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維新은 어떻게 이뤄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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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改憲의 幕前幕後: 朴正熙는 선거의 위험성을 알았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위한 國家改造는 성공적이었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선거의 선동성과 낭비성을 경계하였다.
  *속는 국민들에게 실망하였다.
  *후계자감이 없었다.
  *시작한 일을 끝내고 싶었다.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로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섰고 성공하였다.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1. "이 따위 놈의 선거는 이제 없어!”
  
  
  1971년 4월 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朴正熙(박정희) 후보는 4월 27일에 있을 제7代 대통령 선거를 위한 마지막 연설을 했다. 朴 대통령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야당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는 가운데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朴 대통령을 뽑아 주면 총통제를 만들어 앞으로 朴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를 자신감 있게 피력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全세계의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이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全세계 120여 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경제성장이 빨랐는가 하고 유엔과 세계은행에서 통계를 내어 보았더니, 가장 경제성장이 빠른 국가 중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이 세 번째에 들어갔습니다. 또 어느 나라의 수출성장이 제일 빨랐는가 하면 120여 개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단연 1위였습니다.”
  朴 대통령은 옛날 이야기를 했다.
  “10년 전 5·16 혁명이 나기 며칠 전 대구 시내에 있는 몇몇 백화점에 들러서 내의와 양말을 사려고 주인한테, ‘내의와 양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 앞에 내놓은 물건은 전부가 일제 아니면 미제, 홍콩제뿐이었습니다. ‘우리 국산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아주 쑥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저쪽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국산 양말 몇 켤레를 갖고 와서, ‘아이구, 손님 이거야 어떻게 신겠습니까. 그거 국산은 못 신습니다. 차라리 외제를 사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울 시내의 백화점이나 기타 모든 상점에 가 보면, 그때와는 격세지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날 연설에서 朴 대통령이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 입후보하지 않을 것이니 꼭 찍어 달라”고 호소하지 않으면 수도권에서 金大中(김대중) 후보에게 너무 뒤져 위험하다고 건의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화당의 수도권 선거 책임자이던 康誠元(강성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며칠 전 朴 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다시는 출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표가 안 나옵니다. 지금 서울에서 8 대 2로 우리가 열세인데 지지율을 40% 선까지 끌어올리려면 각하께서 그런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朴 대통령은 담배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화가 나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大選(대선)을 사실상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던 李厚洛(이후락) 정보부장은 전날 朴 대통령이 부산 유세를 끝내고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갔다. 같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가는 도중에 李 부장은 “내일 유세 때는 꼭 ‘이번이 마지막 출마다’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지방 유세의 분위기가 좋았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기분이 나빠졌다.
  李 부장은 이날 장충단 공원 유세장으로 가는 朴 대통령에게 다시 “각하, 어제 그 말씀 꼭 하십시오”라고 졸랐다. 그는 선거 추이를 분석한 결과를 보고하면서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말 없이 뚱하고 나갔다.
  언론은 이날 朴 후보가 불출마 약속을 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장충단 연설에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을 뿐이다. 표를 구걸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대통령을 세 번만 하겠다고 못 박지 않았다. 언론은 朴 대통령의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날 연설을 ‘4選 불출마 선언’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연설을 분석하면 朴 대통령이 마음속으로 헌정을 중단시키는 일대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朴 대통령은 국민들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이야기이다. 이날 연설의 묘한 뉘앙스 차이를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세 분석에 강한 康誠元 의원만은 자신이 건의한 내용과 朴 대통령이 말한 것의 차이에 유의했다. 그는 그 뒤에도 朴 대통령의 연설을 유심히 분석하다가 1972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연설에서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란 단어가 나타나자 주위에 “이달 안으로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하고 다녔다.
  장충단 공원 연설은 朴 대통령에게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懷疑(회의)를 갖게 했음이 여러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1972년 6월 어느 날, 청와대 사정특보인 洪鍾哲(홍종철·前 문교부 장관)이 董勳(동훈) 비서관과 함께 朴正熙 대통령에게 전국 금융기관의 편중대출 상황 보고를 했다. 편중대출을 많이 받은 순서로 100大 기업과 개인을 표로 만들어 올렸다. 이를 훑어본 朴 대통령은 “이 사람들이 나한테 말하던 내용과는 영 다른데, 이것 쓸모가 있겠군”이라고 하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朴 대통령은 집무실 옆문을 열고 뜰로 나가 야외 식탁을 마련케 하고 두 보고자와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다.
  洪 특보가 “각하 요사이 시중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북한 요인이 서울을 다녀갔다던가 하는 소문인데…”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1년 전에 있었던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董勳 비서관, 지난번에 내가 장충단에서 유세할 때 가보았겠지?”
  “예, 굉장히 많이 모였더군요.”
  “이 사람이,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다 날랐지, 하하.”
  董勳 비서관은 ‘朴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장충단 유세 때의 군중이 대부분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알고 있구나, 역시 속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나는 참 무서웠어. 군중이 혼란을 일으키면 결국 무력을 동원해야 진정이 되어요. 내가 4·19 때 부산계엄사무소장이었는데 그런 꼴을 보았어요. 내가 정복을 입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진정을 시켰어요.
  만약 그 장충동에서 북괴가 모략전을 펴서 경찰관 복장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해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그걸 빌미로 하여 북괴가 군대를 들여보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날 나는 연설할 때 그런 걱정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연설을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와서 수행원에게 맨 처음 물은 말이 ‘휴전선에 이상이 없느냐’였어.
  청와대로 돌아와서도 군중들이 다 해산했다는 보고를 받고 저녁을 먹었어. 작은 회사도 사장을 뽑을 때는 이런 저런 점을 살펴보고 신중하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는 대통령을 뽑는데 그런 식으로 군중을 잔뜩 흥분시키고 감정을 돋워 놓고, 그것이 식기도 전에 투표장으로 이끌고 가서 표를 던지게 한다면 엉뚱한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말이야.
  董勳 비서관은 법을 배운 사람이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많이 알 터인데 어디 말해봐요, 이게 민주주의요? 가장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유권자를 만들어 놓기 시합하는 것이 민주주의냐 이 말이야.”
  朴 대통령은 듣고만 있는 두 사람 앞에서 말을 이어갔다.
  “그때 장충동에서 내 연설 자세히 들었겠지.”
  “예, ‘이게 마지막 유세’라고 하시는 말씀 감명이 깊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은 ‘이제 다시는 여러분들한테서 표를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였다고.”
  董勳 비서관은 ‘이 말은 言中有骨(언중유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朴 대통령은 이때 갑자기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치더니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이제 그 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董勳 비서관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朴 대통령은 이어서 인도네시아 헌법에 대해서 董勳 비서관에게 물었다. 자연히 인도네시아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朴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특히 1965년에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수카르노 대통령이 놀아나자 수하르토가 나서서 공산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살육당하는 과정을 설명해 나갔다.
  朴 대통령은 섬이 많고 문맹률이 높은 인도네시아가 그 현실에 맞는 헌법과 정치제도를 도입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두 사람에게 “오늘 한 이야기는 옮기면 안 돼”라고 일침을 놓았다.
  
  2. “국민들이 나를 대접하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1971년 4월 28일,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이날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부총재는 충남 서산 농장에 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朴 대통령이 94만여 표 차이로 金大中 후보를 이기고 있었다. 金鍾泌에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朴 대통령이 현충사에서 충무공 탄신기념식에 참석한 뒤 온양관광호텔로 가니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안내자가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朴 대통령이 방에서 쉬고 있으니 들어가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응, 어딨었어.”
  “저, 서산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
  朴 대통령은 한참 침묵했다. 그 사이 金鍾泌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朴 대통령은 소파 쪽으로 오더니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요새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이것 안 되겠어.”
  “뭐가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래도 빈곤을 추방하려고 열심히 일을 했어. 한 10년 열심히 하여 이제 굶지 않을 정도는 됐어. 수출도 잘 되고 말이야. 그런데 국민들이 내가 三選(삼선)을 하겠다니까 언짢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걸 모르겠어. 내가 영구집권한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은 정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는 후계자를 정하겠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랬는데 金大中이가 뭔데 차이가 그것밖에 안 나나.”
  朴 대통령은 자신을 압승시켜 주지 않은 국민들에게 매우 섭섭한 모양이었다. 좀처럼 이런 말을 하지 않는 朴正熙는 그야말로 작심한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사람(金大中)과 비교해서 국민들이 나를 대접하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민주주의가 역시 약점이 있어.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선거바람이 잘못 불면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 그랬을 때 과연 이 나라가 일관성 있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지 의심스러워. 그래서 내가 심각하게 걱정을 해.”
  朴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돈을 얼마나 썼나. 행정력은 얼마나 구사했나.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공화당이 각 지구당에 돈을 얼마나 내려보냈나 말이야. 그래도 요것밖에 차이가 안 나?”
  이 대목에서 金鍾泌이 말했다.
  “선거에 취약점이란 게 왜 없겠습니까. 이번에 각하 표가 의외로 적었던 것은 역시 저희 보좌하는 사람들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침통해하시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건 여러 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담에 내가 그만두기 전에 그런 면에서 취약점을 확실히 보완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해 놓는 게 내가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새 들어.”
  朴 대통령은 이날 낮 온양호텔에서 있었던 다과회에선 선거에 대해 일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가뭄이 풀려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朴 대통령의 불평을 들으면서 金鍾泌은 오히려 국민들이 현명한 선거를 했다고 생각했다.
  “표차가 95만 표밖에 나지 않은 것은 국민들이 3選개헌에 대한 의아심을 풀지 않은데다가 표를 많이 주면 이 양반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1971년 5월 중순 어느 날,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에 나선 朴 대통령은 충남 온양에서 金世培(김세배) 의원 지원 연설을 끝낸 뒤 헬리콥터를 타고 공주의 李炳主(이병주) 의원 지역으로 떠나면서 대전에서 출마했던 공화당 원내총무 출신의 JP 직계 金龍泰(김용태)를 동승시켰다. 공주에 도착한 일행은 점심시간이 되어 李 의원 집에서 식사를 했다. 점심을 끝낸 다음 朴 대통령은 주인인 李 의원과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좀 쉬고 있으라 하고, “나, 金龍泰 의원하고 이야기 좀 하겠어”라고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난 서울 유세 때 후계자를 키우겠다고 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한 중대사는 전적으로 각하의 意中(의중)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신분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3選개헌 전에 金鍾泌을 후계자로 밀다가 혼이 났던 金龍泰로서는 사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물어보니 대답하기 어렵겠지. 자네 생각나나? 6·25 때 대구 우리 집에서 맹세한 것, ‘이 나라에서 빈곤만은 없애 보겠다’고 한 말. 이제 그 꿈이 이뤄지고 있네. 나도 3選개헌이 무리였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李承晩 박사도 개헌을 하지 않았던들 지금은 國父(국부)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이룩해 놓은 國富(국부)와 국력을 북괴가 남침해서 하루아침에 불살라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을 튼튼히 해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각하께서 下問(하문)하신 일은 저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입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3選개헌을 반대하다가 내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개헌을 하겠다고 하니 동의해 주지 않았나. 같이 걱정하는 뜻에서 묻는 것이야, 다른 뜻은 없어, 이 친구야!”
  金龍泰는 朴 대통령과는 광복 직후부터 인연이 있었고, 몇 안 되는 민간인 출신 5·16 혁명동지였다. 朴 대통령은 공화당 초대 원내총무로 그를 임명하고 ‘두목’이란 애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1968년 공화당 內에서 金鍾泌 의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국민복지회’란 단체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당에서 제명되었고, 1969년엔 공화당이 발의한 3選개헌案(안)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해 7월 金 의원이 태릉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데 金載圭(김재규) 육군보안사령관이 찾아왔다.
  담담하게 지내는 사이였던 金 사령관은 “벌써 金 의원 집에 들러서 양복까지 가져왔으니 청와대로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그는 金載圭의 차를 타고 가서 오랜만에 朴 대통령을 만났다. 朴 대통령은 약 40분 동안 3選개헌案에 가표를 던져 줄 것을 설득했다.
  朴 대통령은 金 의원에게 공화당 內의 개헌 반대자들도 돌려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金龍泰는 오히려 대통령을 돌려놓으려 했다.
  “내가 자네한테 설득을 당하고 있군. 金 의원 어때? 지금까지 벌여 놓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데까지만 시간을 얻을 수 없을까. 저질러 놓은 일들이나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 평생을 보내고 싶어. 우리 집사람도 자네와 똑같은 이야기만 하는데 사무실만 나오면 딴판이란 말일세.”
  朴 대통령은 金 의원과의 과거 인연을 꺼내 압박했다.
  “자네와 나는 혁명에 목숨을 걸었던 사이가 아닌가. 나의 결심이 오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좀 도와주게!”
  결국 金 의원은 굴복했다. 그는 공화당에 남아 있는 개헌반대 의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의했을 뿐이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에 공화당이 국회 제3별관에서 3選개헌案을 통과시킬 때 가표를 던진 의원들은 공화당 106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넘어온 3명, 그리고 金龍泰 의원 등 무소속 4명을 합쳐 총 124명이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金 의원은 아무리 朴 대통령이 후계자를 추천하라고 해도 입을 뗄 수 없었다. 朴 대통령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金 의원은 대통령의 침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속으로는 ‘내가 말한다고 해서 이 나라 역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뗐다.
  “각하, 저의 뜻과 함께 시중의 여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의 후계자가 되실 분은 金鍾泌 공화당 부총재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서 3選개헌 전에 부총재로 임명해 놓으셨기 때문에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대답하는 데 그렇게도 시간을 끈단 말인가.”
  “섣불리 말씀드렸다가는 제 목이 온전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두목에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군.”
  “각하, 그렇습니다. 저는 겁쟁입니다.”
  “종필이… 글쎄, 다재다능은 하지만 신중하지 못해. 人和(인화)도 문제야. 吉在號(길재호)도 자기가 추천해 놓고는 요사이 犬猿之間(견원지간)이라고 해. 人和 없이는 막중한 일을 못해! 趙炳玉(조병옥) 같은 분도 軍政(군정) 때 경무부장을 했다고 해서 對人(대인)관계가 나빠졌대요. 종필이는 정보부장을 하는 동안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흠이란 말이야.”
  이때 충북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기별이 들어왔다.
  
   3. 유신의 목표: 중화학 공업 건설
  
   金鍾泌 전 총리는 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의 7·4 공동성명 이전인 5월말 토요일에 유신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기억한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12시 조금 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예정이 있나.'
   '다른 예정은 없습니다. 운동이나 할까 하는데요.'
   '나하고 가지. 이따 올라와.'
   뉴코리아 골프장으로 가는 車中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우리나라는 선거를 잘못하면 어디를 갈지 몰라. 내가 보기에 70년대가 순탄치 않아. 없는 國力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는 체제로 정비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도약이 어렵겠어. 이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있지만 해놓고 보면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조금 더 있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게. 그때는 임자도 검토멤버에 들어와야 해.'>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0월23일, 駐월남 한국대사 柳陽洙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朴대통령에게 월남 휴전협상 건을 보고 올리고 대기 중이었다. 이날 새벽 金正濂 비서실장으로부터 柳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은 하비브 미국대사로부터 통보받은 휴전안을 柳대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柳대사는 朴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朴대통령은 무척 수척해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國論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된다. 월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國力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極大化, 國力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朴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柳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1972년 10월27일, 朴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의 정치 철학을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國力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는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國力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부인하진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며, 따라서 國益을 위하여 창조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중화학공업 건설에 의한 자주국방력 확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마련, 그걸 가능하게 할 國力의 조직화가 유신의 목표였다.
   1973년도 지방 年頭 순시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國政의 방향에 대해서 이런 술회를 했다. 청와대가 그의 肉聲 지시를 정리한 ‘1973년 지방연두순시 지시사항’의 일부를 소개한다.
   <10월 유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또 여러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10월 유신의 이념과 목표를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가 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데 있다.
   10월 유신은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민족의 主體性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이 있어서는 5·16혁명과 그 기조를 같이하고 있지만, 5·16 혁명보다 그 차원을 한층 더 높여서, 민족주체성에 입각,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월 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사명과 과업을 남이 시켜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또 남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즉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정신과 자세가 바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인 것이다.
   10월 유신의 정신은 새마을 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새마을 정신은 곧 10월 유신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특히 우리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 중에는 “서로 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한 구절에 10월 유신의 정신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서로 도와서’라는 말은 협동이요, 단결이다. “땀 흘려서 일하고”라는 말은 農家에는 소득 증대요 국가적으로는 생산하고 增産하고 수출해서 저축하여 국가의 소득을 증대한다는 뜻이다. ‘부자마을 만드세’라는 말은 우리 농촌의 마을이 전부 부자마을이 되면, 국가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살기 좋은 내 나라’는 바로 복지국가요, 복지사회다.>
  
   4. 維新시절의 성적표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대통령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법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헌법적 평가를 포함하여 國政(국정)과 국민의 삶에 대하여 종합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므로 7년의 유신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 중 3차 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國力(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오일쇼크 기간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유신기간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전자,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은 오늘의 한국을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력 건설도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이 장기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와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를 꿈꿀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유신체제이다.
   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데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 중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로 등장, 박정희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 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식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하였다. 이 기간 중국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유신)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하위계층 20%에 대한 상위계층 20%의 소득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 중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77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의료보험은 세계적 성공사례이다. 朴대통령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의 토대와 안보의 울타리가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것이다. 역사는 朴正熙를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로 평가할 것이다. 또 한 분은 물론 이승만 建國(건국) 대통령이다. 李대통령은 나라를 자유의 초석 위에 세웠고, 朴대통령은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릴 수 있는 힘을 길렀다.
  
[ 2022-10-12, 08: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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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산     2022-10-12 오후 5:29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이 점이 우리나라에 적용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지금의 북한보다 못 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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