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계 여인들의 비극적 사랑을 드러낸 대표곡…음반 10만 장 판매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37)홍도야 울지 마라(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 노래, 1939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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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에 소속되어 춤과 노래를 부르거나 의료와 바느질을 담당했던 기생 제도는 대한제국 말 폐지되고, 1909년 관기(官妓)제도도 철폐된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기생들은 먹고 살기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기생조합은 1914년 일본식 요정문화의 영향을 받아 권번(券番)으로 개칭되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영업조직이자 3년에 걸쳐 그들에게 노래, 춤, 기악 등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기녀(妓女) 양성기관이다. 1936년 6월 서울에는 모두 1600명의 기생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오후 6시경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등 일류 요정에 가서 밤 11경 숙소로 돌아온다고 한다. 화대는 시간당 30전에서 1원 50전 정도를 받는데, 한 달 수입이 대체로 35원~40원 정도 된다고 한다. 악기를 잘 다루고, 노래와 춤이 능숙한 고급 예능인이었기 때문에 왕수복, 이은파, 선우일선, 김복희, 김연월, 이화자 등 우리 대중가요 초기에 활약한 가수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몸은 비록 화류계에 있지만 기생들은 마음속으로 항상 건실한 남성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꾸어왔다. 그래서 요정 등에서 우연히 만나 정(情)이 든 남자와 살림을 차린 기생들은 본처의 단호한 조처(사법관서 제소, 물리적 폭력 행사 등)와 사회적 비난 등으로 이내 파탄에 직면하게 된다. 이럴 경우 출가하거나 자살 등 극단적 방식으로 그들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특히 1920년대와 1930년대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서구에서 온 자유연애사상을 수용하여 모험적인 연애를 추구하다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여 함께 삶을 마감하는 소위 ‘정사(情死)’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양 출신 기생 강명화와 경상도 부잣집 아들 장병천의 정사사건과 충북 옥천 출신 카페 여급 김봉자와 경성제대 부속병원 의사 노병운 정사 사건이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꼬집힌 풋사랑>의 가사에 보면 ‘밤거리 사랑은 담뱃불 사랑 맘대로 피우다가 버리는 사랑’이라고 했다. 기생이라는 화류계 여인들의 사랑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귀결되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울지 마라>이다.
  
  1938년 봄 서울 동양극장에서는 극단 청춘좌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조선 악극사상 최다관객과 최장기 공연을 기록하면서 인기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었다. 임선규 극본, 홍해성 연출에 당시 인기배우 차홍녀와 황철, 그리고 비극의 여왕 전옥이 주연으로 나와 열연을 하였다.
  
  기생을 하며 오빠를 출세시킨 홍도가 오빠 친구와 결혼을 하나 기생을 한 것 때문에 시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일로 분노에 찬 홍도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남편과 혼인을 하는 부잣집 딸을 칼로 찌르나 미수에 그쳐 구속되었다가 나중 무죄를 받는다는 것이 이 연극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처지에 있는 기생들은 홍도의 비극적 삶과 사랑을 동정하며 이 연극을 좋아하였다. 18세 기생 임선월은 이 연극을 본 후 자살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연극이 인기 상종가를 치자 1939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1939년 4월에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 레코드의 A면에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 B면에는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당초 예상과는 달리 레코드 B면에 있던 <홍도야 울지 마라>가 훨씬 인기가 있었다. 모두 10만 장 정도가 팔릴 정도로 이 음반이 인기가 있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는 부산항과 경성역을 오고가는 직원을 증원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작사한 이서구는 1899년 경기도 시흥 출신이다. 일본 니혼대를 수학한 그는 동이일보와 조선일보 기자 등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편 극작가와 작사가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등 사극을 집필하고, <홍도야 울지 마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낙화춘풍> 등 대중가요를 작사하였다. 그의 타계 14주년이 되는 1995년 그의 고향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 <홍도야 울지 마라>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트럼펫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김준영은 1907년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나 배재고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와 도요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처녀총각>, <먼동이 터온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야 울지 마라> 등 인기 대중가요를 작곡하였다.
  
  가수 김영춘은 1918년 경남 김해 출신으로 본명은 김종재이다. 김해농고를 졸업한 그는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후 콜럼비아레코드 전속가수가 되었다. <항구의 처녀설>로 데뷔한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 <동트는 대지>, <국경특급>, <버들잎 신세>, <항구의 전야> 등 40여 곡을 발표하였다. 그를 기려서 김해시는 매년 ‘김영춘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홍도야 울지 마라>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 주는 바람이 분다
  
  
[ 2021-04-17, 06: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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