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분단의 아픔 드러낸 수작(秀作)
가거라 삼팔선(39)(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48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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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소련군은 한국과 만주의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은 1945년 8월8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한 후 8월11일~13일까지 웅기, 나진, 청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고, 8월21일 함흥, 24일 평양, 25일 해주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한반도의 북쪽을 점령하자 미국은 그들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8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1945년 8월16일 소련은 이를 즉각 수락하였다.
  
  1945년 9월7일 인천을 통해 한국에 온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본토 점령을 목표로 둔 전투부대였으므로 군정의 목표와 실행계획 등 제대로 통치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여러 여건상 남한의 생존 가능성도 아주 낮게 보았다.
  
  이 당시 민주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냉전적 대결이 세계적 차원에서 격화되고 있었다. 1946년 2월 소련의 스탈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며 동구권을 신속히 공산화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 등 자유진영은 곧 반격을 가하였다. 우선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의 연설을 통해 소련권에 속한 동구권 국가들에게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 1947년 3월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봉쇄하는 소위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결이 일어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1945년 9월20일 소련의 스탈린은 평양에 있는 소련군정 책임자에게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8일 사실상 임시정부 역할을 하는 북한지역 5도 임시위원회 위원장에 김일성이 선정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이 창당되고,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19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아울러 1946년에는 토지개혁과 주요산업 국유화 조치가 있었고, 1948년 2월에는 헌법 초안이 마련되는 등 조선의 소비에트화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반면 미 군정 치하의 한반도 남쪽에서는 좌와 우, 중간파 등 여러 정치세력간 대결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三相) 회의에서 최장 5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처음에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3일 김일성의 지령으로 좌파는 찬탁으로 전환하였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 군정은 이승만을 협력대상자로 생각하였다. 국내외 정세의 흐름에 밝은 이승만은 한반도에 좌우합작 정부가 들어서면 좌파가 남한을 장악한다고 보았다. 그는 1946년 3월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자’는 단정(單政) 발언을 하였다. 이 발언은 여러 논란을 낳았지만 이 노선에 따라 미국은 1947년 7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양하였다. 1948년 2월 유엔은 미국이 제안한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가결하고, 동년 5월10일 총선을 결정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죄우합작파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면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처럼 나라세우기 정치는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이 충돌하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북한에 든든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정판사 사건, 철도파업, 대구폭동을 일으키며 남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특히 그들은 유엔이 결정한 국회의원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도 같은 해 9월9일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한반도가 분단을 향해 나아가다 끝내 그렇게 되자, 이를 슬퍼하는 대중가요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흘겨 본 삼팔선> 등이 이런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들이다. 이 중에서 <가거라 삼팔선>은 분단의 아픔을 드러낸 수작(秀作)이다.
  
  1948년 고려레코드사는 새 시대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희망 삼천리>와 함께 이 노래를 발매하였다. 그들은 <희망 삼천리>가 대중의 인기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가거라 삼팔선>이 훨씬 더 히트하였다. 전국의 레코드 판매상들이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선금을 예치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15년 정도 작사가 이부풍이 가요계에 안 보이자 다들 그가 월북 혹은 납북으로 생각하였다. 그 당시 이런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 내에서 부를 수 없었다. 이처럼 월북 혹은 납북된 작가들과 함께 한 작품이 많은 박시춘 작곡가는 반야월에게 기존 노래의 가사의 개사(改詞)를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반야월 작사가는 이 노래의 2절과 3절을 바꾸고, 그 당시의 분위기에 맞추어 작품의 반공적 요소도 강화하였다. 한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서울로 온 이부풍은 이렇게 개사를 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을 반야월로부터 듣고 만족했다고 한다.
  
  <가거라 삼팔선>
  
  아~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아~꽃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눈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던 고개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아~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던가
  손모아 비나이다 손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 2021-04-19, 04: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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