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이 본 받아야 할 이승만 대통령 기자회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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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에 태어나 일제와 해방, 6·25를 겪은 기자들이 당대에 활동하면서 겪은 비화를 수록한 책이 있다. 사단법인 한국신문연구소가 1978년 발간한 ‘언론 비사(秘史) 50편: 원로기자들의 직필 수기(手記)’다. 한국 현대사의 대혼란기를 몸으로 부딪쳐 경험한 50여 원로기자들의 체험담 속에는 당대를 주름잡던 걸출한 인물들의 행태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 년에 한 번 아주 특별한 이벤트처럼 열리는 지금과 달리 매주 금요일이면 기자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빈번하게 대통령을 접한 만큼 기자들의 수기에도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중 이승만 대통령의 유머 감각이나 9·28서울수복 후 첫 기자회견에서의 공방, 전쟁 중에도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대통령의 일념 등을 다룬 원로기자들의 ‘노(老) 대통령’ 회고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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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신문검열 철폐하라던 이승만 대통령
  
  
  ▼ 필자: 최흥조(崔興朝)
  1918년 개성 출생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중퇴
  1945년 황해민보 편집국장
  1946년 한성일보 정치부장
  1949년 동아일보 취재부장
  1952년 중앙일보 취재국장
  1952년 신문의 신문사 창업 사장 10년
  1975년 8월 집필
  
  
  
  1950년 6·25동란에 부산으로 피난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9·28 서울수복으로 그의 관저인 경무대로 되돌아왔다. 그때에 몇몇 신문이 서울에서 복간되었다. 그해 10월 중순의 일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평앙을 점령하고 승승장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여 국토통일의 부푼 꿈이 막 실현되려던 무렵이었다. 치열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때이라 전국토는 비상계엄령하에 있었으므로 국방부 정훈국 관장 하에 신문검열제가 엄격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장관의 담화문이 동일지면에 들어갔는데 동아일보는 관례대로 대통령의 것을 5단 표제 머리기사로 하고 장관의 것을 4단표제 중앙부위에 둔 조판대장(臺帳)을 떠서 검열을 받으러 갔더니 당무자는 장관의 것을 ‘톱’으로 하여 대통령의 것과 바꾸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밖에 없으니 신문사는 판을 고쳤다.
  
  다음날은 예정된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경무대 관저에서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 수복 후 최초로 열리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먼저 반가운 어조로 회포를 푸는 말로써 시작한 기자회견은 까다로운 형식을 빼고 흥겨운 대담식으로 진행되었다. 필요한 화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될 즈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 처절한 전쟁을 하는 동안에 신문을 만드는 저희들도 애국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이롭게 하고 우리나라를 해치는 보도를 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방부 정훈국이 모든 신문에 대해서 검열을 실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대위가 앉아서 마음대로 대한민국의 언론을 좌우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는 어떤 기사는 신문에 넣으라고 하고 또 어떤 기사는 신문에서 빼라고 합니다. 제목도 자기 비위에 맞도록 고칩니다. 어제 같은 날은 대통령의 담화문과 국방장관의 담화문을 놓고 장관의 담화문 내용이 중요하니 대통령의 것보다 크게 보도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저희들이 좋은 신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순간 이승만 대통령은 안면근 경련으로 두 볼이 실룩거리는가 하더니 엄숙한 어조로 분연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공산당과 전쟁을 하고 있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야.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신문을 검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는 옆에 앉은 공보처장 김활란(金活蘭) 여사를 돌아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국방부의 정훈국장이라는 사람이 누구요? 국방장관에게 훈령하여 즉시 신문검열을 중지하도록 해요.”
  
  신문검열은 즉일 폐지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로 실로 견디기 어려운 보복적 도발을 받아야 했다. 공문서로 동아일보사에 대하여 나를 파면하고 그 사실을 회보하라고까지 윽박해왔다. 1951년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피난해서도 나에 대한 그들의 초지(初志)는 굽혀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주필 김삼규(金三奎) 씨는 나와 함께 도발의 책원지(策源地)인 소령과 대위를 주석에 초대하여 신문기자 측의 입장과 진의를 설명하여 설득 공작을 폈다. 단순 솔직한 그들은 금시에 감정을 풀고 후로는 다정한 친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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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숙한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 솜씨
  
  
  ▼ 필자: 김형균(金衡均)
  1916년 2월 서울 출생
  1943년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 졸업
  1936~1948년 한성일보 정경, 사회부 취재부장
  1948~1949년 고려통신 기자
  1951~1955년 시사통신, 국제뉴스 편집국장, 주일특파원
  1957~1959년 자유신문 편집국장
  1959~1961년 세계통신 편집국장
  1964~1971년 중도일보 편집국장, 주필
  1976년 7월 집필
  
  
  
  매주 금요일은 대통령 기자회견 날이다. 이때는 사전에 질문사항을 공보처 당국에 제출하는 일은 없었고 대통령회견 날이면 바로 질문했고 또 이승만 대통령은 즉석에서 답변하는 등 잘 받아넘겼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대개 10시에 중앙청회의실에서 회견이 시작되는데 경무대 경찰서원이 대통령께서 곧 들어오신다고 미리 알려주곤 하였다.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퍽 조촐했고 간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보처 당국자와 국무위원 몇 사람 그리고 비서들이 배석했는데 노(老) 대통령의 ‘유머러스’한 답변에 웃음이 터지기가 일쑤였다. 질문할 때 대통령 각하라고 부른 기자는 없었고 대개 '대통령께서'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기자회견 때마다 아침에 만나서 뭐라고 인사를 했으면 좋을지 기자들이 연구해 보라고 했고 적당한 인사말이 선정되면 상금을 후하게 내리겠다고도 했다. ‘안녕히 주무셨소. 아침 자셨소’ 또 ‘굿모닝’ 등도 우리에겐 맞지 않으니 차라리 ‘어떠시오’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우리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일인(日人)도 그럴싸한 아침 인사말이 있는데 적당한 인사말이 우리에게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적당한 아침 인사말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老 대통령은 사라져 간 것이다.
  
  경무대에서의 기자회견 날이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만든 차와 과자 또는 시제(試製) 담배가 나왔다. 같은 탁자에 앉아 노(老)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버르장머리 없이 느껴져 때로는 안 피우고 있노라면 원래 버르장머리 없는 게 기자이니 체면 차리지 말고 피우라고 권하는가 하면 우리 안사람이 차 끓이는 솜씨가 없어 맛이 없어 안 먹는 것 같다고 프 여사에게 다시 끓여오라고 해 프 여사와 기자들을 당황하게도 했고 또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기도 하였다.
  
  또 어느 때인가 기자회견 때는 기자 질문에 김장흥(金長興) 경무대서장이 뭔가 입을 열었다가 “한 나라의 대통령인 내가 기자 선생님들 앞에서 잘 뵈려고 쩔쩔매는 판인데 자네가 뭘 안다고 입을 여나, 자네도 출세하려면 기자들한테 잘 보여야 돼…”하고 나무라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기도 하였다.
  
  또 그 당시의 일이다. 경무대에서의 회견날인데 허정(許政) 교통부장관이 군용기 헌납기금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온 일이 있었는데 李 대통령은 서슴지 않고 “이게 교통부에서 자발적으로 모은 돈이냐 아니면 강제로 모은 돈이냐”하고 물었다. 허정 씨가 자발적이라고 말하자 “나한테 잘 보이려고 강제로 모은 돈이지 뭐야. 내가 다 아는데. 기자들이 이 사실 좀 신문에 써요” 해서 온통 기자회견이 웃음바다가 된 일도 있었다.
  
  이 대통령은 역시 능숙한 솜씨로 내외 기자회견에 임했고 회견의 분위기는 늘 부드러웠다. 회견이 끝나면 회견 석상에 놓았던 담배를 한 주먹씩 집어 기자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등 자상스러운 일면도 보여 주었다. 중앙청 출입 시절엔 좌우익의 기자가 출입했지만 재치있는 기자도 많이 있었고 민완하고도 정의에 찬 기자도 많이 있었다. 중앙청 기자실엔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었지만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취재 경쟁에 열을 올렸다. 통신사는 통신사대로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특종을 잡으려고 ‘소스’를 캐고 또 뛰었다.
  
  
  수복 후 첫 회견… 무책임한 피난 따져
  
  나는 합동통신사에 입사했고 중앙청 출입을 담당했다. 11월 중순경이라고 기억한다. 수복 후 첫 번째의 대통령 기자회견 때였다. 老 대통령의 모습을 보니 무엇보다도 반갑기도 했다. 한편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격 때문에 老 대통령도 기자도 한동안 멍하니 바라다볼 뿐 할 말을 잊은 채 차분한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老 대통령은 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들이 그때 그 사람들이냐”고 첫마디를 물었다. 공보당국자는 “좀 변동이 있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또 침묵이 흘렀다. 내가 일어나 첫 번째의 질문자로서 입을 열었다. “전란을 겪으시느라고 여러 가지로 수고가 많으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다시 이렇게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먼저 老 대통령에게 수인사(修人事)를 한 다음 “대통령께서는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고 발표하셨고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정부는 의정부(議政府)를 탈환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을 비롯한 숱한 국민들의 도강(渡江)피난을 못 하게 해놓고 정부 자체는 대전으로 부산으로 피난했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 시민의 인명 재산의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난 게 사실이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가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 같은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데 대통령께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물었다.
  
  나의 이러한 질문에 이 대통령은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고 약 2~3분 동안 답변을 않은 채 안면 근육이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 동안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이 조용했다.
  “그러면 이 사람들아! 대통령인 내가 가만히 앉아 있다 공산당한테 잡혀갔어야만 속이 시원했겠나?”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역습에 나섰다. 한참 있다 다소 누그러진 듯 이 대통령은 “내가 말한 것과 김 기자의 질문은 ‘오프 더 레코드’로 해 달라”고 영어로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수복 후 첫 번째의 대통령 기자회견은 몇 가지 질문과 더불어 끝났는데 공보국장이었던 우청(雨聽) 이건혁(李健赫) 씨는 “왜 하필이면 그런 질문을 하나, 딴 중요한 질문도 많았을 텐데”하고 못 마땅해하는 표정이었으나 “나나 딴 기자들도 역시 이 말을 묻고 싶을 게고 국민의 여론도 바로 이것으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나는 기자회견의 분위기로 보아서 아무래도 무사할 것 같지 않아서 통신사엔 전화로 송고만 해 주고 들어가지 않았으나 끝내 별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老 대통령의 기자회견 솜씨는 능숙했고 통쾌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 2021-11-21, 09: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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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Buster     2021-11-21 오전 11:09
참으로 한심한 글이다. 애시당초 깜량이 되지도 않은 자가 터무니 없게도 큰 완장을 줏어서 걸치고 있을 뿐더러 반년도 안되어 보따리 챙겨서 떠날 문죄인을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하다니 . . . . 조갑제 대표가 이걸 글이라고 쓰셨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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