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은혜
반공자유-교양영어 (50): Socrates in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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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승만 대통령의 은혜


서양철학의 원조 Socrates의 철학에 대한 주된 공헌은 대화방법이었다. 그는 정밀한 심문을 통해서 대화자의 가장 깊고 가장 깊이 숨겨진 의견을 이끌어 내 테스트하였으며 이런 방법은 Socrates의 변증법으로 알려져 있다. 대화를 독창적으로 한다는 것은 공통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하여 서로를 향해서 접근하고 사물에 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 참가자들이 변증법에 의해서 사실과 진리에 보다 더 근접하게 되기 때문에 토론은 승리나 패배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변증법은 진실에 대한 합동탐색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보다 높은 상태의 각성에 이르는 것이 변증법적 대화의 목적이다. 그래서 Socrates의 대화법은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오게 한다.


Socrates의 영예의 일부는 그의 용기 있는 비동조주의이다. 생각 없이 시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기 개인의 의견을 과감하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중”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생각하려고 하였다. 그는 개인주의자였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개인주의라는 점에서 Socrates는 서구 자유주의의 원류라고 하겠다. 개인들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변증법적으로 탐색되어 도달되는 생각이나 개념은 진실이 거나 진실에 근접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사실과 진리를 파악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다중의 지혜는 개인의 생각이 경쟁적으로 모여서 나온다.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서 사실을 추구하며 사실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나라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부유하고 더 문명된 나라가 된다. 달리 말해서 개인의 자유가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되는 나라 즉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反개인주의 전체주의 나라보다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앞서가게 된다는 것이다.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서구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선진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Socrates의 비동조주의적 개인주의 덕분이다. 북한이 세계 최악의 빈곤국으로 전락한 것은 개인의 자유가 전혀 없는 전체주의 때문이다. 공산독재 북한은 “최고 존엄” 한 명의 목소리뿐이지만 자유한국은 최고 존엄 5000만의 소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신 이승만 대통령의 河海(하해) 같은 은혜에 감사한다.

 



50. Socrates in America

-Arguing to death

-From Socrates, history's quintessential nonconformist, lessons for America today


50-1-394

IF THE most famous philosopher of all were alive today, he might find America remarkably similar to his own Athens of the fifth century BC. Socrates would witness a vibrant and proud democracy, and disdain it as an indulgence of the benighted, unphilosophical “herd”. He would interrogate America’s politicians, talk-radio and cable-television pundits in search of honest discussions that lead to truth, and thereby expose their confusion, contradictions and ignorance. He would avail himself of America’s as of Athens’s freedom of speech, and simultaneously be horrified by the speciousness of the speech that Americans choose to make. And he would challenge America just as he had provoked Athens, and possibly be prosecuted and condemned for it a second time.


Socrates throws down a gauntlet from antiquity to America and all other democracies. How could Athens, which prided itself on its freedoms and had for decades not only tolerated but delighted in the stings of the man who described himself as its “gadfly”, turn on its greatest mind and condemn him to death when he was 70 years old? Had Socrates exposed a terrible flaw in democracy? Or had democracy responded to a mortal threat from the likes of Socrates?


His influence today is usually felt in academia, through the legacy of his ideas. He founded Western philosophy in the sense that all intellectual inquiry before him is deemed to be “pre-Socratic” and all Western philosophy since him, in the words of Alfred North Whitehead, an English philosopher of the early 20th century, mere “footnotes” to the 35 Platonic dialogues in which Socrates was the main character. It was Socrates who made the momentous “turn” of Western thought away from speculation about the composition of the physical world and towards the liberal questions of morality, justice, virtue and politics.


50. 미국에 나타난 Socrates

-죽을 때까지 논쟁하며

-역사의 眞髓(진수)적인 비순응주의자 Socrates가 오늘날 미국에 주는 교훈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면, 그는 그의 나라인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와 미국이 대단히 비슷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Socrates는 활기차고 의기양양한 민주국가를 목격할 것이고 그런 나라를 미개하고 철학이 없는, “가축같이 무지한 민중”의 방종한 나라라며 경멸할 것이다. 그는 진리로 이끄는 진지한 토론을 찾아서 미국의 정치인과 라디오와 케이블 TV의 명사들을 심문하고 그들의 미몽과 모순과 무지를 노출시킬 것이다. 그는 아테네의 그것처럼 미국의 언론자유를 이용할 것이고 동시에 미국인들이 하고 있는 말의 허울 좋음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아테네를 화나게 했던 것처럼 미국에 도전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Socrates는 먼 옛날로부터 되살아나서 미국과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 도전을 하고 있다. 자유를 자랑하던 아테네가, 자신을 아테네의 “등에”라고 말하는 사람(Socrates)의 신랄한 비판을 너그럽게 보아주었을 뿐 아니라 즐기기도 하였던 아테네가 어떻게 해서 70세인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적대하고 처벌하여 죽게 하였는가? Socrates는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하나의 무서운 결함을 폭로하였던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Socrates 같은 사람들의 치명적인 위협에 반격을 가한 것인가?


오늘날 그의 영향은 대체로 그가 남긴 사상을 통해서 학계에서 감지되고 있다. Socrates 이전의 모든 지적 탐구는 “Socrates 이전 시대의 것”으로 간주되고, 20세기 초 영국의 철학자 Alfred North Whitehead의 말대로 그 이후의 모든 서양철학은 Socrates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35편의 플라톤 대화’의 脚註(각주)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서양철학을 창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사상을 물리적 세계의 구성에 대한 思辨(사변)으로부터 방향을 틀어서 도덕성, 정의, 미덕, 정치학 등의 인문적(교양적)인 문제로 향하게 한 사람은 Socrate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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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Socrates casts his influence far beyond academia, beyond even his ideas. His main contributions, arguably, were his method and style as well as the example of his life. His method was to question one or a few individuals in small settings (the “Apology”, which records his address to the 500-man jury at his trial, was the exception). Through such intimate probing he elicited and tested his interlocutors’ deepest and most hidden opinions, a process now known as Socratic dialectic. His style during the discussions was “ironic” in the original sense of eironeia, meaning that he pretended to be ignorant to prompt his interlocutors to open up.


His life, above all, was dedicated to the love of wisdom (philosophy). His wife, Xanthippe, and three sons lived in near-penury while Socrates loitered around the marketplace of Athens looking for debaters. In the end he sacrificed his life for philosophy when he was offered the opportunity to escape from prison before his execution but chose to swallow hemlock instead. What, then, had Socrates revealed in Athenian democracy that made this martyrdom necessary? And would American democracy be capable of repeating Athens’s sin?


 그러나 Socrates는 학계를 넘어서, 심지어 자신의 사상까지도 넘어서 훨씬 더 멀리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주된 공헌은 자신의 삶의 예뿐 아니라 방법과 대화방식(스타일)이었다. 그의 방법은 토론장소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그를 재판하는 500명의 배심원에게 한 그의 말을 기록한 ‘변론’은 예외였다). 이러한 정밀한 심문을 통해서 대화자의 가장 깊고 가장 깊이 숨겨진 의견을 이끌어 내어 테스트하였으며 이런 방법은 Socrates의 변증법으로 알려져 있다. 토론에서 그의 방식은 대화상대의 마음을 열어주기 위하여 무지를 가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eironeia의 원래의 뜻인 “반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는 지혜의 사랑(철학)에 대한 헌신이었다. Socrates가 토론자를 찾아서 아테네의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을 동안 그의 아내 Xanthippe와 세 아들은 거의 극빈 속에 살았다. 결국 사형당하기 전에 감옥에서 도망갈 기회를 제공받았지만 독약을 마시기로 선택하면서 그는 철학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였다. 그렇다면, Socrates는 이러한 순교를 필요하게 만든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무엇을 밝혀내었는가? 그리고 미국은 아테네의 죄를 반복할 것인가?

 


50-3-346

The town-hall meeting

Visiting America today, Socrates might have dropped in on last summer’s “town hall” meetings, in which members of the public allegedly came to debate the reform of health care with their elected representatives. Socrates would have beheld hysterical firebrands shouting that America’s president and senators were Marxists, Nazis or both. Reaffirmed in his disdain for democratic rhetoric, Socrates would have left to seek better conversations, as he used to do in Athens, where he conspicuously shunned the public assembly and the jury courts in which male citizens were expected to serve.


Socrates considered the debate in such settings unedifying, pointless and unworthy-in a word, “eristic”. Eris was the Greek goddess of strife (the Roman Discordia). It was Eris who cunningly dropped a golden apple with the inscription “to the fairest” into a feast, inciting three goddesses-Hera, Athena and Aphrodite-to bicker over who deserved it and thus launching the ten-year Trojan War. Eris is present in presidential debates, in court rooms and wherever people are talking not to discover truth but to win.


In 1968 Stringfellow Barr, an historian and president of St John’s College in Maryland, wrote a Socratic critique of American discourse: “There is a pathos in television dialogue: the rapid exchange of monologues that fail to find the issue, like ships passing in the night; the reiterated preface, ‘I think that…,’ as if it mattered who held which opinion rather than which opinion is worth holding; the impressive personal vanity that prevents each ‘discussant’ from really listening to another speaker”.


공회당 회의

오늘날 미국을 방문한다면, Socrates는 지난여름 대중과 선출된 대표자들이 의료보장제도개혁에 관한 토론을 전개한 공회당 회의에 들렸을지도 모른다. Socrates는 미국의 대통령과 상원의원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나치스이며 아니면 둘 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병적일 만큼 열렬한 토론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민주적 수사학(토론방법)에 경멸감을 재확인하게 된 Socrates는 아테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다 나은 대화를 위해 떠났을 것이다. 아테네에서 그는 남자 시민은 모두 참석해야 하는 공공회의와 배심재판을 유별나게 회피하였다.


Socrates는 이러한 장소에서 하는 토론은 교훈적이지 못하고, 효과가 없으며 가치도 없는, 한마디로 말해 “논쟁적”이라고 간주하였다. Er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분쟁의 여신이다(로마 신화에서는 불화의 여신). (神들의) 잔치에서 “최고의 미인에게”라는 銘刻(명각)이 있는 황금사과를 교활하게 떨어뜨려서, 세 명의 여신―Hera, Athena, Aphrodite―으로 하여금 서로 사과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다투도록 부추겨서 10년간의 트로이전쟁을 일으킨 것은 바로 Eris 여신이었다. Eris 여신은 대통령선거 토론회, 법정 등 사람들이 진리의 발견이 아니고 이기기 위해서 토론을 하는 곳은 어디에나 참석한다.


1968년, Maryland에 있는 St John’s College의 역사학자 겸 총장인 Stringfellow Barr는 미국인의 담론에 대해서 Socrates的인 비평을 하였다: “TV 대화에는 일종의 비애가 있다. 즉 캄캄한 밤중에 항해하는 배처럼 결말을 찾을 수 없는 독백의 재빠른 교환, 마치 어느 의견이 주장할만한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누가 어느 의견을 주장하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같은 반복되는 序言(서언), 각각의 토론자가 다른 화자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는 개인의 인상적인 허영심, 등이 있다.”〈 TV대화는 각 토론자가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고 종합하여 바람직한 결론을 유도하기보다는 각자가 자기만의 생각을 독백하듯이 주장하기 때문에 안타깝다〉

 


50-4-397

Socrates’s alternative was “good” conversation or dialectic. To converse originally meant to turn towards one another, in order to find a common humanity and to move closer to the truth of something. Dialectic, in other words, is decidedly not about winning or losing, because all the conversants are ennobled by it. It is a joint search. Unfortunately, as Mr Barr put it, it is also “the most difficult” kind of conversation “especially for Americans to achieve”.


On a good day, Socrates’s conversations bore all the marks of dialectic. There was little long-winded monologue and much pithy back-and-forth. The conversation often meandered and sometimes Socrates contradicted himself. In the “Protagoras”, for example, he argues that virtue cannot be taught but in the “Meno” that it can. The conversations were at times humorous and invariably surprising. He hoped to bring all involved to a higher state of awareness.


Because Socrates wanted to win converts to this conversational culture he often chose young and malleable men who appeared tempted by the eristic rhetoric he believed democracy encouraged. For instance, Socrates tried hard to educate Alcibiades, the hedonistic and ambitious young man whose guardian Pericles was Athens’s greatest statesman. He also went for a long walk in the countryside of Athens (which he hated leaving) with a young man named Phaedrus in order, very gently, to make the youth see the hollowness of a rhetorician he admired.


Socrates의 대안은 “좋은” 대화와 변증법이다. 대화를 독창적으로 한다는 것은 공통적인 인간성(인간적인 가치)을 발견하기 위하여 서로를 향해서 접근하고 어떤 것에 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대화 참가자들이 변증법에 의해서 고상하게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승리나 패배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변증법은 합동 탐색이다. 불행히도 변증법은, Mr Barr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달성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특히 미국인이) 종류의 대화법이다.


대화가 잘 되는 날에는, Socrates의 대화법은 변증법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장황하게 혼자 떠드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간결하게 주고받는 말이 많았다. 대화는 구불구불하게 나아갔고 Socrates는 때때로 모순되는 말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Protagoras”에서 덕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Meno”에서는 가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대화는 가끔 유머러스하였고 변함없이 놀랄만하였다. 그는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다 높은 상태의 각성에 이르기를 바랐다.


Socrates는 이러한 대화 문화를 따르는 사람(개종자)을 얻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권장한다고 믿어지는 논쟁적 수사학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젊고 순응성이 있는 젊은이들을 종종 선발하였다. 예를 들면, Socrates는 Alcibiades를 교육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Alcibiades는 그의 후견인이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Pericles로서 향락적이고 야망이 많았다. 그는 또한 Phaedrus라는 젊은이와 함께 아테네(그는 아테네를 떠나는 것을 싫어하였다)의 시골지역으로 긴 산책을 하였는데 이는 그 젊은이로 하여금 그가 숭상하는 어떤 수사학자의 공허함을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50-5-398

Socrates as talk-show host

But Socrates also sought out those whom he saw peddling the skills of eristic conversation. These were the travelling teachers who charged wealthy fathers to teach their sons the tools of power, the “sophists” such as Protagoras or Thrasymachus. And there were the rhetoricians. Socrates manoeuvred the most famous of them, Gorgias, into admitting that the aim of rhetoric is “rule over others in one’s city”. Gorgias even boasted that a master rhetorician unqualified in medicine could get himself elected as surgeon general over a qualified doctor who is not rhetorically gifted. In America today, Socrates would recognise sophists and rhetoricians in partisan spin doctors such as Karl Rove and David Axelrod or equally in talk-show hosts such as Sean Hannity and Keith Olbermann.


Using his irony, Socrates would make them feel overconfident, draw them out and then, through his questioning, expose their confusion and ignorance. Often this was done for the benefit of an impressionable young student who was listening. Because such conversations had to be bespoke for the participating individuals, Socrates refused ever to write anything down. As he said in the “Phaedrus”, text remains dumb when questioned and will be understood or misunderstood depending on who is reading it.


The trouble was that, although his students, including Plato and Xenophon, who passed on Socrates’s conversations for posterity, saw him as noble, much of Athens did not. Instead, many Athenians detected an underlying arrogance in Socratic irony. Socrates thus resembled, say, the wiser-than-thou and often manipulative comedian-commentators Jon Stewart and Stephen Colbert in today’s America. Those who agreed with him found him funny and enlightening. The rest found him merely condescending.


대담프로의 사회자로서의 Socrates

그러나 Socrates는 논쟁적 대화기술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이들은 부유한 아버지들에게 Protagoras 나 Thrasymachus같은 소피스트들의 강력한 도구(대화의 기술)를 아들들에게 가르치도록 권유하고 다니는 유랑 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수사학자들도 있었다. Socrates는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Gorgias를 교묘하게 조종하여 수사학의 목적은 “자신의 도시(나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Gorgias는 심지어 의학 자격이 없는 최고의 수사학자는 수사학적으로 재능이 없는 유자격 의사를 누르고 자신이 공중위생장관에 선출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자랑하였다. 오늘날의 미국에 있다면, Socrates는 Karl Rove와 David Axelrod 같은 당파적 정치참모나 Sean Hannity와 같은 Keith Olbermann 텔레비전 대담프로의 사회자에게서 소피스트나 수사학자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의 반어법을 이용하여, Socrates는 그들로 하여금 자만심을 느끼게 하고, 그들을 꾀어서 제멋대로 말하게 하고 질문을 통하여 그들의 혼돈과 무지를 노출시킬 것이다. 종종 감수성이 강한 젊은 학생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행해졌다. 이러한 대화는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개개인들을 위해서 준비해야 하였기 때문에 Socrates는 어떤 대화내용도 기록해 놓기를 거부하였다. “Phaedrus”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질문을 받으면 책은 듣지를 못하고 (책은 사람이 아니므로) 읽는 사람에 따라 책은 이해되기도 하고 오해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비록 Socrates의 대화를 후세에 전한 Plato와 Xenophon 등 그의 제자들은 그를 고귀하다고 생각하였지만, 많은 아테네시민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Socrates는 오늘날 미국의 ‘당신보다 똑똑하며’ 말솜씨 좋은 코미디언 겸 해설자인 Jon Stewart와 Stephen Colbert을 닮았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를 재미있고 계몽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일부러 겸손한 체한다고 생각하였다.


 

50-6-399

Socrates fed this image of arrogance. In his defence before the jury, he said that he acted on a divine mission from Apollo’s oracle at Delphi in exposing so many as ignorant. In Plato’s version, Socrates claimed that the oracle had said “there is no one wiser”. With this presumed superiority, Socrates set out to prove the oracle wrong. Xenophon’s version is more arrogant yet. “Apollo answered that no man was more free than I, or more just, or more prudent,” Socrates told the jury. “Apollo did not compare me to a god…he did, however, judge that I far excelled the rest of mankind.”


It is a tribute to the Athenians that they mostly embraced such megalomania as a charming quirk. They did, however, mock it. Aristophanes, a comic playwright who wrapped serious messages in humour-as, say, Sacha Baron Cohen (aka Borat) does today-wrote an entire play, “The Clouds”, to lampoon Socrates.


In that comedy, an old farmer named Strepsiades wants to get out of the debts of his horse-racing son, Pheidippides, and sends him to an eccentric philosopher named Socrates who runs a “thinkery” where students learn to talk themselves out of any situation (sophistry, in other words). The son successfully evades his creditors but also returns with strange ideas. Because Socrates has taught him that wisdom is the only authority, Pheidippides proceeds to beat up his uneducated father, then threatens to do the same to his mother. Angry that his son has been corrupted, Strepsiades burns down Socrates’s school.


Socrates는 이런 오만한 인상을 주었다.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을 옹호하면서, 그가 많은 사람을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은 Delphi에 있는 Apollo의 신탁이 내린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Plato판에 의하면, Socrates는 “Socrates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신탁이 말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생각되는 우월감을 가지고 Socrates는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Xenophon판에 의하면 Socrates는 훨씬 더 교만하다. “내 보다도 더 생각이 자유롭고 더 정의로우며 더 신중한 사람은 없다고 Apollo가 말하였다.”라고 Socrates는 배심원들에게 말하였다. “Apollo는 나를 神에 비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모든 인류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판결하였다.”


대부분의 아테네 사람들이 이러한 과대망상증을 매력적인 기행으로 받아들인 것은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행을 조롱하였다. 심각한 메시지를 유머로 포장하였던 희극작가인 Aristophanes는―현대의 Sacha Baron Cohen가 하듯이― Socrates를 호되게 풍자하기 위하여 “The Clouds”全作(전작)을 썼다.


이 희극에서 Strepsiades라는 늙은 농부는 아들 Pheidippides가 경마에서 짊어지게 된 빚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벗어날 수 있도록 (달리 표현하면 궤변)학생들을 가르치는 “thinkery”를 운영하는 괴상한 철학자 Socrates에게 보낸다. 아들은 채권자들을 성공적으로 따돌리지만 괴상한 생각을 가지고 귀향한다. Socrates가 그 아들에게 지혜가 유일한 권위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들은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를 구타하고 어머니마저도 구타하려고 위협한다. 아들이 망나니가 되어서 화가 난 Strepsiades는 Socrates의 학교를 불태워버린다.



50-7-400

The Socrates lampooned in the play, and probably laughing heartily in the audience, was 46 at the time and got on well with Aristophanes. Plato presents both men as having a jolly time together in the “Symposium”. But already in “The Clouds”, there are the familiar charges of Socrates corrupting the young and threatening to subvert society and of being impious. Indeed, Aristophanes has Socrates arguing in his thinkery that “Zeus does not even exist.” Addressing the jury 24 years later, Socrates claimed that this is where the charges originated.


In the coming years, many Athenians, and especially those who had been embarrassed by him, would learn to loathe Socrates. His dialectic was indeed surprisingly negative. Typically, he became obsessed with defining something abstract-What is justice? What is virtue?-and then twisted words to dismantle any opinion offered.


In Xenophon’s “Memorabilia”, a man named Hippias refuses to debate Socrates: “You mock at others, questioning and examining everybody, and never willing to render an account yourself or to state an opinion about anything,” he says. In Plato’s “Meno”, his interlocutor compares Socrates to “the flat torpedo sea-fish; for it benumbs anyone who approaches and touches it.” Socrates had a talent for making people feel bad.


He also, in effect, boycotted Athens as a society. Socrates did his military duty but not his civic or jury duty, which he considered beneath him. By opting out of ordinary public life, he chose to be what Pericles in his funeral oration called an idiotes, a person who remains “private” when his country needs him in public life.


연극에서 심하게 풍자를 당하면서도 극을 보는 관객들 속에서 쾌활하게 웃고 있던 때의 Socrates의 나이는 46세였고 극작가 Aristophanes와는 사이좋게 지냈다. Plato는 그의“Symposium”에서 두 사람이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The Clouds”에서 Socrates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고 사회를 전복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으며 神을 모독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타나고 있다. Aristophanes는 Socrates가 그의 학교에서 “제우스神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24년 후에 배심원들 앞에서 변론하면서 Socrates는 고발이 시작된 것은 이때(The Clouds 공연)부터라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 여러 해 동안 많은 아테네사람들, 특히 Socrates가 쩔쩔매게 만든 사람들은, Socrates를 몹시 싫어하게 된다. 그의 논법은 놀라울 만큼 부정적이었다. 전형적으로, 그는 추상적인 것의―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미덕인가?―정의에 집착하게 되고 기존의 어떤 견해라도 해체하기 위해 단어들을 왜곡시켰다.


Xenophon의 “Memorabilia”에서는, Hippias라는 이름의 한 사람은 Socrates와 토론하기를 거부한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말을 점검하면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말 하거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당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모욕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Plato의 “Meno”에서는, 대화자들은 Socrates를 “납작 엎드려 있는 어뢰물고기에 비유하고 있다. 그 물고기는 자기에게 접근하는 누구라도 마비시키고 해치기 때문이다.” Socrates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사실상 아테네를 하나의 사회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Socrates는 군사적 의무는 수행하였지만 시민적 의무(선거 참여 등) 또는 배심원의 의무는 행하지 않았다. 그런 의무는 그의 지위보다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공직생활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조국이 그에게 공적인 삶을 요구할 때에 “私的(사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 즉 그는 Pericles가 그의 장례식 추도사에서 말한 백치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50-8-401

Socrates as American Taliban

Worse, he was suspected of sympathising with Sparta, Athens’s enemy in the Peloponnesian War. An oligarchy in which rulers, warriors and workers had prescribed stations in life, Sparta had aspects of the “ideal” city that Socrates sketched in Plato’s “Republic”, and it was fashionable among his students to admire Sparta. The equivalent would have been for a prominent American intellectual to be pro-Soviet in the cold war, or today to have kind words for Islamic Jihad.


If Socrates had subversive tendencies, he never acted on them overtly. But he did seem to have a bad record with his students. Most famously, there was Alcibiades, who rose to power, talked the Athenians into sending an army to Sicily in a pre-emptive strike that turned into disaster, then defected to advise the Spartan enemies on how best to fight Athens, then defected again (after sleeping with a Spartan king’s wife) to Athens’s other enemy, Persia. When Alcibiades speaks in Plato’s “Symposium”, it is to lament his failure to persuade Socrates to have sex with him.


Another young man, Meno, is Socrates’s chosen interlocutor on the subject of virtue. The same Meno then led an Athenian army to Persia where he betrayed his country and troops by seeking favour at the court of the Persian king. (Admittedly, another student of Socrates, Xenophon, then rescued the stranded Athenian army.) One of Socrates’s three future accusers, Anytus, was present at his debate with Meno.


Socrates’s oldest student was Antisthenes, who apparently became so frustrated with Socrates’s habit of demolishing every conceivable opinion but not offering anything positive that he became the first of the Cynics. He concluded that all of democracy and politics was silly, taunted the Athenians that they should have a majority vote declaring asses to be horses, and then suggested that everybody withdraw from public life altogether. The Cynics became “apolitical”-without a polis (city), apart from society. And there was of course Plato. But Plato never divulged his own views except, perhaps, through the words he attributed to Socrates. It is safe to say that he, too, disdained democracy and was attracted to the Spartan alternative, all the more so since he was the cousin of a certain Critias and the nephew of a man named Charmides, both of whom he appears to have admired and who became the rough Athenian equivalent of what Osama bin Laden and Ayman al-Zawahiri are to America.


미국 Taliban으로서의 Socrates

더욱더 나쁜 것은, 그는 Peloponnesian War에서 아테네의 적국인 스파르타를 동정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통치자와 군인과 노동자들의 지위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과두정치국가인 Sparta는, Socrates가 Plato의 “Republic”에 槪略(개략)해 놓은,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Socrates의 학생들이 Sparta를 찬양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있었다. 이와 똑같은 것(동등물)은 냉전시대에 미국의 한 저명한 지식인이 친 소련주의자가 되거나 오늘날 이슬람의 Jihad에 대해서 친절한 말을 하는 것일 것이다.


Socrates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활동을 공공연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학생들은 좋은 기록(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 가장 유명하게도, 권력의 자리에 오른 Alcibiades는 아테네사람들에게 Sicily를 선제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도록 설득하였지만 그 공격은 재앙으로 변하였고, 그 후 적국인 Sparta로 도망가서 아테네와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하였고, 그 후 (Sparta의 왕비와 동침한 후에) 다시 아테네의 또 다른 적국인 Persia로 도망하였다. Alcibiades가 Plato의 “Symposium”에서 말한 내용은 그와 성관계를 가지도록 Socrates를 설득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젊은이인 Meno는 미덕에 관한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Socrates가 선택한 대화자였다. 그 후 Meno는 아테네군을 Persia로 이끌고 가서 Persia 왕의 궁정에서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그의 나라와 군대를 배신하였다(그 후 Socrates의 또 하나의 제자인 Xenophon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아테네군을 구출하였다). 미래의 Socrates 고발자 세 명 중의 한 사람인 Anytus는 Meno와의 토론에 참석하였었다.


Socrates의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인 Antisthenes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생각은 분쇄해버리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제안하지 않는 Socrates의 버릇에 너무나 좌절하여 犬儒學派(견유학파)의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정치의 모든 것은 바보짓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당나귀를 말이라고 선언하는 다수결 투표를 하라고 아테네 사람들을 조롱하였고,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공적인 삶에서 물러날 것을 제안하였다. 견유학파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살 곳이 없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Plato도 있었다. 그러나 Plato는 Socrates 덕분이라는 말 외에는 자신의 견해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Plato도 민주주의를 경멸하였고 독재국가인 Sparta식 대안에 마음이 끌렸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가 Critias의 사촌이고 Charmides라고 이름하는 사람의 조카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그는 이 두 사람을 존경하였고 이 두 사람과 아테네의 관계는 Osama bin Laden과 Ayman al-Zawahiri가 미국에 대한 관계와 같다(동등하다).

 


50-9-402

Ancient Athens after September 11th

For Athens did have its version of September 11th 2001: an attack on its basic way of life, its freedom and security as a democracy. It had two such events, in fact. In 411BC, during the Peloponnesian war, a group of aristocratic Athenians including students of Socrates overthrew Athens’s democracy in conspiracy with Alcibiades, who promised (but failed) to bring Persian support. This oligarchic junta lasted only a few months.


Then, in 404BC, a second coup toppled Athens’s democracy. Among its leaders were Plato’s relatives, Critias and Charmides, who appear in Plato’s dialogues to be students of Socrates and who were in cahoots with the Spartans who had just won the Peloponnesian war. For much of a year, the oligarchs conducted a reign of terror, before Athens reclaimed its democracy. In 401BC the oligarchs were scheming a third coup, but failed.


Socrates was put on trial two years later. He had played no part in the coups, but he was deemed suspect by association. His speeches, in light of recent events, struck the wrong chord and were considered inflammatory-like, say, the sermons of the American pastor, Jeremiah Wright, which forced Barack Obama, formerly in his congregation, to disavow him. Vaguely but plausibly, Socrates was accused of corrupting the young. 


고대 아테네의 9·11 테러공격

왜냐하면 아테네에도 아테네판 2001년 9·11 폭탄테러 공격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테네의 기본적인 생활방식과 민주국가로서의 아테네의 자유와 안보에 대한 공격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두 번 있었다. Peloponnes 전쟁 중인 BC 411년에, Socrates의 제자를 포함한 일단의 아테네 귀족들이 Persia의 지원을 받아 오겠다고 약속한 Alcibiades와 공모하여 아테네 민주정부를 전복시켰다. 이 소수독재 군사정부는 겨우 수개월 간만 존속하였다.


그 후 BC 404년에 두 번째 쿠데타가 아테네 민주정부를 붕괴시켰다. 쿠데타 지도자들 중에는 Plato의 친척들인 Critias와 Charmides도 들어 있었는데 이들은 Plato의 대화편에 Socrates의 제자로서 등장하고 Peloponnes 전쟁에서 방금 승리한 Sparta와 내통하고 있었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되찾기까지 거의 1년 동안 과두정치 집정자들은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BC 401년에 이 집정자들은 세 번째로 쿠데타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Socrates는 2년 뒤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쿠데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의 연설은 최근의 사건 때문에 악감을 불러일으켰고 선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미국의 Jeremiah Wright 목사의 설교처럼. 이로 인해서 Barack Obama는 집회에서 목사와의 관계를 부인해야 했다. 애매하지만 사실인 것처럼, Socrates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혐의로 고발되었다.


 

50-10-403

The other charge, also familiar to Americans who distrust atheism in their public figures (even though their constitution would not admit it in court), was impiety. Socrates almost certainly was an atheist. As was his wont, however, he cared more about debating, with a man named Euthrypho on the steps of the courthouse before his preliminary hearing, what piety even meant.


In his perplexing defence before the jury, Socrates never addressed either charge directly. True to form, he attempted dialectic with his accusers, making them look confused and thus insulting them even more. Nonetheless, and to the great credit of the Athenians, the verdict was close. I.F. Stone in “The Trial of Socrates” estimates that 280 jurors voted guilty, 220 innocent.


In his second speech, before his sentencing, Socrates stepped up his invective. To his acquitters he was kind. But to the rest he was mocking. Xenophon believed that Socrates intentionally antagonised the jury because at this point he wanted, or needed, to die and become a martyr. If so, Socrates succeeded. Stone estimates that the margin in the second vote grew, to 360-140 in favour of execution. When his friend, Crito, came to Socrates’s cell with an escape plan, Socrates chose to stay and drink the hemlock.


The nonconformist hero

Who and what, then, was Socrates to Athens? Part of his glory derives from his incorruptibility, his brave nonconformism, his determination to think as an individual not as part of “the herd”. Nonconformism became a heroic value in the Western tradition that Socrates helped to found, especially in societies such as America’s that value individualism.


But nonconformism is not an absolute virtue and easily veers off into sedition, subversion or other actions deemed unpatriotic. Psychologists suggest that people make constant trade-offs in social settings between, on one hand, insisting on their notion of truth and, on the other, the cohesion of a group. Sometimes truth and virtue require dissent and rebellion. Other times the survival or security of the group takes precedence and requires solidarity. If Socrates the free thinker belonged to a team, a club, a firm or a country today, he would never compromise his values, but he might well compromise his group.


Stone concluded that Socrates was on the biggest “ego-trip” in history. He probably was. And yet Athens would soon regret having convicted him. His trial was an overreaction, a betrayal of Athenian values just as torturing terrorist suspects or wiretapping Americans after September 11th were betrayals of American values. Democracies do betray themselves. Challengers such as Socrates exist to test society in its commitment to freedom and, if society fails the test, to remind it of the virtuous path.


또한 공적인 인물에게서 보이는 무신론을 싫어하는 미국인들에게 친숙한(비록 미국의 헌법은 법정에서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겠지만) 또 하나의 혐의는 不敬(불경)이었다. Socrates는 거의 확실히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의 습관대로, 그는 예심이 있기 전에 법정의 계단에서 Euthrypho라는 사람과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까다로운 변론에서, Socrates는 모든 혐의(젊은이를 타락시키는 것과 불경)에 대해서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변론 형식에 충실하면서, 그는 고발자들에게 변증법을 시도하여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그들을 더욱더 모욕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아테네 사람들은 훌륭하게도 평결(유죄 무죄를 가름하는 투표)에서 거의 비슷한 찬반을 보여주었다. I.F. Stone은 “The Trial of Socrates”에서 배심원들 중 유죄 투표자 수는 280명이었고 무죄 투표자수는 220명이었다고 평가였다.


선고가 있기 전 두 번째 연설에서 Socrates는 공격을 강화하였다. 그를 사면해주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친절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을 비웃었다. Xenophon은 이 시점에서 Socrates는 죽어서 순교자 되기를 원하였거나 그렇게 되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심원들을 적대하였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Socrates는 성공한 것이었다. Stone은 2차 투표에서 사면보다는 사형을 찬성하는 표의 차가 360-140으로 늘어났다고 평가한다. 그의 친구인 Crito가 도피계획을 각지고 그의 감방을 방문하였을 때, Socrates는 감방에 남아있기로 결정하고 독약을 마셨다.


비동조의 영웅

Socrates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아테네에는 무엇이었던가? 그의 영예의 일부는 청렴결백과 용기 있는 비동조주의 및 “민중”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생각하려는 결의에 연유한다. 비동조주의는 Socrates가 그것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서구의 전통에서는, 특히 개인주의를 중요시하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영웅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비동조주의는 절대적 미덕(가치)은 아니며, 폭력적 선동과 국가전복활동 혹은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가지 다른 행동으로 빗나가기 쉽다. 심리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주장과 사회통합 사이에 놓여있는 사회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양자를 주고받을 것을 권유한다. 어떤 때는 진리와 미덕은 異議(이의)와 반항을 필요로 한다. 다른 때에는 사회의 생존과 안보는 선례(전통)와 연대를 필요로 한다.


자유로운 사상가인 Socrates가 오늘날 어떤 팀이나 클럽이나 회사 및 국가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가치를 결코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집단의 가치와 타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Stone은 Socrates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기중심적 행동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9·11 폭탄 테러 이후에 테러 용의자를 고문하거나 미국인들을 도청하는 것이 미국적 가치에 대한 배반인 것처럼 Socrates를 재판한 것은 과잉반응이었고 아테네의 가치에 대한 배반이었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배반한다. Socrates같은 도전자들은 자유의 실천에 있어서 사회를 시험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그리고 사회가 그 시험에 실패하면 사회에게 올바른 길을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존재한다.

 

출처 : The Economist, Dec. 17th, 2009
[ 2021-06-17, 12: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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