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에 쫓기다 레코드사 골방에서 탄생한 ‘국민 애창곡’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41)비 내리는 고모령(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1948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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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작사가나 작곡가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사건을 당면하는 등 어떤 계기를 만나거나, 아니면 갑자기 대중들이 감동할 만한 특이한 영감(靈感)이 머리에 떠올라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기계에서 물건을 척척 뽑듯 늘 좋은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해방 후 한국 가요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사가 중의 한 분인 유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사를 잘하는 그도 때로는 막힐 때가 있었다. 1948년 비가 하루 종일 오는 어느 여름 날 그는 럭키레코드 사장 박시춘이 이미 만들어 놓은 곡에 가사를 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고향 만리>, <서울야곡>까지 다 완성했으나 한 곡의 작사가 아직 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빨리 가요시를 완성하라는 박시춘의 재촉을 듣고 술을 마시면 좀 일이 풀릴까 생각해서 술집에서 술을 마셨지만 좋은 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럭키레코드사로 돌아온 그는 구석방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어떻게 작사를 할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럴 때 창 밖에서 소란스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빼어 아래를 보니 자신의 사무실 옆에 있는 낡은 집에서 나이 든 여인과 젊은 남자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들은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였다. 이런 식의 모자(母子)간 다툼을 보자 그는 “저런 망할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어머니한테 효도는 못할망정 대들기까지 하다니…” 하는 괘씸한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어느 시골 마을에서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님과 떠나는 아들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보자고 결심을 하였다. 그는 벌써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들을 보내는 어머님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아들의 모습을 이미지로 그리고 있었다. 그는 떨어져 가는 아들이 어머니를 돌아보니까 ‘고모(顧母)’이고, 그렇게 연신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넘으니까 ‘고모령(顧母嶺)’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자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일사천리로 가사를 완성하였다.
  
  작사가 유호가 이렇게 산고(産苦)를 겪으며 만들어낸 <비 내리는 고모령>은 가수 현인이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60년 다시 발매된 음반에서 성우 이창환과 고은정이 애간장 녹이는 모자간 대화를 잘 이끌어가서 음반의 성가(聲價)를 더욱 올렸다.
  
  한편 노래가 만들어진 한참 뒤에 우연히 유호는 지도를 보다가 노래의 제목과 일치되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경북 경산군에 경산과 청도 등 인근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간이역인 고모역(현재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이라는 기차역과 그 인근에 고모령이라는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였다.
  
  작사가 유호가 모자간의 다툼을 우연히 보고 <비 내리는 고모령>을 작사했다는 정두수 작사가의 유력한 주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제기되고 있다. 어떤 이는 부산 발 완행열차를 타고 오던 유호가 고모역에 정차할 때 어머니와 아들이 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작사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다른 이는 많은 어머니들이 일제강점기 징병이나 징용을 가는 자식을 이곳 고모역에서 헤어졌다는 얘기를 유호가 듣고 작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어떤 동기에서 작시가 되었던 이 노래가 이렇게 히트한 이유는 일제가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 전쟁(1941년)을 일으킨 후 많은 한국인들이 그 전쟁에 억지로 동원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식을 사지(死地)로 떠나보내는 어머니와 눈물어린 이별을 했다는 슬픈 경험을 많은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어머니들은 해방 후 가난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자식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다. 이처럼 가슴 아픈 부모와 자식 간의 이별 경험을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모령은 지도상에 실존하는 존재이자, 어머니와 헤어져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망향초’ 신세라며 향수를 달래는 상상 속의 장소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이 노래는 한국인의 가슴을 울린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1969년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문희, 박노식, 독고성 등이 주연한 동명(同名)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2005년 KBS 가요무대 방송 20돌을 맞아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방영된 노래 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2001년 <비 내리는 고모령>의 무대인 고모령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들어간 노래비가 세워졌다.
  
  
  <비 내리는 고모령>
  1.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2.맨드래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눈물 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 2021-04-25, 23: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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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21-04-26 오전 2:55
많은 가수가 부른 ‘비내리는 고모령’ 중 으뜸은 단연 오케스트라 없이 기타와 어코디언 반주 만으로 부른 주현미 버전. 그야말로 絶唱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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