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인식의 틀을 바꾸는 '戰後70년‘ 운동의 의미
’화려한 시절‘ 1980년대의 명예회복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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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 인식의 틀을 바꾸는 '戰後70년‘ 운동의 의미
  
   ’화려한 시절‘ 1980년대의 명예회복부터!
  
   시위대의 함성과 최루탄의 눈물 속에서 10년간 세계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시대. 정보화, 민주화, 세계화, 극일(克日), 공산권 붕괴의 계기까지 만들었던 1980년대의 주인공들, 특히 全斗煥에 대한 작금의 홀대는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소란스러웠지만 화려했던 1980년대를 암울한 시대로 가르치는 어둠의 세력을 지우는 방법이 '戰後70년’ 운동이다. 1980년대를 긍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부정하게 되어 있다!
  
  
   趙甲濟(조갑제닷컴/TV 대표)
  
  
  
   '戰後 70년 운동'의 대전략!
  
  
   월간조선 지난 호에서 내가 "전후(戰後)70년"이란 시대구분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자고 했더니 의외로 호응이 뜨거웠다. 개항기, 개화기, 일제식민지, 해방전후로 시대를 구분하여 생각하면 좌절과 갈등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반일(反日)종족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피해의식을 좌익이 이용, 국민들을 속이고, 정권을 잡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말했듯이 "과거를 지배하면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한국전을, 세계가 이긴 전쟁으로 정확히 개념규정하고, 휴전 이후 진행중인 70년의 전후사(戰後史)를 새로운 시대구분으로 설정하면 자연히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피, 땀, 눈물로 써온 70여 년의 한국 현대사는 누가 뭐래도 우리가 착하게 살아왔음을 증명한다. 이제는 부채의식도, 열등의식도, 노예근성도 필요 없다. 국력에 맞는 생각을 하게 되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데 "戰後 70년, 이제는 자유통일이다"로 귀결된다.
   개화기, 식민지, 해방, 건국, 전쟁의 격동기를 거친 뒤 얻은 자유와 평화의 전후(戰後) 70년! 우리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복지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는 여세를 몰아 세계시민들과 손 잡고 자유통일로 직진하자!>
  
   예컨대 '戰後70년'을 화두로 던졌을 때 생각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戰後70년, 한손에 망치 들고 다른 손에 총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戰後70년, 아쉬운 점도 많았다. 이승만을 잊고 박정희를 미워한 것!
   *戰後70년,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이뤘다!
   *戰後70년, 우리는 선택했다.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을!
   *戰後70년, 당신의 가장 감동적 순간은?
   *戰後70년, 가장 슬펐던 때는?
   *戰後70년, 가장 위대한 인물은?
   *戰後70년, 가장 고마운 사람은?
   *戰後70년, 최고의 가수는?
   *戰後70년, 최고의 선수는?
   *戰後70년, 나는, 우리는, 회사는 무엇을 했나?
   *戰後70년,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戰後70년, 자유의 방파제는 이제 그만, 자유의 파도가 되자!
   *戰後70년, 국가건설, 민주발전, 자유수호, 법치정착, 다음은 자유통일!
   *戰後70년,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
   *戰後70년, 4대 재발견-해양정신, 기업가 정신, 자주정신, 상무(尙武)정신!
  
   이런 식으로 생각이 이어지다가 보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어 나라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일종의 연호(年號)를 바꾸는 의미이다. 그래서 올해는 '戰後 70년 운동'을 벌이려 한다. 회고록 쓰기 운동, 조직이나 회사에서 지난 70년의 기록을 정리하는 운동, '전후사(戰後史) 70년 퀴즈 대회' 등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인류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를 국민적 기록으로 모아놓으면 여기에 적힌 삶의 무게가 종북좌익들의 빛 바랜 이론과 관념을 쓰레기통으로 쳐넣게 만들 것이다. 이는 역사전쟁의 최종승리를 예약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나의 戰後 70년
  
  
   1945년생인 나는 1970년 6월 말 공군에서 제대한 후 대학에 복귀하지 않고 부산에 있던 국제신보 수습기자 시험을 쳐서 1971년 2월1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올해는 기자생활 53년째 되는 해이다. 박정희 정권 때 한 번, 전두환 정권 때 두번 해직되었으나 그때마다 복귀하여 현대사의 기록자 역할을 했다. 중금속 오염, 포항석유개발, 부마사태, 10·26 사건, 12·12 사건, 광주사태, KAL007 피격사건, 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사건, 북한인권 문제, 김대중 대북(對北)불법송금 사건, 미국 내 김대중 비자금 의혹 사건, 맥아더의 실수 등에 대하여 집중취재하여 책이나 기사로 남겼다. 1995년 11월 이스라엘 라빈 수상이 암살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되었으며, 작년 암살된 아베 수상을 단독 인터뷰한 유일한 한국기자이기도 했다. 박정희 전기 13권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상대로 한 수십 회의 인터뷰는 나중에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다. 전후사(戰後史) 70년 중 약50년을 직업적으로 관찰한 행운을 누린 셈이다.
  
   1. 기자로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 1979년 10월27일 새벽, 박정희 대통령 시해 소식을 부산의 살인사건 취재현장에서 들었을 때. 전날 궁정동 암살작전의 지휘자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그 3년 전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서 나를 조사했던 이였다. 포항석유 시추를 정보부가 위장회사를 만들어 했는데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석유 발견 발표를 한 이후 그 석유가 경제성이 없다는 논문을 썼다가 다시 정보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신문사에서 추방된 적이 있다. 10·26은 전후 70년 중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시대를 마감하고 12년에 걸친 전두환 노태우 시대를 연 날이다.
   2. 가장 벅찼던 순간: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벽을 넘어서'. 그 전날은 폭우, 그날 날씨는 끝내주었다.
   3. 가장 아슬아슬했던 순간: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 개표 날. 가장 안도한 날이기도 했다.
   4. 가장 황당했던 순간: 2017년 3월10일 박근혜 탄핵 결정
   5. 가장 한심했던 순간: 2020년 4월15일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아직 개표가 진행중인데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 퇴진을 선언하고 사라졌다가 1년 반 침묵한 뒤 느닷없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6. 가장 불가사의한 일: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압사 사고. 길이 40m, 너비 3m인 골목에서 159명이 죽다니!
   7. 가장 분노했던 순간: 2018년 9월19일 문재인 평양 연설, "남쪽 대통령 문재인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소개로 운운."
   8. 가장 인상적인 연설: 1965년 8월 박정희가 한일회담 반대 학생들을 꾸짖다! 1971년 4월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
   9. 가장 감동적인 글: 1950년 7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쓴 편지
   10. 가장 고마운 분: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
   11. 가장 나쁜 인간상: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문재인, 이재명
   12. 가장 미안한 두 분: 전두환, 노태우
   13. 기성세대의 가장 큰 실수: 한자(漢字)포기. 한글전용(專用)에 의한 한국어 파괴로 국민교양의 약화와 국가엘리트 실종사태를 불렀다.
   14. 가장 위험했던 순간: 1950년 7월 경북 청송의 고향집이 유엔군의 오폭(誤爆)으로 불타는데 질식사할 뻔했다.
   15. 가장 선명한 기억: 다섯 살 때이던 1950년 7월 인민군이 청송의 우리 마을로 줄지어 들어오던 순간,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 밭의 익어가는 오이를 따서 가져갔다. 그때부터 나는 반공(反共)소년이 되었다.
  
  
   절망의 끝에는 희망밖에 없었다
  
  
   1995년 1월호 월간조선은 별책부록으로 "한국인의 성적표"를 냈다. 해방 5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성취를 확인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편집장이던 나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썼다.
  
   <민족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월간조선 편집진의 머리에 남는 이미지어(語)는 ‘대폭발’이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반세기 동안 이 나라의 기성세대가 얼마나 위대한 성취를 했는지 우리가 먼저 놀랐다. 편집을 지휘한 해방둥이 기성세대로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이 작업을 도와준 서울대학교 대학원생의 한마디였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군요.”
   분단·전란·정변 속을 헤치고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 나라를 끌어올린 그들의 성취는 20세기 세계사의 최우등상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족 에너지가 대폭발할 수 있도록 그 뇌관을 터뜨리는 역할을 한 것은 분단과 전쟁이었음을 이 책은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분단과 전쟁은 한국인들을 속박하고 있던 위선적 명분론과 낡은 제도까지도 폐허화해버렸다. 전란은 우리를 벌거벗기면서 공리공론이 아닌 자신의 삶에 정직하고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절망의 끝에는 희망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생존에의 의지로 돌려놓는 위대한 국가 지도자들을 만났다. 민군(民軍), 민관(民官)이 한덩어리가 되어 조선조의 봉건적 지배이데올로기를 걷어차고 통일신라 이후 잠들어 있던 민족의 야성을 흔들어 깨워 정신없이 달려온 해방 50년!>
  
   나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썼다. 해방 50년의 기적은 미완성이다. 그 기적은 좌익·수구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통일에 다다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야 한국 기성세대에의 평가도 완결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디까지나 그 중간평가일 뿐이란 주장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戰後 70년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1980년대의 복권
  
  
   ‘전후(戰後) 70년’을 재조명할 때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시기는 좌익들이 암울한 시대라고 폄하하는 1980년대이다. 신군부 집권, 광주사태, 서울올림픽 유치, 이를 막기 위한 북한정권의 아웅산 테러, 김현희의 대한항공기 폭파, 소련붕괴의 신호탄이 된 KAL007 격추사건, 민주화의 분수령 2·12 총선,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 그 가운데서도 10년간 세계최고의 경제성장률, 앞을 내다 본 정보화 인프라 투자, 이병철의 반도체, 정주영-정세영 형제의 자동차 산업 승부수, 최초의 무역흑자, 낮은 물가, 중산층 70%, 노동 및 대학 운동권의 좌경화, 6월 대시위, 전두환-노태우 합작의 6·29 선언, 그에 따른 직선제 개헌, 노태우 당선, 총선에서 여소야대, 노무현을 미래의 대통령으로 예약한 5공 청문회, 언론자유의 만개(萬開), 문무(文武)합일의 서울올림픽 개회식,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획기적으로 넓힌 북방정책(한중수교 등), 올림픽이 단초가 되었던 동구 공산권 붕괴 등등.
   최고의 경제성장과 최대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일본을 따라잡는 기반까지 마련했다. 전두환·노태우는 서울올림픽을 국가대전략의 중심에 놓고 공산권 붕괴와 민주화의 2중 전환기에 단순한 위기관리가 아니라 적극적 기회활용으로 나아가, 그 뒤 한국인이 먹고 사는 기반을 확충하고 강화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건설이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을 넘게 했다면 1980년대의 소용돌이 속 발전은 그 길을 확장, 질주하게 만들었다. 월간조선 기자로서 그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나는 이 기간에 두 번 해직되고 두 번 복직했는데,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순간을 기록자로 경험하면서 그 기록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흥분을 느꼈다. 지금은 나를 두 번 해직시켰던 전두환 세력을 열심히 변호한다.
  
  
   최소한의 인명손실
  
   1980년대가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이런 대격변이 최소한의 인명손실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18년간 수많은 폭력시위와 마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별도로 다뤄야 할 광주사태를 빼면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시위진압은 온건했다. 오히려 시위대가 죽인 경찰관수가 더 많지 않을까(동의대 사태 때 7명 사망).
   시위대의 함성과 최루탄의 눈물 속에서 10년간 세계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시대. 정보화, 민주화, 세계화, 극일(克日), 공산권 붕괴의 계기까지 만들었던 1980년대의 주인공들, 특히 전두환(全斗煥)에 대한 작금의 홀대는 저주를 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게 만든다. 소란스러웠지만 화려했던 1980년대를 암울한 시대로 가르치는 어둠의 세력을 지우는 방법이 '戰後70년‘ 운동이다. 1980년대를 긍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부정하게 된다!
   이 시대의 위대성은 피를 손에 묻히며 집권했던 전두환을 순화시켜 퇴임할 때는 직선제 개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도록 한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임 약속‘을 지킨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2021년 가을에 서거했을 때 문재인 정권과 언론이 보여준 냉소적 태도는 배은망덕을 넘어 역사에 대한 모독이고, 이런 성향이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는 낙관할 수 없다. 광주사태의 책임을 두 사람에게 추궁하는 것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전두환은 신군부의 집권에 책임이 있지 유혈진압은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의 몫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발포명령, 암매장, 헬기사격의 누명을 씌우려 했지만 실패, 세 가지가 낭설임을 증명했다(국방부 특조위가 헬기사격에 의한 양민학살을 주장했으나 명백한 거짓말임을 모순덩어리 보고서가 증명한다). 1980년대의 재조명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재평가를 결과하게 될 것이다. 좌익이 둘을 극도로 미워하는 것도 그렇게 해야 ‘1980년대’를 ‘암흑시대’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우파적 관점에서도, 좌파적 관점에서도 평가할 점들이 무척 많은데 좌익은 우파적 성취를 지우는 데 집착하다가 민주화의 성취까지도 날려버린다.
   40년 이상 서울 특파원을 지낸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 신문 객원 논설위원은 몇 년 전 펴낸 취재기 "날씨는 맑지만 波高는 높다"(조갑제닷컴 출판)에서 전두환 작품인 서울올림픽을 높게 평가하였다.
   <북한은 오지 않았지만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가 참가하여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후 소련 및 공산권의 붕괴, 동서 대립과 냉전 시대의 종언(終焉)이라는 세계사적인 대변화가 일어난다. 서울올림픽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울올림픽이 동서 대립을 끝내게 했다!”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 인식’의 문제인데, 서울올림픽의 유치에서부터 개최까지 현장에서 취재한 나로서는 전적으로 동의(同意)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은 우선 1990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그해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한소(韓蘇)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한 다음, 9월에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나도 노태우 대통령과 동행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취재를 갔는데, “반공국가 한국이 여기까지 오다니…”하며 실로 감개무량했다.>
  
  
   박정희 못지않은 전두환의 경제성적표
  
  
   전두환-노태우 시절 한미일 관계가 좋았던 것이 북한의 도발을 막고 서울올림픽과 민주화를 평화 속에서 추진할 수 있었던 기본 조건이었다. 두 대통령의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의 기반이 이뤄졌다.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1981~2015년의 35년간 성장률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해는 한국이 외환(外換)위기를 겪던 1998년 한 해뿐이었다.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공이다. 기획재정부 강만수(姜萬洙) 장관은 당시 ‘이 위기만 잘 넘기면 한국은 경쟁국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적중하였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의 경제통계를 비교하면 1980년대의 놀라운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1. 1979년 1인당 GD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D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 개 국가 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70년대엔 외채 망국론이 강했지만,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대외(對外)자산 253억 달러로 개선되었다가 1989년에는 순(純)채권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19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실로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 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전두환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일성에게 무력보복을 하지 않고(그랬다면 서울올림픽이 날아갔을지 모른다) 외교, 경제 등 다른 대전략으로 대응하여 북한을 고립시켰다. 김일성이 서울올림픽에 대응한다면서 1989년에 개최한 평양축전은 준비하는 데 50억 달러가 들어갔고 이게 재정파탄으로 이어져 망조가 든다. 성경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만인 앞에서 선을 행하여 악을 이긴 전두환의 유골은 지금도 장지를 찾지 못하고 자택에 있다.
  
  
  
  
   '벽을 넘어서'란 시대정신
  
   1980년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전 이후 이 나라가 가장 널리 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선 민주화의 시대, 국제적으론 공산권 붕괴라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담은 구호가 '벽을 넘어서'였다.
   원래 서울 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좀 딱딱한 이 개념을 개폐획식의 기본철학으로 구체화시키면서 아주 역동적인 ‘벽을 넘어서’란 말로 풀어놓은 이는 개폐회식 상임위원 이어령(李御寧) 교수였다.
   역대 올림픽 개회식 가운데서도 최고로 꼽히는 서울올림픽은 ‘벽을 넘어서’란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모든 공연과 상징과 동작을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기 때문에 그토록 힘찼고 예언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란 것을 실감케 한 구호였다.
   베를린 장벽과 동구권 붕괴를 부른 시위 현장에서 데모 송으로 울려 퍼진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였다.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있는 ‘브레이킹 다운 더 월’(Breaking down the wall)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그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코리아나 그룹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당시로선 동양인이 부른 곡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팔린 노래가 되었다. 1990년 4월 체코 무용단이 김일성 생일에 맞추어 평양에 가서 공연할 때 배경음악으로 연주되었고, 김일성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주제가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주제가를 작곡했던 조지오 모로더가 작곡하고 토머스 R 휘틀록이 작사했다. 국내에선 한국인 작곡가가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이 ‘우리 취향이 아니라 손님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세계 일류 작곡가와 작사가를 고른 것이다.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2021년 10월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문재인 정부는 마지못한 듯 국가장으로 모시면서도 홀대를 했다. 대통령 조문도 없었고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 유족을 훈계하기도 했다. 병중(病中)이던 이어령 선생은 조시(弔詩)를 적어 유족들에게 보냈다.
   "몸이 성치 않아서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했다. 이 시(詩)는 개발연대의 지도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문화부문을 챙겨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감사를 깔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고인이) 군사독재와 문민독선의 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굳어진 정치풍토에서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싸우시면서 질기고 질긴 질경이 꽃을 피우셨다"며 "보통사람의 시대, 북방외교 시대, 그리고 문화부를 처음 신설해 문화를 여신 업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회고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 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 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사람과 함께
   손잡고 가자고 사릿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 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민주화가 삶속으로 스며드는 1990년대 이후의 일이고 문화 올림픽이기도 했던 1988년 대축제가 계기가 되었다. 군인 출신 박세직과 문인 출신 이어령이 문무(文武)합일로 이룩한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감동! 이게 동구 공산권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게 뭐냐"는 문제의식을 심어 그 이듬해 거리로 몰려나와 공산정권을 차례로 타도했다. 1980년대의 명예회복이 요구되는 한 이유이다.
  
  
  
   1980년대의 마지막 날 기억
  
  
   1989년 12월31일, 1980년대를 청산하는 마지막 통과의례의 희생양처럼 국회의 5공(共)비리-광주특위 연석회의장에 불려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다 받아야 했다. 나도 현장에 있었다. 국회 참의원 회의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前 대통령의 증언을 듣기 위해 2층 방청석에 자리 잡았다. 여야의 약속대로 한 시대의 아픔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그 역사적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은, 기자의 개인적 삶의 궤적도 전두환과 유관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기자는 전두환 시설에 두 번 해직되었다). 기자의 다소 감상적 기대는 구역 질 나는 정치 쇼에 의해 능욕되고 말았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은 전두환을 상대로 엄정한 질문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누가 전직 대통령에게 더 많은 창피를 줄 것인가 하는 경쟁을 벌였다. 전두환의 답변서 낭독을 다 듣고 질문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답변서 낭독 도중 도중에 야당의원들이 뛰쳐나와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는 바람에 일곱 차례나 정회(停會)가 되었다. 밤늦게 증언대를 향해 노무현(盧武鉉) 의원(민주당)이 명패를 던지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전두환은 밤 12시 직전 기자들을 대기실로 불러 낭독을 못다 한 답변서를 15분 정도 읽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평민당 의원 및 보좌관들이 몰려나와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그를 1990년대로 보내버렸다.
   나는 연출자의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저질연극을 구경하면서 1980년대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는 것이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국회를 나오는 길로 옆에 있는 순복음교회로 직행하여 새해맞이 예배에 참석, 1980년대 마지막 날의 잡친 기분을 달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돌아가면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이 국회증언을 끝으로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선언했고, 김영삼(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도 "5공 청산을 통해 심화되었던 사회 각 부문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다짐하였다. 1월4일자 조선일보 사설도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5공 문제에 매달리기엔 90년대의 과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이런 국가적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궁지에 몰리자 김영삼 대통령은 소급입법을 통해서, 5년 전 역사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12·12 사건, 광주사태 등을 법적으로 단죄할 것을 선언,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태풍이 분다. 부관참시(剖棺斬屍)의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이 구속되니 '화려했던' 1980년대도 '암울한 시대'로 검게 칠해지는 것이다. 1980년대의 마지막 날 가졌던 나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적중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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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뒤의 별표
  
  
   위대한 성취의 목록을 만들자!
  
  
   1995년 1월호 월간조선이 선정했던 해방 50년의 50대 성취 목록을 먼저 소개한다. '戰後 70년 운동'에 동참할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올해 창사 70주년이 되는 회사도 이런 표를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해방 50년 한국인의 50대 성취' 목록과 필자
  
   *1945년 신탁통치 반대: 항일(抗日)·반탁(反託)·반공(反共)은 건국의 원동력_이철승(李哲承)
   *46년 국방경비대 창설: 무(武)를 경시해온 조상들을 원망하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_이형근(李亨根)
   *47년 해방 후 최초의 미국(美國) 유학생: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_동덕모(董德模)
   *48년 5·10선거와 정부수립: 이승만(李承晩)의 대미(對美) 외교와 우익 청년들의 피로 이룬 건국(建國)_손진(孫塡)
   *49년 농지개혁법 제정: 인민혁명을 막은 이승만의 승부수_김성호(金聖昊)
   *50년 낙동강 전선 방어전의 무명 전사들: 학생·노무자·부녀자들이 총동원된 총력전의 승리_채한국(蔡漢國)
   *51년 전시(戰時) 대학: 피난시절 향학의 불씨를 피운 전시 대학_한말숙(韓末淑)
   *52년 평화선 선포: 한일(韓日) 외교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평화선’ 선포_최보식(崔普植)
   *53년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韓美) 상호방위조약 조인: 남한이 경제건설에 주력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조약_김용식(金溶植)
   *54년 독도수비대 창설: 일본에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충의(忠義)로 독도를 지켰다_김병열(金秉烈)
   *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起工): 화학비료 자급과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시초_최지현(崔志弦)
  
   *56년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 식량난 해소와 경제도약에 중요한 역할 수행_김용삼(金容三)
   *57년 ‘큰사전’ 완간: 16만4000단어 수록한, 명실상부한 국어대사전_안병희(安秉禧)
   *58년 원자력법 제정: 오늘의 원자력 대국(大國)이 있게 한 이승만의 혜안_한영성(韓榮成)
   *59년 경향신문 폐간과 언론 자유 투쟁: 최초로 제기된 언론 자유의 소중함_송원영(宋元英)
   *60년 4·19의거: 실패한 혁명(革命)이 아니라 미완성의 혁명_이수정(李秀正)
   *61년 행정 근대화: 선진화된 군(軍)의 제도 도입해 국가 행정 근대화 시동(始動)_이석제(李錫濟)
   *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목표 성장률 7.1%를 초과달성_이형구(李炯九)
   *63년 섬유 수출 쿼터제: ‘수출하면 부자 된다’는 인식 심어줘_안영철(安永哲)
   *64년 울산 정유공장 본격 가동: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 수행_정의우(鄭義友)
   *65년 한일(韓日) 국교(國交) 정상화: 한일 경제교류를 ‘조국 근대화’로 승화시켜_오재희(吳在熙)
  
   *66년 KIST 발족: 과학 불모(不毛)의 땅에 과학기술의 불을 붙인 선구적 역할_최형섭(崔亨燮)
   *67년 석탄 생산 1200만t 돌파: 에너지 자급자족과 산림(山林)녹화에 기여_김두영(金斗榮)
   *68년 향토예비군 창설: 후방을 담당하는 제2의 국군 450만_구본중(具本重)
   *69년 마산 수출자유지역 조성: 해외자본 적극 유치를 통한 수출 전진기지의 시초_박세진(朴世鎭)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세계 최단시간내 완성한 고속도로_정주영(鄭周永)
   *71년 새마을 운동: ‘하면 된다’는 자신감 얻은 게 가장 큰 성과_박진환(朴振煥)
   *72년 7·4남북공동성명: 방어적 통일정책에서 적극적 대북(對北)정책으로_정홍진(鄭洪鎭)
   *73년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준공: 민족의 에너지에 불을 붙였다_박태준(朴泰俊)
   *74년 중동 건설시장 진출: 지속적 경제개발을 가능케 한 텃밭 개척_최종환(崔鍾煥)
   *75년 조총련계 재일(在日)동포 고국방문: 중앙정보부의 공세적이고도 인도적인, 정책 전환_조일제(趙一濟)
   *76년 가족계획 성공: 전통을 거스른 선각자적 결단의 성과_이시백(李時伯)
  
   *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한국 경제의 분수령(分水嶺)_최각규(崔珏圭)
   *78년 고리 원전(原電) 1호기 준공: 시운(時運)을 잘 탄 탈유전원(脫油電源)의 선택_정보헌(鄭甫憲)
   *79년 부마(釜馬)사태: 유신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기게 하다_조갑제(趙甲濟)
   *80년 컬러 텔레비전 방영: 21세기 문명(文明)의 발전틀을 구축한 대사건_이원홍(李元洪)
   *81년 해외여행 자유화: 외무부의 적극 대응, 전(全) 대통령의 의지로 규제 풀어_안세훈(安世勳)
   *82년 통행금지 해제: 후진적 분위기를 벗고 안정된 사회상황 과시_유흥수(柳興洙)
   *83년 64KD램 개발 성공: 세계 세 번째로 개발, 반도체 산업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_이종길(李鍾吉)
   *84년 TDX개발: 통신의 기술주권을 확보하려는 역사적 소명_서정욱(徐廷旭)
   *85년 2·12총선: 창당 25일만에 사상 최대 야당을 만들었다_김상현(金相賢)
   *86년 무역흑자 원년(元年): ‘안정 기조 위의 성장책’으로 3저(低)의 호기(好機)를 잡았다_김만제(金滿堤)
  
  
   *87년 6·29선언: 군사정권이 민주주의를 맹세한 항복조약_이상철(李相哲)
   *88년 서울올림픽: 동양의 예절, 독일의 조직력, 미국의 자본주의 감각을 모두 발휘한 21세기 한국의 이정표_박세직(朴世直)
   *89년 수도권 신도시 건설: 천정부지의 집값을 하락세로 돌렸다_문희갑(文熹甲)
   *90년 유행성출혈열 백신 개발: 세계 모든 백신이 국산(國産) 기준을 따르고 있다_안창남(安昌男)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동구권 붕괴와 서울올림픽이 계기_이상옥(李相玉)
   *92년 황영조(黃永祚)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 손기정(孫基禎) 이후 56년 만에 이룩한 민족의 쾌거_김종열(金鍾烈)
   *93년 금융실명제: 부정(不正)추방·공평과세(公平課稅)의 기반 마련_이경식(李經植)
   *94년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 조세수입의 19%(10조 원)를 차지하는 효자산업_정세영(鄭世永)
  
   이하는 필자가 그 뒤의 대표적 업적을 추가한 것이다.
  
   *1995년: 신생아 마지막 70만 명(그 뒤론 줄기 시작)
   *1996년: OECD 가입, 세계 29번째, 아시아에선 일본 다음.
   *1997년: 右에서 左로 평화적 정권교체
   *1998년: 대일(對日)문화개방, 한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 한류(韓流)로 증명
   *1999년: 일반전화(2125만 대)보다 많은 휴대전화, 2300만 대 돌파
   *2000년: IMF 관리체제 극복노력
   *2001년: 인천공항 개항
   *2002년: 한일(韓日)월드컵 4위
   *2003년: 검찰, 대선(大選)자금 수사로 부패의 고리를 끊다.
   *2004년: KTX 개통,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 계획에 위헌 판결
   *2005년: 청계천 복원
   *2006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타결
  
   *2007년: 左에서 右로 평화적 정권교체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극복
   *2009년: 스마트폰 시대 개막
   *2010년: 김연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
   *2011년: 아덴만 인질 구출작전 성공
   *2012년: 신라 이후 처음으로 여성 최고권력자 등장
   *2013년: 싸이 '강남 스타일', 말춤이 세계를 흔들다!
   *2014년: 헌법재판소, 통진당 해산결정
   *2015년: BTS, 본격적 해외 활동 시작
   *2016년: 없음('박근혜 탄핵소추 가결'을 성취로 볼 순 없다)
   *2017년: 이재용 구속중에도 삼성전자 분투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전회(前回) 우승팀 독일을 2-0으로 격파
   *2019년: 사상최대 규모의 광화문 문재인 규탄집회
   *2020년: 미스터트롯 선풍(TV 조선)
   *2021년: 언론의 대장동 비리 보도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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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적 결전장 다부동에 세우는 韓美 최고사령관 李承晩 트루먼 동상의 의미
  
  
  1. 한국전은 이긴 전쟁이다. 남침抗戰으로 공산제국을 무너뜨리고 자유세계를 구한 20세기의 3대 전쟁이다.
  2. 韓美軍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남침을 저지한 덕분에 대만이 살았고, 일본이 경제부흥, 서독이 재무장, NATO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고 미국은 군사비를 4배로 늘려 본격적인 對蘇군비경쟁을 시작, 그 40년 뒤 소련과 동구 공산정권이 무너졌다.
  3. 미국 등 모든 참전국은 이미 한국전을 자유세계가 이긴 전쟁으로 기념한다.
  4. 다부동은 북한군 주력을 최초로 격퇴, 유엔군의 반격을 가능하게 한 결전장으로서 워털루, 스탈린그라드, 베르당과 비견되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5.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3년 뒤의 한미동맹을 예약했다.
  6. 韓美 양국의 최고사령관 李承晩과 트루먼 대통령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지키는 세계시민으로서의 고귀한 신념을 공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야욕을 꺾었다.
  7. 따라서 다부동 전적지는 한국전 승리의 두 주인공을 모심으로써 자유세계를 구한 결전장의 역사적 의미를 새기고, 한미동맹 및 자유통일의 상징을 내세워 국내외에 두 나라 국민들의 희생과 용기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8. 다부동은, 한국전 승리의 세계사적 의미를 구현하는 국제적 명소(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오마하 비치처럼)이자 현충사를 능가하는 구국의 聖地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자유세계의 평화를 지켜낸 점을 부각시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만하다(히로시마 원폭 돔처럼).
  9. "戰後 70년"이 되는 올해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복지화를 이룩한 '가장 위대한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의 두 주인공을 다부동에 세우게 되어 칠곡군과 경북은 감동적 스토리텔링의 중심, 더욱 품격 있는 고장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 2023-03-16, 09: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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