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9) - 계엄령에 도전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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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계엄령에 도전하다
  
  영빈관의 '바보 같은 사나이'
  
  17일 밤 청와대 영빈관 17일 오전 구자춘(具滋春) 내무장관이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와 시청·시경을 둘러보았다. 오후에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100여명이 불량 배였다'면서 '지각없는 행위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 기자가 '이 회견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장관은 '괜찮다'고 했다.
  
  구장관의 경고를 보도하는 형식으로 부산사태는 알려졌다. 구장관의 기자 회견에는 최석원(崔錫元) 부산 시장, 구용현(具龍鉉) 부산시 교육감, 송제근(宋齊根) 부산 시경국장, 이수영(李洙榮) 전시경국장이 배석했다. 구장관은 이날 오후 4시 30분엔 양찬우(楊燦宇) 국회 내무위원장과 함께 부산대학교를 방문, 박기채(朴基采) 총장을 만난 뒤 오후 5시 30분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출발했다.
  
  17일 오후에 청와대에선 박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박찬현 장관은 본 안건 처리가 끝난 다음 부산사태를 본 대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그 사태에 대한 정보 보고를 받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이미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별다른 우려는 표현하지 않았다. 저녁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선 박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만찬이 된 유신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 장관들과 유정·공화당 의원 등 여당권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KBS 전속악단도 나와 있었다.
  
  박대통령은 접견이 끝난 뒤 만찬회장을 돌며 의원들과 어울려 각 지방의 농사 작황, 대전 체전, 의원 외교 등을 화제로 삼아 환담했다. '해외여행을 해보니 우리나라의 빈부의 격차는 극히 적은 편'이라는 어느 의원의 얘기를 들은 박대통령은 '세계은행 통계에도 우리나라는 빈부격차가 적은 나라로 기록돼 있더라'고 응답했다. 박대통령은 학계와 언론계 출신 초선 의원들에게 '밖에서 보던 국회와 직접 들어와서 본 국회는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등 거의 모든 의원들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정재호 대변인은 한산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최규하 총리를 만나자 '부산사태가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물었다. 최총리는 '잘 진압이 되어 평온을 찾았다'고 했다. 헤드 테이블엔 박대통령을 비롯, 김종필, 백두진, 정일권, 태완선, 이효상, 박준규 등이 자리잡았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식사 뒤의 여흥 시간엔 위키 리가 사회를 보았다. 가수 현인·백설희·김정구가 나와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옛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뇌리에서 전날 밤의 부산데모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박문교부장관은 부산 서구가 선거구인 공화당 의원 박찬종을 만나자 '부산에 가보니 선별수리론이란 게 기름을 부었어'라고 했다. 다른 의원들도 박장관과 박의원에게 다가와 부산사태에 대해 물었다. 이들의 걱정과는 별도로 스테이지는 흥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화당 최영철 의원이 사회를 맡더니 '공화·유정 노래시합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화당 대표선수는 최재구였다. 당시 국회에는 3대가수로 꼽히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 3인은 최재구(崔載九)·정재호(鄭在虎)·김수한(金守漢·신민당)이었다. 최의원은
  '나는 최소한 열 곡은 불러야 마이크를 넘기는 버릇이 있다'고 한마디를 하더니 옛 노래를 불러 젖히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18번인 [짝사랑]도 불렀다. 최의원의 독무대가 너무 길어지자 공화당 신형식 사무총장이 독특한 손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최의원은 '강요에 못 이겨 하단한다'면서 물러났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사람은 '유정회의 입' 정재호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운을 떼더니 시를 낭송하듯 읊어 나갔다.
  
  '조국 근대화를 향한 각하의 뜨거운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항상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눈물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이렇게 풍만한 인정과 뜨거운 집념의 영도자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우리 오늘 유신 7주년을 맞아 신명을 바쳐 일할 것을 함께 다짐합시다.'
  
  정의원은 이어서 [삼각지 로터리에……] [나그네 설움], 그리고 묘하게도 [바보 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내려갔다. 박대통령은 '정의원은 가수로 전업하지'라고 평했다. 사회자 최영철이 [엽전 열닷냥]을 부르고 노래 시합을 끝냈다.
  
  이때쯤 박대통령 주변에선 찬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만찬 도중 구자춘 내무장관은 몇 차례 박대통령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슨 보고인가를 했다. 대통령은 그때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라고 역정을 내고 안색이 바뀌더니 노래시합이 끝났을 땐 표정이 아주 굳어 있었다. 신형식은 청와대 비서진들이 빨리 끝내주었으면 하는 사인을 보내는 걸 받아 밤 9시쯤 만찬을 끝내도록 했다.
  
  이날부터 서울에서는 제 12차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3일간 열린 이 협의회에서는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이광요(李光耀) 싱가포르 수상도 한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박대통령으로선 부산사태가 이래저래 체면이 서지 않은 사건이 돼버렸다. 만찬이 끝나자 총리와 내무장관 등 각료들이 한구석에 모여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정재호는 부산사태가 진정되었으니 그 후속 조처를 상의하는 모양이라고 추측, 별 생각 없이 다른 의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나와 2차를 하러 갔다.
  
  버스 안에선 '오늘 작품상은 '정코'가 받아야한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정코'란 박대통령이 코 큰 정의원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이 만찬장에서 박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김종필은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합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씨는 1986년 말『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내가 영감(필자 주:박대통령)과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구자춘 내무장관이 들락거리면서 영감 귀에 대고 뭐라고 그러니까 영감 표정이 굳어집디다. 내가 그때 부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듣고 들어갔는데, 속으로 정말 큰일이다 싶어서 걱정이 되더군요. 말기가 왔구나 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그때 이미자하고 최희준이 와서 노래도 부르고, 또 의원들도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영 흥도 안 나고 밥도 안 먹혔습니다. 그냥 먹는 시늉만 하고 있는데 영감도 나만 쳐다보고 계셨던지 이러시데요.
  
  '왜 그렇게 식사를 안 해?'
  '먹고 있습니다'
  '에이, 안 먹는데. 청와대 밥이 맛이 없나?'
  내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하셨던 겁니다. 그날 밤 헤어지는데 영감이
  '어디 안 가지?' 그러세요.
  '예. 갈데 없습니다. 서울에 있겠습니다.'
  '내 곧 부를 테니까 연락하거든 들어와,' 그러구 헤어졌어요. 이게 영감을 마지막 뵌 겁니다.'
  
  비상계엄 선포 의결
  
  17일 밤 중앙청

  
  김성진(金聖鎭) 문공부장관은 영빈관 만찬회에서 중앙청으로 돌아왔다. 그는 최총리의 지시를 받아 총무처에 임시국무회의 소집을 위한 연락을 취할 것을 통보했다. 이때가 밤10시 30분. 비상연락을 받은 장관들은 중앙청 3층의 국무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이희일 농수산부장관은 잠바 차림에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11시 30분에 총리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구내무장관이 부산사태를 보고한 후,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선포를 제안했다. 김치열 장관이 강력하게 반론을 폈다.
  
  '부산 지방에서 데모가 난 것은 김영삼 의원 제명의 후휴증이며, 민주주의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시민 감정의 폭발이라고 봅니다. 이런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정치도의에 어긋난 것입니다. 정부가 마지막 비상수단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통치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관광·무역·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비상계엄령이 아니더라도 시장·도지사는 경찰력으로 수습을 못할 경우, 인근 군부대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선 올바른 정책 건의는 받아들일 분이니 최총리께서는 비상계엄령 선포의 유보를 진언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장관의 말에 동조한 것은 신현확 부총리뿐이었다. 토의 10여 분만에 최총리는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 통과시켰다. 회의가 끝난 뒤 몇몇 국무위원들이 김치열 장관에게 '잘했다'고 했으나 김장관은 '그런 말은 회의 때 해야지……'라면서 화를 냈다. 이날 총무처장관 심의환(沈宜煥)은 병석에 있어 차관 최택원(崔澤元)이 대신 참석했다. 그는 의결이 끝난 뒤 국무위원들의 서명을 받았다. 이용희(李用熙)통일원장관 '나는 서명 못하겠다'고 버티어 최차관이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강박심리가 부른 과잉 대응
  
  당시의 모든 국무회의가 그랬듯 이날의 청와대의 결정사항을 의결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비상계엄령 선포는 박대통령의 결단이었다. 차지철과 연관시키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중대결정을 주변 인물에 맡기는 것은 박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불과 두시간 만에 이런 결단을 내렸다. 영빈관 만찬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부산은 조용하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구내무장관이 사태 악화를 보고한 것이 대략 밤 8시쯤. 10시 30분에 국무회의 소집 통고가 나갔으니 밤 10시쯤엔 이미 대통령의 뜻은 정해졌던 것이다. 결단은 신속했고 과격했다.
  
  비상계엄령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계엄법)고 돼 있다. 부산의 사태는 크게 잡아도 위수령 대상밖에 되진 않는 것이었다. 관계 장관인 구자춘 내무, 노재현 국방, 박찬현 문교 장관도 개인적으로는 '비상 계엄을 펼 만한 사태는 아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그러나 박대통령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뜻이 그만큼 굳었거나 의사결정체계가 경직돼 있었기 때문이리라.
  
  박대통령의 속셈은 부산사태의 불티가 다른 지역으로 튀기 전에 신속히 진화한다는 것이었다. 병세의 초기에 고단위 투약을 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신속·과잉 대응의 기층심리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박대통령이 확고부동한 통치력을 행사, 국내 치안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쫓기고 몰리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사소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그의 완벽주의는 불안감의 표현이었고 부산사태엔 드디어 과민·과잉의 대응을 보인 것이었다. 데모가 김영삼의 본거지에서 일어났다는 점도 그의 결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겉으론 강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물리적으로는 막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취약한 유신정권의 모순이 부산사태를 통해 노출된 것이었다.
  
  2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이 사태 악화에 대비하여 17일 밤 부산시내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계엄령 선포 세 시간 전인 밤 8시 30분께였다. 밤8시 34분께 부산진서 상황실엔 '무장 군인들을 가득 태운 군 트럭들이 서면 지하도 근방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 경찰은 아무리 강경책을 쓴다 해도 위수령 정도가 선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간 2관구 소속 군 병력은 일단 부산역에 집결하여 상부로부터 명령을 기다렸다. 시민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낌새를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비상계엄령이 17일밤 11시를 기해 부산에 선포될 것이란 통보가 부산의 경찰·정보부·군 부대에 떨어진 것은 밤10시 30분께 였다.
  
  '밤 11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통행금지 시간이 한 시간 당겨져 밤11시부터 시행되니 선량한 시민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이런 안내방송을 경찰은 11시 이전에 하고 다녔다. 그러나 임시국무회의가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키로 의결한 것은 17일 밤 11시 30분께 였고 이 사실이 방송국 임시뉴스로 보도된 것도 그때였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다. 일부 경찰서에선
  
  밤 11시부터 통행금지 위반자 단속을 실시하여 멋도 모르는 시민들을 잡아가기도 했다. 밤11시 이후에도 데모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를 습격, 유리창을 깨고 오토바이를 불태웠다. 서부서 구덕파출소는 18일 0시에 습격을 받았다. 400명쯤 되는 군중은 유리창·자전거·오토바이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 두 갈래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마침 군 병력이 대신동으로 배치돼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데모 군중 2천 명쯤은 법원 앞과 옛 영남극장 앞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쳤다. 서부서가 전 병력을 동원, 이들을 쫓아버린 것은 18일 새벽 2시였다.
  
  17일 밤 10시 : 군수기지사령관
  
  숙소 육군 군수사령관 박찬긍(朴贊兢) 중장은 이날 한국을 방문한 대만의 3성장군을 해운대비치호텔에서 접대했다. 술도 좀 마셨다. 밤 9시 30분쯤 숙소에 돌아왔다. 그는 전날의 시위사태를 알고 있었으나 큰 위기감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박중장이 숙소에 돌아온 직후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국방부장관이 청와대에 들어와 부산사태에 대해 협의 중에 있으니 계엄령 선포에 대비해달라는 메시지였다. 박중장은 부산 시장, 2관구 사령관,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 등을 사령부로 불러 1차적인 지침을 시달했다.
  
  김재규의 운명적인 부산 출장
  
  10 월 18 일 새벽 : 부산

  
  1979년을 통해 심화된 권력구조의 내부 모순도 부산사태를 계기로 표면화됐다. 부산의 비상계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차지철이었다. 18일 새벽에 서울의 공수여단을 부산으로 공수하고 군수사령관 박찬긍 중장에게 계엄 선포 및 계엄사령관 임명을 맨 처음 통고한 것도 그였다.
  
  차의 이런 월권행위는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의 사전 상의 없이 이뤄졌다. 부산사태에 대해 차지철은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홀가분한 입장이 됐다면 김재규는 권한은 적고 책임은 큰 무거운 입장이 됐다. 실점을 계속해온 김재규는 부산사태를 사전에 탐지, 예방 못한 크나큰 책임으로 거의 결정타를 맞았다.
  
  정광민이나 이진걸 같은 아마추어의 단독 모의는 정보망에 잘 걸리지 않는 법인데, 당시엔 아직 부산사태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 걸로 중앙에 알려져 있을 때라 그는 변명할 자료조차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는 18일 새벽 2시쯤 부산의 계엄사령부(군수기지사령부)에 나타났다.
  
  야간 비행으로 급히 내려온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김재규는 박흥주(朴興柱) 대령(수행 비서관)등 참모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박찬긍 중장에게 박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지시의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 시키라'는 것이었다.
  
  박중장은 김재규가 3군단장일 때 그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해서 친면이 있었다. 김재규는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위원회의에 참석했다. 최석원 부산 시장을 비롯, 부산 지검장, 시경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 계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재규는 이렇게 말했다.
  
  '4·19는 우리군의 수치였다. 계엄군이 본분을 이탈, 시민과 합세한 것을 잘못된 일이었다. 이번에는 군의 본분에 충실하라.'
  
  김은 또 1964년의 6·3사태 때 6사단장으로서 서울지구 계엄 업무를 맡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김재규의 이 부산 출장은 그와 박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부산에서 그가 보고 듣고 판단하고, 또 이용하려고 한 것이 10·26의 중요한 동기가 됐다. 부산사태는 김재규의 마음을 통해 계산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커가고 있었다.
  
  18일 새벽 4시 서울 용산
  
  김재규가 밤중에 부산사태의 현장을 살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정일권(丁一權)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박대통령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눈꺼풀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어요. 그런 얼굴로 대통령은 '정형!'이라고 부르며 저를 껴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놈들, 이놈들' 하며 쓰려졌습니다. 이 순간 나는 깨어났는데, 집사람을 깨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꿈에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저를 안심을 시킵디다. 전에도 큰 사건 전에 들어맞는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어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포는 사령관의 육성 명령으로
  
  18일 오전 부산 계엄사령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군수사령관 박찬긍 중장(뒤에 총무처 장관)은 '발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김재규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연행자들을 서둘러 선별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만 전달했을 뿐 발포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계엄사령관이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밀려서 군이 나서게 된 것이니까 군까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박장군은 그러나 발포를 최악의 순간까지 억제하는 지침을 휘하 부대에 내렸다.
  
  첫째,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만 발포를 할 수 있다.
  둘째, 이 직접 명령은 문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면담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로 발포 지시를 받아야 할 땐 먼저 사령관의 육성을 확인해야 한다. 정부는 계엄 선포 첫날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했다. 18일 새벽에 서울로부터 1개 공수특전 여단이 날아왔고, 아침에는 포항으로부터 1개 해병연대가 부산으로 이동됐다. 부산의 현지 군 병력과 합쳐서 계엄군의 규모는 5,500명에 달했다.
  
  19일에 다시 2개 공수여단 병력 3,600명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약 9,100명으로 불어난 군 병력에다가 약 1,800명의 경찰 병력을 더해 총 1만 900명의 계엄군이 편성되었다. 이들 중 1,500명 가량은 휴교에 들어간 10개 대학에 배치되었다. 부산 시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 26개소에서 약 6천 명이 경비에 임했고, 나머지 3,400명은 기동 부대로서 시내를 순찰하는 등의 임무를 받았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의 구성은 계엄사령관 박찬긍 군수사령관, 참모장 이재희 소장, 합동수사단장 권정달 대령, 사령관 밑에 박희도·최세창·장기오 등 3명의 공수여단장과 박구일 해병 연대장 등 실병 지휘관들이 있었다. 계업법에 따라 계엄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박찬긍 중장, 부위원장은 최석원 부산 시장, 위원으로는 부산지방법원장 전병덕, 부산지검 검사장 정태근, 부산시 교육감 구용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유의열, 부산시경국장 송제근이었다. 나중에 박희도 준장 등 네 실병부대 지휘관과 군수사 참모장이 추가되었다.
  
  박장군은 계엄군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않도록 했다. 최루탄도 소·중대장에게만 주었다. 데모대는 개머리판으로 진압토록 했다. 1개 소대에 경찰관 1∼2명을 배치시켰다. 현지 사정에 밝은 경찰관이 데모 군중 속에서 불량배를 지적해주면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박장군은 또 이번 데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합동수사단에 명령했다.
  
  지게꾼에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여론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집계 분석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부산 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김영삼 의원 제명 뒤 야당 의원들이 낸 의원직 사퇴서에 대한 여당측의 선별수리론 이었다. 석유 파동에 의한 경기침체와 김영삼 제명이 2대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집단살상으로 윤색된 교통사고
  
  18일 오전 부산 양정동

  
  계엄군 소속의 탱크 한 대가 양정동 큰길에서 교통사고를 만났다. 택시 한 대가 탱크를 앞질러 가려다가 옆구리를 부딪쳤다. 운전사를 포함, 택시 승차자 3명이 다쳤다. 택시 운전기사의 과실이었다. 이 사고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계엄군이 탱크로 데모 군중을 깔아 죽였다'는 루머로 발전하게 된다. 본 기자는 이 희한한 교통사고의 현장을 취재했었다. 얼마 뒤 서울에 올라왔더니 이 사고가 루머로 변한 걸 알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부산사태에서 시위 군중이 죽었다는 잘못된 기사가 실제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이날 오후 서울에 있는 일본 공동통신의 조양욱(曺良旭) 기자는 부산사태에 대한 총재단 대책회의가 열린다는 신민 당사에 들렀다. 회의는 이미 끝났고 비서들만 있었다. 어느 비서가 '부산에서 여자 1명, 남자 2명이 죽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조기자는 사망자의 성별까지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라 믿고 신민당 소식통에 의한 것이라 밝히고 3명 사망설을 기사로 타전했다. 일본 방송에 이 내용이 보도되자 문공부에서 즉각 강력한 항의를 해왔다. 공동통신에선 신민당에 재확인했다. 신민당 측에선 그렇게 말한 사실이 없다고 잡아뗐다. 할 수 없이 공동통신은 기사 취소 통보를 해야 했다. 취소가 빨라 신문에는 이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18일 오전 10시 부산대학
  
  간밤에 부산에 온 김재규는 부산대학교에 나타났다. 본관 현관에서 박기채 총장이 그를 맞았다. 김재규는 의례적인 말투로 '학생들은 어떻습니까?'고 물었다. 박총장이 총장실로 안내하려니까 김부장은 '사실은 우리 부대가 여기 주둔하게 돼서 한번 찾아보고 싶어 왔다'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곤 군부대의 지휘부가 들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김부장은 침착했고 잔말이 통 없었다.
  
  휴강령이 마산사태 불러
  
  18일 오후 마산 경남대학

  
  점심 때 도서관 앞 잔디밭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경제과 3학년엔 부산에서 통학하던 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학생이 부산 데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생들은 귀를 쫑긋하여 듣고 있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등교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박정희 파쇼정권 타도'라고 쓰인 격문이 붙어 있었다.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느닷없이 교내 스피커에서
  '오늘은 휴강을 실시하니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랍니다'
  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데모도 안 했는데…….'
  학생들은 납득할 수 없는 휴강령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산데모가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된 것과 꼭 같이 마산 데모에 기름을 부은 것을 이 휴강 조처였다.
  
  귀가하는 학생들은 저절로 길목인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되면 용기도 전염된다. 누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됐다. 말하자면 인화물질에 기름은 끼얹어졌는데 성냥을 그어댈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난 상황이었다.
  
  부산이나 마산사태의 발단은 모두 우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과관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부산에서 정광민이 한 역할을 마산에서 한 것이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당시 22세)이었다. 두 정군은 울컥하는 충동적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댄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결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정인권은 며칠 전부터 일곱 명의 학생들과 데모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중간시험이 시작되는 10월 21일을 D데이로 잡고 있었다. 휴업이 길어지면 D데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당황한 정인권은 대책을 의논하려고 동료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부산 학생들과 같이 싸우자.'
  '3·15정신을 되살리자.'
  '부모들이 피땀 흘려 공부를 시킨 것을 이럴 때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아느냐.'
  정군의 일장 연설은 그 자리의 학생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뇌관을 터뜨렸고, 그 다음부터는 학생과 시민의 자체 추진력에 의해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저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 뒤로는 정군이 다시 지도자로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그 뒤의 경과는 부산과 거의 같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정문 앞을 경찰이 막자 '3·15 의거탑에서 만나자' '불종거리(의거탑에서 가까움)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일부는 담을 뛰어넘어, 일부는 얼마 뒤에 집으로 가는 체 정문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기다리는 시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4·19는 시작됐습니다'
  
  18일 저녁 청와대

  
  김재규는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막바로 청와대로 갔다. 김은 10·26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날의 일을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박대통령은 이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항소이유 보충서]의 일부 발췌).
  
  이 대목은 김재규가 자신의 범행을 설명하기 위해 두고두고 써먹은 논리의 핵이다. 김재규의 논리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박대통령과 차지철이 과연 그런 말을 했는가, 했다 하더라도 진실된 의도에서 한 말인가, 아니면 사석에서의 단순한 과격 발언인가. 부산과 같은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과연 옳았는가. 박대통령의 인격이 권력 유지를 위해 발포를 사양하지 않을 그런 수준인가. 이런 의문들은 이 글을 통해 앞으로 검증될 것이다.
  
  김재규는 1979년초에 일어난 이란 혁명에 대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다. 일반 시민의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 그는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부산에 연고가 있는 간부들을 현지로 내려보내 사태의 원인 분석을 하도록 지시했다.
  
  계엄령에 도전하다
  
  18일 밤 8∼9시 남포동

  
  부산 데모의 한 가지 특징은 의외성이었다. 학생이나 정부가 예상하지도 않은 뜻밖의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나가면서 역사적 대사건으로 이어졌다. 우연적인 것 같은 사건들은 한 줄로 꿰어져 뚜렷한 방향성을 지닌 큰 흐름을 갖게 되었다. 참여자들은 '그 순간에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얘기했다. 역사에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무의식을 통해 역사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또 놀라게 한 것은 18일의 밤 데모였다.
  
  정예 공수부대 군인들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M16총을 겨눈 채 시내 요소요소를 경비하고 있는 속에서 또다시 데모가 터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궂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두 시간이나 앞당겨진 통금시간에 맞추어 귀가하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버스 및 택시 정류장이 몰려 있는 동명극장 부근 인도엔 수천명의 시민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7시 55분께 누군가가 '야!' 하는 고함을 지르며 찻길로 나섰다. 순식간에 300명쯤 되는 민중이 그를 따라나섰다.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은 '왓샤!' '왓샤!' 남포파출소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파출소에다가 돌세례를 퍼부어 유리창을 박살냈다. 그들은 시청 쪽으로 치달렸다. 시청 주변엔 200명쯤의 공수부대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파출소가 부서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데모대와 공수부대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공수부대 군인들은 데모대를 향해 차렷 자세로 돌격했다. 사과탄이 데모대를 겨냥하여 날아갔다. 데모대는 흩어져 광복동, 남포동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부산지사 양원 기자는 18일 밤 8시께 계엄령하의 시청 앞에서 데모가 또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엄령이 내렸는데 데모를 해?'
  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노외찬 기자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광복동으로 달렸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시간이나 앞당겨진 통금시간에 맞추려고 시민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시내버스와 영업용택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 타기를 단념한 시민들은 걷기 시작했다. 인도는 행인들로써 빽빽이 메워졌다. 인파는 묵묵히 흘러갔다.
  
  취재차가 부영극장 앞에 이르렀을 때 그곳은 한바탕 데모바람이 지나간 뒤였다. 눈을 찌르는 개스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틀 동안 시위대의 함성 속에 파묻혔던 부영극장 앞 광장 주위는 스산하기만 했다. 회사로 돌아가려고 취재차를 남포동 동명극장 쪽으로 몰았다. 극장 앞 지하도 입구에서 앞서가던 택시가 손님을 태우려고 멈췄다. 취재차도 멈췄다. 이때 길 건너편 남포동 입구 골목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300명쯤의 시위대가 우루루 몰려나왔다. 경찰과 군인들에게 쫓기는 데모대가 분명했다. 이들은 찻길을 가로질러 취재차까지 다가왔다. 지휘자인 것 같은 한 청년이 맨 앞에서 언론기관의 취재차임을 알아냈다.
  
  '어! 합동통신 차다. 조져!'
  청년의 손짓에 따라 데모대는 이 포니차를 덮쳤다.
  '우당탕탕!'
  돌멩이와 유리병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 든 군중은 이 차에 몽둥이질을 했다. 양원은 '이제 죽는구나'고 생각했다. 책가방을 낀 한 고등학생이 창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 이새끼들아! 보도 똑똑히 해.'
  '알았다.' 노기자가 말했다. 그 학생은 더 크게 소리질렀다.
  '똑똑히 하란 말이다, 새끼들아!'
  '알았습니다.' 겁에 질린 양기자의 입에선 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한 청년이 운전석 창문으로 몽둥이를 쑤셔 박으며 운전사를 찔러댔다. 운전사는 문을 열고 혼자 달아났다.
  
  다른 청년이 창을 통해 운전석 뒷자리에 앉은 양원을 겨냥하여 우산대를 찔렀다. 배에 박히는 순간 '억!' 하면서 몸무게 80킬로그램의 그는 우산대를 잡아당겼다. 우산대를 빼앗은 순간 이번엔 노외찬에게 위협이 다가왔다. 한 청년이 창문을 열려고 했다. 노기자는 급히 자물대를 눌렀다. 그 청년은 이번엔 앞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물대를 뽑아 올렸다. 노기자는 옆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후닥닥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안에 홀로 남은 양원은 노기자가 데모대 속에서 맞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기자는 이틀 전에 바로 이 장소에서 있었던 작전차 방화 장면을 퍼뜩 머리 속에 떠올려보았다. 누가 기름통에 성냥불을 그어 대지 않나 뒤돌아보는데 옆창문이 열리더니 수많은 손들이 양원을 붙잡아 끌어내는 게 아닌가. '퍽!' 발길질이 그의 입에 와 닿았다. 땅바닥에 쓰러진 그는 꽝, 꽝, 사과탄이 바로 옆에서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군중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기자는 그대로 남포파출소를 향해 뛰었다. 이번 데모에서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았던 이 파출소엔 한 50면의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100미터쯤 앞에서 취재차가 데모대에게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것을 보고도 손쓸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다만 사과탄을 데모대에게 던져 위협을 주었을 뿐이었다. 양기자는 파출소를 향해 뛰면서 뒤돌아보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데모대는 차를 모로 세우고 있었다. 기름이 흐를 것이다. 누가 불을 지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데모대가 시청 쪽에서 행진해 들어오는 공수부대 병력을 발견, 쫙 흩어져버렸다. 공수부대는 찻길로 나와 있던 데모 구경꾼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한 청년이 쓰러지자 그의 연인인 것 같은 아가씨가 '이 사람은 학생이 아니 예요'라고 소리치며 짝을 부둥켜안았다. 파출소로 뛰어든 양원은 '뭘 하러 이곳에 왔느냐'는 경찰관들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먼저 달아났던 노기자는 부산상대 학생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이 학생은 노기자에게 뭇매를 때리려는 군중을 막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그 학생은 '우리가 노린 것은 이런 폭력이 아닌데……' 라고 사과하듯 말했다. 취재차는 100만원을 들여 고쳐야 할만큼 크게 부서졌다. 더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은 양기자의 마음이었다.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자기의 배를 우산대로 찌른 그 청년을 찾으려고 네 경찰서의 보호실을 뒤지고 다녔다.
  
  경찰관들이 데모대를 두들겨 패는 일이나, 형사들이 붙들어온 데모 청년들을 매질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양원 기자를 두들겨 팬 데모대는 8시 40분까지 두 차례 더 시청에의 접근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흩어진 데모대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 대열 속으로 들어가 중부서 앞을 거쳐 영주동 육교 앞까지 와서 인파 속에서 소멸돼버렸다. 경찰은 이들이 소멸될 때까지 뒤따라가면서 일일이 그 동태를 보고했다. 상황이 끝난 것은 밤 9시 10분.
출처 : 책
[ 2003-07-15, 14: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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