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 박사, 학회 참석차 영국 방문중 교통사고로 사망
[연재] 37. 동료에게 남긴 마지막 말: "누군가 묻거든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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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존 맥 박사(가운데 줄 하얀색 양복)가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던 매사추세츠 정신건강센터(舊 보스턴 정신병원) 직원들 단체사진 (출처: 랄프 블루멘탈著 '빌리버', 맥 박사 가족 제공)

 

맥 박사의 UFO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록펠러 가문의 후손 로렌스 록펠러는 2004년 7월 11일 9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UFO 현상을 연구하는 단체들에 재정적 지원을 해줬고 정부 관계자들과도 만나 UFO 현상을 알리려 했다. 록펠러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과 만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UFO 연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록펠러가 지인들에게 전한 말에 따르면 클린턴 내외는 UFO와 관련해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 빌 클린턴이 자리를 비웠을 때 록펠러에게 다가와 이 문제를 다시는 대통령 앞에서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이 무렵 맥 박사가 운영하던 ‘심리학 및 사회 변화 센터’라는 단체는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맥 박사는 이 센터를 통해 UFO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의 동료들은 기부금을 더 받기 위해 이 센터의 이름을 ‘존 맥 연구소’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맥 박사는 동료들에게 “원래 누군가의 이름을 딴 연구소는 그가 죽은 뒤에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아직은 건강한데 몸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최근 양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받은 상황이었다. 전린섭염을 앓고 있던 그는 약초상으로부터 야자나무 열매와 쐐기풀 뿌리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었다.


맥 박사의 평판과 위상은 크게 추락한 상황이었다. 그는 2004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선(再選)을 막기 위한 풀뿌리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고 어떻게 해서든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존 케리 후보 지지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20곳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 존 케리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런 풀뿌리 운동의 중요성을 담은 글을 써 진보 성향의 투표 독려 홈페이지인 ‘아메리카 보트’에 보냈다. 자신의 이름을 실명(實名)으로 써도 된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이 홈페이지 관리자 측은 “매사추세츠주의 한 자원봉사자로 소개하는 것이 더 간단할 것 같다”고 알려왔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맥 박사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었다.


맥 박사는 이를 듣고 웃음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나빠졌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말까지 했으면 (홈페이지 관계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맥 박사의 가까운 동료들도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맥 박사와 엮여 커리어에 불이익이 생기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맥 박사를 ‘아 납치 얘기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로 부르곤 했다.

 
2004년 9월의 마지막 주말, 맥 박사는 영국 옥스퍼드에 있는 세인트존 대학교에서 열리는 T. E. 로렌스 기념행사에 초청받게 됐다. 맥 박사는 1970년대에 로렌스의 인생을 심리학 측면에서 재조명한 전기(傳記)를 써 퓰리처상을 받았었다. 이날 행사는 영국인 역사가이자 로렌스에 대한 전기를 쓴 제레미 윌슨 등이 주최했다. 윌슨은 하버드 대학교가 출장비를 지원해주지 않으면 자신이 이를 대주겠다고 했다. 맥의 이혼한 부인인 샐리가 모아둔 마일리지 포인트를 사용해 비행기표를 마련해줬다고 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맥 박사는 말년에 어느 정도 재정적 어려움을 겪은 것 같았다.


맥 박사는 처음 초청을 받았을 때 참석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책을 쓴 지 30년이 넘었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미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윌슨은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로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캐주얼한 행사라며 맥을 안심시켰다.


맥 박사는 9월 마지막 주 목요일 런던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사후세계 연구가인 몬타그 킨의 미망인인 베로니카 킨을 만났다. 맥 박사는 몬타그와 가깝게 지내며 이런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곤 했었다. 몬타그는 그해 1월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78세.


이날 세미나는 성공적이었다. 맥은 로렌스 지지자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맥 박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버몬트주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이야기를 하며 이를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 로렌스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맥 박사는 세미나가 끝난 뒤 킨과 함께 세포 생물학자이자 초(超)심리학자인 루퍼트 셸드레이크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셸드레이크는 맥 박사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는 주류의 학문과는 거리가 먼 ‘형태공명론(形態共鳴論)’이라는 것을 연구한 사람이다. 이는 자연의 모든 것들은 선천적으로 서로 소통을 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애완견들은 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셸드레이크 역시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비판을 받았다.


맥 박사는 셸드레이크와 만난 뒤 금융 컨설턴트들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맥 박사가 운영하는 연구소에 들어오는 기부금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임을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킨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밤 11시 20분쯤 지하철역에서 나왔다. 킨은 역에 도착해 전화를 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나 맥 박사는 15분 정도의 거리니 그냥 혼자 걸어가기로 했다. 그는 롱랜드 드라이브 선상에 있는 사거리 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길을 절반 정도 건너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살았던 본능에 의해 오른쪽만을 주시했다. 영국은 미국과 달리 차가 좌측에서 달리고 서쪽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오는 차는 왼쪽에서 온다. 


이때 그는 50세 컴퓨터 엔지니어인 레이몬드 체코브스키가 몬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어두운 밤길에 사람이 건너는 것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경찰은 운전자에게서 술 냄새를 맡고 음주 측정을 했다. 알코올농도는 0.05이었다. 영국의 음주운전 기준은 0.04 이상이었다. 그는 이후 피검사를 통한 혈중 알코올농도 역시 측정했는데 0.097이었다. 기준인 0.08을 초과하는 수치였다. 사고 현장에 있던 목격자는 맥 박사가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구조대원의 발목을 손으로 붙잡은 채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맥 박사는 인근에 있는 바넷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이송된 두 시간 뒤인 2004년 9월 28일 새벽 12시 20분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왼쪽 정강이뼈, 척추, 갈비뼈 여러 개가 골절됐었다. 사고로 인해 폐가 크게 다쳤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경찰은 맥 박사의 호주머니에 있는 킨의 주소를 찾아내 새벽 2시 반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맥 박사의 사고 소식은 보스턴에 있는 그의 지인들에게 빠르게 전달됐다. 존 맥 연구소는 홈페이지를 통해 곧 공식 발표를 할 것이라고 알렸다.


캠브리지 병원 정신과 총괄 과장인 제이 버크는 9월 28일 정오 동료들에게 이메일을 썼다. 그는 “어젯밤 존 맥이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는 비보를 접수했다”고 했다. 킨은 영안실에서 존 맥 박사의 시체를 확인했다. 킨은 맥이 “이렇게 쉬운 일일지 전혀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킨은 맥이 숨진 이틀 뒤 교령회(交靈會,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혼령과 교류를 시도하는 모임)를 진행했다고 했다. 그는 블루멘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존이 나타나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고 했다. 맥이 “깃털 같은 것 하나가 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는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며 “나는 떠날지, 아니면 남을지 선택할 수 있었다”고 했다고 했다. 맥은 “부서진 내 몸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가보니 (킨의 남편인) 몬타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고 한다.


하버드 캠브리지 병원 내과 전문의인 빅터 구레비치는 맥과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사람이다. 구레비치의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쟁 난민 자격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맥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구레비치는 맥이 로렌스에 대한 글을 쓰던 시절이 기억난다며 잘 되겠나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고 했다. 그러다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났다고 했다. 맥 박사가 납치와 같은 ‘미친 것’을 연구하다 하버드 대학교와 갈등이 생겼던 시절도 기억난다며 맥을 오랫동안 봐온 자신으로서는 놀랍지 않았다고 했다. 구레비치는 “맥은 항상 무언가 흥미로운 일을 하던 사람이고 이에 꽂히면 물불을 안 가린 사람”이라며 “지인 중 맥만큼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 없는데 나는 맥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킨과 로렌스 세미나를 주관했던 관계자들은 10월 13일 런던의 한 공동묘지에 모여 작은 장례식을 치렀다. 이날 장례식에는 영국 국방부 소속 직원인 닉 포프도 참석했다. 그는 UFO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미국에서의 장례 예배는 사고로부터 약 7주 뒤인 2004년 11월 13일 하버드 대학교 교회에서 진행됐다. 가족과 동료 약 100명이 참석했다. 이날 예배는 하버드 신학대학교 교수이자 흑인 동성애자 목사인 피터 고메스가 담당했다. 고메스는 “이번 생(生)과 다음 생으로 가는 과정은 우리 누구도 알지 못하는 위대한 미스터리인데 이제 존 맥은 모든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에드 칸트지안은 맥 박사와 함께 하버드의 정신과 프로그램을 캠브리지 병원에 자리잡도록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례 예배 자리에서 자신은 맥 박사의 납치 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고 고백했다. 맥은 그럼에도 그에게 ‘우주로 가는 여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칸트지안은 맥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고 했다. “누가 물어본다면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납치 경험자인 카린 어스틴도 이날 단상에 올라 추모 인사말을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됐다”고 했다. 어스틴은 마지막까지 맥 박사와 가까이 지낸 사람 중 한 명이이었다. 맥 박사가 런던을 떠날 때 공항에 데려다준 것도 그녀였고 미국에 돌아오면 공항에 마중나기로 약속했었다고 했다. 어스틴은 맥 박사가 납치를 경험한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줬다고 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녀는 단상을 내려오며 발을 헛디뎌 엎어질 뻔했다.


맥의 가족은 영국 법정에 체코브스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건 당시 상황을 보면 체코브스키가 의도적, 혹은 악의적으로 맥을 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고였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탄원서에서 “그가 이 사건으로 이미 겪었을 충격과 죄의식에 동정심을 느낀다”며 “더 많은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존 맥은 체코브스키 씨가 감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가 감옥에 간다고 해서 우리의 슬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영국 법원은 체코브스키에 대해 15개월의 징역형과 면허정지 3년을 선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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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2, 06: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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