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리비아 紀行(1)
가다피가 다스리던 나라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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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베니스·로마紀行 上 - 한국인들은 왜 祖國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대수로(大水路)공사장, 그리스·로마 유적인 렙티스 마그나 및 키레네의 폐허, 리비아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는 옛 이탈리아 총독관저에서 기자는 무엇을 보았나. 전쟁과 평화의 기록으로서의 역사(歷史), 그리고 야성의 한국인들이었다. 사(士)자 계급의 착취구조에서 해방만 되면 한국인들은 초원을 달리던 몽고 기마군단의 기상을 되찾아 펄펄 날아다닌다. 우리에겐 넓은 무대가 필요하다.

<1994년 9월 월간조선>

 

『아프면 약 사 묵어레이』

오후 4시 김포공항 탑승 대기장 18번 게이트 옆 공중전화 박스. 기자는 전화를 걸려고 줄을 서 있었다. 앞에서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왜 빨리 안 받노. 내 잘 갔다 올께. 아프면 약 사 묵어레이』
『……』
『잘 갔다 올께. 도착해서 전화할께. 장모한테 나 대신 전화하레이』
기자는 『아 이 분도 휴가를 끝내고 리비아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동아건설 노동자이구나』라고 직감했다. KE8013편 점보기는 오후 4시에 김포(金浦)를 이륙했다. 투니시아 제르바 공항에 도착하기 전 하노이와 바레인을 경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두 곳 모두 처음인데다가 기자의 방문 국가 리스트에 2를 더해주는 셈이 되지 않는가. 무착륙 장시간 비행보다는 중간 중간에서 쉬어가는 게 재미있지 않은가. 이륙 후 순항고도에 접어들자 『디스 이즈 캡틴 스피킹』(This is captain speaking)으로 시작되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맹동섭 기장」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맹(孟) 기장이 모는 점보기의 조종실에 앉아 태평양을 횡단, 김포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것은 1985년 10월이었다. 학자 같은 조용한 인상의 孟 기장 얼굴이 떠올랐다. 이륙 후 3시간쯤 지나 점보가 중국 남쪽지방 상공을 지나갈 때 허가를 받고 조종실로 들어갔다.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진입한 뒤라 조종실의 세 사람-기장·부기장·항공기관사-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孟 기장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면 그 전용기의 기장으로 뽑혀 여덟 번이나 정상회담에 관계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방문국의 공항에 전용기를 도착시키는 데 신경 쓴 이야기를 했다. 9년 전 기자가 孟 기장의 점보기를 탔을 때는 밤이었다. 조종실의 앞 창은 시야가 넓다. 마치 우주선에 탄 기분이 들 정도로 별들이 가깝게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 비행의 애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군조종사 출신인 孟 기장은, 1970년대 초에 남쪽으로 착각 비행을 했다가 동해안 백사장에 불시착했던 북한 공군 미그기의 조종사 박순국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당국에선 귀순으로 발표했으나 朴 소좌는 결코 전향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朴 소좌의 미그기는 항법장치의 고장인지 조종사의 착각인지 동해안을 따라 포항 상공까지 남하했었다. 우리 공군은 뒤늦게 발진하여 다시 북상하는 미그기를 추격, 속초 근방의 해안에 불시착시켰었다. 결혼한 몸으로 가족을 北에 둔 朴 소좌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으나 공군장교가 되어 잘 살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에선 朴 소좌를 영웅으로 만든 「은빛 날개」란 영화를 제작했다.
 孟 기장은 『중국의 지상 관제소 가운데는 고장이 나서 가동이 중단된 곳이 더러 있다』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금방 구별된다』고 했다.
『옛날엔 한국의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국토가 벌겋고 일본은 검푸렀는데 요사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해졌어요. 인도 대륙 위를 날다가 보면 황폐한 땅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요』

 

하노이 공항에서의 추억

 

 김포를 떠난 지 네시간 만에 월남의 수도 하노이에 내렸다. 밤. 시골 驛舍같은 공항 시설. 파란 모자를 쓴, 깡마르고 키가 작은 월남 청년들이 탑승자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동아건설의 리비아 공사장으로 취업해 나가는 이들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들은 담배를 많이 피워댔다. 습기가 많은 후끈한 여름 밤에 넥타이를 맨 승객은 기자뿐이었다. 좁은 대기실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는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간이 매점처럼 단출한 카운터에는 콜라 등 음료수가 몇 개 놓여 있고 뱀이 들어 있는 술병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리비아에 도착했더니 동아건설의 한 간부가 『그 뱀술이 아직도 그대로 있습디까』 하고 물었다. 꽤 고명한 뱀술인 모양이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아프리카로 돈벌이 나가는 월남 청년들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기자가 다수의 월남인들을 만난 것은 이것이 19년 만이었다.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에 우리 해군 LST 두 척은 한국 교민들과 월남인 妻 및 한국과 관계 있는 월남인 1천 5백여 명을 태우고 출발, 5월 중순에 부산에 닿았다. 이들은 옛 부산여고 교사에 수용되었고 기자는 이곳을 취재했었다. 亡國의 流民이었지만 월남 사람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보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로부터 도움과 보호를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수용소 관리소에 대해서 당당하게(때로는 건방지게) 요구, 항의하는 그들을 보고는 『독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났었다. 주한 월남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던 한 월남 장교가 사이공에 남겨둔 아내가 혹시 LST편으로 탈출해 오지 않았나 고대하다가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흐느끼던 장면도 생각났다. 지금 그 장교는 어디에 있을까. 아내와 재회했을까. 아마도 했겠지… 역시 세월만이 역사가 남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상념에 잠겼다.

 

 하노이 공항을 출발, 6시간의 야간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바레인. 현지 시간으로 새벽 0시40분이었다. 바레인은 중동의 회교 국가이지만 술이 허용될 정도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이다.
 영국 식민지였고 지금도 영국인들이 관리로 많이 고용돼 있다. 공항은 아주 현대적이고 능률적이다. 여기서 3시간을 기다렸다. 공중전화 박스는 집으로 전화를 거는 한국인 근로자들로 만원이었다. 1987년 12월1일 오전, 이곳 바레인 공항에서 신분이 탄로난 KAL858편 폭파범 金勝一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金賢姬도 앰플을 깨물었으나 경찰관이 즉시 개입하여 목숨을 건졌다.
 1989년 봄, 기자는 金賢姬 씨와 최초의 인터뷰를 안기부 安家에서 가졌던 적이 있다. 앗시리아의 浮彫(부조)처럼 옆 얼굴의 윤곽이 또렷한 金씨는 자살을 결심했을 때의 심정을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김일성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혁명가로 값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공작원에게 잡히면 자살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의 체면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처럼 따랐던 金日成에 대한 각성의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金日成 死後에 다시 그녀를 만났더니 『김일성은 한번도 좋은 일 못하고 죽었으니 참 불쌍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서 본격적인 탐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金賢姬와의 인터뷰였다. 아무도 옆에서 총을 들이대고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예의 바른 처녀」 金賢姬는 왜 노동자들이 탄 비행기 안에 시한폭탄을 두고 내렸던가. 이 의문을 풀려고 접근해 보니 거기엔 金日成이란 神이 있었고 그의 신도가 된 金賢姬와 인민이 있었던 것이다.

 

리비아로 들어가다

 

 기자는 비행기를 타면 늘 창쪽 좌석을 차지하여 지도와 실제 地理를 대조하는 재미를 즐긴다. 바레인을 떠난 지 네 시간쯤 지나서 날이 밝고 오른쪽으로 지중해가 나타나더니 두 바위섬이 항공모함처럼 떠 있었다. 시루떡처럼 평평하고 길쭉한 섬 위에는 활주로가 있고 절벽의 낙차는 200m를 실히 넘을 것 같다. 저기가 어딘가. 지도를 보니 말타였다. 몇 년 전 부시-고르바초프 頂上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점보기는 투니시아의 지중해쪽 北岸 상공으로 들어갔다. 누런 땅과 올리브 농장 위를 지나 제르바 섬에 내렸다. 독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 관광지엔 동아건설 사무소가 있어 입국하는 근로자들을 맞아들인다. 리비아에 대한 UN의 경제 봉쇄조처로 국제항로가 끊겼기 때문에 제르바를 경유, 陸路로 리비아에 입국해야 한다.


 제르바 공항에 내리니 현지 시간으로 오전 9시, 陽明한 지중해의 하늘밑이었다. 비행의 時差에 따른 피로를 빨리 푸는 방법이 있는데 햇볕을 받으면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해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행할 때의 時差 피로는 해의 운행 방향을 역류하는 경우보다 덜하다고도 한다. 역시 인간은 지구·자연의 리듬과 맞추어질 때 편해지도록 조직돼 있는 모양이다. 제르바에서 트리폴리까지의 육로는 부산-서울 거리다. 오른쪽으로는 올리브, 오렌지 농장이 연속돼 있고 왼쪽으론 지중해. 아프리카가 지중해와 만나는 모로코-알제리-투니시아-리비아-이집트의 北岸은 비가 적당히 와 그린벨트를 이루고 있다. 과일과 농산물이 풍성하게 나는 이곳을 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 문명이 연속적으로 지나갔다. 그 흔적이 다양한 인종구성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본토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의 그리스-로마 도시들도 발굴돼 있다. 리비아-투니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리비아 땅으로 들어갔다. 도로표지판이 아랍어로만 표기돼 있고 거리를 써  넣지 않았다. 「地理」가 국가기밀이라고 한다.


 유쾌한 청년처럼 그려진 지도자 가다피의 초상간판이 길가에서 자주 나타난다. 투시니아 쪽 길가에선 돈다발을 잡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흔드는 노상 환전상들이 자주 보였었는데 리비아에선 그것이 처벌대상이다. 네 시간 만에 동아건설의 트리폴리 사무소에 도착했다. 트리폴리市 교외에 자리잡은 이 기지는 잘 정돈된 건물과 정원으로 해서 지치고 불안한 여행자를 안도시킨다. 入國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서 1주일 정도 교육시킨 다음 현장으로 내보내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귀빈 숙소에 짐을 맡긴 뒤 오후엔 트리폴리시내로 구경을 나갔다.


 서울에서부터 기자와 동행한 동아그룹 홍보실의 吳鴻埰 과장은 사진작가이기도 한데 리비아에서 이미 3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최고급 안내자였다. 리비아 국립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바닷가의 옛 요새 건물 속에 있는 이 박물관은 이탈리아 점령기엔 총독관저로 쓰였다고 하니 우리 중앙국립박물관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우리는 박물관 건물이 옛 총독부였다고 하여 철거했고 가다피 정부는 혁명 이후에도 옛 이탈리아 총독관저를 계속 박물관으로 쓰면서 최근엔 더욱 그 내부를 잘 꾸며놓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자주 정신으로 말한다면 金泳三에 뒤질 것 같지 않은 가다피는 왜 식민지 종주국의 사령부를 부숴버리지 않고 있나. 두 지도자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왜 다를까.

 

국립박물관으로 계속 쓰는 이탈리아 총독 관저

 

 그 해답은 이 박물관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4층으로 된 박물관의 각 층은 리비아가 딛고 있는 역사·문화의 지층이었다. 先史시대-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현대 리비아로 이어져온 역사의 흔적들이 이 박물관 안에서는 쌓이고 이어지고 조화되고 있었다. 한 문화의 융성과 멸망, 또 다른 문명의 등장과 퇴장, 전쟁과 평화, 격돌과 화해의 5000년간 파노라마를 한 시간 만에 스쳐지나가면서 기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건물엔 죄가 없는데…」
 역시 로마 시대가 남긴 조각이 압권이었다. 위풍당당한 황제 및 원로원 의원들의 석상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선정적인 귀부인 조각상은 2000년의 時空을 뛰어넘어 無言의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여인상은 그 노출의 정도가 지금의 법률로써도 단속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이런 대담한 개방성과 남자상에서 나타나는 위엄과 힘, 이것은 바로 로마 1000년을 관류한 시대 정신이었으리라. 힘과 자신감이 있으니 개방도 대담하게 할 수 있었으리라. 군사력과 개방성, 즉 내부의 단결에 기초한 국제화는 로마 제국이 천년을 계속하면서 세계문명의 저수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 4층 박물관의 맨 위층은 가다피 기념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反美·자주·폐쇄·전투적 이미지가 충만하지만 가다피 또한 아래 3개층의 축적된 역사 위에 서 있는 것이고, 그런 토양 위에서 자란 그이기에 이탈리아 총독의 죄를 총독부 건물을 상대로 물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자연히 알았던 것이 아닐까.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문 것의 한 결과는 日帝 침략에 대한 想起의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다. 日帝 침략의 중요 물증을 없애는 것이다. 한 역사학 교수가 쓴 글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친일적이다」

 

상전으로 모셨던 필리핀人을 부리고 있는 한국인

 

 동아 건설 트리폴리 사무소 曺正燮 소장은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월남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공중사진 분석관(장교)으로 참전했던 그는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며칠 지나면 베트콩 부대들이 또 사진에 잡히고, 마치 샘 솟듯이 중단없이 땅 속에서 솟아나듯 병력이 보충되는 것을 보고는, 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曺소장은 『우리에겐 월남이 징검다리였다』고도 했다. 『월남 진출의 경험이 있었기에 中東건설 시장으로 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건설 기술이 발전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은 1950∼60년대 주한美軍이 발주한 공사였다고 했다. 이때 공사 감독은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한국 업자들은 필리핀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회유와 수모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 필리핀 사람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과 부엌을 오가면서 음식을 나르는 근로자도 30대 초반의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 태도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6시 운동장에는 어제 기자와 함께 왔던 월남인 입소자(入所者) 200여 명이 최초의 日朝점호 겸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오와 열이 잘 맞지 않은 것으로 봐 군대경험자들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책임을 진다!』
『우리는 능력이 있다!』
『안전! 안전!』

 한국어로 구호를 제창하면서 운동장 주위를 구보하는 월남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완강한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진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겁을 먹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프랑스와 미군을 상대로 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위대한 국민들은 또 다른 위대한 국민들을 만난 것이다.


 리비아 도착 둘째날 오전 8시, 우리(기자+吳鴻埰 과장+필리핀 운전사)는 미제 비크 승용차 편으로 1000㎞ 동쪽에 있는 벵가지를 향해 출발했다. 지중해쪽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녹색 지대를 달리는 길이다. 아프리카나 사하라 사막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미국 아이다호나 몬태나주의 서부지역을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동차 여행의 즐거움은 동승자들끼리의 대화이다. 특히 吳과장은 리비아에 관한 한 역사부터 지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분이라 기자는 완전히 시청각적인 입체 교육을 받는 기분이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大파노라마, 귓전을 떠나지 않는 吳과장의 해설….
한 시간쯤 달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 홈즈市의 렙티스 마그나에 도착했다. 한 시간쯤밖에 여유가 없어 6일 뒤를 기약하기로 하고 중심부만 돌아보았다. 해변가의 이 도시 폐허는 광화문 일대보다 약간 넓다. 개선문, 공회당, 대중목욕탕, 신전, 야외극장, 魚市場 따위 공공건물이 모여 있었던 곳이다. 렙티스 마그나의 입구엔 이곳 출신인 세베루스 로마 황제의 동상이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날렵한 몸매에 곱슬머리-전형적인 武將의 모습이다. 기자가 딛고 있는 렙티스 마그나의 폐허는 약 2800년의 역사적 축적을 갖고 있다. 기원 전 9세기쯤 레바논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페니키아 상인들은 北아프리카 곳곳에 무역기지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지금 투니시아에 있는 카르타고와 렙티스 마그나도 포함된다.


카르타고는 강성해져 렙티스 마그나를 포함한 지금의 알제리 투니시아 리비아 일대를 정복하고 시실리까지도 영향권 안에 두었다. 3차에 걸친 로마와의 결전 끝에 카르타고가 철저하게 망해버리자 기원전 2세기 렙티스 마그나는 로마 영토가 되었다. 폼페이와 시저 사이의 內戰 때 렙티스 마그나는 폼페이 측에 붙어 물자와 인력을 제공했다. 시저가 암살된 뒤 13년간 로마는 또 다시 內戰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가 서기 전 31년 악티움 海戰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수습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등극하자 이 도시는 로마 원로원의 직접 통치下로 편입되었다.

[ 2023-09-16, 14: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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