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중턱 ‘아리랑 술집’서 도토리술 먹으며 작사…80년 넘도록 민족의 애창곡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59)번지 없는 주막(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1940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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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없는 주막>이 나온 1940년이면 중일전쟁(中日戰爭・1937년)을 일으킨 일제(日帝)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1941년)을 1년 앞둔 급박한 시점이었다. 이에 따라 집안에 있는 물건에 대한 공출 등 전시(戰時) 총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먹고 살기 위해 한해 수십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만주나 일본 등으로 이주를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나라 없는 민족이라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유랑인의 슬픔이 가슴 속에 절절하게 맺히는 시절이었다.
  
  1940년 여름 박영호 작사가는 그가 근무하던 태평레코드 문예부원들과 어울려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을 등정하였다. 그들은 백두산 중턱에서 비를 만나 통나무를 얼기설기 이은 후에 그 빈틈에 흙을 발라 추위와 비바람을 겨우 면할 수 있는 통칭 ‘아리랑 술집’으로 칭해지는 어느 주막에 들어갔다. 집 밖에는 여름밤을 적시는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집주인이 내어놓은 도토리술을 밤이 늦도록 먹으며 정담(情談)을 나누었다.
  
  그때 호롱불을 줄이면서 비를 보던 작사가 박영호는 일제의 지배 아래 황폐한 조국 산하를 ‘번지 없는 주막’으로 비유하면서 끓어오르는 비참한 심정을 담은 가사를 썼다. 이미 조선인의 만주 이민사를 다룬 희곡 <등잔불>을 썼던 적이 있는 그는 이런 조국을 등지고 타향을 떠도는 조선인의 유랑 신세의 애환을 이 가요시에 담았다. 이 가사의 맛을 제대로 살린 이재호의 곡을 백년설이 불러 6만 매 이상 판매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음반의 발매와 관련하여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1940년 9월 태평레코드사는 <산팔자 물팔자>, <눈물의 두견화>를 담은 음반을 발표하였으나, <눈물의 두견화>가 조선총독부 검열에 걸려 발매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태평레코드사는 급히 이 노래 대신에 <번지 없는 주막>을 대체 수록하여 개정 임시발매라는 이름 아래 1940년 10월 내어놓았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나왔지만 이 노래는 유랑가요의 고전이 되며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많은 조선인들은 대포를 마시며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동안 쌓인 울분을 일시에 토해 놓았다.
  
  이 노래의 인기는 해방이 되어도 계속되어 1961년 강찬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김승호, 박암, 도금봉이 주연배우로 등장한 영화 <번지 없는 주막>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밀수 배를 타던 주인공이 사직당국에 자수하여 형기(刑期)를 마치고 나오나 아내가 병들어 죽어간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밀수에 가담하여 아내를 살렸으나, 다시 배반할 것을 염려한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1994년에는 김상열 감독이 최주봉과 김성녀를 캐스팅하여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하여 술집에 취직한 부인을 떠나 고향에 어린 딸을 맡기고 그는 정처 없이 떠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박영호는 1911년 함남 원산 출신이다. 그가 작사한 가사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조명암과 함께 일제 시기를 대표하는 작사가이다. 그는 <번지 없는 주막>, <연락선은 떠난다>, <사대문을 열어라>, <오빠는 풍각쟁이>, <청춘 번지>, <열아홉 순정>, <청포도 사랑> 등 수많은 가요시를 썼다.
  
  작곡가 이재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본명이 이삼동이다. 그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경상도 아가씨>, <나그네 설움>, <남강의 추억>, <울어라 기타줄아>, <대지의 항구>, <산유화>, <불효자는 웁니다>, <귀국선>, <고향에 찾아와도> 등 주옥같은 명곡을 작곡하였다.
  
  경북 성주 출신인 가수 백년설은 일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다. 그는 <나그네 설움>, <대지의 항구>,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불러 식민 치하 조선인의 슬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번지 없는 주막>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여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쿠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믿겠소 못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살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잊느냐.
  
  
[ 2021-05-18, 01: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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