the country of traitorous elements. Each prisoner was made to incriminate in writing between eight and 11 others. Those others were arrested. They, in turn, incriminated at least eight people. So it went on at the most important and most feared prison in the country: a sequence relentlessly reproducing.


He felt proud of this system. It appealed to him as a mathematician. He had been a star in the subject at school, brilliant enough to get to the Lycée Sisowath in Phnom Penh, even though his family was poor and he was mocked as half-Chinese. His graduation marks in the Baccalaureate were the second-highest in the country. He became a maths teacher, quiet but firm, until communist revolution distracted him. And when that failed he returned. He taught maths and English in refugee camps, maths and Khmer in China, and when he emerged from hiding in 1999 presented himself as a maths teacher. As though he had never diverted.


Teaching, too, was his natural bent. At S-21 he rarely did interrogations himself, but trained the interrogators. Many came with him from the first prison he had ever run, M-13 in the maquis. They were mostly young peasants with a low level of culture, but he trusted them. At S-21 he would telephone them every 20 minutes to check on progress. 


S-21(감옥)에서 그가 고안한 시스템은 단순하고 논리적이고 영구적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압제계급을 뿌리 뽑고 그 나라에서 반역적 요소를 숙청하려는 Pol Pot 동무의 열망(이것은 그 자신의 열망이 되었었다.)을 끊임없이 채워줄 수 있었다. 각 죄수는 8명과 11명 사이의 다른 사람들을 문서로써 유죄증명을 하도록 시켜졌다. 그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적어도 8명을 죄수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짓은 전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무서운 감옥에서 계속 되었다: 무자비하게 재생산하는 연쇄작용(이었다).


그는 이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것이 수학자인 그에게는 마음에 들었다. 학생 때 그는 그 과목(수학)에서 스타였으며 비록 그의 집은 가난하고 半중국인이라고 조롱을 받았지만 재능이 대단히 뛰어나서 Phnom Penh의 Sisowath 국립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Baccalaureate(학사학위 시험)에서 그의 졸업시험 점수는 전국 2등이었다. 그는 수학교사가 되었고 공산주의 혁명이 그를 빗나가게(distract)할 때 까지는 조용하고 견실하였다. 그리고 그것이(혁명) 실패하였을 때 그는 돌아왔다. 그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고 중국에서는 수학과 Khmer말을 가르쳤다. 그리고 1999년 은신처로부터 나타났을 때 자신을 수학교사로 소개하였다. 전혀 전향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르치는 것도 그의 타고난 재능(bent:성향, 재능)이었다. S-21(감옥)에서 그는 자신이 직접 심문을 거의 하지 않고 심문관들을 훈련시켰다. 그가 운영하였던 첫 교도소인 유격대의 M-13교도소로부터 그와 함께 많은 심문관들이 왔었다. 그들은 대부분 교양수준이 낮은 젊은 농민들이었지만 그는 그들을 신뢰하였다. S-21에서 그는 진행상황을 검사하기 위해서 20분마다 그들에게 전화하곤 했었다.

 


40-3-320

Most prisoners could be bullied verbally into “confessing” with threats, or “evidence” against them, or even with the steady humiliation of being called “Monsieur”, as if they were colonialists. He kept his usual neat record of what was done to resisters. “About 20 whippings with fine rattan.” “20-30 whippings with electrical wire.” “Stuffing with water.”


He claimed later that he had hated running the prison. He had tried to get sent to the Industry Ministry instead. It was not the torture that troubled him, though he tried to play that down. Nor was it the deaths. He did not see those; the slit throats, the hoe severing the neck, happened elsewhere. His sleep was untroubled by his victims’ faces. What bothered him was that S-21 was meant to be a tool to find out truth. Or so he had convinced himself. Yet perhaps 60% of each “confession” was false, and perhaps 80% of those he sent to death did not oppose the regime. He knew this at the time. Everyone knew it, Angkar included. No one dared say it, for sheer fear. He got through the days, he said later, by quoting Alfred de Vigny: “Energetically perform your long and heavy task/On the path to which Fate has called you/Then…suffer and die without a word.”


To poetry he could add another salve: complete identification with the revolutionary struggle. He had fallen for communism Chinese-style at the Institut de Pédagogie, teacher-training college. That promise of progress and change was irresistible. By the early 1970s he was in the maquis with the Khmers Rouges, learning to fight for a Democratic Kampuchea that would be agrarian, classless and untainted by the West. His nom de guerre, Duch, meant the schoolboy who stood up when his master asked him to.


대부분의 죄수들은 위협과 그들의 진술에 반대되는(against) “증거”로서, 심지어 그들이 마치 식민가(식민지 시대 그들을 지배하였던 프랑스인들)인 것처럼 그들이“Monsieur”(영어의 Mr.)라고 불리는 계속적인(steady)모욕을 주면서(with), 겁박하여 “자백” 시킬 수 있었다. 그는 저항하는 자들에게 가해진 것에 대한 그의 통상적인 반듯한 기록을 계속하였다. “큼직한(fine) 등나무 막대기로 태형 약 20대.” “전깃줄로 대형 20~30대.” “물로 채우기.”


후에 그는 교도소를 관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산업부에 배치받으려고 노력하였었다. 그는 비록 그것(고문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play down)하려고 하였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고문이 아니었다. 죽음(deaths)도 아니었다. 그는 죽은 것들을 보지 않았다; 찢어진 목, 목을 절단하는 괭이는 다른 장소에서 일어났다. 그의 잠은 희생자들의 얼굴에 의해서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S-21(감옥)이 의도하는 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렇다고(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감옥의 의무) 그는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러나 아마도 각 “자백서”의 60%는 거짓이었고 아마도 그가 죽음으로 보낸 죄수들의 80%는 정권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점을 그는 당시에 알고 있었다. Angkar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감히 말하지 않았다. Alfred de Vigny의 “길고도 무거운 과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라/운명이 너에게 명한 그 길 위에서/그리고는 고통받고 말없이 죽어라.”를 인용함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고 그는 후에 말하였다.


詩(시)에다가 그는 또 하나의 甘言(감언: salve)을 첨가하였다: 혁명투쟁과의 완전한 동일체. 그는 교사훈련 대학인 Institut de Pédagogie에서 중국 스타일 공산주의에 폭 빠졌었다. 발전과 변화의 그 약속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에 그는 Khmers Rouges[캄보디아 공산 叛軍(반군)]와 함께 유격대에 있으면서 농업적이고 평등하고 서양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민주주의 Kampuchea를 위해 싸우는 것을 배웠다. 그의 假名(가명) Duch는 선생님이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서는 학생을 의미하였다.



40-4-321

He may have hated the prison work, but he faithfully repeated the slogans. “Our party makes absolutely no mistakes.” “Angkar knows who is good and who is bad.” They did not quite smother the rising fear that his perpetual system might swallow him, too.


Was he sorry? In 1999, when a journalist found him, he wanted to talk. By then he had become a Christian, another ideology in which he could immerse himself. He knew about sins and forgiveness now. Occasionally he shed tears. He was the first high Khmer Rouge official to go on trial, in 2009. There, often dressed in pure white, his soft voice demanding exact dates and transcripts, he explained himself. But what he said one day he might retract the next. He played with truth, as he had done before. Uniquely among Khmer Rouge leaders, he accepted responsibility for his actions at S-21. But his superiors had given the orders, so he was bound to obey. And he hoped, having been useful, that he might be released.


He was not. In 2012 his original sentence of 35 years for torture, murder and crimes against humanity was extended to life. He was not surprised, or did not let it show. He had learned young the most pertinent of Khmer Rouge mottoes for him, “Extinguish your heart.” And he had not thrown off the motivations of those days. Given the chance, he would discuss Marxism for hours. He clung tightly, too, to his nom de guerre. “Kaing Guek Eav” was the quiet teacher’s name he could have reverted to. But “Duch” was still who he was, the diligent boy who pleased his master. And wrote daily, for years, above that name, “Smash.” “Keep.” “Grind to dust.”


그는 감옥 업무를 싫어했을지도 모르지만 슬로건들을 충실하게 복창하였다. “당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 “Angkar는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를 안다.” 그것들(슬로건)은 그의(그가 속한 공산당) 영구적인 시스템은 그를 또한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증대하는 공포를 완전히(quite) 질식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후회하였는가? 1999년 한 기자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말하기를 원하였다. 그때쯤 그는 그가 자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념인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는 죄와 용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눈물을 흘렸다. 2009년 그는 재판을 받는 첫 Khmer Rouge의 고위관리였다. 재판정에서 순백의 옷을 입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정확한 날짜와 사본을 요구하면서 그는 자기 행위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말한 것을 다음날 철회하였다. 그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진실을 가지고 게임을 하였다. Khmer Rouge 지도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uniquely) S-21에서 있었던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관들이 명령을 내렸었고 그래서 자기는 복종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석방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석방되지 않았다. 2012년에 고문과 살인과 인류에 반하는 죄로 받은 35년 최초선고(original sentence)는 종신형으로 연장되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혹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Khmer Rouge 좌우명 중에서 그에게 가장 적합한 것인 “너의 심장(따뜻한 감정)을 절멸시켜라.”를 젊었을 때 배웠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절의 동기유발을 버리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몇 시간 동안 토론하였다. 그는 또 그의 假名(가명)에 단단히 집착하였다. “Kaing Guek Eav”는 그가 되돌아갈 수 있었던 그 조용한 교사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Duch"는 여전히 그의 선생님을 기쁘게 해 주었던 부지런한 소년, 그였다. 그리고 그는 매일 그 이름 위에 “박살내라”, “지켜라”, “먼지가 될 때까지 갈아라.”라고 썼었다.


출처 : The Economist, Sep 12th 2020
[ 2021-04-06, 11: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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