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의 시대(2) - 불운과 불만의 계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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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의 선견지명설
  
  1948년엔 참모총장 보좌관 겸 통역, 49년엔 정보국장 보좌관으로 있어 한미 군수뇌부의 동향에 정통했던 고정훈(高貞勳)은 『朴正熙가 있었던 정보국만이 6·25에 대해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통역을 자주 해서 아는데 蔡秉德과 이범석(李範奭) 국방장관은 미 고문단에 대해 신물이 날 정도로 남침의 위험과 적 전차부대의 위협을 지적, 군원을 요청했어요. 李장관이 책상을 치면서 열변을 토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군측에선 스탈린이 도발한다면 유럽에서 할 것이다. 한국의 지형엔 전차가 맞지 않는다는 등 판에 박힌 설명으로 입막음을 하려고 했어요. 나중엔 우리 군수뇌부도 지쳐서 밑에서 남침가능성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또 그 소리냐고 짜증을 낼 정도였습求? 육본에는 정보국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국만 탁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과장입니다.』
  
  장창국(張昌國.6·25당시 작전국장·육군대장 역임)은 1972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6·25당시의 육본 작전참모부장 고문 헤이즈레트(당시 중령)를 찾아 가 『정말 그때 한국에선 전차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가?』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헤이즈레트는 『나도 명색이 군인인데,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있는가. 상부에서, 전차는 쓸 수 없다고 가르치라고 해서 본의는 아니지만 그랬을 뿐이다. 명령과 나의 판단사이에 끼여 밤낮없이 고민했다. 지금은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란 것이다. 1950년에 들어서면 대북(對北) 안테나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전투정보과는 날이 다르게 더해가는 위기감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柳陽洙 당시 전투정보과장의 증언은 이렇다. 『불길한 징조가 많아집디다. 대북 첩보원의 보고, 북괴귀순자들의 진술, 북괴병력의 전진배치, 도하용 주정의 임彭?출현 등등 모든 징조가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朴正熙씨에게 부탁하여 정보분석·판단업무를 종합지휘하게 하고 작업반을 늘리면서 대응했지요. 3월엔 이미 적의 공격태세가 완료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張都暎국장은 이런 보고를 위로 올리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국장과의 사이가 거북해졌고 6·25남침 1주일 전에 저는 6사단으로 전보 발령되었어요. 떠나기 전에도 李永根씨 등 당시 과원들에게 남침은 시간문제이니 잘 대비하라고 부탁했습니다』
  
   6·25직전 제사로 귀향
  
  6·25 당시 개성 주재 첩보부대 파견대장이었던 김경옥(金景沃)대위(육사5기생·육군준장 예편)는 6·25가 터지기 10일 전 적진으로 침투한 정보원이 『임진강에 도강용 주정 약3백 척이 집결해 있다』고 보고해 왔다고 회고한다. 이 첩보를 육본 정보국으로 보고했더니 정보국에 나와 있던 미 고문관이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현품을 가져오든지 사진을 찍어 오라』고 지시하더란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가진 첩보원을 들여 보내려고 했더니 느슨하던 38선이 철통같이 봉쇄되어 실패하고 말았고, 그대로 6·25를 맞고 말았다. 李永根에 따르면 朴正熙는 6·25 사흘 전인 5월21일에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李永根 중위 등 과원들에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경찰서로 연락하라』고 부탁해 두더란 것이다.
  
  6·25직전에 정보국 5과장이었던 車虎城(당시 소령)은 기자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6·25가 터지기 며칠 전으로 기억합니다. 朴正熙가 나를 찾아오더니 아무래도 복직을 해야겠는데, 복직추천서를 좀 써 달라고 부타합디다. 숙군때 참여한 장교가 추천장을 써야 한다는 거에요. 제가 그것을 써 주었고, 그의 복직탄원서가 육군본부 수뇌부로 올라가 있을 때 전쟁이 터졌습니다』 사태가 폭발점을 향하여 급전직하하고 있다고 확신한 전투정보과에선 張都暎 정보국장을 설득, 6월24일 오후 3시 육군본부 지하실에서 작전국장, 인사국장 등 육본 참모들에게 긴급브리핑을 가졌다.
  
  남한관계는 李永根, 북한관계는 金鍾泌 중위가 보고했다. 두 사람은 적의 공격준비는 끝났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기습의 가능성이 높다, 외출금지를 시켜달라, 등등의 건의를 했으나 참모들은 냉담했다는 것이 李永根의 기억이다. 그래서 참모들이 나가버린 뒤 첩보과장을 모시고 실무자들끼리 다시 모여 각 지구에 나가 있는 첩보파견대에 지시, 적정을 더욱 소상하게 파악하여 두었다가 월요일의 육본 참모희의에서 정보국장이 보고하도록 하자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도강(渡江)으로 의심 불식
  
  6·25가 터지자 張都暎 정보국장은 朴正熙를 빨리 불러 올리라고 했다. 전보도 치고 경찰통신망을 l용, 선산에 내려가 있던 朴正熙에게 연락이 갔던 것 같다. 車虎城의 증언―.
  
  『6월27일에 저는 의정부쪽 전선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정보국장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날밤 늦게 의정부에서 용산의 육본으로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요. 그냥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들이 널려 있고 사람이 없어요. 모두 철수한 거지요. 부하장교를 데리고 저는 한강다리 쪽으로 갔습니다만 이미 폭파된 뒤였습니다.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추락한 자동차들이 가에 처박혀 수북히 쌓여 있어요.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 지금의 천호동 방향으로 건너갔습니다. 새벽의 동이 터 훤해졌어요. 강안에 도착하여 보니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가까이 가보니, 車형! 접니다, 하고 불러요. 朴正熙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즉, 연락을 받고 어제 밤에 서울로 올라와 육군본부로 갔더니 비어 있고, 나오려니 다리가 끊겨 겨우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거에요. 우리 세 사람은 그때부터 시흥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기(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봤어요. 朴正熙는, 아직 폭탄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수중에 30원밖에 없었습니다. 점심때쯤 어느 아주머니가 누렇고 길죽한 오이들을 따가지고 오는 것과 마주쳤어요. 30원을 주고 한 광주리의 오이를 사서 세 사람이 허기를 채우려고 먹기 시작했는데 꿀맛입디다. 저는 그날 오후 朴正熙와 헤어졌는데,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 강변에 남았습니다』
  
  張都暎은 그의 회고록(「신동아」84년7월호)에서 「6월30일 오전중 수원국민학고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으로 나갔더니 朴正熙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서울에 적이 침입한 상황으로 봐서 朴문관은 그가 원하였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버렸다」고 썼다. 車虎城이 수원으로 옮긴 임시 육본으로 갔더니 朴正熙는 어느새 소령 계급장을 달고 張都暎 정보국장의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車소령을 본 朴定熙는 책상을 뛰어넘어 와 『車형! 정말 고맙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민간인 시절의 침울하던 모습과는 딴판인, 화기가 도는 표정이었다.
  
   복직, 그리고 재혼
  
  金利鎭 상사는 후퇴하는 육군본부를 따라 수원에서 평택까지 朴正熙와 동행했다. 평택역에서는 UN군 전투기의 오폭(誤爆)을 받았다. 金상사와 朴正熙는 튀어나온 우물 뚜껑을 은폐물로 삼고 엎드려 기총소사를 피해야 했다. 金상사가 朴正熙와 헤어진 것은 7월10일게 청주에서였다. 朴正熙는 새벽에 일어나더니 대전의 육군본부에서 불러서 간다면서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다. 張都暎에 따르면 朴正熙가 소령으로 정식 복직한 것은 대전에서였다고 한다. 자신이 丁一權 참모총장과 申性模 국방장관에게 직접 간청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정보국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朴正熙는 전투 정보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어 7월14일 대구로 옮겨간 육군본부를 따라갔다. 1950년의 그 암울하던 여름을 朴소령이 대구, 그리고 부산으로 옮겨다닌 육군본부를 따라 다니고 있을 때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는 아마도 金在春(육군소장 예편·한중문화협회장)일 것이다. 朴正熙가 육사 중대장으로 있을 때 5기 생도였던 金在春은 12세 위인 그를 스승 모시듯 했다. 朴正熙가 전투 정보과장으로 있을 때 金在春은 정부국 보급실장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자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金씨에 따르면 朴正熙 소령을 陸英修 잡안에 소개시켜 준 사람은 陸英修의 외가쪽 오빠가 되는 宋在千 소위였다. 宋씨는 朴소령의 대구사범 후배인데, 같은 과에서 포로신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맞선은 1950년 8월 하순 부산 영도에 있던, 陸英修 가족이 세들어 살던 일본식 집 2층에서 봤다. 韓武協 대위는 朴正熙 소령이 의외로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어 선 보러 가기 전에 불안해 하기에 일부러 소주를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맞선 보는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이것은 陸英修가 대통령 부인으로 변한 뒤 어느 여기자에게 한 말이다.
  
  『신부 박정희 양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에 朴正熙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다시 대구로 올라가는 육본의 수송지휘를 맡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10월에 육본의 전방지휘소가 서울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그는 신설된 제9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단장이 된 張都暎 정보국장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운명적 인연을 가진 두 사람 가운데 늘 베푸는 쪽에 있었던 것이 張都暎이었다. 서울 청계국민학교에 사단사령부를 설치, 예하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며칠 안 돼 사단사령부는 대전으로 이동, 중부지구에 남은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0월29일 張사단장은 6사단장으로 전보되고 오덕준(吳德俊) 준장이 후임으로 왔다. 9사단의 본부는 대전고등학교에 설치돼 있었다. 朴正熙 중령은 참모장으로서 신설사단의 병력확보와 편제구서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종합학교 2기로 갓 졸업한 신참소위 1백여명이 대거 배속되어 왔다. 창설된 28, 29, 30연대의 병력은 육군 병원에서 퇴원한 사병들과 보충대 병사들이었다. 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사단 포병대대가 창설된 것도 두달 뒤였다.
  
  1∼3개월 간격으로 사단장은 이성가(李成佳), 김종갑(金鍾甲), 최석(崔錫) 준장으로 바뀌었다. 사단장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자연히 사령부는 朴正熙참모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때 작전참모는 육사동기생인 손선희(孫熙善) 소령이었다. 지금은 홍창물산 고문으로 있는 孫熙善은 『朴참모장은참모들을 자상하게 거느리고 사단장에게는 깎듯이 대해 사단사령부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회고한다. 朴중령은 참모들에게 업무의 지침만 지시하고 세부적인 것은 맡겨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지시한 일의 결과는 반드시 비망록 노트를 갖고 다니며 꼼꼼히 챙기기에 참모들은 자율 속에서도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저는 작전참모장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재량권이 컸습니다. 동기생이지만 저보다는 7세나 위이고, 작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 그분이 시키는 지침대로 하니까 틀림이 없더군요. 저는 뒤에 7사단 참모장이 되었는데 그분의 방식대로 참모장 일을 하려고 애썼지요』 朴正熙는 대전에서 근무하면서 충북 옥천에 있는 미래의 처가로 자주 놀러 갔다.
  
  결혼식은 50년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올려졌다. 당시 대구시장 허헉(許億)이 주례를 섰다. 신부의 손을 잡고 인도한 이는 朴正熙의 대구사범 시절 스승인 金영기였다. 주례가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하고 입을 떼는 바람에 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또 다른 해프닝도 있었다. 신부의 예물인 금반지를 갖고 있던 宋在千이 이를 잊어버렸다고 했다. 金在春이 후다닥 뛰쳐나가서 금반지를 하나 사 갖고 왔다. 나중에 찬찬히 찾아보니 잃어버렸다는 금반지가 다시 나타나 결혼반지는 2개가 됐다. 신혼살림은 삼덕동 이정우씨의 아래채 셋방에서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퍼…』
  
  朴중령이 결혼하기 사흘 전 9사단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급박해진 전선을 쫓아 강원도 평창군 대화로 이동했다. 朴중령은 신혼 닷새째 되는 날 사단을 좇아 대구를 떠났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진행중이던 1951년 초에 9사단장으로 취임했던 金鍾甲(육군중장예편·공화당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강원도를 수도사단과 9사단이 양분하여 맡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단은 동해안쪽을, 9사단은 내륙 쪽을 관할했습니다. 교통과 통신망이 엉망이고 지세는 험악하고 관할지역은 넓어 지휘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았어요. 사단장이 대대장 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보충대 출신이 많아 「인민군 보급부대」로 불릴 만큼 허약했고 포병지원도 못 받는 데다가 예비연대가 없어 교육·훈련의 기회도 없이 신병들을 전투에 투입, 병력손상률이 엄청나게 높았어요. 전선이 고정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바람에 사단사령부가 아홉번이나 이동, 9사단은 아홉이란 숫자와 무슨 인연이 있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朴正熙 참모장에게 맡겼습니다. 작전만 내 결재를 받아 하라고 했지요. 충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주어 뒤를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히 말해서 작전에 대한 지식과 안목은 사단장인 저보다 그분이 났더군요』
  
  金鍾甲 당시 사단장에 따르면 그해 겨울에는 실탄이나 포탄 공급보다도 주먹밥 공급이 더 큰 문제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연기를 낼 수 없어 후방에서 만든 주먹밥을 일선 사병들에게 나눠줄 때쯤 되면 벌써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곤 했다. 주먹밥과 실탄 공급을 맡은 노무자들의 사정은 더 비참했다. 사단마다 약 2천 명씩의 노무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25세에서부터 40세 이상까지 비교적 나이 많은 이들이었고 기혼자도 많았다. 1년 기한으로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부대에선 1년이 넘어도 보내주면 보충이 안된다고 제대를 시켜주지 않고 계속 부렸다.
  
  金鍾甲 사단장 시절 전선에선 큰 접전이 없어도 적의 포격으로 하루 평균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어느 날 2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작전참모가 사단장에게 좋은 날이라면서 술 한잔 사 달라고 했다. 金준장은 朴正熙참모장에게 회식준비를 지시했다. 朴正熙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 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입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플 겁니다』 그때 金준장은 속으로 『건방지게 무슨 반대냐』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 뒤 朴正熙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문득 그 때 말이 생각나더란 것이다.
  
   대공세 직전 행운의 탈출
  
  육영수(陸英修)는 남편을 만나러 두 차례 9사단 지역으로 온 적이 있었다. 송재천(宋在千) 중위가 『부인 모셔 왔습니다』고 보고하니까 朴중령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 사람 뭐 하러 왔대』라고 하더란 것이다. 그때 한국군 부대에선 군 차량을 군인까지 붙여 일반업자들에게 대여하여 돈을 버는 「후생사업」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장교들의 봉급에도 보태고 부대 운영비로도 썼다. 이 후생사업을 맡았던 金在春에 따르면 朴참모장은 한번도 그 수입에 손을 벌리지 않았고 돈 관리도 공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朴正熙는 이 무렵 부사단장으로 부임한 李龍文 대령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李대령은 6·25 때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고, 그래서 공을 세울 기회도 잃어 진급이 늦었다. 동병상련의 정도 더해 둘은 더욱 단짝이 되었다. 그러나 4월에 崔錫 준장이 새 사단장으로 부임, 사단사령부의 분위기가 어렵게 되었다.
  
  崔錫 준장이 부임한 뒤 첫 번째 사고가 생겼다. 어느 날 崔사단장이 일선 시찰을 나갔다가 연대의 배치가 자신의 명령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전참모회의에서 이를 해명하라고 지시했다. 朴참모는 朴正熙 참모장과 함께 작전명령이 잘못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으나 부대배치는 작전명령대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참모회의에서 박춘식(朴春植) 참모는 崔錫 장군이 서명한 작전명령서를 갖고 와 해명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군수참모 金在春에 따르면 崔사단장은 『야 이 새끼야, 내가 어디 이걸 보고 사인했나, 보지 않고 했지』라고 소리 질렀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사단장과 참모들 사이에 인격적인 대우 문제가 발생, 분위기는 더욱 경색되었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소문난 崔錫 준장도 朴正熙에게만은 어렵게 대했다고 한다. 사단장과 마음이 맞지 않게 된 朴正熙 중령은 5월초 몸이 약해졌다는 구실로 병가를 얻어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朴春植과 李龍文도 5월중에 모두 칭병, 9사단을 떠나버렸다. 사실 그때 朴正熙는 대단히 쇠약해 있었다. 朴正熙는 대구로 내려가기 전에 후방에 있던 金在春의 부대로 와서, 송아지를 잡아 먹고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고 한다. 金在春은 이때 朴正熙가 대구로 내려 간 것은 「행운의 위기탈출」이었다고 표현했다. 朴正熙가 대구로 내려간 지 며칠 뒤인 5월17일 중공군은 대공세를 취했다. 9사단이 소속된 국군3군단은 한국전쟁사상 최대의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장병들은 방대한 오대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걸어서 며칠 동안 행군해야 했다. 적의 포격이 비오듯했고, 도처에서 매복 공격이 있었다. 체력이 떨어진 낙오자들은 포로가 되거나 총 맞아 죽거나 동사하기도 했다.
  
  金在春은 『만약 그때 그분이 9사단에 남아 있었으면 그토록 쇠약해진 체력으로 며칠 낮, 며칠 밤을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산준령을 넘어 후방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지휘계통이 무너져 자기 체력만 믿고 달아나야 할 실정이었습니다. 체력엔 자신이 있는 정도 한번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야간탈출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나중엔 탈진하여 고마운 부하들이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때 朴正熙 참모장 숙소에서는 젖먹이가 딸린 아주머니가 가정부처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저와 같이 달아났는데 깊고 넓은 계곡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어른도 목까지 잠길 정도였어요. 우리가 계곡을 막 건너려 할 때 적의 포격·총격이 집중되었어요. 허겁지겁 건너긴 했는데 아주머니가 정신없이 제 앞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등에는 아기가 없고 빈 포대기만 업혀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머니, 아이는 어떻게 했어요, 라고 물으니까 그제서야 떠내려간 아기를 찾는다고 야단을 합디다만 너무 늦었지요』 여순 반란사건에서 시작된 朴正熙의 악운은 9사단을 떠남으로써 일단 끝났다. 그는 악몽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4: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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