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아데나워, 獨佛화해를 넘어 유럽통합의 길을 열다!
秘史/오늘의 유럽을 만든 두 巨人의 영혼을 연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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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史/오늘의 유럽을 만든 두 巨人의 영혼을 연 대화
   드골-아데나워, 獨佛화해를 넘어 유럽통합의 길을 열다!
  
   *드골은 獨佛화해의 조건으로 서독의 핵무장 포기와 프랑스의 핵무장을 못박았다.
   *드골의 위대한 지도력은 문장력에서 나왔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은 첫째, 위대한 문필가, 다음은 위대한 사상가, 셋째는 위대한 정치인, 넷째는 위대한 장군."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드골의 분노
  
   나는 지난 8월말 45일간의 유럽 여행 마지막 코스를 프랑스의 아르덴 지역 도시 스당으로 잡았다. 영어명으로는 세단(Sedan)인데 프랑스 사람들에겐 악몽의 이름이다. 1870년 여기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10만 명이 프로이센군에 항복하고 황제는 프로로 잡혔다. 1940년 5월15일 프랑스 수상 폴 레노는 영국수상 처칠과 통화하면서 "스당이 돌파되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면서 흐느꼈다. 프랑스군은 그 40일 뒤 항복한다. 프랑스가 이 두번의 치욕, 특히 국가의 명예심과 영혼마저 무너진 두번째 패배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나?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육군이 6주만에 항복한 것은 군사적 패배일 뿐 아니라 정신적 붕괴였다. 프랑스 국민은 좌우로 갈려 싸우느라고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잊었고 프랑스군은 패배를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도덕적으로도 철저히 망가진 프랑스를 거의 혼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샤를 드골이다.
   프랑스군의 이론가로 유명했고 일찍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결합시킨 전격전(電擊戰)을 예상하고 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창했던 드골이었다. 그의 전쟁교리를 프랑스군은 무시했지만 히틀러는 참고했고, 독립적인 전차군단을 육성했으며 아르덴 돌파전에 투입, 성공했다. 드골은 제4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스당이 돌파된 직후 반격작전에 나섰다.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독일군 포로 수백 명을 붙잡기도 했으나 무너진 둑을 메울 순 없었다. 5월16일의 상황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피란민 속에는 패잔병들도 보였다. 그들은 독일 기갑부대로부터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달아나던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독일 기계화부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한 다음 서진(西進)하는 독일군의 길을 막지 말고 남쪽으로 가라고 놓아주었다. "우리는 너희들을 포로로 잡을 만큰 한가하지 않다"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이런 모욕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나는 한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 이런 바보짓! 전쟁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는 넓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그날까지. 그리하여 이 국가적 수치가 깨끗하게 지워질 때까지. 그 이후 내가 한 모든 행동은 그날 결심한 것이었다.>
  
  
   베르당의 추억
  
   드골은 1차대전 때 세 번 부상당했는데, 프랑스 동부전선 베르당 전투에 중대장(대위)으로 참전했다가 1916년 3월 독일군의 포로가 된 적이 있다. 32개월 동안 포로 수용소에 있었는데 다섯 번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붙잡혔다. 독일과 프랑스 군은 포로가 된 장교들을 예우하여 그는 책을 쓰기도 했다.
   나는 10여년 전 베르당과 마지노 요새를 구경한 적이 있다. 샴파뉴 지방의 에퍼네이를 출발하여 로렌 지방으로 들어가 베르당까지 가는 길 주변은 풍요한 들판이었으나 전선지역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독일과 프랑스가 여러 번 영토를 주고받은 격전지로서 한국의 철원 포천 지역 분위기였다. 베르당에 가까워오니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의 간판이 자주 나타났다. 1916년에 프랑스와 독일군이 300일간의 격전에서 100만 명의 젊은이들을 희생물(쌍방 약30만 명 戰死, 약70만 명 부상)로 바친 도시가 '평화의 도시'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 지도부, 특히 드골과 아데나워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베르당은 인구 2만 명의 작은 마을이다. 로마시대인 서기 3세기부터 게르만족과 접경한 고도(古都)였다. 마을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영어 가이드(여성)를 태웠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베르당 전투가 벌어졌던 야산(野山)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구릉지(丘陵地)였다. 달 표면처럼 움푹움푹 들어간 포탄자리가 남아 있었다. 지금도 숲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한다. 불발탄을 건드려 다치고 죽는 사고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이 좁은 공간에 6000만 발의 포탄이 터졌다고 한다.
   베르당 지역에는 독일군인들의 공동묘지도 수십 개 있다. 프랑스 군의 납골당은 야산 정상(頂上) 두오몽 요새 근방에 있는데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15000명의 무덤과 무명(無名)전사자 유골 13만 명분이 보존되어 있다. 세계에서 사람 뼈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리라. 길이 137미터의 석조(石造) 건물에는 창이 많이 나 있다. 그 창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온통 유골더미였다. 해골, 팔 다리 뼈, 가루가 된 것 등등. 이 유골 더미 위에 석관(石棺)들이 놓여져 있었다. 높이 46미터의 충혼탑, 교회, 타고 있는 촛불...
   이 두오몽 납골당으로 가는 산길 옆에 한 동상이 있었다. 내려서 다가가 보니 'Andre Maginot'라고 써져 있었다. 아, 마지노선을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하는 놀라움! 마지노는 의사였는데 베르당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나자 지원하여 참전했다가 부상하고 불구자가 되었다. 전후(戰後)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독불(獨佛) 국경선을 따라 마지노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다. 고향 베르당에서 벌어진 살육전을 장차전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인명(人命)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요새를 생각해낸 것이리라. 인간이란 존재는 역시 과거와 체험의 포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2차 대전 때는 탱크와 전투기를 이용한 전격전의 등장으로 마지노 요새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독일군은 마지노 선을 우회하여 뒤에서 쳤기 때문이다.
   마지노 요새는 프랑스군을 방어 위주의 안주하는 관료형으로 만들었고, 나치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극북하기 위하여 고민하다가 탱크와 전투기를 결합시킨 전격전 위주의 공격형, 창의적 군대로 개혁, 대승했다.
   2016년 봄 베르당 전투 100주년을 맞아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이곳 전몰자 기념관에서 만나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고 화해를 다짐하였다.
  
   패전의 도시 스당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달려 룩셈부르크를 지나 프랑스의 스당으로 가는 길은 아르넨 숲을 지난다. 아르덴 숲지대는 면적이 경상남도 정도이고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에 걸쳐 있으며 아름들이 나무로 울창하다. 언덕과 낮은 야산, 그리고 평지의 연속이다. 프랑스군이 독일 전차군단은 이 숲지대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방어에 소홀했다가 당한 것이 이해도 되었다. 프랑스는 아르덴 지역을 지나는 뮤즈 강이 자연적 방어망이라 생각했다.
   스당은 군사도시여서 그런지, 두번의 결정적 패전의 현장이어서인지 무거운 분위기였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중세의 성곽엔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보불(普佛)전쟁 기록이 많았다. 프랑스 군인들이 단체로 입장, 패전의 교훈을 새기고 있었다. 스당 시내를 가르는 뮤즈 강은 너비가 100m 내외였다. 독일군 전차군단은 1800대의 전차와 3만 대가 넘는 차량으로 50여 시간에 걸쳐 아르덴 숲을 통과한 뒤 이 뮤즈 강을 건넌다.
   대안(對岸)에서 진지를 구축했던 프랑스군은 독일 전투기의 맹폭을 견디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프랑스 공군이 만약 아르덴 숲속에서 교통체증을 일으키고 있는 독일 전차군단을 발견, 폭격했더라면 2차 대전은 거기서 끝났을지 모른다. 실제로 한 프랑스 정찰기는 숲속에 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기갑부대를 발견,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잘못 봤겠지. 거기에 독일군이 있을 리 없다"고 묵살당했다.
   스당을 돌파한 구데리안 장군 휘하의 독일 전차군단은 덩커크 쪽 해안을 향하여 돌진, 벨기에 북쪽으로 진출했던 프랑스 영국 연합군의 주력을 배후에서 차단, 포위, 섬열했다. 독일군인들은 필로폰을 먹과 불철주야로 야수처럼 싸웠다.
   나는 스당의 성곽 안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려 했으나 만원이라 가까운 샤를빌메지에르 근방 작은 호텔에서 잤다. 샤를빌메지에르 광장은 크고 활기가 남쳤다. 이 도시는 2차 대전 격전지로서보다는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출생지로 더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타이타닉'으로 출세하기 전에 랭보를 연기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흥행에는 대실패했지만 시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정확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35세에 죽은 그가 19세 때까지 쓴 시가 20세기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예술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한다. 랭보는 시를 절필(絶筆)한 다음엔 아프리카 등을 유랑하다가 죽었다.
  
   대문장가
  
   프랑스 문학의 힘은 프랑스어로 쓴 고흐의 편지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드골의 지도력이 여기서 나왔다고 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도 '모던 타임스'에서 드골을 정치가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썼다.
   드골의 전쟁 회고록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2014년에 알려졌다). 나는 이 회고록은 인간적 깊이와 문장력에서 처칠 회고록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드골은 두 권의 회고록을 직접 썼다. 아르덴 돌파전으로 정치적, 군사적, 정신적으로 파탄 난 프랑스와 군대와 국민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의 고뇌가 스며 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 조국 재건의 핵심임을 파악하고, 거의 맨손으로 경멸을 받아가면서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 같은 세기적 거인(巨人)들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처절한 모습은 비슷한 처지의 이승만(李承晩)과 자꾸 겹쳤다(그 또한 대문장가).
   드골은 14권의 책을 썼고 연설문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원고지에다가 만년필로 글을 썼다. 천천히 정성을 다해 썼는데 특히 구두점 찍기에 신경을 썼다. 구두점 찍기는 문장이 숨을 쉬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묻지 말라. 사자는 그가 소화한 양(羊)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나는 평생 독서를 하였다"고 했는데 그의 문장력은 어마어마한 깊이와 폭을 가진 독서와 사색의 산물이었다. 5공화국 때 한 장관이 물었다.
   "장군께서 가장 숭배하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첫째, 위대한 문필가, 다음은 위대한 사상가, 셋째는 위대한 정치인, 넷째는 위대한 장군."
   드골은 1958년 권좌에 복귀한 후 소설가 앙드레 말로를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 국무회의를 할 때는 수상의 맞은 편 자리에 앉히고 회의를 주도하도록 배려했다.
   70대의 나이에 두 번 나라를 살린 점에서 드골과 이승만은 비슷하고 짓밟힌 민족혼을 되찾기 위하여 우방국 지도자들을 상대로 악역(惡役)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야 했던 점에서도 유사하며, 이런 정신력의 원천이 무서운 자기 확신과 이를 뒷받침한 문장력에서 나왔다는 점도 서로 통한다. 차이점도 있다. 드골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이어갈 세력을 만들어 그 뒤의 프랑스를 이끌도록 했지만 이승만은 이념정당 건설에 실패, 사후(死後)평가가 박하다는 점이다.
  
   역사적 연설
  
   드골은 기갑사단장에서 국방차관으로 옮겼다가 프랑스 정부가 항복을 결정하자 불복, 영국으로 도피,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그가 처칠을 설득하여 맨 첨 한 일은 BBC를 통한 방송이었다. 1940년 6월18일의 이 방송 연설은 역사적 명문(名文)이다. 이날은 하필 워털루 패전 125주년이었다.
  
   "프랑스 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 오랜 동안 프랑스 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注 프랑스 정부)는 적대(敵對) 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적(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적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재기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대의(大義)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선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대영(大英)제국과 같은 대의(大義)로 손 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不運)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전역(戰役)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적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 부대의 거대한 중량(重量)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 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 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들과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 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 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 예언한 경로대로 히틀러는 진다. 드골의 역사적 예지력(豫知力)이 놀랍다.
  
  <계속>
[ 2021-11-19, 16: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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