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특전사령관 정병주 인터뷰/"지금도 총 맞던 상황을 떠올리면 피가 역류"
부하에게 피격된 前 공수특전사령관이 말하는 8년간의 은둔, 그리고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친 金五郎 소령 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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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10·26 사건) 그날의 총격은 아무런 계획없이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12·12 사건에 대한 공개 청문회 같은 것을, 언론기관에서 한 번 벌여보시지요?"
 *"군인은 정치 하기엔 너무 단순…복잡한 사회 끌고 나갈 수 없다."
<1987년 12월 월간조선>
  
  <군정종식 기도 드린 전 공수단장>
  
  1979년 12월13일 새벽 특전사령부 사령관실로 들이닥친 부하들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으나 왼팔에 총상을 입고 목숨을 건진 정병주(鄭柄宙)씨(60·당시 특전사령관·소장). 그는 그해 12월24일의 국방부 발표문에는 [김재규의 고등학교 후배로서 그를 추종해 왔고, 정 총장을 구출한다고 병력을 동원한 사람]으로 발표되었다. 이 발표문이 나올 때쯤 그는 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그는 비서실장이 총맞고 죽은 것도 몰랐다고 한다. 지난 80년 초에 아내가 정한 시간보다 늦게 문병을 와서 신경질을 냈더니 김오랑 소령의 안장식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병상에서 그는 몇 번 조사를 받기는 했으나 수사기관에서는 구속기소할 만한 죄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지, 김재규나 정승화씨와 더 이상 연루시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수사관에게 그랬어요. 내가 죄가 있다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 구속할 것이지 왜 아무런 경고도 없이 총을 쏘았느냐고요."
  
  1980년 1월20일 그는 육군 소장으로 예편되었다. "두 가지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는데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1949년에 육사 9기로 입교하면서 시작된 그의 군생활은 31년 만에 끝났다. 6·25 때 그는 1연대 소대장으로서 후퇴하다가 한강변에서 포탄의 파편에 머리를 맞아 후송되었다. 공수단장 시절에는 낙하훈련중 다리를 부러뜨린 적도 있다. 79년 12월13일 새벽의 부상은 그의 군생활중 세 번째였다. 이 세 번째 부상은 전장에서 적에 의해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에게는 영원히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가 된 것이다.
  
  두 차례의 수술을 받고 팔을 쓸 수 있다는 보장이 된 상태에서 3월 초순 그는 병원을 나왔다. "바로 집으로 갔느냐"는 물음에 그는 "어느 중간지점에서 2∼3일간 쉬다가 갔다"고 했다. 서울 청파동으로 돌아와 보니 집에는 군 수사기관에서 붙여준 경호원(?)이 있었다. 그는 전화도 대신 받아주고 하면서 늘 정씨를 따라다니다가 1980년 6월6일에 철수했다고 한다. 그 뒤의 생활에 대해 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 세 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씨가 저 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
  
  보살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독실한 불교신도인 그의 아내(55)는 이런 남편을 보기가 안타깝던지, 남편을 절로 자주 데리고 가서 불공을 드리게 하고 스님과도 만나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정씨의 타는 속이 다스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 2년간 스스로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정부 쪽으로부터 어떤 제의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없었다"고 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부터 공언을 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군복을 벗는 그 순간이 인생 퇴직의 날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퇴직 시기가 너무 빨리 와서 적응하기가 힘이 들었지요."
  
  1983년에 큰아들(32)이 결혼식을 올렸다. 큰아들과 며느리는 천주교 신자였다. '늙으면 자식따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정씨 부부도 명동성당으로 나가게 되었다. 노부부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여섯 달 동안 열심히 성당에 나갔다. 1984년 2월에 영세, 그해 10월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요아킴. 이 즈음부터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명동농성사건이 끝난 뒤 지난 6월15일 밤에 이 성당에서는 1만여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미사가 열렸었다. 이날 정병주씨는 바깥에서 소낙비를 흠뻑 맞으면서 군정종식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공수단 인맥의 중심이었으나…>
  
  특전사령관 출신답게 호방한 기질을 아직도 보여주는 정병주씨는 김재규와는 안동농림 1년 후배라는 관계가 있다. 1964년 무렵 김재규가 6사단장일 때 정 대령은 참모장이었다. 어느날 박 대통령이 김 사단장 숙소를 찾아와 놀다가 갈 때 정 대령이 안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돼 그 뒤로는 박 대통령의 사랑도 받게 되었다고 한다. 1967년 연대장을 거친 그는 車圭憲씨의 뒤를 이어 공수단장으로 취임했다. 그 이듬해 준장이 되었고 1971년까지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약 80회의 점프 기록을 갖고 있다.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예비낙하산을 메고 내렸다가 다리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71년부터 일선 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74년에 소장으로 승진, 陸英修여사 피살사건 직후 車智澈 대통령 경호실장 밑의 경호실 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74년 말에 고향과도 같은 특전사령부로 돌아가 사령관이 되었다.
  
  12·12사태의 주역들 중에서는 정병주 사령관 밑에서 직속부하로 근무했던 장교들이 무척 많았다. 노태우, 장기오, 박희도, 최세창 장군 등이 그들이다.
  
  "나의 전임자는 몇 사람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사령관을 무시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등 위계질서를 어지럽혔고, 사령관은 이를 참지 못해 기합을 넣고…. 결국 그런 갈등이 문제가 되고 해서 사령관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1974년 말에 갑자기 제가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어요. 저는 박 대통령에게 직접 '다른 선배들도 있으니 저에게는 다음에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사양했으나 거절하시더군요. 1974년부터 79년 12월12일까지 특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이 부대를 확대 개편하는 데 주력했지요. 이 부대는 사실상 제 손으로 키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령관 시절에 저는 옛날에 공수특전단에서 근무한 경험자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장기오, 최세창, 박희도 이런 장교들이었지요. 저는 이들을 아꼈고, 남의 싫은 소리를 들어 가면서까지도 그들의 뒤를 봐주었읍니다. 일부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은 위관시절부터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박 대통령의 귀여움을 받았기에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그렇게 만든 데는 박 대통령뿐 아니라 박종규, 윤필용, 차지철 같은 측근들의 과오가 많습니다."
  
  정병주씨는 정호용씨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많이 했다.
  
  "정호용 장군은 아주 생각이 깊고 의리가 굳은 사람입니다. 동기생 중에서도 정치에 비교적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고, 지휘체계를 통해서 이를 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12·12 사태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그 사태 뒤에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저는 정 장군이 우리 군의 정치적 중립화에서 과거 이종찬 장군이 했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12·12 때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 여단장에 대해 "그들은 승진, 보직 등에서 모두 나의 은혜를 입었던 부하였다. 정규 육사 선후배 사이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고 말했다.
  
  <부마사태 때 부산에서 지휘>
  
  경북 영주가 고향인 정병주 소장이 격동하는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휩쓸려 들게 된 계기는 1979년 10월16일에 터진 부마사태였다. 10월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정병주 사령관은 휴가중이었다. 그는 즉시 부대로 돌아왔다. 서울 근교의 공수 1개여단이 10월18일 새벽 부산으로 급파되었다. 평화시로는 사상 최대의 야간 공수작전이었다. 정 사령관도 김재규 정보부장과 같은 비행기편으로 부산에 내려갔다고 한다. 다음날 김재규 부장은 군용기편으로 성남 비행장에 돌아왔다. 정 사령관은 먼저 와 있다가 안동농림 선배이기도 한 김 부장을 마중나가 "병력이 더 필요한 것 같으냐"고 물었다. 김 부장은 "더 파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있어도 부산에 가까운 해병부대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마산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바람에 2개 공수여단이 다시 기차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한 여단은 마산으로 보내졌다. 정 사령관도 부산으로 내려가 지휘부를 설치했다. 부산에서 공수부대원들은 몽둥이와 총검으로 무고한 시민들에게도 가혹행위를 하여 원성을 샀다. 10월26일 밤 정병주 사령관은 부산의 지휘부에서 서울 근교의 윤흥기(尹興基) 여단장으로부터 긴급전화를 받았다.
  
  "육군본부에서 저의 여단을 즉시 육본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깜짝 놀란 정 사령관은 서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재규 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순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 연결이 되지 않았다. '권력 핵심부에서 큰일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졌다. 겨우 정승화 총장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정 총장은 얼마나 바쁜지 "김해로 가라"고만 말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김해에 가니 군 수송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와 있던 공수단, 보안사의 요원들 50여 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보안사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도 보였다. 비행기 안에서는 모두가 말없이 긴장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앞으로 닥칠 운명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성남 비행장에 닿으니 육군본부에서 차가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차는 육군본부로 달렸다. 지하벙커로 들어가니 육군 수뇌부 장성들이 모여서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비로소 정 사령관은 박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접했다. 정 사령관은 고등학교 선배인 김재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인데, 때로는 머리쓰는 것이 비상하고, 때로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날의 총격은 아무런 계획없이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법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과장하고, 미화하였지만 그 사건에는 전혀 깊이가 없어요. 허황하고 허무하고…"
  
  <12·12 청문회라도>
  
  10·26사건 뒤에 그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책임을 느껴서가 아니라 인간의 허무, 인생의 무상함을 보고는 마음이 심란해서 견딜 수 없더라는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저의 학교 선배지요, 박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은 제가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김계원 장군도 제가 좋아했던 분이고요. 이런 분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되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고…"
  
  정승화 총장의 만류로 특전사령관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12·12를 맞은 것이었다. 그는 12·12 사태에 대한 국방부 발표문에서 자신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는 것에 대해서 "허, 허" 웃으며 설명했다.
  
  "저는 김재규씨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단장 시절에는 신직수 부장으로부터도 명절에 촌지를 받았어요. 그게 저만 받은 겁니까. 이미 관례가 된 일이 아닙니까."
  
  그는 12·12 사건의 진상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고 했다.
  
  "진상은 역사를 위해서 제대로 밝혀져야 합니다만 군의 입장도 생각해야 합니다. 12·12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이 아직도 군의 요직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즉 가능하면 군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끌고 나가야 민주화에도 보탬이 될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12·12 사건에 대한 증언이 다 다르니까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공개 청문회 같은 것을, 언론기관에서 한 번 벌여보시지요?"라고 했다.
  
  <장님이 된 고 김 소령의 부인>
  
  그는 기자와 만나기 며칠 전, 12월13일 새벽에 상관을 지키려다가 육사 선배가 지휘한 돌격대의 사격을 받고 죽은 김오랑(金五郎) 소령의 미망인 白榮玉씨(39)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뒤 그 충격으로 장님이 되었다는 백씨는 흐느끼면서 "이제 사령관님도 많이 늙으셨죠?"라고 묻더란 것이다. 기자는 정씨에게 짓궂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 사령관께서 키우신 것이나 진배없다는 공수단이 일단 유사시에 처해서는 사령관의 적법한 명령을 듣지 않았고, 위험이 다가오자 김오랑 비서실장 한 사람을 빼고는 측근 부하들까지도 모두 피신해 버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제가 총 맞던 상황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피가 역류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허탈하고, 국민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정병주씨는 자신의 비서실장이 죽고, 그 아내가 장님이 되었다는 부담까지 안고 살아왔다. 일부에서는 그가 끝까지 야인으로 남은 것은 죽은 부하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닌가 말하기도 한다. 백영옥씨는 육사 25기 출신인 남편이 그날 밤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감하고도 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날 일이 터질 줄, 그분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뒤에 제가 알아보았는데, 합수본부에 있던 남편의 동기생이 그날 밤 일찍 전화를 걸어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귀띔해 주었다는 겁니다."
  
  백씨는 36세에 요절해버린 남편의 죽음을 사흘 뒤에야 알았다고 한다. 김 소령의 장례식은 죽은 지 나흘 만에 특전사 연병장에서 치러졌다. 백영옥씨는 까무라치고, 김 소령의 몸은 군인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뼈가루가 든 상자는 국립묘지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당시에는 김 소령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느냐, 없느냐로 논란이 크게 일었다. 육사 동기생과 일부 상관들은 김 소령의 군인정신은 "국립묘지에 눕고도 남음이 있다"고 주장, 영안실에 뼈 상자를 안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립묘지에선 시신이나 뼈상자로 영안실에 일정기간 안치해 두었다가 모아서 묘역에 안장하게 된다. 김 소령이 죽고 나서도 백씨는 장교 관사에 머물면서 끈질기게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보러 다녔다. 특히 남편을 쏜 대대를 지휘한 박모 중령을 찾아가 따지기도 했다고 한다. 박 중령은 "나는 떳떳하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고 말했고, 백씨는 "사령관을 쏘는 것이, 적법한 명령이냐"고 공박했다는 것이다. 이 박 중령은 12·12 사건 며칠 전에 육사 후배인 김 소령 부부를 초대, 하룻밤을 즐겁게 지낸 적도 있었다.
  
  남편의 죽음과, 그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해서 정신적인 충격을 너무 많이 받은 때문인지 백씨의 시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눈물로 지새던 백영옥씨는 국립묘지의 영안실로 달려가 남편의 유골상자를 안고 몸부림치기도 했다고 한다. 김 소령은 1980년 2월29일에 국립묘지에 묻혔다. 병상에서 정병주씨가 김 소령의 죽음을 안 것은 이날이었다고 한다. 백씨는 1980년 5월 친정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완전히 장님이 된 뒤 지금까지 수절하고 있다. 1983년에 백씨는 친정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부산불교자비원을 열었다.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아 고민거리에 대한 상담을 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다. 김 소령과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 백씨는 두 수양딸을 데리고 산다고 한다. 백씨는 총소리가 싫어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정병주씨는 백씨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총성과 항명과 하극상이 어지럽게 오고간 그날 밤 정병주씨는 그래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부하를 한 명 데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육본측 장성들과는 다르다.
  
  <군인은 정치하기엔 너무 단순>
  
  정병주씨는 정호용 육군참모총장이 마련한 예비역 장성 모임에 두 차례 나갔다가 우연히 최세창 대장과 마주쳤다고 한다. 최 장군은 12월 13일 새벽 자신의 휘하 여단 병력을 지휘, 정 사령관을 체포한 그 사람이다. "그때 무슨 말이 오고갔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정병주씨는 씩 웃기만 했다.
  
  "그래도 정호용 장군이기에 그런 모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정호용 장군은 12·12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저의 뒤를 이어 특전사령관이 되었지요. 제가 뒤에 만나 사령관실이 엉망진창이었을 텐데… 하고 농담을 했더니, 깨끗이 되어 모르겠습디다, 하고 말하더군요. 군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는 정 장군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정 장군이 광주사태 진압의 책임자로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공수여단을 일단 지역 계엄사령관 휘하로 배속시키면 특전사령관은 지휘권이 없어요.}
  
  완전한 백발인 그는 167㎝의 키에 67㎏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매일 하는 대중탕에서의 냉온탕을 건강의 비결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군이 정치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내가 군인을 해봐서 잘 알지만…" 하면서 열을 올려 설명해갔다.
  
  "군인은 명령에 거의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된, 사고방식이 아주 단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끌고 나갈 수가 없어요. 저도 아내로부터는, 당신은 가정도 군대식으로 다스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직업군인은 옷을 벗고 정치를 해도 절대로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어요. 군대는 상관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돼 있는 사회인데, 그런 사고방식을 정치와 경제에 적용해보십시오. 법치국가에서 명령과 법을 구별하지 못하고, 명령에다가 법을 갖다 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鄭柄宙씨는 기자와 헤어질 때 요즈음 신문에서 지가 이름이 鄭炳宙라고 잘못 표기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정병주는 이 정병주가 아닙니다" 하고 웃었다. 그리곤 수도원으로 기도하러 가야겠다면서 일어났다. 이날은 토요일(11월14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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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注)정병주 씨는 1989년 3월 실종 130여일 만에 경기도 고양군 산중턱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측은 "석연치않은 점이 많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 2023-01-23, 14: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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