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정희 씨 별세!
1977년 북한에 의하여 납치될 뻔했었다! 납치사건 연루자는 이응노 부인 박인경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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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19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19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은 2017년 이후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었다. 수년 전 남편 백건우(피아니스트·77)는 한 방송을 통해 “사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은 뉴스는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더 숨길 수 없는 단계까지 왔고 윤정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다시 화면에 나올 수도 없는 거고 해서 알릴 때가 됐다 생각했다”고 투병 사실을 밝혔다. 윤정희 씨는 남편, 딸과 함께 살았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선발돼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1960∼80년대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 총 280편에 달한다. 대표작으로는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마지막 작품은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로 국내외 7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77년 7월 파리에 살 때 윤정희씨는 남편 백건우씨와 함께 이응노 화백 부인 박인경의 꾐에 빠져 당시 유고연방의 자그레브(지금은 크로아티아 수도)에 갔다가 대기중이던 북한공작원에 의해 납치될 뻔했었다. 자그레브에 주재하던 미국 외교관의 도움을 받아 구출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고 정부가 북한에 항의, 자백을 받아낸 외교문서가 월간조선(2003년 7월호)에 의하여 공개되는 등 확정된 납치미수이다. 1999년 윤정희, 백건우씨는 자신을 유혹, 자그레브로 데리고 갔던 박인경이 김대중 정부 때 한국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불안하여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나를 찾아온 적도 있다. 오늘 그녀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중에 납치 사건을 언급하는 언론이 없다. 특히 납치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했던 한국일보도! 민노충 심장부로 침투한 간첩단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한데도 말이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禹鍾昌 月刊朝鮮 기자가 쓴 기사의 일부
  
  「박인경의 경우」
  
   몇달 전, 한국일보 金聖佑(김성우) 논설고문이 그의 고정 컬럼 「金聖佑 에세이」에서 한 여자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 여자의 이름은 朴仁京(박인경·73). 컬럼의 제목도 「박인경씨의 경우」라 했다.
  
   朴仁京씨는 타계한 在佛(재불) 화가 李應魯(이응로)씨의 두 번째 아내다. 40여년 전인 1958년에 李화백과 같이 프랑스로 떠나 줄곧 거기서 생활하다가 1967년 東伯林(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남편 李화백과 함께 프랑스 國籍(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등을 돌린 그녀는 1994년 서울에서 열린 顧菴(고암·李화백의 호) 5주기展(전) 참석을 시작으로 「자유롭게」 입국하고 있다.
  
   顧菴의 아내 朴仁京씨를 겨냥하여 한국의 대표적 論客(논객)중 한 사람인 金聖佑 논설고문이 장문의 에세이를 쓴 까닭은 컬럼 첫 문장에 나온다.
  
   <얼마 전, KBS 2TV의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란 프로에서 顧菴(고암) 李應魯씨의 10주기 추모 전시회에 참석하러 파리에서 와 있던 부인 朴仁京씨와의 대담이 장시간 방영되었다. 이 자리에서 朴씨는 1977년에 있었던 白建宇(백건우)·尹靜姬(윤정희)씨 부부의 납치미수 사건을 묻는 질문에 『나도 그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본인들이 알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기껏 이 말인가>
  
   金聖佑 고문이 朴씨의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1977년 파리에 거주하던 피아니스트 白建宇씨와 영화배우 尹靜姬씨 부부가, 朴仁京씨가 주선한 연주회에 초청받아 스위스 취리히 공항을 거쳐 공산국가 유고에 들어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이었던 金고문은 현지에서 그 사건을 취재하고, 朴仁京씨와 일문일답을 한 유일한 기자였기 때문이다.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한 金고문은 컬럼에서 「이때(인터뷰 때) 朴씨는 白建宇씨를 유고의 연주회에 초청하게 된 경위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회피했다」며 「당시 사건의 자초지종으로 미루어 북한의 工作(공작)이 아닌 것도 아니었고, 朴씨가 그것을 절대로 모를 일도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사건 경위에 나타나는 수많은 의문점은 차치하더라도 사건 직후 진상조사를 위한 파리 주재 우리 대사관의 소환에 왜 불응하고 5개월 동안이나 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까」라며 朴씨의 분명찮은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金고문은 「정부는 白建宇씨 일가의 납치미수 사건에 대해 朴씨가 밝힐 것은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양심범의 입장이라면 그런대로 태도를 분명히 천명한 뒤라야 입국시키는 것이 옳다. 朴씨가 아직까지도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우리 사회를 속이는 일은 위조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부와 朴씨의 각성을 촉구했다.
  
  
  

  *2007년 6월1일자 기사
  
  지난 5월3일 대전에서는 이응노 미술관 개관식이 있었다. 부인 朴仁京씨가 명예관장이 되었다. 이 개관식엔 박성효 대전광역시장 등이 참석했다. 박 시장은 박인경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대전시가 2층 미술관 건립비 예산 약50억원의 거의 전부를 댔다고 한다.
  
  박인경씨는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인사를 할 때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李應魯 화백의 부인인 朴仁京씨는 1977년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고 윤정희-백건우 부부를 납치하기 위하여 당시 공산국가이던 유고로 두 사람을 유인했던 사람이다. 북한정권도 이 범행을 자신들이 기획했음을 시인했다.
  
  북한정권의 하수인이 어떻게 납치 행위에 대한 代價를 치르지도 않고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名士 대접을 받고 있는가? 북한정권의 납치공작에 가담했던 인물이니 지금도 북한정권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보부 시절부터 朴仁京씨를 북한공작원으로 단정해왔던 국정원은 국민들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다. 예술엔 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에겐 국경도 있고 법도 있다. 우리나라는, 예술인은 간첩, 반역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입법을 한 적이 없다.
  
  *2021년 10월19일 연합뉴스는 <고암 이응노의 부인이자 한국 현대미술계의 주요 여성 화가인 박인경 화백의 작품이 이응노미술관에 전시된다>고 보도했다. 류철하 이응노미술관장은 "만 95세 나이에도 신작을 그려내는 박인경 화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박인경이 윤정희 백건우 납치사건 관련자임을 적지 않았다.
  
  
  

   *월간조선 2003년 7월호 <대특종/北, 윤정희·백건우 납치 工作 공식 시인!>
  
   駐유고 북한 대사가 유고 정부에 대해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공작을 시인한 외교문서 발견. 26년 만에 사실로 확정!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woojc@chosun.com〉
  李世珉 朝鮮日報 사회부 기자〈johnlee@chosun.com〉
  
   ●『(尹靜姬 부부) 유괴를 계획했던 것은 자그레브 주재 북한 영사관 동지들이 아니라 평양에서 온 그룹이다』(駐유고 북한 대사 정광순이 유고 공산당 행정위원 비디치에게 한 발언)
   ●『尹靜姬 부부를 납치하여 평양으로 데리고 갈 북한 비행기가 자그레브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납북 직전 두 사람을 구출했던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 크리스텐슨 26년 만의 증언)
   ● 尹靜姬 부부를 자그레브로 유인했던 「북한 工作 협조자」 朴仁京(李應魯 화백 부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지금도 한국을 왕래하고 있다
  
  
  유고 공산주의동맹 국제관계課에서 보관
  
   1977년 유고 자그레브에서 발생한 영화배우 尹靜姬(윤정희)씨와 피아니스트 白建宇(백건우)씨 부부 납북 미수사건은 평양에서 파견된 북한 工作팀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북한 당국이 유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시인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유고슬라비아(6개 연방국이 분리되어 현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 공화국을 형성하고 있다.)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委 간부회 국제관계課에서 보관 중인 기밀서류 속에 들어 있었다.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와 미모의 영화배우가 서방 세계의 접근이 어려운 동구권 유고에서 북한 공작원의 납치를 모면하고 탈출한 영화 같은 이 사건은 희생자가 될 뻔한 尹靜姬-白建宇 부부의 증언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의 추적 보도, 그리고 귀순한 李韓永(이한영·金正日의 전처 성혜림씨의 조카. 1997년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됨)씨의 증언 등에 의해 북한이 자행했다는 사실은 확실시되었으나 이번에 유고 정부가 보관 중인 기밀서류가 공개됨으로써 사건 발생 26년 만에 북한의 工作임이 공식 확인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사건 관련자인 李應魯(이응로·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在佛 화가) 화백의 부인 朴仁京씨(79)에 대한 향후 법적 처리가 주목된다. 朴仁京씨는 연주회 초청을 구실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윤정희-백건우 부부를 동구권 공산국가 유고로 유인한 사람이다.
  
   朴仁京씨는 그동안 「북한 工作員」 혹은 「북한 工作 협조자」로 지목돼 왔으나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조사를 받지 않았고, 사건 발생 17년 후인 1994년부터는 아무런 제재 없이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朴仁京씨의 주장을 검증 없이 보도하여, 朴씨가 윤정희 부부의 모략에 의한 희생자인 양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에서 보관 중인 이 기밀서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委 간부회 행정위원인 도브리보예 비디치가 자그레브 주재 북한 대사 鄭光淳(정광순)을 불러, 북한 측이 자행한 「한국 피아니스트 白建宇씨 유괴 공작」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이에 대해 鄭光淳 대사가 해명하는 대화록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유고 공산당에서 북한 대사를 소환, 유괴사건을 비판
  
   이 서류에 따르면 비디치가 鄭光淳 대사와 대화를 가진 날짜는 1977년 10월25일로, 납북 미수사건이 발생한 지 석 달 후였다.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유고를 탈출해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白建宇씨 부부가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에 출두, 사건의 전모를 신고한 것은 1977년 8월1일이며, 그 후 이 사건은 한국 언론을 비롯, 全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약되었다. 비디치가 북한 대사와 대화를 가진 것은 유고와 북한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던 무렵이었다.
  
   기밀서류에 따르면 두 사람의 대화는 유고 공산당 간부 비디치가 鄭光淳을 일종의 「소환」 형식으로 초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디치는 鄭光淳에게 『자그레브 주재 북한 영사관의 활동에 관해서 비판할 점이 있음을 주재국 입장에서 통보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초청 이유를 밝힌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 측은 유괴 실행은 승낙하기 어려우며 그런 활동이 자그레브나 우리나라 영토內에서 실시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활동은 우리나라와 우리나라의 정치를 국제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우리나라와 북한에 손실을 끼치는 것이다.
  
   한국 피아니스트 白씨 유괴 工作에 관해서 全세계 언론이 다루고 있다. 영사관은 쌍방 협정에 의거, 첩보가 아닌 정치활동의 센터가 되어야 하며, 그 활동은 개설시에 교환된 협정內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측은 우호국 북한의 정치적 필요성에 대해 이해하고 영사관 개설을 허가했던 것이며, 정치적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원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영사관 재적 인원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밀서류 내용과 일치하는 李韓永 증언
  
   이 비판에 대한 鄭光淳 대사의 발언은 기밀서류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대사 측은 답변으로서, 우리 측의 비판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대사는 이전에는 몰랐으나, 헬레비니치 동지로부터 이 件에 관한 사건의 전말을 듣고 주의받은 후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유괴를 계획했던 것은 영사관 동지들이 아니라 평양에서 온 그룹이다. 대사는 헬레비니치 동지와의 대화 후 즉시 지도부에 연락했으며 영사관 동지들도 이 件에 관해 평양에 연락했다고 말했다. 유괴를 계획했던 그룹은 黨의 징벌을 받고, 직함을 가지고 있던 리더는 직함을 잃었다.
  
   대사는 비판을 완전히 받아들일 것을 재차 강조하고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매우 유감이며, 이 대화를 상대국 지도부에 전하고 이와 같은 종류의 일은 상대방에게도 정치적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사건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말했다>
  
   鄭光淳 북한 대사의 유감 표명에 비디치는 감사의 뜻을 전한 다음, 『야고브레비치 동지의 휴가와 관련한 북한 초대 件에 관해서, 黨 간부의 상호 휴가 초빙은 있으나 행정관에 대한 것은 관행이 없지만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티토 대통령 방문 때의 매우 우호적인 환영, 그리고 金日成 주석과의 매우 알찬 회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고 기밀서류는 밝혔다.
  
   이 서류 끝에는 이 서류의 送信處가 비디치, 헬레비니치 등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 간부 7명과 국제관계課 자료실이라고 기록, 黨의 주요 간부에게만 보고된 극비 사항임을 암시했다.
  
   서류에 등장하는 鄭光淳 북한 대사는 북한인명록에 따르면 1927년생으로 신의주 출신이며,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했다. 鄭光淳은 1972년 일본 삿포르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 때 북한 선수단장을 맡았다. 고등교육성 副相, 북한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73년 교육부 부부장, 1974년 아르헨티나 주재 북한 대사가 되었다. 1976년 10월부터 1980년까지 유고 주재 북한 대사를 지냈는데,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白씨 유괴 공작은 평양에서 온 그룹이 계획했고, 유괴를 계획했던 그룹은 黨의 징벌을 받았으며 직함을 가지고 있던 리더는 직함을 잃었다』는 鄭光淳 북한 대사의 발언은 李韓永씨의 1996년 증언과 일치한다. 李韓永씨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 金正日의 전처인 영화배우 成蕙琳(성혜림)씨의 조카다. 성혜림씨 언니인 成蕙琅(성혜랑)씨가 李韓永씨 어머니다.
  
   金正日의 전처 성혜림씨는 1973년부터 신병 치료를 위해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 바빌로바街 아파트에서 언니 성혜랑씨 가족과 함께 살았다. 모스크바와 스위스를 오가며 살았던 李韓永씨는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 귀순한 李韓永씨를 최초로 접촉했던 기자는 李씨로부터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은 북한 노동당 對外연락부(최근 명칭은 사회문화부)가 5만 달러의 거금을 주고 유고 경찰 관계자를 매수하는 등 치밀한 계획 아래 저질렀다는 증언을 들었다.
  
   이 증언에서 李韓永씨는 『납치 책임자는 이모의 前남편(편집자 주: 성혜림씨는 월북작가 이기영씨의 장남 이종혁과 결혼했으나 金正日의 눈에 들면서 남편과 이혼했다) 친척인 對外연락부 부부장 李正龍이었고, 李正龍은 당시 노동당 연락부 과장 허묵을 자그레브 주재 북한 영사관 상무관으로 위장시키고 마취제까지 준비했다』고 말했다.
  
   李正龍은 납치 工作 실패 후 평양으로 복귀하는 길에 성혜림·성혜랑 자매가 묵고 있던 모스크바 아파트로 찾아와 이같은 사실을 실토하면서 『독 안에 든 쥐였는데 놓쳤다』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애석해 했다고 李韓永씨는 증언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년 후, 李正龍은 對外연락부 부부장에서 해임되었으며, 거의 폐인처럼 살다가 1995년에 사망했다.
  
  
  『윤정희를 잘 아는 할머니를 공작원으로 참가시켰다』
  
   李韓永씨는 그가 쓴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에서 이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인용하면 이렇다.
  
   <이 사건을 총지휘했던 사람은 이정룡 연락부 1부부장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까지 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사건은 모스크바에서 이부부장에게 직접 들었다. 공작 책임자의 말이니 가장 정확할 것이다.(중략)
  
   제일 데려오기 쉬운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윤정희라고 판단했다. 작전 계획의 비준도 받았다. 金正日이 허가한 것이다. 납치 장소는 유고슬라비아로 정했다. 처음부터 유고슬라비아로 데려오면 공산국가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음악을 좋아하는 돈 많은 재일교포가 백건우씨의 팬인데 그가 백씨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윤정희를 잘 아는 할머니를 공작원으로 참가시켰고 유고의 자그레브 경찰국장을 3만 달러를 주고 포섭했다. 별장 하나를 빌려 외곽은 자그레브 경찰이 지키고, 별장 안에는 공작원들이 숨어 있었다. 공작원 할머니가 집에 들어와 『왔어요』라고 말하면 모두 튀어나가 납치하기로 했다.
  
   납치 작전의 실패는 할머니가 대사를 틀리게 말한 탓이다. 할머니가 『왔어요』하면 벽장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튀어나오게 돼 있었는데, 할머니가 『다들 어디 갔나』 하는 바람에 옷장에 숨어 있으면서 튀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암호가 이상하자 숨어 있던 사람들 중 허묵이라는 연락부 과장이 튀어나왔다.
  
   백씨 부부는 미국의 보호 아래 자그레브 공항을 빠져나갔다. 북한 측은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한 번 더 납치를 시도해 보자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관계자들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갔다. 이정룡 부부장만 살아남았다>
  
   이 책에서 「공작원으로 참가시킨, 윤정희를 잘 아는 할머니」가 李應魯 화백의 부인 朴仁京씨다. 1926년생인 朴仁京씨는 사건 당시 51세이며,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자그레브 현장의 납치 책임자는 북한 공작원 허묵』
  
   朴仁京씨는 1977년 7월 초, 白建宇씨에게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부자가 자기 집 살롱에서 白씨의 연주회를 갖고 싶어 초청장을 보내왔다고 알렸다.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白씨는 일단 거절했으나 朴仁京씨가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고 권유해 마지못해 응낙했다.
  
   白씨는 한 해 전에 李應魯씨 주례로 李씨 집에서 영화배우 윤정희씨와 결혼식을 올려 李씨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白씨는 부인 윤정희씨와 생후 5개월 반 된 딸 眞希양을 데리고 朴仁京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오후 파리發 취리히行 스위스 항공에 올랐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 파빌로비크의 비서라는 여자가 나타나 파빌로비크의 양친이 유고에 가 있어, 거기서 연주회를 하기 때문에 유고行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며 취리히~자그레브 간 왕복 항공권을 건네주었다. 白씨 부부는 이렇게 하여 공산국가 유고에 입국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영화狂인 金正日이가 영화배우 윤정희씨를 납치해 오라는 지령을 내려, 당시 對外연락부 부장이었던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 정경희가 직접 평양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나와 지휘했다. 자그레브 현장의 실무 책임자는 「허묵」이란 가명을 사용하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윤정희 부부를 유고 자그레브로 유인하는 역할은 朴仁京이 맡았다』고 증언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비엔나는 유고의 자그레브, 덴마크의 코펜하겐 등 유럽 지역에 설치된 북한의 對南 공작기지를 지휘하는 본거지라고 한다. 1970년대 초반에는 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 관장해, 인민무력부 소속의 현역 소장 김대성이 비엔나 총책으로 나왔는데 나중에 對外연락부로 소속이 이관되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납치 사건의 실무 책임자 「허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허묵은 유고 자그레브를 무대로 활약한 북한의 거물 공작원이다. 워낙 많은 假名(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진짜 이름과 출신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이 유엔(UN)에 옵서버단을 파견했을 때 허묵은 「권호」라는 가명으로 유엔본부에 근무하며 재미교포들을 공작금을 주고 포섭했다. 허묵이 필요로 하는 돈과 각종 첩보장비를 보급해 준 사람은 비엔나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 이상준이다. 허묵과 평양의 통신 연락은 이상준이 담당했다』
  
  
   선글라스 낀 동양 여자는 북한인 「방화자」
  
   이 관계자는 윤정희씨 부부 납치에 관계했던 한 북한 여자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방화자」로, 허묵의 연락책 이상준의 아내라고 한다. 이 관계자에 의하면 「방화자」는 납치사건 당시 유고 자그레브 공항에 나가 선글라스를 끼고 윤정희씨 부부에 대한 감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런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사건 발생 직후 윤정희씨 증언으로 공개되었다.
  
   윤정희씨는 『시골 공항처럼 작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조선민항이라 쓴 북한 항공기가 착륙 대기 중임을 보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자 우리 일행을 마중나온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낀 동양 여성이 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도 사건 발생 당시인 1977년 8월14일자 1面 기사에서 「白씨 부부가 유고 공항 입구에서 보았던 선글라스를 낀 동양 여자는 자그레브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에 근무하는 북한인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동양 여자가 「방화자」이고, 이상준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화자」의 정체를 처음 공개한 이 관계자는 『납치 공작은 「방화자」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1977년 당시 유고인들은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다. 유럽인도 아닌 동양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자그레브 공항에 나타난 것이 납치 공작 실패의 첫 번째 실수이고, 두 번째 실수는 「방화자」가 북한식의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점이다. 유럽의 낯선 공항에서 어색한 차림을 하고 있는 동양 여자를 보는 순간, 영화배우인 윤정희씨는 여성 특유의 직감력에 의해 긴장했던 것이다』
  
   납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의 金正日은 굉장히 애석해 했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1년 후인 1978년 북한은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를 홍콩으로 유인, 납치에 성공한다.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 관계자의 계속되는 증언이다.
  
   『최은희 납치 공작의 단서는 박성철이 제공했다. 남북 조절위원회 회의 참석차 서울에 온 박성철은 金正日을 위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의 흑백 필름을 얻어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이 영화를 본 金正日이 최은희씨 납치를 지령했다.
  
   최은희씨 납치는 윤정희씨 납치 방식과 거의 그대로 진행되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윤정희씨 부부를 유고로 유인한 사람이 朴仁京이란 여자이었듯이 당시 서울에 살았던 최은희씨를 홍콩으로 유인한 사람은 李像姬(이상희·당시 52세·사망)라는 여자다. 朴仁京은 가짜 연주회 초청장을 만들어 윤정희씨 부부를 유인했고, 李像姬는 최은희씨에게 홍콩 영화 출연을 위해 초청한다는 허위 초청장을 보냈다. 똑같은 수법에 최은희씨가 당한 것이다』
  
  
   [일본 NHK 취재팀의 추적 결과]
  
   북한 공작원 「김유철」 추적

  
   이번에 처음 공개된 유고 정부의 기밀서류는 일본 공영방송 NHK 취재팀이 극비리에 입수했다. 이 취재팀을 기자는 지난 3월 서울에서 만났다. NHK 취재팀은 「김유철」이란 이름의 북한 공작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NHK 취재팀에 의하면 「김유철」은 일본인 납치 공작의 주범으로서, 요도號 납치범들에게 납치 공작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NHK 취재팀이 「김유철」에 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올해 60세 가량이며 對外연락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것, 1980년 무렵에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했다는 것, 그리고 요도호 납치범들의 평양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는 김유철 사진과 김유철의 여권 사진 등이었다.
  
   NHK 취재팀이 기자를 찾은 것은 기자가 月刊朝鮮 1999년 11월호에 쓴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의 발생지가 유고이고, 「김유철」 역시 이 무렵 유럽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연관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만남을 계기로 NHK 취재팀과 기자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독일·덴마크·유고 등 유럽에서 있었던 북한 노동당 對外연락부 공작원들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기로 했다. 기자는 유럽에서 활동하다 귀순한 前 북한 공작원을 NHK 취재팀에 소개해 주었고, 이 공작원의 도움으로 NHK 취재팀은 독일과 덴마크內 북한 공작 거점들을 취재했다. 「김유철」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NHK 취재팀은 「슈타지 文件」(前 동독 비밀경찰에서 보관 중이었던 기밀서류) 등도 뒤졌다.
  
   이러한 다각적인 현지 취재와 文件 확인 작업에서 NHK 취재팀은 舊유고 정부가 보관 중인 기밀서류에서 「비디치와 鄭光淳의 대화록」을 발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NHK 취재팀은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 당시 白씨 부부가 안전하게 유고를 탈출하게끔 도와준 자그레브 주재 미국대사관 영사 크리스텐슨씨를 찾아 내는 개가도 올렸다.
  
   NHK팀의 취재 내용은 지난 6월1일 「NHK 스페셜-요도호와 납치」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북한 공작원 「김유철」의 행적과 요도호 납치범들의 활동, 그리고 일본인 납치가 주 내용이었고,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과 크리스텐슨 인터뷰 등은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NHK 보도 후, 기자는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의 관계자로부터 「김유철」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에 따르면 「김유철」은 허묵의 후임자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유고 자그레브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주로 활동한 「김유철」은 일본인과 재일교포를 납치 혹은 포섭하여 對日 우회 침투공작을 하는 게 주 임무였다고 한다. 이 관계자의 말이다.
  
   『김유철은 「우스노미야」라는 일본인 이름을 사용했고, 일본 여권을 소지했다. 나이는 60대 중반이고, 對南 공작기관인 「3호」 소속이다. 「3호」는 「3호 청사」의 준말인데 북한의 對南 공작기관인 對外연락부, 통일전선부, 작전부가 「3호 청사」 안에 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對外정보조사부인 35호실은 3호 청사 밖에 있다. 「김유철」은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크리스텐슨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의 증언]
  
   크리스텐슨을 찾아내다

  
   NHK 취재팀이 찾아낸 크리스텐슨씨는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에서 그동안 확인이 불가능했던 유고에서 있었던 일을 객관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다.
  
   납치 장소가 공산권 유고라는 점에서 사건 발생 당시부터 현지 취재가 불가능했던 이 사건은 납치 현장에 白씨 부부와 이들을 유고로 안내한 朴仁京씨 세 사람만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후 朴仁京씨가 李應魯 화백의 영향력을 업고 사건의 모든 책임을 白씨 부부에게 덮어씌우는 바람에 白씨 부부의 자작극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크리스텐슨이란 이름은 白씨 부부가 유고에서 있었던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 발생 초기에 공개했지만, 크리스텐슨의 정확한 이름과 직책, 연락처 등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白씨 부부가 기억하는 크리스텐슨이란 사람의 인적 사항은 「이름이 리처드 A 크리스티안센 혹은 딕 크리스텐슨이고, 1977년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 부영사였으며, 그때 나이가 32세 가량」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이 사람을 찾기 위해 기자는 1999년 駐韓 미국 대사관에 白씨 부부가 기억하는 인적 사항을 적어 보냈다. 한참 후, 駐韓 미국 대사관 측은 『국무부에서 근무한 외교관 가운데 그런 이름과 경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통보해 왔다.
  
   그러나 NHK 취재팀은 기자가 알려준 이 인적 사항을 토대로 크리스텐슨씨를 찾아냈다. 기자는 NHK 취재팀의 도움을 받아 크리스텐슨씨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크리스텐슨씨의 풀 내임은 「리처드 A 크리스텐슨」으로, 白씨 부부가 기억하는 이름과 거의 일치했다.
  
   크리스텐슨씨는 1936년생으로 올해 예순일곱이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州에서 태어났다. 위스콘신州의 리펜 대학을 졸업하고 軍에 입대, 몇 년을 복무한 뒤, 보스턴 인근의 터프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2년 미국 외교관이 되어 베네수엘라에서 첫 근무를 하고, 1968년 이후 東유럽 국가인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었다.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은 그가 유고슬라비아에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발생했다.
  
   그 후 몇 년간 워싱턴에 있다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있었고, 그 몇 년 후에 은퇴했다. 지금은 민간 非영리 기구인 메리디언(Meridian) 국제센터에서 일하며,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외국 인사들의 미국 내 일정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訪美한 한국 언론인이나 과학자들을 도와준 적도 있다고 했다.
  
  
   크리스텐슨과 같은 호텔에 묵다
  
   白씨 부부를 死地에서 구출해 준 크리스텐슨씨의 역할은 사건 발생 후 언론에 이렇게 소개되었다.
  
   <유고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한 白씨 일행은 비자가 없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뒤 한 공항 직원이 나가라고 손짓해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 직원은 여권에 입국 확인 스템프를 찍어주지 않았다.
  
   마중객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는 白씨에게 朴仁京씨는 취리히 공항에서 파빌로비크 여비서한테서 받았다며 편지 봉투를 주었다. 봉투 겉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집의 약도가 그려져 있으며, 유고 돈 800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白씨는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약도를 보여 주었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길을 15분 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사람이 없고, 연주회를 초대한 집 치고는 너무나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낀 白씨는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다음,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층과 2층을 둘러보던 白씨는 3층에서 내려오는 동양인 남자를 발견했다. 놀란 白씨는 대기시킨 택시에 올라 탔다. 『웨이트(기다려라), 웨이트』 하며 다가온 동양인이 택시 손잡이를 잡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白씨는 택시 문을 잠그고 운전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白씨 일행은 오후 6시10분경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에 도착했다. 영사관은 문이 닫힌 뒤였고, 도서관이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도서관 직원은 크리스텐슨이라는 부영사를 白씨에게 소개했다. 자그레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크리스텐슨은 자기가 숙박 중인 펠리스 호텔로 白씨 일행을 안내했다. 호텔에서 白씨는 유고를 출발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저녁을 먹었다.
  
   연락을 받고 호텔로 달려 온 미국 공보관 관장은 白씨가 미국 영주권을 가진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고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白씨의 연주를 들었다. 밤 12시쯤 호텔로 돌아온 白씨 일행은 모두 416호실에 투숙했다. 크리스텐슨의 방은 3층이었다.
  
   다음날 아침 6시40분쯤 밖에서 누군가가 416호실 문을 두드렸다. 뜬 눈으로 밤을 세운 白씨가 가만히 있으니까 朴仁京씨가 문을 열려고 했다. 白씨는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하고는 크리스텐슨 방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후 크리스텐슨은 『문 밖에 세 명이 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인데 모두 북한 사람 같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1시간쯤 지난 후 짐꾼 한 명을 데리고 온 크리스텐슨은 白씨 일행을 로비로 안내했다. 로비에는 미국 영사관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사는 크리스텐슨에게 白씨 일행을 공항까지 안내하라고 일렀다. 白씨 일행은 7월30일 정오쯤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다>
  
  
   『그들 일행은 흥분 상태였다』
  
   다음은 크리스텐슨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NHK 취재팀이 인터뷰한 내용과 朝鮮日報 사회부 李世珉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취합했다.
  
   ―자그레브에는 언제 부임했습니까.
  
   『1977년 7월입니다』
  
   ―자그레브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정치·경제·상무 담당관이었습니다. 그 당시 美대사관은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었고, 자그레브에 총영사관이 있었습니다. 내 임무는 영사 서비스 제공과 미국 기업의 현지 투자 지원 등이었습니다. 유고에 진출한 미국 기업에서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고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에서 발생한 일을 국무부에 보고했습니다. 아드리아海의 몇 군데 항구에서 美 해군을 맞이하는 연례 행사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백건우씨 부부를 처음 만나게 된 상황과 그 당시 백건우씨 부부의 태도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자그레브 총영사관에 부임하고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나는 늦게까지 영사관 안에 남아 잔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자그레브에 입국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호텔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총영사관은 자그레브 도심의 큰 광장에 있는 빌딩 내에 있었습니다. 1층에는 도서관과 정보센터가 있었는데 이 시설은 유고슬라비아 현지인에 의해 관리되었고,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습니다. 잔업을 하고 있던 그날 밤, 나는 1층에서 근무 중인 한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미국인을 만나고 싶다고 아주 끈질기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얼마 후 그들이 내 사무실로 왔습니다. 白씨 부부와 자녀, 그리고 중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 등 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성을 잃고 상당히 흥분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그곳에 왔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했나요.
  
   『25년이 지난 일이라서 기억이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白씨가 미국 영주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몇 년인지 구체적인 연도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줄리아드 음악원에 재학한 경험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때 영주권을 취득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 미국 영주권이 그의 입장에선 美 영사관을 방문한 계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 유고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무역 관계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그레브에는 그들이 당연히 가야 할 한국 대사관과 그외의 한국 정부기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白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국 영주권이 미국 입국의 창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고, 그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을 도운 것은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습니까.
  
   『白씨로서는 영주권이 미국 입국의 창구라고 생각했겠지요. 영주권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보통 그런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우리 직무는 아니었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들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사관으로 가 주세요』
  
   ―그들이 당신의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고 했는데, 그때 그들은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白씨는 우선, 왜 자그레브에 왔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와 가족은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비즈니스맨 아니면 이 비즈니스맨의 대리인으로부터 접촉이 있었답니다. 白씨는 유고슬라비아人의 집에서 콘서트를 열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초대되었다는 것입니다. 白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취리히로 갔습니다.
  
   취리히에 도착했더니 그 비즈니스맨의 비서인지, 대리인이 마중을 나와 「스케줄 변경이 있습니다. 콘서트는 취리히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류블랴나 댁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티켓과 류블랴나로 갈 준비도 이미 끝난 상태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입니다. 그 당시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습니다.
  
   그 당시 취리히에서 류블랴나로 가는 직항 편은 없었지만, 취리히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직항 편은 있었습니다. 白씨 일행은 일러준 대로 비행기를 탔답니다. 자그레브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마중을 나올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류블랴나로 이동할 준비를 해두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류블랴나는 자그레브에서 약 120~130km의 거리에 있는데, 무사히 류블랴나까지 가서 예정대로 콘서트를 해주었으면 한다는 설명이었다고 합니다.
  
   자그레브에 도착했을 때 白씨 일행은 그 비즈니스맨 대리인의 마중을 받고 어떤 주소가 쓰인 메모를 건네받았습니다. 대리인은 「여기로 가주세요. 거기서 류블랴나로 안내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준비된 택시에 태웠다고 했습니다. 白씨 일행은 그대로 따랐던 것인데, 그 시점에서 白씨는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것은 없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자그레브에 도착했을 때, 자그레브라는 도시는 산 위에 있었습니다만, 건네받은 주소에 도착해 보니 깨끗한 주택가 한복판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 白씨는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기 시작한 듯합니다. 지적한 주소지에 도착한 시점에서 그는 택시를 내렸을 때인지 아니면 탄 채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주소의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본 순간, 「북한 사람이다」라고 직감하고, 바로 택시를 탄 채로 운전수에게 「지금 곧장 미국 영사관으로 가 주세요」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북한인들이 白씨 방 밖에 서 있었다』
  
   ―당신 사무실에 들어온 白씨가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라고 호소했습니까.
  
   『「그들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고, 나를 여기까지 유인해서 나와 가족을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白씨의 부인은 그때 현역 배우였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한국 영화배우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당시는 백씨보다 그의 아내 쪽이 유명한 듯했습니다. 백씨는 피아니스트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이미 여배우로서 명성이 있었습니다』
  
   ―白씨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최초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정말 믿어도 되는 얘기인지, 아니면 지나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인지, 판단이 잘 서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다시 파리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美 총영사관을 나가면 길 한쪽 편에는 여행사 대리점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제가 머물고 있는 호텔이 있었습니다.
  
   이 양쪽을 분주히 움직여, 다음날 가장 빠른 비행기로 파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아마도 금요일 밤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그날밤 안으로 파리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여서 가장 빠른 비행기에 타도록 준비했고, 제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1박 할 수 있는 준비도 했습니다. 자그레브에서는 조금 오래된 호텔이었지만 서비스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영사관 동료의 부인이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녀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는데, 그 동료와도 함께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뒤 다음날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을 정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白씨와 몇 시간을 함께 보낸 자리에서 그들이 북한에 대해서 갖고 있는 공포심 등에 대해 말을 하던가요.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닙니다. 파리에 돌아갈 준비와 호텔의 숙박, 다음날 아침 공항까지 가는 문제들에 대한 준비를 끝낸 다음, 白씨 일행은 조금 안심하는 듯 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북한에 관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음날 아침, 6시 아니면 6시15분경에 전화가 울렸습니다.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아마 한 시간쯤 빠른 시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白씨가 전화를 했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하고 있는데 문을 여는 것이 무서워서 문을 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문을 열지 말아요. 내가 넌지시 당신 방 앞을 지나면서 누군지를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나는 옷을 갈아 입고, 白씨 방 앞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인지 세 사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최소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 자신도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의 얼굴을,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 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북한 측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유고슬라비아뿐만 아니라 세계 어떤 나라에 있어서도 우리와 북한의 외교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북한 관계자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방으로 돌아와 白씨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열지 마세요. 당신이 말한 대로 방 밖에는 북한 관계자가 몇 사람 있습니다. 시간이 될 때까지 그대로 대기해 주세요. 시간이 되면 내가 모시러 갈 테니까 그 때 함께 내려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관계자는 당신이 누구인지 눈치챘습니까.
  
   『아마 그들은 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큰 호텔도 아니었고, 사람이 많이 지나 갈 시간대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프런트로 가서 「북한 관계자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 몇 사람이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리셉션을 열기 위해서 와 있는 듯합니다」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을 들었는데 프런트의 대응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자그레브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다
  
   ―북한 관계자가 호텔을 나간 것은 언제였습니까.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릅니다. 프런트에 얘기한 후, 나는 호텔을 나와 광장 건너편에 있는 경찰서로 가서 그 사태를 설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호텔 프런트에서 이상한 설명을 한 것은 호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경찰서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인 듯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미국인이 필사적으로 뭔가에 대해서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겠죠.
  
   나 자신도 자그레브에 온 지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아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기였고 게다가 설명하기 복잡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겨우 경찰을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경찰이 「공항으로 향할 때 경찰차로 경호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아마도 그렇게 대응해 준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으므로 白씨 일행을 데리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비행기에 타는 것과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까지를 지켜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이었습니다』
  
   ―白씨가 호텔 방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흥분해 있었습니까.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뒤에 런던에서 선데이 타임지를 읽었는데 이 사건에 대해 아주 크게 다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美 국무성에는 또 한 사람의 리처드 딕 크리스텐슨이라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국무성에서 근무하고 있고 지금은 일본의 美 대사관에 있습니다. 그전에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이었고 한국에서 활동한 경험도 있으며, 부인도 한국인입니다.
  
   한국의 어떤 신문은 그의 사진까지 실어 그가 이 사건에 관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제 딸과 사위는 지금 美 국방성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한국의 美 대사관에서 4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 당시 리처드 딕 크리스텐슨씨는 한국 美 대사관에서 넘버 투 맨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 딸이 말해 준 것인데, 리처드 딕 크리스텐슨의 한국 부인의 부모들은 그 기사를 읽고 진실을 쓰지 않았다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선민항기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白씨 일행이 자그레브를 떠난 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그들이 떠난 그날 밤, 나는 브리티시 에어웨이즈(영국 항공사) 주관의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영국 항공사 관계자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3, 4일 前에 북한 비행기가 자그레브에 도착해, 다른 민간 비행기와는 떨어진 장소에 대기해 있는데 그 비행기의 운항 목적에 대해서 누구도 모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했던 白씨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우리들은 「아마도 이 비행기와 납치 미수는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白씨 부부 납치사건에 북한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에 대해서 이전부터 알고 있었나요.
  
   『아니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북한이 免稅(면세)주류와 담배를 수출해 외교 활동 자금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북한이 마약 밀매를 하고 있다는 정도인데 마약 밀매는 그 당시엔 특별히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한 북한 비행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다른 비행기와는 달리 멀리 떨어져 세워져 있고, 등록이 되지 않은 비행기였기 때문인가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여객기처럼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볼 수가 없었고, 어쨌든 이상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한국 국적의 白씨가 비자도 없이 유고슬라비아에 입국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는 사전에 비자를 취득해야 하는데, 한국인은 비자신청을 하더라도 허가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60년대 후반 내가 루마니아 주재 美대사관에서 근무했을 때, 닉슨 대통령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가를 방문한 것은 戰後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자단에 한국인 기자도 섞여 있었습니다. 대통령 방문 전날이었는데, 이들의 입국을 루마니아 정부가 허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루마니아와도 외교관계가 없었습니다.
  
   대통령 방문이라는 큰 행사가 있으면 영접국에서는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요구에 응하는 자세를 보였어야 했던 만큼 한국 기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큰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일반 한국인이 당일에 비자 없이 유고에 입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는 그 당시 북한과 좋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비자 없이 유고 입국이 불가능하다면 유고슬라비아와 북한 사이의 강한 결속력이 이 사건에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공산당이 건재했고, 국가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서구 제국과 北美에 비해서는 언론과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지만 다른 공산주의권 나라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수천 명의 유고슬라비아인 노동자가 서독,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외의 유럽으로 돈 벌러 갔고, 정치적 이유로 여권을 발급받지 못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 유고슬라비아 국적의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이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외에서 일해서 번 수익을 자국으로 가져와 사업 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국가로서 북한과 강한 경제적·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상업적 목적이든 무슨 목적이든, 북한의 의도는 알 수 없었을지 모르나 북한 비행기의 이·착륙은 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白씨가 떠난 후 북한 측 관계자와 접촉할 기회는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자그레브의 외교 사회는 정말 규모가 작아 몇 개의 영사관과 총영사관, 무역사무소 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건국 기념일 등의 행사가 있을 때 북한 관계자가 참가했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金日成 배지를 달고 있어서 금방 북한 관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그들과 접촉한 적은 없었습니다』
  
  
   『약간의 주의산만으로 납치 실패』
  
   ―영국 항공사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북한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습니다. 휴전으로 인해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미묘합니다. 북한은 위험한 정권입니다. 1977년 당시에는 북한이 지금의 한국보다 군사적·경제적으로 더 힘있는 국가였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 북한은 점차 경제력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북한 관계자와 접촉한 것이라면 자그레브나 류블랴나에서 열렸던 전시장에서 정도일 것인데, 실제로 그들이 이러한 행사에 참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구체적인 기억이 없으니까요』
  
   ―白씨와 있었던 일을 다른 외교관에게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5년 전 일이라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만, 「북한의 의도가 무엇일까」 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베오그라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 보고한 것은 기억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대사관을 통해서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며칠 후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베오그라드 주재 대사관에 보고했을 때의 반응과 후속 조치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확인했던 것 정도입니다』
  
   ―이 사건은 납치 미수인데, 북한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졌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白씨가 내가 체류하고 있었던 호텔에 숙박하리라고는 계획 단계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자그레브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의 깨끗한 주택가 안에서 일어나고 끝날 예정이었으므로, 白씨 일행이 호텔에 투숙하면서 아마 납치 계획 관계자는 실패한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생긴 후 계획을 재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더 조심해야 했는데 약간의 주의산만이 있었던 것이죠』
  
  
   『북한의 납치 기사 읽으면 그 사건이 생각난다』
  
   ―납치 장소였던 언덕 위의 주택가엔 가 보았습니까.
  
   『아내가 자그레브에 온 후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보려고 구경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인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매우 깨끗한 주택가에 있었습니다. 한 가구가 사는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대문과 정원이 딸려 있는 저택이 늘어서 있었고, 깨끗한 거리의 모퉁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白씨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상당히 수상한 낌새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요』
  
   ―최근 보도되고 있는 북한의 납치 의혹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는 북한 정권의 잔학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다른 나라라면 국제적으로나 국내 정책에 있어서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간 북한에 의한 납치 기사를 읽을 때면 늘 1977년의 그 사건이 떠오릅니다』
  
   ―白씨 부부 납치 미수사건을 경험한 후 북한에 대한 인상이 어떻습니까.
  
   『이 사건은 악질적인 행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북한은 주류나 담배 밀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기 때문에 취하고 있는 방안이라고 합니다. 전세계에서 불법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은 그들뿐은 아닙니다. 東유럽에서는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 간에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많은 대사관에서는 西유럽의 암시장에서 손에 넣은 현지 통화를 여행가방 하나 가득 담아 와 이를 외교자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美 대사관은 벌칙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면세품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팔아서 외교자금으로 쓰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고 들었습니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을 때 입니다. 북한 대사관은 창이나 눈에 띄는 곳에는 모조리 선전용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美 대사관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슬로건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내가 북한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느꼈던 불만은 非도덕성입니다』
  
   ―白씨와 그 후 소식을 나눈 적이 있습니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국제센터에 근무하고 있을 때 미국 정부 초청을 받은 한국인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白씨가 일년에 한 차례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미국의 카네기홀과 링컨센터 등에서 콘서트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白씨가 지금도 파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미행했을지도』
  
   ―북한의 납치 행위를 목격했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나는 신중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최악의 사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白씨가 내 사무실에 뛰어들어 왔을 때,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는 사실일 가능성과 상상력 등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남북 간에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사람들의 감정이 불안정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첫 반응은 지나친 상상력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24시간이 지난 후,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납치 미수 사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白씨 부부가 투숙했던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린 북한인들의 인상은 외교관이었습니까. 스파이 타입이었습니까.
  
   『적어도 한 명은 자그레브 주재 북한무역사무소와 연관된 자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오스트리아 건국 기념일 리셉션장에서 보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 사람들이 통상 관계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북한과 유고슬라비아 간의 통상 관계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스파이였을 것입니다.
  
   아주 이른 시간인데 그들은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어쨌든 상당히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白씨가 투숙한 방에 대한 정보는 프런트에서 입수한 것 같습니다. 나는 처음엔 저들이 白씨 뒤를 따라 美 총영사관까지 따라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택시 운전사도 그들과 한 패로서, 白씨 일행을 어디까지 태우고 갔는지를 그들에게 알린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사실은 알 수가 없고요』
  
   ―어쨌든 白씨의 거처를 알아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총영사관을 나온 우리는 큰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총영사관에서 여행대리점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호텔까지도 걸어갔습니다. 나는 CIA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미행 방지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띄는 행동을 했습니다』
  
  
   朴仁京은 긴장한 상태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사건 당시 白씨 부부와 같이 있었던 미세스 리(朴仁京은 李應魯 화백의 부인이어서 미세스 리로 불렸다) 에 대해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녀는 白씨 부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매우 조용했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죠. 당시 그녀가 영어를 사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북한에 협조해 白씨 부부 납치를 도운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여자가 북한의 협조자인 줄 정말 몰랐어요. 白씨 부부가 파리로 돌아간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세스 리가 북한에 협조한 것으로 믿는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뒤에야 알았습니다. 내 사무실에 왔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고, 白씨도 그 사실에 대해 내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미세스 리의 차림새는 어떠했습니까.
  
   『상당히 옷을 잘 입고 있었어요. 부유한 편으로 보였습니다. 나이는 45세 정도. 25년 전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어요. 마르거나 야윈 체격은 아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회색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미세스 리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상당히 긴장해(nervous) 있었습니다. 白씨 부부도 긴장하고 흥분해 있었고, 그녀도 긴장한 상태인데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그녀는 계속해서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뭔가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백건우씨는 당시 미세스 리를 믿는 것 같았습니까.
  
   『나는 백건우씨가 그녀를 의심한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로 돌아간 白씨가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서 그녀를 의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백건우씨는 미세스 리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백건우씨 혼자만 우리와 이야기했습니다.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해 영어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白씨 부인이 미세스 리와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세스 리가 북한에 협조했다는 보도를 본 후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매우 놀랐습니다. 미세스 리가 그러한 계획에 관여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엔 전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이 호텔 방 밖에서 문을 두드렸을 때 미세스 리가 문을 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나는 白씨에게 내가 갈 때까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白씨 부부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 朴仁京씨는 납북 미수사건이 공개된 후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의 소환에 불응하고 5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반면, 피해자 白씨 부부는 1977년 8월 말 서울에 들어와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부는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납치 공작 협조 혐의자」 朴仁京 근황
  
   朴仁京씨는 1926년 全州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활하며 이화여대 미술대학 1회생으로 입학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朴씨는 이화여대 학생 시절에 스승과 제자 관계로 李應魯 화백을 만났다. 1958년 李화백을 따라 프랑스로 간 朴씨는 22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어 李화백의 아내가 되었다.
  
   朴씨는 1967년 東伯林(동백림) 간첩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남편 李화백과 함께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등을 돌렸다. 1994년 金泳三 정부 시절, 서울에서 열린 「고암(이응로 화백의 아호) 5주기展」 참석을 시작으로 자유롭게 입국하고 있다.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白씨 부부이고, 그 다음 피해자는 朴仁京씨 남편인 李應魯 화백이다. 『李應魯 화백은 이 사건을 정말 몰랐다』는 白씨 부부의 증언과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李화백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
  
   그는 아내 박인경씨가 白씨 부부를 유인해 유고 자그레브로 갈 때 파리에서 50km 떨어진 시골에 있었고, 아내가 유고에 갔다는 사실을 사건 발생 후에야 알았지만, 아내 말만 듣고 한국 정부의 工作에 의한 제2의 東伯林 사건이라고 주장, 오해를 사게 되었다.
  
   수덕사 부근에 기념관을 짓고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던 李應魯 화백의 꿈은 이 사건으로 깨졌다. 李화백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젊은 시절의 李화백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수덕사 부근의 수덕여관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수덕여관 앞마당의 바위 위에 그린 그림은 지금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여관의 주인은 李화백의 본처 朴貴姬씨인데 얼마 전에 사망했다.
  
   기회만 되면 한국에 가려고 애를 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응로 화백은 1989년 1월10일 파리 보인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응로 화백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값은 1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인경씨는 한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에 온 이후에 그린 작품만 1만 점이 넘는다』고 밝혔다.
  
   이응로 화백 사망 후 박인경씨는 파리 근교 「보 쉬르 센느」에 있는 별장을 구입, 이곳에서 생활한다. 별장 안에는 이응로 화백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고암 서방」이란 한국식 전통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한국산 목재와 재래식 기와 등을 컨테이너에 싣고와 한국 최고의 목수 申榮勳(신영훈)씨의 지휘 아래 한국에서 건너간 목수 6, 7명이 두 달에 걸쳐 지었다.
  
   1994년 이후 朴仁京씨는 수시로 한국에 들어온다. 한국 내 공식 직함은 「이응노 미술관 관장」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이응노 미술관은 2000년에 개관되었다. 아담한 3층 건물로 2층은 전시장이며, 박인경씨 숙소는 3층에 있다. 이 미술관은 사립미술관으로 朴仁京씨 개인 재산이다.
  
   朴씨는 지난 2월 한국에 들어와 한 달 가량 머문 후 파리로 갔다. 오는 8월 말에서 9월 사이에 다시 한국에 온다고 한다.
  
  
  

   [李應魯 화백 부인 朴仁京씨 인터뷰]
  
   『나는 기밀서류 내용을 부정한다』

  
   지난 6월13일 오후 4시(파리 현지 시각 오전 8시), 기자는 파리의 박인경씨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朴씨는 귀가 잘 안 들린다며 기자에게 큰 소리로 말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朴씨는 「북한 공작원」에 대해서는 「그 사람」, 「북한 당국」은 「그들」이라 불렀고, 북한이란 말을 마지 못해 써야 할 때는 「이북」 혹은 「북쪽」이라 표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은 평양에서 유고에 보낸 북한 공작원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북한 당국이 유고 정부에 공식 시인한 기밀서류가 일본 NHK 방송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 머리 속에서 하루라도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사건이에요』
  
   ―북한 당국이 유고 정부에 공식 시인한 이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만일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면 이북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나는 그 내용을 부정한다고 써 주세요』
  
   ―이 사건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조사를 안 받고 어떻게 내가 서울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한 번도 조사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일 조사를 받았다면 조사한 기관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정부라 할 수도 있고, 중앙정보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기하고 나하고의 문제이지 어떻게 내가 제3자한테 이러고 저러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그걸 말해야 합니까』
  
   ―유고에서 돌아온 후 왜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 조사에 응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한국 정부나 한국 대사관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동백림 사건 때 속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어떻게 젊은 사람을 끌고 갈 수 있어요?』
  
   ―가짜 초청장을 만들어 白씨 부부를 동구권 공산국가 유고로 유인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백건우, 윤정희가 가기 싫어했다면 노인인 내가 어떻게 젊은 두 사람을 끌고 갈 수 있겠어요. 나는 연주회에 가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발로 간 것입니다』
  
   ―파빌로비크라는 사람 명의의 초청장을 받아와 백건우씨한테 보여 주며 『내 입장을 생각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면서요.
  
   『초청장은 백건우 이름으로 왔습니다. 초청장을 받은 사람은 백건우예요. 나는 파빌로비크가 누구인지 전혀 몰라요. 연주회 날짜까지는 시간이 있었으니까 초청장을 받은 본인이 초청자 파빌로비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나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라도 파빌로비크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나하고 상관 없는 사람을 내가 왜 알아야 해요』
  
   ―초청장 사본을 보니까 수취인은 「미세스 리」, 즉 朴선생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사본이 있다면 그 내용을 읽어 봐 주세요. 오래 전 일이라 나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기자가 『팩스 번호를 불러주면 사본을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朴씨는 『지금 나가야 하니까 다음에 전화하세요』라며 팩스 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
  
   전화를 끝내면서 朴씨는 일방적으로 『그야말로 북쪽에서 나를 정치적으로 써먹었다고 한다면, 남쪽에서는 나를 정치적으로 써먹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윤정희-백건우씨 부부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박인경씨가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보면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면서 『유고 정부의 공식 문서와 크리스텐슨 증언을 통해 모든 사실이 드러난 만큼, 이제는 박인경씨가 진실을 밝힐 차례』라고 말했다.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민주당 千容宅 의원은 『북한에 납북될 뻔한 윤정희씨는 유명 영화배우이고, 사건 자체에 의혹이 있는 만큼 공소시효가 지났다 하더라도 조사해서 국민 앞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박인경의 경우」
  
   몇달 전, 한국일보 金聖佑(김성우) 논설고문이 그의 고정 컬럼 「金聖佑 에세이」에서 한 여자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 여자의 이름은 朴仁京(박인경·73). 컬럼의 제목도 「박인경씨의 경우」라 했다.
  
   朴仁京씨는 타계한 在佛(재불) 화가 李應魯(이응로)씨의 두 번째 아내다. 40여년 전인 1958년에 李화백과 같이 프랑스로 떠나 줄곧 거기서 생활하다가 1967년 東伯林(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남편 李화백과 함께 프랑스 國籍(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등을 돌린 그녀는 1994년 서울에서 열린 顧菴(고암·李화백의 호) 5주기展(전) 참석을 시작으로 「자유롭게」 입국하고 있다.
  
   顧菴의 아내 朴仁京씨를 겨냥하여 한국의 대표적 論客(논객)중 한 사람인 金聖佑 논설고문이 장문의 에세이를 쓴 까닭은 컬럼 첫 문장에 나온다.
  
   <얼마 전, KBS 2TV의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란 프로에서 顧菴(고암) 李應魯씨의 10주기 추모 전시회에 참석하러 파리에서 와 있던 부인 朴仁京씨와의 대담이 장시간 방영되었다. 이 자리에서 朴씨는 1977년에 있었던 白建宇(백건우)·尹靜姬(윤정희)씨 부부의 납치미수 사건을 묻는 질문에 『나도 그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본인들이 알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기껏 이 말인가>
  
   金聖佑 고문이 朴씨의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1977년 파리에 거주하던 피아니스트 白建宇씨와 영화배우 尹靜姬씨 부부가, 朴仁京씨가 주선한 연주회에 초청받아 스위스 취리히 공항을 거쳐 공산국가 유고에 들어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이었던 金고문은 현지에서 그 사건을 취재하고, 朴仁京씨와 일문일답을 한 유일한 기자였기 때문이다.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한 金고문은 컬럼에서 「이때(인터뷰 때) 朴씨는 白建宇씨를 유고의 연주회에 초청하게 된 경위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회피했다」며 「당시 사건의 자초지종으로 미루어 북한의 工作(공작)이 아닌 것도 아니었고, 朴씨가 그것을 절대로 모를 일도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사건 경위에 나타나는 수많은 의문점은 차치하더라도 사건 직후 진상조사를 위한 파리 주재 우리 대사관의 소환에 왜 불응하고 5개월 동안이나 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까」라며 朴씨의 분명찮은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金고문은 「정부는 白建宇씨 일가의 납치미수 사건에 대해 朴씨가 밝힐 것은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양심범의 입장이라면 그런대로 태도를 분명히 천명한 뒤라야 입국시키는 것이 옳다. 朴씨가 아직까지도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우리 사회를 속이는 일은 위조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부와 朴씨의 각성을 촉구했다.
  
   金고문의 이 컬럼은 22년 前에 발생한 白建宇·尹靜姬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 정확히 표현하면 拉北(납북)미수 사건에서 미궁으로 남아있던 朴씨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國家情報院(국가정보원)에서도 內査(내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白씨 부부 拉北미수 사건은 희생자가 될 뻔한 白씨 부부의 증언, 한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의 추적 취재와 보도, 귀순한 李漢永(이한영·金正日의 전처 성혜림씨의 조카·북한공작원에 의하여 피살됨)씨 증언 등에 의해 사건의 윤곽은 거의 드러난 상태이지만 白씨 부부를 死地(사지)로 안내한 朴씨가 조사에 불응해 가해자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未完(미완)의 사건이다.
  
  
   연주회 초청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2년 후에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되는 유사한 사건을 유발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白씨 부부와 우리 정부가 「북한의 공모자」라 지목한 朴仁京씨가 사건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에 와서도 자신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白씨 부부에게 책임을 넘기고는 자유롭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권위와 정통성은 정권이 바뀌어도 단절되지 않듯이 이 납치미수 사건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 할 책임을 金泳三-金大中 정부는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덕사 부근에 은둔해 말년을 보내고 싶었던 고암의 꿈은 白씨 부부 납북미수 사건으로 깨졌다. 고암은 1977년 이후, 한번도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白씨 부부 납북미수 사건은 白建宇·尹靜姬씨 부부가 1977년 8월1일 오전, 파리 駐在(주재) 한국대사관에 출두해 공산국가 유고 자그레브에서 프랑스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신고하면서 공개되었다.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와 미모의 영화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한 이 사건은 국내외 언론의 관심 속에 국제적 사건으로 떠올랐다. 당시 보도내용을 종합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7년 7월 초, 白建宇씨는 李應魯씨의 부인 朴仁京(당시 51)씨를 통해,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부자가 자기 집 살롱에서 음악회를 열어 白씨의 연주회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았다. 고려화랑(李應魯씨가 파리에서 경영한 화랑)의 고객 「에나」라는 여성으로부터 이 제의를 받았다는 朴씨는 며칠 후, 파블로비크 이름의 초청장을 白씨에게 건네 주었다.
  
   7월21일자로 된 초청장의 내용은 白씨의 음악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것과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팡 등을 듣고 싶으며 白씨 가족은 물론, 朴仁京씨도 초청, 경비를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블로비크는 이 초청장에서 음악회는 고령의 자기 부모를 위한 것인데 그들이 유고 자그레브 교외의 별장에 살고 있다고 했다. 白씨는 연주장소는 당연히 초청자가 살고 있는 스위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白씨는 일단 거절했으나 朴仁京씨가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고 권유해 마지못해 응락했다. 白씨는 한 해 전에 李應魯씨 주례로 영화배우 尹靜姬씨와 결혼식을 (李씨 집에서) 올렸고, 평소 李씨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白씨는 부인 尹靜姬씨와 생후 5개월 반된 딸 眞希(진희)양을 데리고 朴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오후 2시5분, 파리發(발) 취리리行(행) 스위스 항공 705便(편)에 올랐다. 다음날인 7월30일은 尹靜姬씨의 33회 생일이어서 동행했다. 李應魯씨의 아들 隆世(융세)씨가 이들을 파리 공항까지 태워주었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 佛語(불어)가 유창하고 키가 큰, 파블로비크의 여비서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비서는 파블로비크의 양친이 유고에 가 있어, 거기서 연주회를 하기 때문에 유고행 비행기로 갈아 타야 한다면서 白씨 일행의 짐을 찾아 옮겨 싣는 수속을 밟았다.
  
   白씨가 비자도 없이 공산국가 유고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여비서는 스위스 제일의 갑부가 입국 수속을 다 취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며 취리히∼자그레브간 왕복표를 건네주었다. 尹씨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려고 했을 때, 여비서는 자기가 갔다오겠다고 자청한 후, 朴仁京씨에게 동행을 제의해 朴씨가 따라갔다. 朴씨는 여비서로부터 봉투를 받았다. 취리히 공항에서 잠시 대기하던 白씨 일행은 자그레브行 유고 항공기에 올랐다. 여비서는 동행하지 않았다.
  
  
   유고 공항 통과
  
   시골 공항처럼 작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尹靜姬씨는 「조선민항」이라 쓴 북한 항공기가 착륙 대기중임을 보았다. 白씨 일행은 비자가 없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뒤, 한 공항 직원이 나가라고 손짓해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 직원은 여권에 입국 확인 스탬프를 찍어주지 않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자 白씨 일행을 마중나온 사람은 없었다. 尹씨는 선글래스를 낀 동양 여성이 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중객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는 白씨에게 朴씨는 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 여비서한테서 받았다며 편지 봉투를 주었다. 봉투 겉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집의 약도가 그려져 있으며, 안에 유고 돈 8백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白씨는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약도를 보여주었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 길을 15분 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행인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택시 요금은 2백 디나르가 나왔다.
  
   마당에 사람이 없고 연주회를 초대한 집 치고는 조용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白建宇씨는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尹씨와 딸은 택시 안에 두고, 白씨는 朴仁京씨와 운전수 등과 함께 집 근처로 다가갔다. 정문은 잠겨져 있었고, 뒤로 돌아가니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운전사가 앞에 서고 그 뒤를 白씨와 朴씨가 따랐다.
  
   1층은 안을 둘러볼 수 없게끔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白建宇씨는 여비서가 준 봉투 속에 들어있던 키로 문을 열었다. 朴仁京씨가 맨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와 운전사는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있다 밖으로 나온 朴仁京씨는 2층에 만찬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白씨가 들어가보니 1층에 있는 세 개의 방은 모두 문이 잠겨 있었고 2층은 모두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중 한 방에 보자기를 씌운 테이블 위에 복숭아를 담은 과일 그릇과 하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白씨가 이웃 집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옆집에서 10대 소녀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白씨가 소녀에게 『아미크씨 집이 맞느냐』고 묻자 소녀는 『그렇다』면서 『늙은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이라고 했다. 소녀는 3층 창밖에 널려 있는 빨래를 가리키며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며 건너왔다. 소녀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가 뒤처져 들어갔다. 소녀가 3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안돼 갑자기 『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서 내려오는 소녀 뒤에 동양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란 白建宇씨는 택시쪽으로 달려갔다. 동양인은 『웨이트(Wait·기다려라), 웨이트』 하며 다가왔다. 白씨가 얼른 택시에 오르자 동양인은 택시 손잡이를 잡았다. 白씨는 안에서 문을 잠그고 운전사에게 빨리 출발하라고 말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白씨는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10분이었다.
  
   영사관은 문이 닫힌 뒤였고, 도서관도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크리스텐선이라는 부영사를 소개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서른 두 살의 젊은 사람이었다. 크리스텐선은 자기가 숙박중이던 팰리스 호텔로 白씨 일행을 안내했다. 호텔에서 白씨는 다음날인 7월30일 오전 8시50분에 유고를 출발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저녁을 먹었다.
  
   연락을 받고 호텔로 달려온 미국 공보관 관장은 白씨가 미국 영주권을 가진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고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白씨의 연주를 들었다. 밤 12시쯤 호텔로 돌아온 白씨 일행(尹靜姬씨+朴仁京씨)은 헤어지기가 겁나 모두가 4백16호실에 투숙했다. 크리스텐선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아침 6시40분쯤 밖에서 4백16호실 문을 두드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白씨가 가만히 있으니까 朴仁京씨가 문을 열려고 했다고 한다. 白씨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고는, 크리스텐선 방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후 크리스텐선은 『문밖에 세 명이 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인데 모두 북한 사람 같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1시간쯤 지난 후, 짐꾼 한 명을 데리고 온 크리스텐선은 白씨 일행을 로비로 안내했다. 로비에는 미국 영사관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사는 크리스텐선에게 白씨 일행을 공항까지 안내하라고 일렀다.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는데 담당관은 입국 도장이 없다며 의아해했다. 전날 입국 때 白씨 일행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던 사람이 나타나 또 한번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白씨 일행은 파리行 유고 항공기 「JU 1242」便을 타고 7월30일 정오쯤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후, 유고 美 영사관의 크리스텐선이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었다>
  
  
   초청 경위에 대한 金聖佑-朴仁京 대화
  
   파리에 도착한 白建宇씨는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金聖佑씨에게 유고에서 있었던 사건을 털어놓았다. 金聖佑 특파원은 朴씨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 파리 시내 20區(구) 악소街(가) 14번지 8층에 있는 朴씨 집을 찾아갔다. 다음은 金聖佑 특파원과 朴씨와의 일문일답(한국일보 기사 인용).
  
   ―白씨를 연주회에 초청하게 된 경위는.
  
   『우리는 친부모와 친자식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우리를 잘 따랐고, 우리도 그들을 귀여워했다. 그런 나를 의심하다니 서운하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데…』
  
   ―초청 경위를 듣고 싶다.
  
   『서울에서 신문에 났다니 신문에 뭐라고 썼는지 보고 대답하겠다』
  
   ―신문에서는 朴여사에게 공모혐의가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누명을 벗어야 할 것이 아닌가.
  
   『빈집(자그레브의 집)에 혼자 먼저 올라갔다고 의심하는데, 왜 올라가 보면 안되며, 내려와서 『만찬준비가 다 돼 있으니 올라가 봐』라고 내가 말했다는데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내가 너무 태연했다고 시비인데 태연하지 않았으면 또 일부러 태연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 아닌가. 白建宇가 누명을 씌운 것이다. 저들은 둘이고 나는 혼자니…』
  
   ―초청 경위를 밝히지 않으니 의심하는 것 아닌가.
  
   『파리로 돌아와서 白씨 내외는 나를 앉혀 놓고 꼬치꼬치 따지는데 이것은 경찰신문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정에서도 아니요, 그런 식으로 달려드니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그리고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나만 따르는 바보가 어디 있는가. 저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연주회의 초청자가 대관절 누구냐.
  
   『취리히에 사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무슨 제재소인가 공장을 경영하는 큰 회사의 사장이라고 했다(白씨에게는 스위스 제1의 갑부라고 말함). 사장은 파리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고, 부모들은 유고에서 살다가 스위스로 넘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장을 소개한 사람은.
  
   『우리 화랑에 그림 구경하러 가끔 오는 어떤 여자가 소개했다. 무슨 말끝에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白建宇를 자랑했더니 취리히에 사는 어떤 사장이 1년에 한번씩 고령의 부모들을 위해 음악회를 여는데 갈 생각이 있겠느냐고 해서 白建宇를 키워줄 욕심으로 그에게 가 보라고 했다』
  
   ―그 여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글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초청장 주소는 가공
  
   ―이름은 아는가.
  
   『하도 사람 이름 기억을 못해서…. 화랑에 사인이라도 남겨놓고 간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화랑에는 댓 번, 아니 서너 번 온 여자다』
  
   ―주소도 모르는가.
  
   『모른다』
  
   ―초청장을 받아 白씨에게 전했다는데 그 초청장은 이 여자가 가지고 온 것인가.
  
   『아니다. 다른 여자였다. 초청하는 사장의 비서라면서 화랑에 두고 갔다. 처음 여자는 사장에게 白씨 초청을 바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사장의 조카라는 여자를 통해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초청장에는 「내 조카를 통해서 잘 들었다」고 되어 있고, 그 조카 이름은 「에나」라고 적혀 있음)』
  
   金聖佑 특파원과 인터뷰를 가진 후 朴仁京씨는 3차에 걸친 駐佛 한국대사관의 출두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金聖佑 특파원은 초청장에 쓴 주소지 「스위스 취리히 펠드 스트라스 17번지」를 찾아갔다. 「펠드 스트라스」라는 거리는 있었지만 17번지는 없었다. 이 거리는 1번지부터 23번지까지가 없고, 24번지부터 시작돼 주소부터가 가짜였다. 초청자 「미하일 파블로비크」는 유령 인물이었다.
  
   白씨 부부의 유고 탈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그레브 주재 美 영사관의 크리스텐선 부영사는 白씨 부부가 파리에 도착한 지 6일 후인 1977년 8월4일,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전화 인터뷰를 갖고 『白씨 일가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게 느껴져 돕기로 했었다』면서 『白씨 일가와 함께 있던 朴仁京씨는 나와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8월14일, 1面에 게재한 장문의 기사에서 白建宇씨가 유고의 자그레브 별장에서 만났던 동양 남자와 유고 공항 입구에서 보았던 선글래스를 낀 동양 여자는 자그레브 駐在 북한 통상대표부에 근무하는 북한인 부부로 밝혀졌다며 白씨 부부 납치기도 사건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분명하다고 보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지적된 朴仁京씨의 「미심쩍은 행동」은 다음과 같다.
  
   ①연주회 초청을 주선했다는 여자에 대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며 아주 친한 사람』이라고 했다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모르며 서너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며 분명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②초청장이 처음엔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서라는 여자가 두고 갔다고 번복했는데 비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③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의 여비서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러 갈 때 朴仁京씨가 따라가, 白씨 부부가 안보는 데서 자그레브 별장의 약도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았다.
  
   ④자그레브 공항 도착 후, 마중나온 사람이 없어 白씨가 두리번거리자 朴仁京씨가 봉투를 내주면서 『택시타고 오라는 말인가봐. 택시 타고 가자』라고 말했다.
  
   ⑤별장 도착 후, 빈 집을 앞장서 올라갔다 나오면서 『만찬회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올라가 봐』라고 말했다.
  
   ⑥미국 영사관으로 가면서 『이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자』고 말했다.
  
   ⑦미국 영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지고, 미국 공보관장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호텔에 그냥 있자고 했다.
  
   ⑧북한 사람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가볼까』 하면서 문을 열어주려는 것을 白씨 내외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⑨白씨가 한국대사관에 가서 신고를 하자고 하자 『나는 프랑스 정부와 손잡고 살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
  
  
   金正日의 비준
  
   朴仁京씨가 白씨 부부와 「유고행 연주회」를 떠날 때, 李應魯씨는 파리에서 50km 떨어진 시골에서 아들과 함께 있었다. 소식을 듣고 파리로 올라온 李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白씨 내외가 집사람과 같이 취리히로 연주 여행을 떠나는지는 전혀 몰랐다. 아내는 취리히에서 열린 내 개인전 때 두고 온 그림들을 찾아오겠다고 해서 다녀오라고 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李씨는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측이 꾸민 제2의 東伯林(동백림) 사건』이라 주장했다.
  
   1977년 8월9일, 駐佛(주불) 한국대사관 영사과는 교민들에게 주의를 요망하는 안내문을 보냈다.
  
   <지난 7월29일 白建宇씨 가족이 朴仁京씨(李應魯씨 부인)에 의하여 스위스 부호(가공 인물로 밝혀졌음)의 만찬 연주에 안내한다는 명목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까지 유인되어 가서 북괴에 의하여 납치되기 직전에 간신히 모면하여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7월30일 파리로 귀환한 사실이 있습니다.(중략)
  
   이와 관련하여 교민 여러분은 여권상 목적지 또는 경유지가 기재되지 않고, 또 유효한 입국사증(비자)이 없는 한, 동구권이나 기타 공산국가에 여행하시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파리에서 이희세(기자注·李應魯 화백의 조카)가 간헐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소위 「통일조국」이라는 잡지 및 기타 북괴 선전물이 교민사회에 배포되고 있는 바, 이러한 북괴 선전 간행물을 접수하였을 때는 지체없이 반송하거나 파기하시어 추호도 북괴의 선전공작에 말려들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납치미수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인 1977년 8월31일, 尹靜姬씨가 파리에서 귀국하고, 며칠 후 白建宇씨도 연주회를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출두해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정부는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李應魯 화백의 국내 전시회를 금지시키고 작품의 유통을 막았다.
  
   白씨 부부 납북미수 사건은 1996년 북한 金正日의 전처 성혜림 일가의 서방탈출을 계기로 귀순 사실이 공개된 李漢永씨의 증언으로 재조명되었다. 李漢永씨(성혜림의 조카)를 최초로 접촉했던 기자는 李씨로부터 『對南(대남) 연락부 이정룡 부부장의 지휘를 받은 북한 공작원들이 5만 달러를 주고 유고 경찰 관계자를 매수하며 치밀하게 저질렀다』며 『납치 실패 후 이정룡이 모스크바 아파트에 찾아와 이같은 사실을 밝히고 독안에 든 쥐를 놓쳤다며 주먹으로 응접세트를 치면서 애석해했다』고 말했다.
  
   李씨는 자기가 쓴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동아일보사 펴냄)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이 사건을 총지휘했던 사람은 이정룡 연락부 1부부장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까지 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사건은 모스크바에서 이부부장에게 직접 들었다. 공작책임자의 말이니 가장 정확할 것이다. (중략)
  
   제일 데려오기 쉬운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윤정희라고 판단했다. 작전계획의 비준도 받았다. 김정일이 허가한 것이다. 납치 장소는 유고슬라비아로 정했다. 처음부터 유고슬라비아로 데려오면 공산국가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음악을 좋아하는 돈 많은 재일교포가 백건우씨의 팬인데 그가 백씨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윤정희를 잘 아는 할머니를 공작원으로 참가시켰고 유고의 자그레브 경찰국장을 3만 달러를 주고 포섭했다. 별장 하나를 빌려 외곽은 자그레브 경찰이 지키고, 별장 안에는 공작원들이 숨어 있었다. 공작원 할머니가 집에 들어와 『왔어요』라고 말하면 모두 튀어나가 납치하기로 했다.
  
   납치작전의 실패는 할머니가 대사를 틀리게 말한 탓이다. 할머니가 『왔어요』 하면 벽장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튀어나오게 돼 있었는데, 할머니가 『다들 어디 갔나』하는 바람에 옷장에 숨어 있으면서 튀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암호가 이상하자 숨어있던 사람들 중 허묵(허정숙의 아들)이라는 연락부 과장이 튀어나왔다.
  
   백씨 부부는 미국의 보호 아래 자그레브 공항을 빠져나갔다. 북한측은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한번 더 납치를 시도해보자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관계자들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갔다. 이정룡 부부장만 살아 남았다>
  
  
   전시회날 他界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 후, 朴仁京씨는 파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교민들과의 접촉을 끊고 살았다.
  
   李應魯씨 내외는 1983년 한국 國籍(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어 1987년에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평양 방문중 李화백은 6·25 전쟁 때 헤어진 아들 李文世(이문세)와 해후했다. 文世는 자식이 없던 李화백이 養子(양자)로 받아들인 형의 아들이다. 6·25 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文世는 北에 정착해 그 무렵엔 시골 국민학교 교장이었다. 文世씨는 3년 전인 1996년에 사망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둘째아들 隆世(42)씨도 李화백이 프랑스로 떠나던 1958년에 養子로 입적했었다. 隆世씨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어느 날, 李화백의 프랑스 집에 가나화랑의 대표 李皓宰(이호재·45)씨가 찾아갔다고 한다. 李씨는 李화백에게 국내 전시회를 권유했다는 것이다. 전시회를 열 것을 제안하는 젊은 화랑 대표를 李화백은 安企部(안기부) 요원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작품을 보고 싶다는 李씨에게 李화백은 둘둘 말아 보관하고 있던 작품을 꺼냈다. 李화백이 작품을 활짝 펼치자, 그 순간 李씨는 울음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李皓宰씨는 『大家(대가)의 작품이 함부로 보관돼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났다』고 말했다. 李씨는 顧菴의 첫 인상을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다』고 말했다.
  
   大家의 작품을 한 눈에 이해하는 화랑대표 李씨에게 마음이 끌린 李화백은 『나는 한국 정부에 피해를 입었다.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남는 것은 내 작품이다. 작품을 보고 나를 평가하라. 작가로서는 자신이 있다. 작품에 문제가 있으면 顧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전시회를 할 경우, 한국 정부에 내 작품을 빼앗길까 걱정이 된다』고 우려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9년 1월10일, 「李應魯 회고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李화백은 참석치 못하고 그의 작품만 한국에 들어왔다. 바로 이날, 李화백은 파리 보인病院(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파리 시내 20區(구)에 있는 프랑스 유명 예술가들의 안식처인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駐佛(주불) 한국문화원장 張德相(장덕상·65)씨가 대사관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張씨의 말이다.
  
  
   李화백 장례식장의 북한 벤츠
  
   『李화백측은 한국대사관에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서울의 본부에서 顧菴 사망을 문의해 알게 되었다. 大使(대사)와 상의하여 내가 대사관의 대표로 참석했다. 장례 시작 5분 전인, 오전 10시25분쯤 도착했는데 조문객이 30여명쯤 되었다. 조금 있으니 벤츠 두 대와 승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유네스코 駐在 북한 대사와 파리 북한대표부 대사가 벤츠에서 내렸다. 그들은 故人에게 조의를 표했다. 조문객은 모두 1백20여명쯤 되었는데 80여명이 외국인이었다. 국내 인사는 10명쯤 되었다』
  
   張德相씨는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으로 발령받은 1965년부터 顧菴을 알고 지냈다. 파리의 유일한 한국 특파원이었던 그는 김치 등 한국 음식이 생각나면 顧菴집을 찾아 顧菴 내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張씨에게 顧菴과 朴仁京씨에 대해 물어보았다.
  
   ―李應魯 화백은 어떤 성향의 분입니까.
  
   『놀러 갈 때마다 李화백은 국내 정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할아버지가 정치에도 관심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파악하기로, 李應魯 화백은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아내 朴仁京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朴씨는 이화여대 다닐 때(1945년에서 1949년 사이) 학생운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東伯林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입니다. 李화백 집에서 朴仁京씨가 작성한 프랑스 교민들의 신상기록철이 발견되었는데, 대사관에서 작성한 영사파일보다도 더 세밀하게 분류해 놓았답니다』
  
   顧菴이 北에 기울어진 것은 첫째 아들 文世씨가 北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89년 월간미술과 가진 인터뷰에서 顧菴은 父情(부정)의 단면을 드러냈다.
  
   『6·25 때 헤어진 아들을 동백림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어. 부모 된 심정에 오로지 아들을 만나보기 위한 일념으로 갔을 뿐이여. 결국 아들도 생면 못한 채 간첩 누명만 쓰게 된 거여…(중략)』
  
   196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모 기업체 회장은 고암의 親北(친북)은 배고픔도 한 원인이 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동양화가를 파리에서 누가 알아줍니까. 끼니 이을 돈 마저 떨어지자 顧菴은 돈을 꾸기 위해 駐佛 한국대사관을 찾아갑니다. 丁一權씨가 駐佛 대사할 때인데 그 당시는 한국 정부도 쪼들릴 때 아닙니까. 빈손으로 나오고 말지요. 최후의 수단으로 顧菴은 일가족 동반 자살을 결심합니다. 아내와 자식을 다리 밑으로 데려가 하루 밤을 지새며 자살궁리를 하던 그는 다리 밑에서 억척스럽게 살고 있는 개들을 보고 마음을 돌려 북한대표부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생활비와 畵具(화구) 살 돈을 빌려 연명했다고 들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北이 우리보다 잘 살 때이지요. 그렇게 해서 北에 기울어진 화가나 작가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李應魯 화백은 납치미수 사건과 무관
  
   파리에서 李應魯 화백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金聖佑 고문은 『李화백의 생전의 소원은 수덕사 옆에 기념관을 짓고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었다』며 『이 꿈을 尹靜姬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이 무산시켰다』고 말했다. 그후에도 李화백은 기회만 되면 한국에 가려고 애를 썼으나 아내 朴仁京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金고문은 말했다. 다음은 金고문과 일문일답.
  
   ─납치미수 사건 발생 직후 朴仁京씨를 최초 인터뷰한 기자로서 朴씨의 행동을 어떻게 봅니까.
  
   『朴씨는 처음엔 「나도 같이 납치당할 뻔했다」고 주장하다가 두 번째는 「한국 정부가 제2의 東伯林 사건으로 조작했다」며 말을 바꿉니다. 지금은 朴씨가 尹靜姬 부부에게 덮어씌우는 바람에 尹씨 부부의 자작극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해를 풀겠다는 朴씨의 주장은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며, 핵심을 흐리는 것입니다.
  
   본인이 뭐라고 주장하든 朴仁京씨는 白建宇씨를 유고 연주회에 초청한 주선자입니다. 주선자가 당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연주회를 주선하게 된 경위에 대해 朴씨는 아직도 명쾌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한국대사관의 소환에 응하여 밝혀야지요. 소환에 응하지 않은 점도 규명돼야 합니다』
  
   ─인터뷰를 한 후에 朴씨를 만난 적은 없습니까.
  
   『못 만났어요. 朴씨를 상대로 납치미수 사건을 집중적으로 추궁한 기자가 없어요』
  
   ─朴씨는 北과 연계돼 있습니까.
  
   『北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면 해명했을 것으로 봅니다. 朴씨는 엄연한 납치미수 사건의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가 해명이나 사과 한 마디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사회 공익상 문제입니다』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에 李應魯 화백도 관련돼 있습니까.
  
   『발생 전에는 정말 몰랐을 것입니다. 발생 후에 아내의 말만 듣고 한국 정부의 工作(공작)에 의한 제2의 東伯林 사건으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에 있어서 李화백과 朴仁京씨는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李화백이 혐의를 벗었으니까 朴仁京씨도 무관하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정부나 프랑스 경찰이 이 사건을 수사했습니까.
  
   『李씨 내외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유야무야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명서」 대신에 「사유서」
  
   1994년 1월10일, 호암 갤러리. 顧菴 5주기展에 朴仁京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이 발생한 지 17년 만의 첫 고국 방문이다. 그 이후 朴씨는 한국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朴씨는 이 자유를 어떻게 얻었을까. 가나화랑 李皓宰 대표의 설명이다.
  
   『朴仁京씨가 顧菴 5주기展에 참석하기를 원해, 파리 駐在 한국대사관에 朴씨의 귀국 여부를 타진했습니다. 정부에 「해명서」를 제출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朴씨에게 전달했습니다. 朴씨는 「사유서」를 쓰기로 했습니다. 朴씨의 사유서를 검토한 대사관측은 몇 구절을 고치자고 요구했습니다. 朴씨는 「그렇게 하면 내가 사과하는 셈이 된다. 사과는 내가 받아야 한다」면서 처음엔 거부했으나, 나중에 받아들여 대사관측이 원하는 대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부와 오해가 있었던 것에 사과한다」며 사과라는 말을 집어 넣었습니다. 사유서 제출 이후부터 한국 출입에 지장이 없어졌습니다』
  
   朴씨가 쓴 「사유서」는 存安(존안)돼 있었다. 관련 부서에서는 자료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사유서에는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정부 관계자가 알려주었다. 白씨 부부 납치미수 사건의 책임을 물어 정부가 展示(전시)를 금지시킨 顧菴의 작품은 顧菴이 사망한 1989년에, 그리고 朴仁京씨는 顧菴 5주기를 기해 한국에 마음대로 출입할 「자유」를 얻었다.
  
   朴仁京씨는 1926년 全州(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활하며 이화여대 미술대학 1회생으로 입학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梨大(이대) 학생 시절에 顧菴을 만난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연을 맺은 두 사람은 22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부부가 된다.
  
   朴모씨는 朴仁京씨의 동생이다. 朴모씨는 딸만 둘인 朴仁京씨 집에 養子로 들어갔다. 나이는 朴仁京씨보다 두 살 어리며, 朴仁京씨가 이화여대에 다닐 때, 연세대학을 다녔다. 朴仁京씨 대학 동기들은 朴모씨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고 기억했다. 朴모씨는 6·25 전쟁 직전에 고려제지에 입사, 13년을 근무하고 제지공업 기술 습득을 위한 연수생 자격으로 1964년 독일로 출국했다. 그는 연수기간을 연장해가며 몇년째 입국을 미루었다.
  
   1967년 東伯林 사건이 터진 후, 朴모씨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독일에 연락할 길이 끊긴 가족들은 서독 주재 한국대사관에 朴씨의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했다. 朴씨는 東伯林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으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1996년 10월, 서울가정법원은 朴모씨를 失踪者(실종자)로 선고됐다. 생존해 있다면 朴모씨는 올해 71세다.
  
   朴모씨의 아내는 이화여대 앞에서 화방을 운영하며 자식을 기르고 시부모를 모셨다. 틈틈이 그녀는 남편 친구는 물론, 시누이 朴仁京씨 친구들에게 남편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1992년에 사망했다. 사망 1년 전, 그녀는 남편을 찾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그녀는 파리에 사는 시누이 朴仁京씨에게 남편의 행방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朴씨는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해외재산 관리인
  
   독일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의 행방을 왜 파리의 시누이에게 물으려고 했을까. 朴仁京씨의 한 대학 동기생은 이렇게 말했다.
  
   『자식 셋에 시부모 모시고 어렵게 살면서도 남편을 찾아나서는 朴모씨 아내의 모습은 정말 애처러웠다. 죽는 순간까지 남편의 행방을 알려고 했다. 우리들은 朴仁京씨와 朴모씨의 대학 시절 활동으로 미뤄 朴仁京씨만은 행방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朴仁京씨는 모른다고 했다. 우리 동기들은 朴모씨가 北에 간 것으로 짐작한다』
  
   기자는 朴모씨의 장남을 만나 아버지의 행방과 朴仁京씨와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朴仁京씨는 내 고모다. 어머니와 고모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1991년 파리의 고모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모른다. 고모는 서울에 와도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고모와 남처럼 지낸다』
  
   顧菴이 타계한 지 2년 후, 일본에서 李應魯 화백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된 작품은 거의 팔려나갔다. 판매는 양씨라는 姓(성)의 여자 畵商(화상)이 책임졌다. 양씨는 韓日 화랑가에서 朴仁京씨의 해외재산 관리인으로 통한다. 그런데 양씨는 한때 조총련계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양씨와 거래를 하고 있는 국내 모 화랑 관계자의 말이다.
  
   『양씨에겐 여자 형제가 한 명 있는데 북한의 고위 관리와 결혼했다. 양씨는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조총련을 탈퇴하지 않았고, 자주 北에 들어갔다. 양씨의 남편은 한국 國籍이다. 양씨는 최근에 전향, 한국 國籍으로 바꾸었다. 國籍을 바꾼 지금은 顧菴 작품을 거의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안다』
  
   양씨는 李화백이 살아 있을 때 일본에서 전시회를 갖는 고암 작품의 위탁판매권을 독점 계약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고암은 佛語(불어)를 할 줄 모른다. 顧菴의 입과 손발 역할을 朴씨가 대신했다. 朴씨는 顧菴의 영원한 반려자로 불렸다. 顧菴의 강의를 들었던 프랑스의 한 교민은 朴씨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그의 말이다.
  
   『顧菴은 아주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온 몸을 써가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려고 했다. 강의 통역은 부인 朴씨가 주로 전담하는데 顧菴이 열 가지를 이야기하면 朴씨는 두 가지 정도로 줄여서 설명하고, 顧菴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과 다르게 통역하기도 했다. 顧菴의 예술 세계가 朴씨의 잘못되고 짧은 통역으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느낌을 받았다』
  
  
  朴仁京씨 별장 구입
  
   顧菴 사망 이후 朴仁京씨 생활에 변화가 따랐다. 친구들은 『넉넉하지 않던 생활이 풍요롭게 변했다』고 말했다. 朴씨의 생활에 변화를 준 것은 顧菴이 남긴 수만점의 작품들이다. 그 값은 백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顧菴은 우리나라 화가중에서 서양화의 金煥基(김환기) 화백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동양화에서 多作(다작)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오전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顧菴이 남긴 작품의 수에 대해 朴仁京씨는 「가나아트」 여름호에서 『渡佛(도불) 이후의 작품을 정리중인데 1만점이 넘는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값 나가는 작품은 3천여점으로 추정되었다.
  
   고암은 작품을 미술관용·판매용·습작용으로 나눠 제작했다고 한다. 인기있는 작품은 호당 1백만원에서 2백만원, 비인기 작품은 호당 50만원에서 1백만원 사이라고 한다. 顧菴 그림중 최고가는 1억원에 근접했다는 게 화랑가 이야기다.
  
   顧菴 작품은 일본에서 제일 많이 팔리고, 미국 교포들이 그 다음으로 많이 구입한다. 朴仁京씨는 顧菴의 작품을 팔아 현금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에서는 고암 작품의 판매를 朴仁京씨가 그동안 고사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 顧菴 10주기(1월10일) 때 공개적 작품 판매가 처음으로 이뤄져 억대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화랑가에서 보고 있다.
  
   朴仁京씨 생활의 첫 외형적 변화는 별장 구입이다. 별장은 파리 근교 「보 쉬르 센느」에 있다. 朴씨가 주변에 밝힌 구입 대금은, 백만 프랑(우리 돈으로 약 2억원) 선이다.
  
   별장 안에는 「고암서방」이란 한국식 전통가옥이 있다. 李應魯 화백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고암서방」은 한국산 목재와 재래식 기와 등을 컨테이너에 실어와 지었다. 한국 최고의 목수 申榮勳(신영훈)씨가 지휘했다. 申榮勳씨의 말이다.
  
   『한국에서 건너간 목수 6, 7명이 동원돼, 짓는 데 두 달 걸렸다. 평수는 20평 정도다. 朴仁京씨가 돈을 직접 지불했기 때문에 총 얼마가 들었는지는 모른다. 자재를 컨테이너에 담아 배로 싣고 가서 트럭으로 운반했으니 운반비가 많이 들었고, 보험료와 목수 인건비를 합쳐 한국에서 짓는 것보다 세 배가 더 들었다고 보면 된다』
  
   건축업계에서는 약 3억원이 든 것으로 추정했다.
  
   朴仁京씨는 최근 발족한 「顧菴 기념사업회」(회장·윤범모) 운영기금으로 2억원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수덕여관 주인
  
   朴仁京씨의 파리 생활이 이렇다면 李화백의 본부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월12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부근의 수덕여관을 찾아갔다. 가을의 수덕사는 등산객 발길로 북적였다. 수덕사 일주문 왼쪽에 있는 수덕여관은 간판만 빛을 발할 뿐 건물은 쇠락했다. 낮이어서 그런지 15개의 방 가운데 손님이 찬 곳은 몇 개에 불과했다. 젊은 시절 李화백이 여관 앞마당의 바위에 새긴 그림은 세월의 풍상에 아랑곳 없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문화체육부에서 1995년에 만든 안내문이 서 있었다.
  
   「李應魯 선생이 한때 작품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여 여기에 표석을 세운다」
  
   李화백의 고향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충남 洪城(홍성)이다.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 때 顧菴은 15세의 나이로 고향을 떠난다. 그는 전통 서화계의 巨木인 해강 金圭鎭(김규진) 문하에서 글씨 사군자 서예 묵화를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南畵(남화) 2大家의 한 사람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다. 일본의 패망이 서서히 드러나던 1945년 3월, 顧菴은 수덕여관을 사들이고 이곳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수덕여관에서 顧菴은 화가 羅蕙錫(나혜석)을 만났다. 나혜석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중인 金一葉(김일엽)의 뒤를 따라 수덕사에 왔으나 인연이 없어 삭발은 못하고 수덕여관에서 장기 투숙자로 살았다. 고암은 수덕여관의 나혜석을 이따금 방문하여 작품세계를 논했다.
  
   顧菴의 추억이 서려 있는 수덕여관에는 그의 본처 朴貴姬(박귀희·91)씨가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었다. 朴씨는 친정쪽 6촌 동생 朴貴河(박귀하·73)씨와 며느리 權채원(73)씨의 보살핌 속에 거동을 못하고 누워 지내고 있었다. 며느리 權씨는 北에서 사망한 고암의 아들 李文世씨의 아내다.
  
   朴貴姬씨가 누워있는 방의 벽에는 朴씨 환갑 때 李화백과 같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통통한 朴씨 모습은 간데가 없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朴씨가 기자를 맞았다. 귀가 먹어 잘 못듣고, 이가 없어 조금밖에 먹지를 못한다는 朴씨지만 기자가 준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顧菴과 朴仁京씨에 대하여 여쭤볼 게 있어서 왔다고 하자 朴씨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변화가 기자에게는 분노로 느껴졌다.
  
   옆에 앉은 며느리 權채원씨와 6촌 동생 朴貴河씨에게 朴仁京씨와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남입니다. 원수같이 지냅니다』
  
  
   비극
  
   그 이유를 물었다.
  
   『파리에서 수차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와 할머니(顧菴 본처)가 좋은 마음에서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이혼한 부인이라고 작품 한 점 주지를 않습니다. 이곳 수덕여관에는 顧菴의 작품이 단 한 점도 보관돼 있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도 朴仁京씨는 서울에 와도 전화 한 통 없습니다. 6·25 전쟁 때 顧菴을 따라온 朴仁京씨는 이 근처에서 피난살이를 한 과거를 잊은 모양입니다』
  
   朴仁京씨는 그동안 수덕여관을 두 번 방문했다고 했다. 지난 봄에 顧菴의 프랑스 제자들과 같이 들렀을 때 할머니는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朴仁京씨에게 『돈 좀 줘』 하고 하자, 朴씨는 웃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李화백과 관련된 사진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했다.
  
   누워서 대화를 듣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안약 좀 넣어줘』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도박또박했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눈치료를 위해 안약을 넣는다고 했다. 며느리 權씨의 말이다.
  
   『정신이 말짱하고 치매도 없으십니다. 여기에 고암기념관을 짓는 게 소원인데 돈이 있어야지요.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만 합니다. 顧菴 작품 몇 점만 달라고 朴仁京씨한테 부탁했지만 파리에선 모른 척합니다. 비극이죠』
  
   고암 사망 1년 전인 1988년부터 그를 만난 가나화랑 李皓宰 대표는 『말년의 顧菴 선생은 국내에 들어가고 싶어하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顧菴 선생은 작품을 쌓아놓고 우시곤 했다. 한국에 들어가고 싶으나 작품을 빼앗길까 봐 울었다. 작품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顧菴의 작품은 프랑스 법에 따라 배우자까지는 상속이 되나 배우자가 죽으면 국가에 귀속된다고 한다. 자식들은 작품 관리인은 될 수 있지만 상속은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배우자 朴仁京씨가 일흔 셋의 고령이지만 정신이 맑고, 건강이 좋아 아직은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 畵壇에서는 朴仁京씨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고암의 작품이 한국에 오기를 기대한다. 朴仁京씨도 『내가 갖고 있는 작품은 고암 것이다. 이것들은 고암 기념사업에 쓰기로 했다. 고암 사업의 중심부도 파리에서 서울로 옮기고 싶다』면서 「顧菴 기념사업회」 발족을 계기로 한국 移轉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납치미수 사건의 희생자 白建宇씨는 『李應魯 화백은 숨길 줄을 모르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 사건을 정말 몰랐고, 개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처리를 잘못해 오해를 사게 되었다』며 『朴仁京씨는 진실을 밝히고, 우리 사건과 무관한 李應魯 화백이 핍박받은 것처럼 부각시키지 말라』고 말했다.
  
  
[ 2023-01-20, 09: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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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산     2023-01-20 오후 1:04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이별가/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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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명복을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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