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13) - 김재규의 재판과 파워게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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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재규 재판과 파워 게임
  
  미국 원격조종설의 논리구조
  
  김재규가 시해 직후 육본 벙커에서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했다는 풍문은 이번 취재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장관들에게 '미국에 대해서도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음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김재규를 미국에서 조종했다는 소문은 10·26 직후부터 있었으나 물론 증거는 없다.
  
  김재규가 박대통령과 달리 친미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김재규뿐 아니라 두 전임자 이후락·김형욱도 친미적인 부장이었다. 사석에선 습관적으로 '미국놈'이라 부를 정도로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온 박대통령 밑의 정보부장들이 대체로 친미적이었다는 것은 일단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친미적 정보부장들의 존재가, 자주국방·핵개발·유신체제 강화 등으로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박대통령에 대해서 견제 역할로서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박대통령은 1960년대부터 이후락을 가까이 부리고 있으면서도 '그자가 CIA 첩자라면서?'란 가시 돋친 말을 측근에게 한 적이 있었다. 법정에서 김재규는 자신의 거사를 합리화하는 자료로서 민주회복과 함께 '박대통령의 제거에 의한 한미관계의 개선과 이로 인한 집단 안보의 강화'를 꼭 들었다.
  
  '자주국방이 이상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10월유신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안보도 끝장입니다.'(항소이유 보충서)
  
  김은 이런 한미관계의 개선을 10·26의 필연성으로까지 꼽았다. 박대통령 서거 이후 한미관계와 집단 안보가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김은 또 박동선 사건의 본질을 박정권의 독재에 대한 미국의 견제와 경고로 이해하여 민주화를 건의했었고, 미군의 전면 철수 방침에 대한 박대통령의 오기에 가까운 동의를 번복하도록 유도했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친미적인 김재규에게 미국이 정보 조작으로 세뇌를 시켰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즉, 김에게 '박대통령 때문에 한국의 안보가 위태롭다→미국이 박대통령의 제거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는다→부마사태로 민심이 박정권을 떠났다→따라서 대통령만 제거하면 정권은 절로 붕괴될 것이고, 미국도 새 정부를 지원할 것이고, 집단 안보도 강화될 것이다'는 논리구조가 형성되게끔 김재규에게 심리전적인 정보 공세를 폈으리라는 추리다. 이런 원격 세뇌엔 증거가 남을 리도 없고 본인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추리는 그야말로 기사가 아니라 첩보물의 영역일 터인데, 당시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도 그런 추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10·26 직전 관광여행 간 CIA지부장
  
  10·26사태 당시의 CIA 한국 지부장은 제 10대인 로버트 브루스터(Robert Brewster)였다. 그때 52세였다. 1978년말에 한국에 온 브루스터는 6대 한국 지부장인 존 리처드슨 밑에서 부지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공군 장교 출신인 그는 눈이 아주 크고 시원한 인상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 그는 방광암(췌장암이었다는 설도 있음) 수술을 받았었다. 그런 몸으로 격변의 1979년을 한국에서 맞게 된 것이다.
  
  10월 16일 부산, 10월 18일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터져 부마사태로 발전했을 때 그는 현장으로 요원들을 보내 정보 수집에 분주했다. 그러나 부마사태가 가라앉고, 다른 도시로 확산이 되지 않자 그는 10월 21∼24일 사이 경주, 동해안, 설악산 등지로 관광여행을 갔다. 그 급박한 시점에 관광여행을 다녔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가족끼리의 관광이었음은 우리쪽 정보에서도 확인됐다. 관광에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10·26이 나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27일 아침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와 정보부를 찾아갔으나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용산 유엔촌에 있는 대통령 전경호실장 박종규(당시 공화당 의원) 집을 찾아갔다. 이때 브루스터를 목격한 박씨의 측근은 그가 아주 초췌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답답할 때 CIA지부장이 찾은 사람이 박씨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 18년 전 5월 16일 아침에 당시의 CIA 한국 지부장 피어 드 실버는, 브루스터와 꼭 같은 암중모색의 상황에서 박종규 소령과 처음으로 우연히 만나,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채널을 확보하게 됐었다.
  
  이 만남은 주체세력에 대한 CIA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됐었다. 그 뒤로 박종규는 역대 CIA지부장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반미 성향이 강한 박정희 대통령 측근에서 친미적 파이프 라인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박종규였다. 우연하게도 박종규는 10·26 뒤 등장할 군의 신진 세력과도 깊은 인간적 유대를 갖고 있었다. 12·12 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 장성들 가운데는 5·16 당일과 직후 박소령 밑에서 박정희 의장 경호요원으로 일했던 사람들도 많다.
  
  브루스터 지부장이 그런 시기에 박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10·26 뒤의 사태 발전에 대비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어쨌든 브루스터의 10·26 전후 행적으로 봐서도 이 시해 사건에 미 CIA가 직접 관련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10·26이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었다는 사실이다.
  
  10·26 수사, 전두환 장군의 등장
  
  김재규 한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서 비롯된 10·26 사건은 그 성격이 쿠데타 기도라기보다는 정치적 암살 사건이었다. 쿠데타 기도이든 암살 사건이든 그 뒤의 사태 수습에 주도권을 잡는 것은 사태를 진압하거나 범인을 체포하는 쪽이다. 10·26 사건은 국내 치안을 어지럽힌 소요 사태가 아니었다. 이 사건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자중자애하는 성숙된 한국인 상을 보여주었다. 비록 비상계엄령은 선포됐지만 군 병력을 진압에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10·26 사건은 지역과 인원이 극히 한정된 암살 사건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가장 중요한 계엄 업무는 범죄 수사에 의한 사건의 진상규명이었다. 진압 병력을 동원하는 소요 상황에선 군 지휘권을 장악한 계엄사령관의 역할이 막강해지지만 본질이 '암살'이었고 사태 수습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수사'였으므로 이 수사를 책임지는 기관이나 인물에게 관심과 권한이 몰리게 되어 있었다.
  
  이런 역사적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게 된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 소장이었다. 그는 10월 26일 밤 시해사건의 진상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했고, 범인 체포를 지휘했으며, 수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통치권 공백의 8시간 동안 일관된 행동논리와 지휘체계로써 사건 대처에 임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전두환 장군이었다. 18년 동안 이 나라의 권부 그 자체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긴 무대 위에 하나의 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전장군이 급히 연락을 받고 사복 차림으로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한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밤 8시 30분께였다. 벙커에는 김재규 및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정총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노재현 국방장관 및 3군 수뇌진이 와 있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서 군의 두 지휘자인 노국방과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시해 범인으로 차지철 경호실장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한국종합화학 사장으로 있는 노재현은 '차지철의 평소 소행으로 보아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김재규에게 '당신이 본 상황이냐, 아니면 보고를 들은 상황이냐'고 캐물었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노재현은 '차가 군 지휘 계통을 문란시키는 행동을 많이 했다'면서 '당시에 개각이 임박했는데 나도 차의 작용으로 바뀌게 돼 있었다'고 했다.
  
  정승화 총장, 청와대 포위 지시
  
  정총장은 나중에 법정에서, 자신도 차를 범인이라고 생각했고, 김재규가 당황한 것은 범행 현장에서 탈출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었다는 진술을 했다. 정총장은 또 여동영 변호사에게 차지철의 월권 행위에 대한 불만사례를 털어놓았다. 차지철은 부마사태 직후 공수부대 2개 여단의 투입을 멋대로 결정했고, 군 인사에도 자주 개입하여 '어디까지가 차지철 개인의 부탁이고 어디까지가 박대통령의 지시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고 한다.
  
  한때 대통령 경호 휘장이란 것을 3군 총장들이 청와대로부터 받아서 달고 다녔는데 나중에 경호실장이 주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불쾌해진 정총장은 청와대에 들어갈 때 이 경호 휘장을 떼고 갔는데, 그럴 때마다 차지철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늘 아래위를 훑어보곤 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에 3성 장군을 임명, 자신의 직위를 상대적으로 격상시키기도 했으며 엘리트 장성들을 경호실로 불러들여 근무케 했다. 노·정씨 양쪽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차지철이 군의 인사 및 병력 동원에도 깊이 간여했고, 이것이 어떤 야심으로 비쳤음은 확실한 것 같다. 정총장은 궁정동에서 김재규와 차를 같이 타고 육본으로 오는 도중 김재규에게 '내부의 소행이겠지요'라고 물었다. 김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정총장은 '청와대 경호 병력이 둘러싸고 있는 궁정동에서 대통령이 피격됐다면 범인은 경호실 내부에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정총장은 밤 8시 40분께 수도경비사령관이 육본에 도착하자 청와대의 포위를 지시했다. 9시께에는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을 철저히 단속하고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청와대 주변에 병력을 배치토록 지시하였으니 충돌이 없도록 직접 수도경비사령관과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지시는 차지철이나 경호실을 범인으로 착각함에 따른 조치였다.
  
  '코드 원이냐?'
  
  정총장에 비해 전두환 장군의 대처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전두환 장군은 육본 벙커에서 노국방으로부터 '적절한 조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고 즉시 국군보안사령부로 돌아왔다. 그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대통령 유고'의 실상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보안사령부를 지키고 있던 보안처장 정도영 준장은 전장군이 도착하기 전, 밤 8시 10분께 '청와대 비서실장이 누군가를 업고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정처장은 지구병원으로 달려갔다. 입구에서 무장을 한 경비 요원들이 그를 제지했다.
  
  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인 김병수 공군 준장이 전화에 나왔다. 정처장은 입원한 사람이 누구냐고 짚이는 대로 이름을 대며 물었으나 김원장의 대답은 애매했다. 김원장 곁에는 정보부 경비원들이 서서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김원장은 '누가 죽었다'고 구체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전두환 장군은 군복으로 갈아입자마자 김병수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냐고 물었으나 김원장은 '예' '아니오'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답을 주지 못했다. 얼마 뒤 보안사 참모장이 전화를 걸었다.
  
  '코드 원(박대통령을 지칭)입니까?'
  '네.'
  김재규가 말하는 유고가 대통령의 사망을 뜻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전장군은 육군본부로 즉시 돌아갔다. 범인 김재규 체포작전이 시작된 것은 그 3시간 뒤였다.
  
  '10시 25분경 김재규가 김계원을 벙커 화장실로 슬며시 데리고 가서 '우선 계엄을 선포해서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군사혁명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보안 유지를 당부하였다. 한편 11시 30분경 김계원은 국무위원들의 강경한 태도로 보아 김재규의 거사가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망설이다가 옆방인 국방장관 보좌관실로 살짝 혼자 가서 육군총장을 잠깐 그 방으로 오도록 전갈을 보낸 바 총장과 장관이 동시에 들어오기에 김부장이 범인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장관과 총장은 김재규를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총장은 즉시 육본 벙커로 내려와 수도권 일부 부대에 대해 이동 명령을 내리고 11시 40분경 보안사령관과 헌병감에게 김재규를 체포토록 지시하였고, 보안사령관은 헌병감을 육본내 임시 지휘소로 불러 휘하 참모와 김재규 체포 계획을 수립하였다.'(계엄사 수사 발표문)
  
  김재규 체포 작전의 비화
  
  27일 0시 30분쯤 김진기 육군 헌병감은 먼저 국방장관 보좌관 조약래 준장에게 김재규의 유인을 부탁했다. 조준장은 국방부 장관실로 들어갔다. 최규하 총리 등 국무위원들과 떨어져 김재규는 앉아 있었다. 이때는 비상국무회의가 정회중이었다.
  '부장님, 정총장이 육본 총장실에서 조용히 만나자고 합니다.'
  '박흥주 대령은 어디 있나.' 조준장은 엉겁결에 문 바깥쪽을 가리키며
  '저기 있읍니다'고 했다.
  
  그때 박흥주는 사태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깥 복도에서 30여 명의 다른 고관 수행원들과 섞여 있었다.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모 대령이 박대령을 김재규와 분리시킬 양으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옆방으로 들어가시오!'라고 고함을 쳤다. 김대령의 기세에 눌려 박대령도 멋모르고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김재규가 조준장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재빨리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 3명의 군 수사관이 '정총장이 육본에서 기다리십니다'고 안내를 맡고 나섰다. 김재규는 다시 박대령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한 수사관이 '곧 불러오겠읍니다'고 했다. 김헌병감 등 수사관들은 김재규를 안내하여 비밀 통로를 내려갔다. 김재규는 낯선 통로에서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이 길은 VIP용입니다'고 누군가가 둘러댔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한 수사관이 대기중인 레코드 승용차 쪽으로 김재규를 유도했다. 청사 뒤쪽은 깜깜했다. 차의 문을 열고 오모 중령(보안사 수사관)이 갑자기 김재규를 밀어넣었다.
  '무장을 해제하겠읍니다'면서 오수사관은 차중에서 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38구경 5연발 리볼버 권총을 끄집어냈다. 권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승용차는 삼각지 방향으로 출발했다.
  
  김재규는 '자네, 누구야'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지'라고 불안스럽게 물었다. 수사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꾸 캐묻자
  '정총장께서 부장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고 했읍니다'고 대답했다.
  김재규는 겁을 주려는 듯 '이제 세상이 달라졌어. 각하는 돌아가셨단 말이야. 지금 수도통합병원에 계셔'라고 말했다. 국무위원들에게도 유고에 대한 설명을 완강히 거부하던 김재규가 궁지에 몰린 것을 알아채고 한 말이었다. 김재규를 태우고 가던 차의 운전사는 착각을 하여 레코드 승용차를 정보부의 시내 분실 앞에 세웠다. 김재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겁을 한 수사관들은 승용차를 급히 돌리게 하여 보안사 분실로 향했다. 김재규는 조사관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자네들 뭣하는 놈들이야!'
  '누가 시켰어?'
  '날만 밝으면 세상이 바뀐단 말이야. 몸조심 해!'
  그러나 조사가 시작되자 한 시간도 안돼 김재규는 범행을 자백했다. 국군보안사령부에서는 이재전 경호실 차장의 체포도 수사관들에게 지시해두었고, 김계원 비서실장도 연행하려 했다. 정승화 총장이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고 이를 막았다. 정총장은 나중에 '김실장이 달아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다. 당시 김계원 사건의 수사 책임자는 보안사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이었다. 부산의 합수단에 파견나가 있다가 26일 밤에 비행기편으로 급히 올라와 이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중령은 뒤에 이렇게 술회한 바가 있다.
  
  '김재규가 수사분실로 연행된 뒤에도, 이제 세상은 변했으니 당신들 살 궁리나 하시오라고 공갈을 쾅쾅 칠 때, 중정부장이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재규였으므로 내심 그 추종자들이 무언가 계획을 하고 있구나, 내일 아침이면 수사를 담당한 우리는 반혁명분자로 처단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소름이 쭉 끼쳐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읍니다. 우리는 수사관회의를 소집, 우리의 손에 국가의 흥망이 달렸다. 목숨을 걸고라도 수사를 철저히 하여 공모자를 색출해야 한다고 다짐하여 수사에 착수하였으나 정승화 총장도 사건 현장에 있었고 함께 차를 타고 육본까지 왔다는 진술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던 것입니다.'
  
  정보부 무력화, '합수단' 강화
  
  김재규의 체포를 확인한 뒤 전두환 장군이 먼저 한 일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조직이었다.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리면서 부산지구 계엄사 합동수사단이 발족, 당시의 부산지구 보안부대장 권정달(權正達) 대령(현 민정당 의원)이 단장에 취임한 적이 있었다. 이 지역 수사단의 조직을 참고하여 합동수사본부의 조직 요강이 만들어졌다.
  
  27일 오전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발표, 합동수사본부의 발족을 알리면서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즉 중앙정보부의 모든 기능을 합동수사본부에서 흡수하도록 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지탱해온 핵심기관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고, 합동수사본부의 강력한 등장을 알리는 조치였다.
  
  27일 오전 합동수사본부는 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의 장(長)들을 불러 첫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전두환 장군은 상좌에 앉았다. 그는 국내의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간밤에 각하께서 서거하셨읍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붑니다.'
  그뒤의 수사로 범인은 중앙정보부란 조직이 아니라 김재규와 그 측근으로 밝혀졌지만,
  '범인은 중앙정보붑니다'란 말에서 이미 정보부가 이 전환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없게 됐음이 암시된 것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27일부터 정보부의 간부 수십 명을 연행, 김재규와의 관련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에서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정보부의 장이 대통령의 살해범이란 엄청난 충격이 도덕적 차원에서 벌써 이 기관의 기능을 정지시킨 셈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군, 검찰, 경찰, 법원 등에서도 요원들을 차출, 조직과 기능을 강화해갔다.
  '일(work)이 있는 곳에 권력(power)이 있다'는 말대로 합동수사본부는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하나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다.
  
  11월 1일치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외무성 소식통을 이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라는 좀 성급한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 소식통은 비상계엄령하의 한국에서는 군부가 치안·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 김종환 합참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전사령관에 대해서는
  ① 박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이 군부를 쿠데타에 끌어들이려 했을 때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저지하고 평온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
  ② 군의 소장 엘리트를 여러 명 배출하고 있는 육사 11기를 졸업한 실력자로서 동기생이 실전부대의 사단장 클래스로 있다,
  ③ 사건 수사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의 질서 유지에 있어서 중심 인물이라는 점 등을 들어 군의 실권은 정계엄사령관 등 군의 장군들이 아니라 전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방파제 무너지듯, 철권도 풀리고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은 모든 국민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쇼크였다. 6·25 발발에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권력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했다. 박진환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은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신현확 당시 부총리는 '국가의 위기가 닥쳤다는 직감과 함께 북괴의 남침이 생각났다'고 했다. 정재호 당시 유정회 대변인은 '그것은 거대한 방파제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박정권의 성격은 그의 종말로 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 개인의 행동 논리와 사고 방식에 의해 지탱되어온 것이 박정권의 실체였음이 분명해졌다. 18년 동안 이 나라를 철통같이 장악했던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조짐은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새벽 부산 합수단
  이날 새벽 합수단 시내 분실의 의자에 앉아 신문을 받고 있던 부산사태 배후조종 혐의자 김광일 변호사는 사무실의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챘다. 군인들이 총과 실탄을 찾아 무장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그는 데모대가 쳐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27일에 김광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나갔다. 다만 그를 조사하던 정보부 수사관이 사라진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었다.
  
  이날 김광일은 변소에 갔다가 내려오는 계단에서 최성묵을 만났다. 둘은 눈인사를 나누며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김광일은 옆방에서 박상도 등이 얻어맞고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치를 떨었다. 변호사란 직업 덕분에 비교적 인간 대우를 받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가 변호사란 것을 안 방위병들이 호의를 베풀기 시작했다. 한 방위병은 껌을 던져주었다. 며칠 동안 의자에 앉아 있느라고 지친 그에게 씹을 것이 생겼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다른 방위병은 김광일이 조는 것을 내버려두었다가 누군가가 다가오면 발을 굴러 신호를 해주었다.
  
  28일 일요일. 그는 교회 생각을 했다. '기도 당번인 내가 나타나지 않아 교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겠지. 교인 김모군의 결혼식은 어떻게 됐는지…….' 이때 등 뒷문이 열리더니
  '김광일! 세상이 시끄러워졌어'라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왜, 또 데모 났어요.'
  빈정거리듯 대꾸하자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 날아왔다.
  '대통령이 죽었단 말이야, 박정희가!'
  '예?'
  
  그가 뒤돌아보았을 때는 문이 꽝 닫힌 뒤였다. 그는 대통령이 죽은 까닭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장이 호전될 것이란 자신은 섰다. 그날부터 수사관들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조서를 받는 쪽의 집요성도 사라졌다.
  '그까짓 것, 적당히 써버려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29일 밤 그는 수사관으로부터 '내일 나갈 수 있을 것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잘 수 있었다. '잠만 재워주면 영원히 있으라 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잠이 그리웠던 그였다. 다음날 그는 2관구 사령부의 법무사에게 불려가 일장 훈계를 듣고 각서를 썼다. 민권투쟁을 계속하겠지만 방법을 부드럽게 하겠다는 요지로 썼다.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 그 법무사는 '후배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한 뒤 김변호사를 보냈다.
  
  부마사태의 도화선이었던 정광민군(부산대학생)은 27일 아침 동래경찰서 형사피의자 보호실 안에서 박대통령 피살 소식을 들었다. 당직 형사가 '역사가 바뀌었다'고 중얼거리면서 귀띔을 해주었다. 정군은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을 잠시 느꼈다.
  '우리는 더욱더 죽게 됐다.'
  박대통령의 죽음은 그에게 기쁨이나 보람보다는 불안을 안겨주었다. 김재규의 마음을 통해 박대통령의 운명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정군이 그때 퍼뜩 생각한 것은 '이젠 10년쯤은 썩게 됐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죽음 뒤에 유치장 텔레비전에 나타난 추모·칭송 일변도의 장면들은 이런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정광민군은 10월 31일에 구속됐다.
  
  부마사태를 배후 조종한 남민전 요원으로 몰리고 있던 황성권(외국어 대학생)은 수사관들의 태도가 27일에 갑자기 싹싹해진 것을 깨달았다. 28일엔 자기를 신문하기 위해 내려왔던 남민전 전담팀이 서울로 올라간 것을 알았다. 29일엔 부산 중부경찰서로 돌려보내졌다. 도중에 그는 시내버스에 붙여진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라니……. 난 그 사람의 몸이 건강한 줄 알았는데…….'
  그는 박대통령이 병으로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격류의 한가운데 선 최규하
  
  헌법의 규정에 따라 박대통령이 가졌던 막강한 권한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승계됐다. 승계된 것은 권한이었지 권력은 아니었다.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권한과 권력은 으레 별개의 개념이었다. 법이 보장하는 권한이 반드시 권력이란 물리력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권한에 권력이 따라오지만, 비민주국가에선 권력에 권한이 추종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법이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측근 참모였던 ㄱ씨는 1979년 11월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4·19뒤보다도 상황이 더욱 모호하다고 생각했읍니다. 4·19때는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지만 민주당이란 대체 세력이 있었고, 따라서 허정 과도내각의 임무는 민주당으로의 정권 중계라는 분명하고 제한된 성격을 갖게 됐읍니다. 10·26 뒤는 어정쩡한 상황이었읍니다.
  
  박대통령은 시해 사건으로 퇴장한 것이지 민중봉기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고, 공화당, 유정회, 행정부, 군 등 정권의 하부구조는 그대로였읍니다. 그러나 박대통령 그분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에 그분이 사라진 무대에서 유신체제라는 그분의 유산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무리로 보였읍니다.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같은 의견이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달랐읍니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이 이끄는 행정부는 공화당과 유정회를 여당으로만 설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민당과 손잡을 수도 없었읍니다. 최대행의 뚜렷한 권력 기반은 없었읍니다. 워낙 비정치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가장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전환기에 대통령직을 맡게 됐읍니다. 권한은 물리력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는데, 박대통령은 이게 가능했지만 최대행은 불가능했읍니다.
  
  힘의 질서가 붕괴된 혼돈기에서는 가장 확실한 것, 즉 가장 현실적인 힘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물리력은 권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저는 평화시에는 명재상이 될 수 있었을 최규하 대행이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고 생각했고, 전망은 밝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됐읍니다.'
  
  최규하 권한대행에겐 늘 따라 다니는 인물평이 있었다.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라야 그 위를 건너는 사람'이라는. 그는 꼼꼼하기로도 유명했다. 결재할 때 영어 스펠링이나 한글의 맞춤법까지 지적했고 외교관이면서도 골프를 일체지지 않았다. '골프 안 치고도 총리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할 때, 한번은 돈지갑을 안 가지고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가 동석한 다른 특보로부터 500원을 빌어 점심값을 냈다. 그 며칠 뒤에 500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넣어 그 특보에게 상환을 했던 사람이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인 최규하 권한대행은 결코 인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경기고 동창회에 초대돼도 '총리가 동문회에 참석하면 교육계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거절했다. 그는 깨끗한 처신으로써 주위의 존경을 받기도 한 반면 지나친 조심성으로 해서 업무 처리가 늦어진다는 불평을 사기도 했다.
  
  경성 제 1고보(지금의 경기고) 동창생인 최세황(전국방차관)은 '특징이 없었던 점이 그의 특징이었다'고 학창 시절의 최권한대행을 평할 정도였다. 일제가 만든 괴뢰 만주국의 관리로써 출세를 시작한 그는 4·19 직후를 제외하곤 자유당, 공화당 정권 아래에서 중단 없고 순탄한 관리생활을 해왔다. 최대행은 룰이 확립된 외교관 생활에 젖어 그의 행동은 극히 규격적이었다.
  
  신뢰성에 금간 두 지도자
  
  이러한 최권한대행은 10·26 사건 당일 밤, 통치권 공백의 그 8시간 동안 확고의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10·26 사건은 최규하 당시 총리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지도자로서의 신뢰성'에 손상을 주었다. 이 흠은 두 사람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남겼으며 그뒤의 정국 향방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최규하 총리는 10월 26일 밤 8시께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의 연락을 받고 청와대로 갔었다. 여기서 김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다는 것이 박대통령을 잘못 맞춰 돌아가시게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무위원들 가운데 김재규가 시해 범인이란 것을 맨 처음 알게 된 최총리는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요구한 대로 육본 벙커로 자리를 옮겼다.
  
  대통령의 서거로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의장소를 청와대가 아닌 김재규가 있는 육본으로 옮긴 것이다. 최총리는 육본이나 국방부에서도, 다른 국무위원들이 박대통령의 생사 여부를 몰라 김재규에게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이 점도 일부 국무위원들에게는 지나친 조심성으로 비쳤다.
  
  정승화 총장은 10·26 사건의 현장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뒤에 가서야 김재규와의 사전모의는 전혀 없었음이 드러났지만, 세간에 퍼지기 시작한 의구심은 정승화 총장에게 상당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고, 그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든 것 같다. 정승화 총장은 11월 1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파견 나온 정경식(鄭京植) 검사에게 참고인 진술을 했다. 정총장은 '궁정동에 가보니 나를 초대한 김재규는 나타나지 않고 김정섭 차장보가 접대를 해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전에도 김부장이 3군 총장을 초대해놓고, 자기는 각하와 식사 약속이 되어 끝나는 대로 빨리 오겠다며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을 대신 보내 어느 술집으로 옮겨 술을 접대케 하고는 뒤늦게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한 일도 있고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은 이날 또 보안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가서 김계원 실장을 연행해야겠다고 하니 '장관도 동의하여 연행을 지시했는데 조금 있다가 김실장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도망할 것 같지 않아서 연행하지 말라고 재차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정총장은 김재규의 인물평도 했다.
  '그는 관료적이고 고답적인 성격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2·12 사건 뒤 정총장의 진술 태도가 문제됐다. 그를 체포한 계엄사측에선 정총장이 진술 조서를 작성하는 데 비협조적이었다고 지적했었다. 일단 진술한 내용을 확인한다면서 조서를 보자고 해서 가져가면 그것을 두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조서를 찾으러 가니 조서 내용을 여러 군데 고쳐놓았더란 것이다. 조서를 받을 때도 화를 내면서 돌아앉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총장은 법정에서 '진술서를 제출하라고 했지만 내가 직접 조사를 받겠다고 요청, 3일간 조사를 받았으며, 돌아앉은 것은 진술내용이 다르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쨌든 10·26 사건은 전환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선 두 인물에게 하나의 상처를 주었다. 10·26 사건이나 12·12 사건과 같은 위기에서는 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이 평상시의 천배 만배나 되는 중요성을 갖게 되며 지도 역량이 엄정하게 테스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소신 있는 행동력과 결단력이 요구되는 10·26 이후의 정국에서 두 사람의 약점을 보이고 있었고, 그것을 주위에서 (아마도 본인들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뒤의 사태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터였다.
출처 : 책
[ 2003-07-15, 14: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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