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전 오늘 히틀러가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소련은 이겼지만 내상으로 40여 년 뒤 결국 무너졌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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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전 오늘, 즉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이 100개 사단을 동원,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獨蘇 전쟁은 독일군이 붙인 암호명이 ‘바바로사’였다. 神聖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인데, ‘붉은 수염’이란 뜻이다.
  
  이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死傷者가 많았다. 양쪽 병력이 많을 때는 천만 명을 넘었고, 양쪽 戰死者는 300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2000만 명이 소련군과 민간인, 1000만 명은 독일과 동맹국 군인 및 민간인들이었다. 2차 대전 전체 戰死者는 민간인들을 포함, 7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人命 손실이 컸던 것은, 독일과 소련이 악마적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였기 때문에 人命을 무더기로 희생시키는 작전을 편 탓이다. 민간인들도 敵으로 간주, 학살하였고, 포로도 예사로 죽였다. 소련 영토에선 독일군이, 독일영토에선 소련군이 학살, 강간, 약탈을 자행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군인들 앞에서 유태인들과 여성들이 특히 많은 피해를 보았다.
  
  스탈린은 2년 전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을 믿고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다. 수많은 공격징후 첩보가 들어왔지만 그는 귀를 막았다. 기습이 이뤄지자 그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6월30일까지 별장에 틀어박혀 출근도 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 사이 소련군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도 스탈린과 소련군이 재기할 것이라 믿지 않았다. 전쟁 지도부가 마비상태에 빠지자 제2인자 몰로토프 외상 등 공산당 정치국원들이 별장으로 찾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나타나자 스탈린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정치국원들은 우리를 지도해달라고 간청했다. 스탈린은 '다른 지도자를 찾아보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 물러나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비록 잔인한 지도자였지만 스탈린을 대체할 인물은 없었다. 기습당한 소련의 이런 지도자 부재 현상과 기습 남침 당한 이승만 대통령의 신속대응, 눈부신 전쟁 지도를 비교하면 건국 대통령의 위대성이 새삼 돋보인다.
  
  
  미국의 보수파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모두 惡黨이니 양쪽이 싸워서 한쪽이 망하고 다른 쪽이 지쳐 있을 때 그를 공격하면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련 지원을 반대하였다.
  
  900일간 계속된 러시아의 옛 首都 레닌그라드 포위로 120만 명의 시민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開戰 4개월 만에 소련군 400만 명이 戰死, 부상, 포로 신세가 되었다.
  
  아무도 소련이 살아날 것이라고 보지 않았으나 비와 눈, 그리고 T-34 전차가 그들을 살렸다. 가을비는 도로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독일이 자랑하는 戰車軍團의 進軍 속도를 늦추었다. 이어서 찾아온 눈보라는 겨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독일군을 얼어붙게 하였다. 이때 추운 날씨에 잘 견디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크렘린 첨탑이 보이는 교외까지 진출하였다가 패퇴하였다. 구조가 간단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T-34 전차가 독일군을 괴롭혔다.
  
  소련은 전쟁 전에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므로, 1941년 막판에 시베리아 주둔군을 뽑아 對獨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독일인으로 위장하여 암약중이던 소련 간첩 조르게가 스탈린에게 일본은 소련을 치지 않고 남방작전을 펼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스탈린이 건설한 중공업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 독일의 무기생산을 압도하였다. 미국도 전폭적으로 소련을 지원하였다.
  
  독일군이 破竹之勢로 소련군을 깨는 것을 본 일본은 자신들에 대한 석유봉쇄작전을 시작한 미국과 결전을 벌이기로 작심한다. 이렇게 하여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태평양 전쟁이 開始된다.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던 독일 제6군 30만 명이 소련군의 포위작전에 걸려 항복하고 그해 여름 쿠르스크에서 벌어진 사상최대 규모의 탱크전에서 독일이 밀리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군은 그 후 2년간 독일을 향하여 천천히 밀고 들어간다. 1945년 초 폴란드 바르샤바로 입성한 소련군 병력은 250만 명에, 탱크가 6250대, 비행기가 7500대, 야포가 4만1600문이나 되었다. 병력과 무기 등 물량 면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늘 세 배 이상 많았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질서 있게 퇴각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을 무너뜨린 다음에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흡수하고 슬라브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거나 아리안족(독일민족)에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어머어마한 자원에 짓눌려 최후를 맞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전쟁으로 美英 연합군이 서쪽에서 독일을 쳐올 때도 독일군은 全 병력의 70%를 동부전선에 배치, 소련과 싸웠다. 2차 대전의 主戰場은 獨蘇전장이었다.
  
  2차 대전 때 인명손실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소련으로서 2000~3000만 명이 죽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여러 나라들-동독, 체코, 헝가리, 발틱 3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對獨 전쟁을 승리로 끝낸 다음 1945년 8월9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서 原爆을 맞은 일본은 15일 항복하였다.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는 소련군은 부산까지 갈 수 있었지만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38도선에서 멈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獨蘇 전쟁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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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F.C Fuller란 영국 군인이 있었다. 1966년에 87세로 죽었다. 그는 수십권의 전략, 戰史 책을 남겼다. 영국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탱크의 역할을 경험한 뒤 기계화 부대가 장차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쓴 책 가운데서 필자가 읽은 것은 'The Decisive Battles Of The Western World(1792-1944)'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유명한 전투가 소개되어 있다.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 1815년의 워털루 전투, 1870년의 세단 전투, 1914년의 마른느 전투,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풀러는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시각으로 2차 세계대전을 해석한다. 그는 에필로그 부분에서 미국이 유럽 전쟁에 참전한 것은 실수였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미국의 참전에 반대했던 전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미국의 경제공황기의 공화당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후버는 1954년에 자신이 왜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는가에 대하여 이런 요지의 설명을 하고 있다.
  
  1. 1941년에 독일이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영국이 독일군에 점령당할 위험성은 사라졌다.
  2. 나는 미국이, 독일과 싸운다고 해서 소련을 지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바보짓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3. 나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가 싸우도록 내버려두어 지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나는 미국의 對蘇지원은 공산주의를 온 세계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4. 나는 우리가 참전하지 않고 독일과 소련의 사투를 방관하고 있다가 보면 이 세계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전쟁의 결과를 보면 내 생각이 맞았다.
  
  영국과 미국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과 소련이 死鬪를 벌이는 것을 구경만 하다가 두 巨惡이 지칠대로 지쳤을 때 개입하여 세계 질서를 잡아놓을 수 있었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독일군의 기습을 당한 소련을 지원하여 살려놓더니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엔 내친 김에 독일에 선전포고, 유럽전쟁에까지 개입하여 쓸데없이 피를 흘렸다는 주장이다. 그 피흘림의 대가는 무엇인가.
  유럽의 반이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갔지 않았는가. 히틀러보다도 더 나쁘면 나빴지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럽의 반을 넘겨주자고 그렇게 피를 흘렸다는 말인가라고 풀러는 묻고 있는 것이다.
  
  후버는 공산주의를 나치와 같은 인류의 적으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다. 루스벨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뉴딜 정책은 국가주도의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이기도 했다. 그의 주변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국을 지원하고 싶어했다. 그 영국을 코너로 몰았던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하여 스탈린을 궁지로 몰고 있었을 때 루스벨트는 소련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을 도왔다. 무적의 독일 육군을 상대로 한 소련군의 영웅적인 투쟁이 유럽 문명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스탈린이 전쟁 후에 동구권을 공산화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루스벨트는 간과했다. 후버의 불개입 주장이 옳았는지, 루스벨트의 참전이 옳았는지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답은 없을 것이다. 이 답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을 반영시킬 것이다.
  공산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가치판단이 세계사를 바꾼 정책의 근저에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가치관은 전략, 정책의 저변에 있는 것이다. 이 가치관을 형성하는 정치이념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한반도에선 동족인데도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양쪽이 갈라져 사생결단의 투쟁을 하고 있다. 이념은 민족보다도 우리의 생활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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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蘇전쟁에서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이겼지만 소련이 받은 타격이 너무나 커 결국 냉전의 패배자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은 약3000만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그것도 활동성이 강한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우크라이나 등 소련의 가장 발달한 지역이 전장으로 변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무리하게 중공업 시설을 내륙으로 옮기는 바람에 생산성이 떨어졌다. 약300만 명의 강제이주로 인한 타격도 컸다. 스탈린이 기술자들을 많이 숙청하였다.
  
  
  
  
  
  
[ 2022-06-22, 03: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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