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의 깨끗한 斷念과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3>
최근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쿠바 미사일 사건의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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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6월호

 

⊙ 쿠바 실패의 교훈 잊은 푸틴, 위기 때 핵 쓸지도

⊙ 미국이 쿠바 침공했으면 현지 소련군은 핵으로 반격했을 것

⊙ 군 지휘관들이 정치인들의 핵 사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

⊙ 미사일을 숨길 야자수 숲은 없었다… 은폐 불가능하다는 보고는 차단

 

趙甲濟(조갑제닷컴/TV 대표)

 

 

푸틴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쿠바 미사일 사건을 다룬 수많은 저작(著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1971년에 나온 하버드 대학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의 '결정의 핵심'(Essence of Decision)일 것이다. 앨리슨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핵 시대의 결정적 사건이었고 기록된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정의(定義)하였다. 논문 저자들은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하여 그동안의 연구 결과와 다른 점도 찾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가장 주목한 점은 소련의 당군(黨軍) 지도부 내부에서 견제와 수정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작전의 성공은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 완료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한 점에 달려 있었다. 그러려면 노출된 장소에 기지를 만들면 안되는데 누구도 이미 결정된 장소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흐루쇼프도 이 사실을 모른 채 밀어붙였다. 논문 저자들은 앨리슨이 '결정의 핵심'에서 내세운 주장을 반박한다.


앨리슨은 소련군의 전략 교리는 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그 교리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두 저자는 쿠바 파견 소련군의 실무 장교들 선에선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상부에 의하여 묵살된 점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고 했다. 두 학자는 작전을 망친 책임자는 소련 전략 미사일군 사령관 세르게이 비류조프라고 특정했다. 그는 농업 전문가로 위장하여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만나고 돌아와 흐루쇼프가 미리 결정해 놓은 미사일 배치에 영합하는 보고를 했던 사람이다.

 

"쿠바의 야자수 숲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두 논문 저자는 소련이 쿠바 미사일 사건 실패에 대하여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았고 교훈도 얻지 못하였으며 그것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 실패에 반영된 것 같다고 주장한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잘못을 덮는 것이 급해서 다른 사람의 책임을 추궁하기 어려웠고 비류조프는 참모본부의 전횡(專橫)에 책임을 전가(轉嫁)하면서 자신의 오판(誤判)을 덮었다.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두 저자 세르게이 다첸코(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와 블라디슬라브 주보크(런던 경제 대학 교수)는 푸틴이 흐루쇼프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 흐루쇼프처럼 인류를 위한 결단을 내릴지는 의심스럽다고 썼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하나'라는 확신으로 강제 병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측근에서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푸틴은, 흐루쇼프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비밀주의와 관료주의에 기대어 전쟁을 벌였다가 낭패를 당하니 핵 발사 단추를 만지작거린다. 두 학자는, 러시아 군의 참모본부가 쿠바 실패 사례를 소화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고 했다. 흐루쇼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 중에도 중국과 인도의 전투 중지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인도 요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전투를 중단시키려면 원인 규명에 주력하지 말고 정전(停戰)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울부짖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일보다는 전투가 계속될 경우 죽게 될 생명을 구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두 학자는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서로의 금지선을 시험하지 않으려 조심했다고 지적한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그 선이 어디인지를 두 지도자도 몰랐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허영과 미움이 그를 최악의 실수로 몰아갔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타협을 택했고 케네디도 신중하게 대처하여 협상으로 인류를 핵 재앙으로부터 구했다. 두 저자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푸틴은 절대로 핵무기를 쓸 수 없으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승(完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썼다. 푸틴 주변에는 '러시아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다'면서 패배하기보다는 핵전쟁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1962년에 그런 목소리가 이겼다면 우리는 지금 다 죽어 있을 것이다"고 했다.


푸틴보다 더 위험하고 철 없는 인간이 김정은일 터이다. 그가 핵 발사 단추를 누르려고 할 때 북한엔 말릴 사람이 없고 남한엔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싸운 흐루쇼프

  

쿠바 미사일 사건에서 패배한 흐루쇼프는 사람이 달라졌다. 기가 꺾여버린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부하들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암살되었을 때 흐루쇼프는 친구가 죽은 것 같이 충격을 받고 비통해 하였다. 당시 로버트 케네디와 아나톨리 도브리닌 대사는 케네디-흐루쇼프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미국 대사관저를 방문, 방명록에 서명했는데 울었다고 한다. 재클린 케네디 여사에겐 위로 편지를 보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3년간 소련에서 살았다는 보고를 받고 신경이 쓰였다. KGB 국장으로부터 오스왈드가 비밀요원이 아님을 다짐 받고는 안심했다.

   

흐루쇼프의 인간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그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쿠데타로 밀려난 1964년 10월 이후였다.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교외의 저택에서 사실상 연금생활을 보내면서 1971년에 죽을 때까지 혁명가로서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이 점에선 트로츠키와 비슷하다). 독재자는 권력을 놓치면 죽임을 당하든지 입을 닫고 죽은듯이 살아야 하는데 그는 비밀리에 회고록을 써 적국(敵國)인 미국으로 밀반출시켜 그곳에서 출판하도록 했다. 소련 공산당은 그가 녹음기를 앞에 두고 회고록을 구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번 협박, 도청, 수색하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한때 흐루쇼프의 부하였던 정치국 위원 키리렌코와 당의 규율위원회 위원장 펠세는 그를 불러 따졌다.

   

"당과 국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중앙위원회의 일이지 개인이 할 일이 아니다. 작업을 중단하고 원고를 넘겨라."

   

"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개인의 관점일 뿐이다. 당신들의 요구는 헌법이 규정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마음대로 해봐라. 내 연금, 아파트, 별장을 뺏아가려면 그렇게 해봐라. 나는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다. 나는 금속기술자로 돌아가 일할 수도 있다. 아직도 내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배낭을 지고 구걸하면서 먹고살 자신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필요한 물건들을 줄 터이지만 당신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흐루쇼프는 회고록 원고가 압수될 것을 두려워하던 중 정치범 출신인 빅토로 루이스(그는 영국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의 모스크바 현지인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를 통해서 미국의 주간지 타임과 연결되어 원고를 밀반출하기 시작했다. 이 원고를 편집하고 확인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 클린턴 정부 시절 국무부 차관을 지냈던 당시 타임지 기자 스트로브 탈보트였다.

   

미국의 출판사 측에선 원고가 흐루쇼프 것이며 출판을 허가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중계자를 통해 모자를 선물했다. 흐루쇼프는 그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1970년 가을 문제의 회고록이 서양에서 출판될 것이란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 소련 공산당은 그를 호출하여 신문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원고를 밀반출시키거나 출판을 허가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소련 공산당도 그 책이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데 만족하고 더 이상의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소련 공산당 당규위원회 위원장 펠페가 흐루쇼프의 행태를 스탈린식이라고 몰아붙였더니, "그렇다. 우리는 모두 스탈린이란 전염병에 걸렸었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했으나 당신은 아직 그대로야. 나를 잡아 가두어, 나를 쏴버려. 드골이 죽었다는 뉴스를 오늘 라디오로 들었는데 그가 부럽다. 나는 정직한 사람으로 죽고 싶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싶다. 망치와 못을 가져오라."

   

이 무렵 흐루쇼프는, 한 극작가가 일생에서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운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이지! 나의 팔꿈치까지 피가 묻어 있단다. 이것이 나의 영혼에 남아 있는 가장 끔직한 기억이야."

  

위대한 인간성

  

약20년 전 도쿄에서 남로당 간부 출신 박갑동(朴甲東)씨를 만났다. 하코네에서 열리는 북한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내가 흐루쇼프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창 너머로 펼쳐지는 일본의 평화로운 교외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흐루쇼프 덕분에 살았습니다.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한 그 유명한 스탈린 격하 연설로 해서 개인숭배와 피의 숙청을 끊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공산권 안에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남로당 숙청 선풍에 걸려 투옥되어 있었는데 김일성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보스인 흐루쇼프의 노선에 맞추어 정치범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할 때 출옥했습니다. 그런 뒤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이지요. 흐루쇼프의 역사적 연설로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당내 집단학살이 사라졌습니다. 중국, 북한, 알바니아는 예외였습니다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한 공산주의자의 결단이 한국인의 운명에도 이렇게 구체적 영향을 끼쳤구나 하는 감회에 젖었다. 흐루쇼프는 인간이 해선 안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다. 그의 정신적 제자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자' 고르바초프였다. 그가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다가 해체로 몰고간 데 가장 분통 터져 한 사람이 푸틴이고 김일성 김정일이었다. 권력을 가졌을 때나 놓은 뒤에나 변함 없는 인간성을 보여준 흐루쇼프는 농부 아들임을 자랑했고, 톨스토이를 토스트예프스키보다 더 좋아했다고 전한다.

[ 2023-05-25, 16: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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