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군 제일의 작전통' 강문봉 前 장군의 지도자론
"최고의 참모총장은 정일권, 야전지휘관으로는 백선엽 장군이 최고"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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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네 참모총장은 文官 우위의 철학 신봉한 軍 지휘자"
 *"영천을 지킨 유재흥 장군, 포항을 확보한 김백일 장군과 함께 백 장군은 나라를 구한 분"
 *'임표의 중공군은 만주군 출신을 포용, 일제시대의 일본군같이 잘싸웠다.'
 *'미군 지휘관 중 가장 뛰어났던 분은 릿지웨이, 맥아더는 때를 잘못 타고난 천재'
 *"이승만 대통령은 기틀이 잡힌 국가의 대통령으로 더 적격, 박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었으면 나라가 더 발전했을 것"
 *"육군사관학교의 교육 목표는 군사 지식보다는 사생관(死生觀)의 확립에 두어야"
 
 
 
<1983년 9월 마당>
  
  올해 나이 60인 강문봉씨는 열 살쯤은 젊어 보였다. 적당히 살이 찐 다부진 몸매를 가진 그는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상체를 세우고 사인펜으로 탁자 위를 딱딱 두드리면서 깐깐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군복을 입혀 놓으면 그대로 야전 사령관으로 변할 것 같은 당찬 자세였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로는 할아버지를 찾는 손자의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처럼 6·25의 전국(戰局)을 전체적으로 세세히 파악했고, 두루 경험했고, 그래서 자기 나름의 전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군 제일의 작전통이었던 그가 사회에 나와서는 행정학을 전공하여 자신의 옛 상관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연구 논문을 쓴 데는 무엇인가 남기고, 또 말하고 싶은 뜻이 숨어 있는 듯했다.
  
  -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네 참모총장은 모두 민주국가의 군 통수 원칙인 문관 우위주의에 철저했던 사람으로 보십니까?
  
  "아무리 군인이지만 직위에 따라서 정치적 배려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군 사령관까지는 그 업무 수행에 있어서 정치적 배려를 해서는 안되겠지만 참모총장은 그 위로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문관이고 그 아래로는 모두 제복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치와 군대의 접점에 선 매개자로서 항상 정치적 고려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모총장은 '군인이 직접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대원칙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국이 건국 이래 지켜온 원칙이며 미군의 제도를 본뜬 한국에서도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문관이 꼭 군인보다 전지 전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치에 군인이 나서는 것보다는 문관이 맡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군인도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복을 벗은 다음에야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5·16 뒤에 제가 정치를 할 군인과 군대로 돌아갈 군인을 빨리 구분하라고 주장한 것도 정치로부터 군을, 또 군으로부터 군을, 또 군으로부터 정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네 분 참모총장 모두가 문관우위의 철학을 신봉한 민주국가의 군 지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장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채병덕 장군이 철저한 문관우위주의자였습니다. 저의 논문에서는 그의 리더십 형태가 독재형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런 그도 대통령이나 국방장관과 같은 문관들에 대한 충성심은 추호도 흩트린 적이 없었습니다. 문관우위의 원칙과 더불어 군인에게 절대적인 의무로 부과되는 것은 '명령복종'입니다."
  
  -그런데 강 선생님께서는 제2사단장으로 있을 때 삼각고지를 확보하라는 작전명령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전시의 명령 불복종은 물론 사형감입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알았고 군법회의를 각오하고 항명을 했습니다. 당시 삼각고지 옆에 있는 저격능선에서는 45일 동안 주인이 매일 뒤바뀌는 격전이 계속된 끝에 45일째부터 우리가 드디어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2사단(사단장 정일권)은 병력 1만 명 가운데서 7000 명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보병이었죠. 당시 1개 사단의 보병은 약 8000이었으니까 결국은 행정병 정도만 무사했다는 얘기지요.
  삼각고지 전투는 미 제7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40여 회의 뺏고 뺏기는 싸움을 계속했지만 고지 확보엔 실패했어요. 그러자 미군 사령부(당시 작전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에선 휴식이 필요하다며 미7사단을 후방으로 빼고 한국군 2사단으로 하여금 삼각고지를 대신 점령하도록 명령했지요. 그 때 저는 미 제9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된 정일권 장군의 후임으로 2사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단장들과 같았다면 시키는 대로 공격을 계속했을 겁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겠지만 물품처럼 끊임없이 보충되는 것이 병력이고 그러다가 소강 상태가 되면 나는 훈장을 하나 받게 될 거고….
  기어 오르는 데만도 등반기술이 필요한 그 고지를 우리 사단은 3일간 공격했으나 큰 손해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단으로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지요. 미군 대신에 우리 장병들을 이렇게 희생시킬 순 없다. 더구나 그 고지가 전국(戰局)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군법회의에 넘겨지겠지만 나 한 몸의 희생으로 수백,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처벌을 기다렸습니다.
  당시 일부 일선 지휘관에게는 과도한 공명심이 있었어요. 무슨 고지를 점령하고 몇 미터를 전진했는가, 그래서 훈장을 탈 것인가 말 것인가에만 신경을 쓰고 그러는 사이 별 중요성도 없는 전투에서 수많은 장병이 죽고… 저는 언젠가 한국 전쟁을 다른 각도에서 쓸 생각입니다. 몇몇 장군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여태껏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평가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강 선생님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군들은 저의 항명을 묵인해 주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런 점에선 이성적이라 할까요. 자신들의 명령이 부당했음을 깨달은 뒤에는 말입니다."
  
  -삼각고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중공군이 가졌지요."
  
  -군에서도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죠?
  
  "그건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무엇이 부당한 명령인가, 그 판정 기준이 애매한 것 아닙니까? 소대장이 분대장에게 어디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는데 분대장이 스스로 판단하여 그 지시가 잘못됐다고 이를 거부한다면 그건 명령 불복종죄지요. 그러나 사단 이상의 전략 단위에서는 명령에 대한 거부가 아닌 수정 건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휘관도 부하로부터의 건의가 타당성이 있을 때는 명령을 수정하는 포용력을 발휘하여 아래에서 명령 불복종이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 신경을 써야겠지요. 그러나 '재판 없이 양민을 사살하라'는 따위의 명령은 누가 보아도 부당한 명령이며 불법 행위입니다. 위법 행위지요. 그러니 명령 불복종이니 뭐니 할 필요도 없지요. 명령대로 한다고 양민을 사살하면 하수인은 상관과 함께 살인죄로 처벌받습니다.
  한국 전쟁 초기 국군이 계속 후퇴를 겨듭하자 우리는 분대장 이상에게 즉결 처분권을 주어 이탈자·도망자를 막도록 했습니다. 국가운명이 존망에 달린 당시엔 별 말이 없었으나 전쟁 뒤 송요찬 장군같은 사람이 즉결 처분된 군인의 가족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법에 의해 징집된 장병을 법에 의하지 않고 즉결 처분하라는 당시 참모총장의 명령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겠죠. 저는 6·25 때 딱 한 번 아군이 궤란 상태에 빠지는 걸 보았습니다. 서울이 함락된 뒤 도망쳐 나온 병정들이 행주 나루터를 통해 김포로 건너와 뿔뿔이 흩어지는데 공포심에 쫓겨 미친 듯이 달아나더군요. 장교가 막으면 쏴 죽이고 달아나는 판이었습니다.
  조직이 완전 붕괴된 광경이었습니다. 즉결 처분권이 주어진 것이 이런 상황에서였지요. 미군들은 보니까 전장에서 도망쳐 나온 병사들은 모두 한 곳에 모아 놓고 푹 쉬게 하고 대접도 잘해주더군요. 며칠이 지난 뒤 그들에게 일선복귀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본 뒤에 계속 전투를 기피하면 아예 후방으로 보내버립디다. 싸우기 싫어하는 놈 억지로 싸우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거지요."
  
  -이종찬 참모총장은 1952년 헌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파동 때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 동원명령을 거절,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 경우도 부당한 명령에 대한 당연한 거부에 해당합니까?
  
  "그 사건이야말로 두고두고 시비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상 계엄하에서 국가 원수의 병력동원 명령을 육군 참모총장이 스스로 판단하여 거부한 것은, 비록 야당 정치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그 자체가 너무 정치적인 월권행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전쟁에도 바쁘니 정치파동에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경찰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명령의 수정을 건의하는 것은 참모총장의 의무이지만 국가 주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그 직권 아래서 내린 합법적 명령을 부하가 거부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종찬 장군이 그 명령 거부로 해서 존경을 받게 된 일면도 있지만 나라가 올바로 되려면 그런 일이 칭송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논문을 읽어 보니까 채병덕 장군을 변호하려는 생각들이 군데군데서 엿보이는 것 같더군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는 동정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 상황(6·25남침)에서는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이 나섰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지만 채 장군이 당시로선 최선의 인물이었고(참모총장으로서) 그도 최선을 다했었다는 걸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이하 군 수뇌부에선 적의 남침 우려가 있다는 위기감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6·25가 터지기 두 달 전 이런 위기에 대비할 가장 적합한 인물로 채 장군을 지목,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였습니다. 채 장군에게는 이것이 두 번째 참모총장 임명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지휘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채 장군은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고급 지휘관들에 대한 인사이동을 두 번에 걸쳐 실시하여 일선 사단장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저도 작전국장에서 물러나 미국 육군대학으로 갈 예정이었지요. 전쟁이 터지자 채 총장의 이 인사 이동으로 지휘체제가 불안정해 있었다고 비난들 했지만 채 장군이 김일성이와 짜고 했겠습니까? 인사를 마무리지은 그는 장비 개선에 착수, 고장난 차량을 조사했는데 당시 60퍼센트의 차량이 고장난 것으로 밝혀졌지요.
  6·25 전날 밤 채 총장이 육군회관 낙성식에서 파티를 연 것도 그를 비난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결과론일 뿐입니다. 한강 다리를 너무 빨리 폭파한 일에 있어서도 채 장군에게만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 같습니다. 한강 다리의 폭파에는 정치적, 군사적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육군 참모총장의 책임 한계는 군사적 판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문관들은 정치적 판단을 포기한 상태였고 채 장군이 폭파 시기의 최종 결정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사적 입장에서는 적의 전진을 저지한다는 것이 한강다리 폭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됩니다. 적의 전차가 창경원까지 왔을 때 채 총장이 공병감에게 즉각 폭파를 명령했습니다. 최창식 공병감은 이 명령을 충실히 실천했을 뿐이라고 변소했습니다만 어디 명령이 다 같습니까? 분대장이 병사에게 하는 명령, '사격!' '돌격!'은 즉각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장이 '돌격!' 한다고 전체 사병이 돌격합니까? 사단장이 '돌격!' 해도 그 명령은 문서로 연대에 전달되고 연대는 그 명령에 따른 세부지침을 마련한 뒤 다시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는 다시 이 지침의 실천계획을 만들어 비로소 돌격이 되는 것 아닙니까?
  참모총장의 '즉각 폭파!' 명령을 받은 공병감이 다리 위로 피난만과 병력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즉각 폭파를 해버렸다면 이건 공병감이 그 명령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최 공병감이 그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했다가 사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공병감의 잘못이 없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통신부대가 통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다리 위로 적의 탱크가 진입했을 때 폭파를 했어야 옳았습니다. 곧, 폭파 시기의 판단은 공병감이 했어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다리가 폭파될 때 우리 1사단은 아직도 강북에서 작전중이었고 중화기는 하나도 도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강 선생님의 박사 논문에서는 정일권 장군이 참모총장으로서는 1위의 평점을 받았는 데 대해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백선엽 장군이 1위로 뽑혔습니다. 백 장군의 어떤 능력이나 실적 때문입니까?
  
  "백 장군의 가장 큰 공적은 대구 북방 다부동의 사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8월 우리가 부산 교두보로 몰렸던 그 암울한 시기에 백 장군은 다부동을 지킴으로써 풍전 등화의 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다부동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이 부산 교두보의 돌출부이며, 이 요충이 무너지면 대구는 없어지고 따라서 부산까지도 내주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부동은 부산 교두보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죠. 백 장군의 제1사단은 이곳을 방어전으로 막아냈습니다. 물론 백 장군 휘하 연대장들(최영희, 김점곤, 김동빈 등)이 우수했고 미군의 지원, 후방의 지원이 승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백 장군의 집념과 투지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방어전은 해본 사람이 아니면 그 고충을 모릅니다. 공격을 할 때는 움직이니까 불안감이 덜한데 진지를 구축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방어시의 공포감은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어디서 도깨비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고, 사방에서 죄어 오는 불안감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만 생기고…. 이런 방어전을 백 장군은 해냈습니다. 밤만 되면 적은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한 공격을 되풀이 되풀이해 왔고 육탄전이 곳곳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나라가 사라졌다가 되살아나곤 했던 겁니다. 부산 교두보의 다른 두 요충지, 즉 영천을 지킨 유재흥 장군, 포항을 확보한 김백일 장군과 함께 백 장군은 나라를 구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김백일 장군은 오래 살었더라면 정말 수많은 공적을 남겼을 호랑이 같은 야전 지휘관이었죠.
  '타이거 송'으로 불렸던 송요찬 같은 사람도 김 장군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어요. 김 장군은 아직 완전히 평정이 안된 서울―원산 가도를 지프차로 주파할 만큼 일신상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정도였는데 끝내 비행기 사고로 죽었죠. 그밖에 한신 장군은 아마도 실전 경험이 가장 많은, 그래서 실전 지휘에 대한 책을 써야 할 분이고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정진 장군은 대대장 시절, 함락이 안되는 적의 진지가 있으면 그를 초빙하여 공격하게 할 만큼 무서운 선봉장이었습니다."
  
  -다부동 전투 때 강 선생님은 대령으로 육군본부 작전국장을 하셨죠? 작전국장은 작전 지휘의 실무 책임자 아닙니까?
  
  "정일권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저는 다시 작전국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작전국장 생활이 어떠했느냐 하면 24시간 계속 근무, 진짜 불면 불휴의 나날이었습니다. 하루에 30분밖에 못 잘 때도 있었고 닷새 동안 눈 한 번 붙이지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더군요. 대강 오후 대여섯 시부터 밤 11시까지 각 일선 부대에서 작전국으로 전황 보고를 합니다. 이를 종합하여 다음날 작전 계획을 작성, 늦어도 다음날 새벽 2시까지는 일선 사단에 작전 명령을 하달합니다.
  보통 공격 명령이 사단에서 하급 부대에 떨어지는 것이 새벽 5시쯤이니까요. 그런 다음 오전에는 참모총장과 번갈아 가며 일선을 돌면서 작전 명령의 실행을 감독하고 본부에 돌아오면 오후 2∼3시가 되죠. 그 밖에도 수시로 일선 부대에서 올라오는 전황 보고에 대해 총장을 대리하여 결심(決審)하고 조치를 지시하고…."
  
  -한국전쟁 때 우리 쪽의 군 고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는데 이런 젊은 나이가 리더십 발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저는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합니다. 군과 같은 조직 안에서는 오랜 경험이 곧 유능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30년이 걸려 소대장에서 사단장까지 이른 사람보다 5년 만에 이 과정을 밟아버린 삶이 더 머리가 잘 돌아갈 것입니다. 나폴레용이 프랑스의 군 사령관이 된 나이도 20대 후반, 알렉산더 대왕도 비슷한 나이에 군사적 천재가 되었습니다. 전쟁이란 것은 정상이 아닌 비상(非常)의 상황이기 때문에 신진 기예의 젊은이들이 임기응변, 과감, 박력으로 밀고 나가는 데 더 유리할 거에요. 특히 지휘관의 체력은 전쟁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인데 이 점에서 한국 전쟁 때의 젊은 장군들은 좋았죠."
  
  -한국전쟁 초기 김석원 장군이 50대의 나이로 수도 사단장이 되었는데 이 분의 나이와 경력은 군 리더십 발휘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까?
  
  "김 장군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북지(北支)에서 일본 군대의 대대장까지 지냈습니다. 그런 그도 한국전쟁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김 장군이 연병장에서 칼을 빼어들고 '사단, 돌격!'이라고 호령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휘관이 구두 호령할 수 있는 최대 단위는 대대입니다. '대대, 돌격!'은 되지만 '연대, 돌격!'이나 '사단, 돌격!'이란 호령은 현대전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리더십이란 것은 발전해 가는 조직이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끔 갈고 닦여져야지 그냥 그대로 있으면 못 쓰게 된다는 교훈이라 할까요. 반면 비슷한 나이인데도 김홍일 장군은 훌륭한 지휘를 하였고 그 분의 전술이론 강의는 우리도 경청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현대적 관리·경영 기능이 보급된 데에는 군의 공헌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강 선생님께서는 그러나 논문에서, 이제는 군이 사회로부터 리더십 이론을 배워 국가 발전에 적합한 방향으로 조직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뜻의 말씀을 하셨는데….
  
  "미국의 군사관계 최고 회의에는 군인은 합동 참모회의 의장 한 사람밖에 참석시키지 않으며 그나마도 발언권과 투표권도 없다고 합니다. 전쟁에 관한 주요 정책을 문관들이 결정한다는 얘기지요. 앞으로의 전쟁은 철저한 총력전이 될 것이며 그런 전쟁에는 군인을 포함한 온 국민들의 두뇌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가릴 것 없이 꼭 같습니다. 안 죽겠다, 돈이나 인원을 가장 적게들여 이기겠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경영 잘하는 사람들이 더 적당할지 모르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리더십 이론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습니다. 새로운 리더십 이론의요체는 보통 사람도 훈련을 통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군의 막료제는 지휘관의 독선이나 오류를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보통 사람이라도 충분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도에서는 천재형보다는 참모들의 중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개방적인 리더, 곧 민주적인 군 지도자가 더 요구되는 것입니다. 통솔을 받는 인간을 인간답게 다루는 기술에 대한 연구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군인을 물건 다루듯 할 수는 없게 되었고 부하를 진심으로 심복케 하는 기술과 인격을 지도자는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한때는 군의 경영 능력이 사회나 관료조직보다도 월등하여 군의 현대적 관리 기법이 행정이나 회사조직으로 전파돼 갔었습니다만 이제는 형세가 역전되어 '사회의 새로운 경영 기법이 군으로 들어갈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강 선생님은 작전국장 시절 공산군의 맞상대를 의식하신 적이 있습니까?
  
  "적의 작전국장이 누구였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적의 '작전 명령1호'를 입수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읽어보니 소련어로 된 원문을 서툴게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정확해야 할 작전 명령서에 문장이 안 되는 곳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침 기본 전략을 소련군이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마도 그들은 작전 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했지 않나 생각합니다. 북괴군이 자랑했던 무정, 최현 장군들도 그저 밀고나가는 용(勇)만 앞섰지 지(智)를 겸비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사령관은 처음이 임표, 이어서 팽덕회로서 두 사람 모두 중공 혁명전쟁의 노련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들을 군 지휘관으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팽덕회는 잘 모르겠고 임표 군대와 싸워본 경험에서 이야기한다면 그는 대단한 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대가 한 고지를 두고 중공군과 싸웠는데 나흘 동안 계속하여 엄청난 포격과 폭격으로 목표 고지를 두들기고 난 다음 1개 대대를 보내 걸어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9부 능선에 도착했을 때 전멸된 줄 알았던 적들이 수류탄을 던지며 역습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물러났다가 재차 공격했죠.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9부 능선까지는 오르는데 마지막 결전 단계에서 좌절하고 말아요. 이렇게 되니 부하들이 지휘자를 안 따라 주어요. 8부 능선까지는 따라 올라가는데 최후 돌격에서는 엉덩이를 빼는 거에요. 그러니 소대장 중대장만 죽어가고 그래서 공격을 중지시켰습니다만, 그때 생각했어요. 저 중공군은 일제시대의 일본군같이 싸운다고요.
  우리가 일제시대에 알았던 중국 군대는 달아나기만 하는 군대였는데 대해 보니 완전히 딴판이었어요. 그 비결의 하나는 임표가 만주군을 포용했기 때문이었죠. 일제가 만주에 세운 괴뢰 국가가 만주국이고 그 군대가 만주군인데 장교들은 거의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조직도 일본군을 본떠서 만들었어요. 일본 항복 뒤 임표는 이 만주군을 고스란히 인수하여 장개석 군과의 싸움에서도 유효 적절하게 써 먹었어요.
  장개석 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공산군이 만주에서 승리하여 역전의 계기를 잡은 데도 만주군 출신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만주군을 잘 써먹은 모택동은 한국 전쟁에 만주군 출신 장교들을 투입, 많이 죽게 하여 도태시켜버렸죠."
  
  -강 선생님께서는 육군본부 작전국장, 사단장, 군단장으로 6·25를 겪으면서 많은 미국 지휘관들을 경험하셨는데 군 지도자로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군사 지도자로서 가장 뛰어났던 분은 릿지웨이 장군이었습니다. 인품에 있어서는 10군단장을 지냈고 나중에 태평양 지구 사령관을 역임했던 화이트 장군이었습니다. 저는 10군단 부(副)군단장으로 있었는데 그 분과 한 막사에서 생활하여 형님처럼 느끼고 있었습니다.
  워커 장군은 평범한 군인이었고 뒤에 합참 의장, 주 월남 대사를 지냈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정말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테일러 장군은 미국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에 얼마나 손해가 나든지 별 관심이 없었어요. 역시 군인은 저렇게 조국에 충성해야 하는구나 하고 감명한 바 컸습니다. 렘니처 장군은 쾌활, 대담한 장군이었으며 휴전 협정에 서명했던 클라크 장군은 보기보다는 생각이 깊고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클라크 장군이 이 대통령의 자유 포로 석방사건을 놓고 별로 좋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분의 회고록을 읽어보니 막후에서 아주 이성적인, 사려 깊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벤플리트 장군은 한국이나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서는 좋은 장군이었는지는 모르나 머리가 썩 좋은 군인은 아니었지요. 맥아더 장군은 때를 잘못 타고난 천재였습니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트루먼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트루먼 회고록을 읽어보면 맥아더의 오만한 자세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해요."
  
  -선생님의 논문에서 설문 응답자들의 79개 문항 평점을 종합하면 압도적으로 정일권 장군이 네 전시 총장 중 1등으로 나타났는데, 직접 네 전시 총장의 순위를 매기라는 마지막 문항의 응답 집계에서는 이종찬 장군이 으뜸으로 나왔습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미시적으로 볼 때는 정일권, 거시적으로 볼 때는 이종찬 장군이 1등이라는 거죠."
  
  -강 선생님의 개인적 견해는 어떻습니까?
  
  "그 논문에는 저의 개인 의견을 일체 넣지 않았습니다만 누구든지 저를 보고 정 장군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지요. 저는 이종찬 장군에 대해선 다른 분들처럼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정일권 장군은 1951년 7월 참모총장직을 그만두고 미 육군 지휘참모 대학에 입교했다가 1년 뒤 귀국했는데 이때 2사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참모총장 역임자가 일선 사단장으로 발령받은 데 대해 불평이 대단했을 텐데 그는 잘 견딘 편이었죠?
  
  "그게 그 분의 장점이죠. 그러나 거꾸로 이야기하면 바로 그 점으로 해서 배짱이 없다, 속이 없다, 팔방 미인이다 하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요."
  
  -정일권 장군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어떠했습니까?
  
  "한국전쟁중 휴전 직전에 우리 군단이 무너진 적이 있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유재흥 장군 휘하의 제3군단이 와해되다시피 했는데 끝내 반격을 제대로 못했어요. 중부 전선에서는 정 장군 휘하의 2군단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유재흥 군단과는 달리 정 장군은 거의 파멸되사시피 했다가도 부대를 재정비, 반격하여 오히려 38선 북쪽으로까지 적을 쳐 올렸습니다. 정 장군은 후퇴를 하면서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례는 퍽 대조적으로 전사의 연구 자료가 될 만한데 이걸 보아도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정 장군의 능력은 높게 평가될 수 있겠죠."
  
  -강 선생님은 군복을 벗은 뒤에는 국회의원으로서 정치도 경험하셨는데 정치 지도자와 군 지도자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양쪽 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선 같지요. 그 봉사의 방법에 있어서 군인은 '생명을 바쳐서라도'의 자세를 요구받습니다. 후진국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정치 지도자는 대체로 생명의 위험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게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고 박정희 대통령은 실전 경험은 별로 없던 분이죠?
  
  "휴전 뒤 사단장을 했을 겁니다, 아마."
  
  -그 분을 군 지휘자로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제가 3군단장일 때 저 아래에서 군단 포병사령관을 그 분이 맡았어요. 그 때부터 아주 그릇이 큰 지휘관이란 인상이었습니다."
  
  -나이는 박 대통령이 강 선생님보다 많았죠?
  
  "일본 육사도 그 분이 선배이고 나이는 일곱, 여덟 살쯤 많겠죠."
  
  -그 때문에 좀 거북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것 없었어요. 저는 아버지뻘 되는 분들, 예를 들면 유재홍 장군의 부친 같은 분들도 부하로 데리고 있었습니다만 공과 사를 구분해서 일을 처리하니 문제가 없었어요."
  
  -정치 지도자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건설중인 국가의 대통령으로서보다는 기틀이 잡힌 완성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더 적격이었을 것 같고 오히려 박 대통령이 창설중인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면 나라가 더 발전했을 것 같아요.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해서 많은 비난도 받지만 그 분이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도입한 점에 대해선, 그것의 올바른 실천 여부는 논외로 하고라도 높이 보아야 할 겝니다.
  저는 중국에서 돌아오신 분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경직된 정치 체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그 경험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간을 다투어 한국을 발전시켜야 했었는데 6·25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너무 시간을 허송했어요.
  박 정희 태통령의 리더십은 군 지휘관 경험을 통해 다져졌고, 잘 아시다시피 군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최대 자질은 실행력입니다. 사단이란 조직은 그 기능상 국가와 매우 비슷합니다. 국가의 요소별 기능이 사단 조직 안에서 거의 대표되고 망라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단장이란 직책의 경험은 축소판 국가의 통치라고 볼 수 있으며 사회에서도 응용이 가능하지요."
  
  -전쟁을 겪은 군인과 그렇지 못한 군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쟁을 겪은 군인, 사경을 헤쳐 온 군인들은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새계관, 즉 사생관을 갖게 되는 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확실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부하를 보는 눈도 다를 것이고 그의 리더십도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의 교육목표는 군사 지식보다는 사생관의 확립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강 선생님은 우리 군의 유능한 작전통으로, 또 6·25전쟁에 작전의 측면에서 가장 깊숙이 간여한 사람으로, 그래서 6·25전쟁사를 쓰는 데 있어서 최적격자로 꼽히시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사실 저는 1947년에 조선 경비대 총사령부가 창설돠었을 때 작전국을 개설한 사람입니다. 그 뒤 1950년 6월 6·25가 터지기 열흘 전까지 4년 동안 계속 작전국장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다섯 명의 참모총장이 바뀌었습니다. 총장이 바뀌면 다른 참모들은 따라서 바뀌었지만 저만은 한 자리에 계속 있었습니다. 6·25 직전 미국 유학 예정으로 작전국장 직에서 물러났다가 6·25 며칠 뒤 다시 작전국장으로 돌아와 정일권 총장과 함께 1년쯤 일했죠. 그러니 6·25 전후 5년을 작전국장으로 있었던 셈이 되나요?"
  
  -1951년에 작전국장을 물러나신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그 때는 우리가 중공군의 공세를 반격, 전선이 고착되었을 즈음인데 저는 장 총장에게 일선으로 보내 달라고 했지요. 작전국장으로 일해 보니까 대부분의 일은 내가 실제로 다 하는데 총장 이름으로 발표되고 내 이름은 나지도 않고 반대로 사단장들은 훈장만 받고, 이래서 사단장 직을 자원하여 1사단을 맡게 되었지요."
  
  -아까 강 선생님께서 6·25전사를 올바로 써 보시겠다고 다짐하셨는데 전사(戰史)는 왜 중요합니까?
  
  "전사는 군대의 빛나는 전통을 나타내는 정신적 지주입니다. 군대는 이길수록 강해진다고 합니다만 전사는 승리와 패배, 그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 후세의 군인들에게 좋은 전통은 계속 이어가고 패전의 교훈을 깨달아 실패의 반복을 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산으로 쫓겨 내려가는 그 상황에서도 전사 편찬위원회를 조직, 전사 자료를 수집케 한 것도 후세에 경종을 울리려 함이었죠.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전쟁 공간사(公刊史)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늘그막한 나이에 역사 공부를 좀 하려고 해요. 역사를 알고 전쟁을 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큰 전역을 치른 장군들은 거의 빠짐없이 회고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클라크, 릿지웨이 장군도 그랬고요.
  그런데 막상 한국 장군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몽고메리나 패튼 장군은 알아요. 이제 내 나이에 뭐 달리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한글 전용으로 책을 써야겠지요? 다음 세대들을 위한 책이니까…."
  
  
[ 2023-01-19, 13: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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