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유조선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1)-불간 대유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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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9일
  
  쿠웨이트시의 새로운 상징이 되고 있는 건물에 올라갔다. 쿠웨이트 타워. 쿠웨이트시가 아라비아灣으로 뾰족하게 휘어 도는 첨단 부분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쿠웨이트 국보 제1호'라는 별명을 붙여 준 이 타워는 쿠웨이트 시가의 전체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쿠웨이트 타워는 1979년 3월에 완공됐다. 유고슬라비아 건설 회사가 지었는데 3개의 타워로 구성돼 있다. 연필처럼 생긴 펜슬 타워, 급수 탱크가 붙은 급수 타워, 급수 탱크와 전망대 겸용 식당이 있는 쿠웨이트 타워, 가장 높은 쿠웨이트 타워의 높이는 187미터, 전망대의 높이는 123미터, 급수 탱크 두 개의 용량은 4500톤. 여기서 내려다보면 자동차의 무리가, 먹이를 쫓아 몰렸다가 흩어졌다가를 되풀이하는 물고기처럼 신호등의 제어를 받으며 도로 위를 흘러가는 게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슈아이버, 수웨이크 항만시설, 남쪽으론 살미아市가 지도 그대로의 해안선을 그리고 있는 수평선에는 쿠웨이트 풍경의 필수 소도구인 초대형 탱커들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쿠웨이트 시가지는 사막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따라 가늘게 뻗어 있다. 쿠웨이트의 존립 그 자체가 사막의 기름과 바다가 제공하는 무역 및 해운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밤이 되면 이 타워는 조명을 받고 우유 빛으로 부각된다. 직선과 곡선, 그리고 원통 면이 여자의 몸을 연상시키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이 타워에서 4킬로미터쯤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니 어항이 나타났다.
  
  폭이 넓은 목선들이 갯벌에 박혀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두 노인이 낡은 목선을 수리하고 있었고 뱃전을 씻어내는 어부들, 모래바닥에 앉아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붉게 탄 얼굴의 늙은 고기잡이들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것과 같은 적막함을 안겨주었다. 늙은이들이 수리하고 있는 목선은 쿠웨이트 특유의 '다우'라는 배인데 폭이 매우 넓다. 석유 발견 이전 쿠웨이트 무역상들은 이 배를 타고 인도, 아프리카까지 돌아다녔다. 여기서 다시 4킬로미터쯤 북쪽으로 가면 허수아비가 달린 정치망 어장이 나타나고 바닷새 나는 물가에서는 젊은 남녀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거기서 해안도로를 건너면 '쿠웨이트 게이트'(KUWAIT GATE)로 불리는 옛 성문의 잔재가 나타난다. 그 성문 앞 풀밭에서는 늙은 아랍인이 아이들과 함께 풀을 뜯어 푸대에 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들이 몰고 온 하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아마도 가축 사료를 구하러 온 것이리라. 아직도 일부 쿠웨이트 原住民은 사막에서 양떼를 몰고 있었다. 최고급 자동차의 행렬 뒤로 나타나는 양떼의 모습은 이 나라가 가진 진보와 보수의 양면성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쿠웨이트 국영 탱커 회사(KOTC)의 파이잘·알·가님 회장과 면담했다. 알·가님 회장은 키가 190센티를 넘고 머리가 엄청나게 크며 호쾌한 인상으로 집무실을 꽉 메우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의 一家는 쿠웨이트의 이름난 家門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알·가님 회장은 쿠웨이트 최초의 선장이기도 하다. 지난 1968년에 스물 아홉의 나이에 선장이 됐다. 그는 '현대식 선박의 선장으로는 내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는 쿠웨이트 원주민들이 옛날부터 항해와 고기잡이와 무역에 소양이 있었다고 자랑했다.
  
   "나의 선조는 아라비아 사막을 떠돌아다니던 베드윈族이었오 사막을 지나다니는 것은 항해와 흡사하지요. 사막은 곧 바다고 낙타는 배와 같아요. 별을 보고 위치와 방향을 알아내는 것이나 폭풍과 싸우며 進路를 뚫어야 하는 것이나 똑같은 원리지요. 그래서 베드윈족은 쿠웨이트에 정착하자마자 훌륭한 뱃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4백년 전에 이 땅에 정착, 줄곧 배를 탔지요. 나는 열 다섯 살부터 영국 배를 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뿌리를 털어놓았다. KOTC는 지난 1957년에 창립된 중동 최초 최대의 유조선 회사다. 지금은 적재 톤 수로 따져 250만 톤 의 탱커 선단을 가진 세계 유수의 탱크 船社가 되었다. 쿠웨이트가 파는 원유의 상당 부분은 KOTC 탱커로 실어 날라야 한다는 계약을 쿠웨이트 정부는 원유 수입국에 안기고 있다. 이런 뒷받침에 힘입어 KOTC는 '7년엔 약 3000만 달러의 순수입을 남겼다. 요즘 세계 탱커 선복량의 과잉과 석유 물동량의 부족으로 유조선 시장이 최악의 불황에 빠져 있는데도 알·가님 회장은 '우리는 올해 안으로 선복량을 다시 백만 톤쯤 더 늘리겠다'고 호언했다.
  
  KOTC는 초대형 유조선 시대는 지나갔다는 판단 아래 8만 톤 급의 중형선과 석유 정제품 운반 船隊의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KOTC의 대담한 전략은 쿠웨이트의 수출 원유라는 고정된 물동량이 언제든지 확보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쿠웨이트는 원유를 팔아서 돈만 받던 시대를 오래 전에 넘어섰다. 원유를 팔고, 그 원유를 쿠웨이트 유조선으로 나르게 하고, 다른 나라 유조선일 경우에는 그 배가 쿠웨이트 항구에서 반드시 연료유를 사 넣게 하여 종합적으로 돈을 벌고 있다. 요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체 정유시설을 확장하고 있다. 원유를 그대로 파는 것보다는 정유 공장에서 한 번 굴리면 부가 가치도 늘고 고용 증대도 되기 때문이다.
  
  쿠웨이트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것은 18세기초. 아라비아 사막의 생활무대로 하던 유목민들이 이곳에 정착, 1756년에 사바가(家)로부터 왕(쿠웨이트 사람들은 SHEIKH라 불러 KING와 구별한다. 왕보다 한 등급 낮은 족장 또는 제후에게 붙이는 칭호다)을 뽑음으로써 국가로서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은 20세기 중엽까지 주로 진주 채취, 어업, 무역에 종사했다. 쿠웨이트의 국장(國章)은 지금도 기름이 아니라 아라비아 선박이다. 그만큼 이들의 석유 前 시대 생활은 바다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아라비아만은 삶터의 연장이었다.
  
  이 바다를 건너 그들은 이란, 인도, 아프리카와 교역했다. 특히 인도는 이들의 가장 큰 진주 수출 시장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인도인들이 일자리를 구해 쿠웨이트로 밀려오고 있지만. 쿠웨이트는 아라비아만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무역 중개에도 재치를 발휘했다. 이란 이라크에서 물건을 사들여 사우디 아라비아 쪽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척박한 좁은 땅에서 생존하는 길은 무역과 바다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고 그런 진취적인 기질이 오늘의 쿠웨이트人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세이크·자버·알·아하마디 국왕도 쿠웨이트를 '중동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쿠웨이트는 은행업, 중계무역, 증권, 해운분야에서는 중동의 중심지가 돼 있다. 이곳의 증권 시장은 거래액에서 세계 여덟 번째이다.
  중동으로 취재하러 오는 기자들은 겁을 먹게 마련이다. 취재 기자에 대한 입국 허가를 내기 어렵다. 사진을 잘못 찍으면 봉변을 당한다.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술과 도박은 일체 금지다. 시간관념이 없다. 게으르다. 약속을 못 믿는다. 따위의 말을 한 두 번쯤은 듣게 된다.
  
  ●사진촬영 : 적어도 쿠웨이트에서는 사진 촬영에 제한이 거의 없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만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셔텨를 누를 수 있다. 고층 건물에서도 왕궁이나 사형장도, 심지어 공개교수형 장면도, 기도 모습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 이날 우리 취재팀은 '수크'로 불리는 이곳의 오랜 시장을 둘러보았다. 망태를 짊어진 쿠웨이트판 지게꾼이나 늙은 환전상 또는 물표(物票) 상인들에게 렌즈를 갖다 대어도 그들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웃으며 포즈를 잡아주기까지 했다. 촬영에 협조적이란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시간관념 : 이곳의 관공서는 겨울에는 오전 7시30분∼오후 1시30분이 근무시간. 여름엔 오전 7시∼오후 1시. 회사에선 오전 8시30분∼낮 12시30분을 오전 근무로 치고 오후 4시30분까지는 낮잠 시간. 오후 4시30분에 다시 출근, 저녁8시까지 일한다. KPC같은 국영 기업체에선 오전 7시∼오후 3시까지 점심시간도 없이 근무한다. 그 대신 이들 회사는 금, 토요일 이틀간을 쉰다. 순수 근무시간을 따져볼 때 한국보다 크게 짧지 않다. 더구나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여름에도 이 정도를 일한다면 결코 게으르다는 표현을 하기는 어렵다. 시간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선입감도 쿠웨이트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한국현지 상사원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하기는 '코리안타임'이란 낱말까지 만들어 냈던 한국 사람들이 아랍인의 시간관념을 탓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중동 특유의 기후환경을 감안할 때 아랍인들의 시간관념은 정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개처형 : 중동에서 서구화된 나라에 속하는 쿠웨이트지만 사형은 공개 집행한다. 전해 11월19일에는 도심지 사형장에서 태국 사람 두 명이 공개 교수형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며칠 전부터 사형 집행 날짜를 예고, 시민들의 관람(?)을 유도했다. 이 둘은 환전상을 털고 살인까지 한 강도 살인범들이었다. 신문들은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의 사진과 상세한 집행장면을 1면 머리기사로 일제히 보도했다.
  
  구경꾼들도 이 장면을 찍으며 환호했다고 한다. 한해 전 10월28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세 강간 살인범에 대한 교수형이 공개로 집행됐었다. 그때도 수천 명이 몰려 구경했고 신문에서는 1면 머리기사로 취급했다. 1961년에 독립된 이후 쿠웨이트에서 사형된 범죄자수는 11명에 불과(20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다. 요 며칠 현지 신문에는 도색필름 압수, 마약 밀매단 검거, 포주 적발 등등의 기사가 실렸다. 이들 기사는 활자를 고딕체로 하고 박스 기사로 편집, 돋보이게 처리했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는 쿠웨이트 정부가 잠재적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서 공개처형이나 풍기단속을 홍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쿠웨이트 신문에는 '키스사건'이 보도됐다. 젊은 아랍 남녀가 바닷가에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추었다가 경찰에 풍기문란 혐의로 적발된 것이었다. 재판장은 이 범인들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같은 날 다른 재판소에서 강간범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택시 운전사가 여자 승객을 강간한 것인데 판사는 '여자 혼자서 택시에 탄 책임도 크므로' 라고 하여 키스 범행자에게보다도 더 관대한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일벌백계주의와 엄격한 이슬람 교리에 힘입은 탓인지 쿠웨이트의 범죄 발생률은 세계 최저 수준. 우리 경험으로는 쿠웨이트와 싱가포르에서는 도난이나 강도 등 여행자가 당하기 쉬운 범죄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시아 상선 장석용 주재원은 '이곳에 1년 있는 동안 한국인들이 도난을 당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아랍인들이 다투거나 주먹다짐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술 : 이런 치안 유지가 희생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쿠웨이트에서는 음주가 금지돼 있다. 여행자도 술을 가지고 입국할 수 없다. 한때 음주를 자유롭게 해 보았더니 사고가 많이 생겨 다시 금지 시켰다는 얘기다. 그러나 상당수의 아랍인들은 집안에선 술을 마신다. 그런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며칠 전 한국식당을 경영하는 어느 한국인이 술을 몰래 팔다가 경찰의 현장 급습을 받고 붙들려갔다. 이 사람은 쿠웨이트에서 술 밀매로 치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쿠웨이트 사람들은 집 바깥에선 금주, 집안에선 음주라는 이중적인 생활습관에 익숙해 있고 정부도 이를 묵인하고 있다. 이곳 밀매주의 값은 조니 워커가 서울에서보다 10배쯤 비싼 10만원 선. 최근에는 술 밀수선이 살미에시의 해안 백사장에 밤을 타고 몰래 상륙, 술병을 파묻어 두었다가 동네 어린이들이 마시고 취하는 바람에 들통이 난 일도 있었다.
  
  ●여자의 평등 문제 : 이 날 쿠웨이트 의회는 여자에 대한 참정권 부여 제안을 27 대 7로 부결시켰다. 이 제안에 대한 찬반 토론은 이러했다.
  
  사르쿠 의원 : 이슬람 교리는 남녀평등을 가르치고 있다. 남녀불평등은 이슬람의 敵들이나 하는 소리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대끼는 것이 싫다면 남자와 여자의 투표장소를 분리시키면 될 것 아닌가?
  
  칼리드·주마인 의원 : 우리의 역사는 여자들이 이슬람을 위해 용감히 투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들은 벌써 비서, 의사, 대학교수까지 되었다. 그들은 평등하게, 대우해야 할 시간이 성숙됐다.
  
  무하마드·알·라시드 의원 : 여자들이 증권시장에까지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투표권을 줄 단계는 아니다.
  
  알·두와이쉬 의원 : 여자는 장막 뒤에 숨겨야 한다.
  
  무하마드·알·바락 : 여자는 후손의 교육과 양육에 전념해야 한다. 여자의 차 운전에도 반대다.
  
  알·하즈라프 의원 : 투표권을 준다면 한 남자가 40명의 여자와 결혼하여 자신에 대한 찬성 투표수를 늘려도 된단 말인가!
  
  다음날 영자지 "아랍 타임즈"는 풍자만화를 그렸다. '여자에게 투표권까지 주어서 무얼한담? 그들은 벌써 힘이 무척 센데...'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다른 영자지 "쿠웨이트 타임즈"는 사설에서 '여자에게 '왜' 참정권을 주어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 줄 것인가가 문제여야 한다'는 진보적 사설을 실었다. 이 에피소드는 쿠웨이트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크게 올라가고 있다는 反證이며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달리 이 나라가 남녀평등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교리의 남자와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는 대목만 생각하여 아랍의 여자들이 남자의 노예라고 단정짓는 것만큼 위험한 사고방식은 없을 것이다.
  
  쿠웨이트의 경우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린 남자는 베드윈 사람들이나 극소수의 대부호에 불과하다. 오히려 돈이 없어 평생 결혼을 못하고 늙는 아랍인들도 더러 있다. 결혼 때 여자 쪽에서 큰 경비부담을 지는 한국과는 달리 여기서는 수천 달러를 처가댁에 주고 아내를 데려와야 한다. 아랍 여자들은 또 적어도 남편의 바람 문제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평생 아내밖에 모르고 산다.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한 중동에선 남자가 외도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우디에서는 여자의 취업을 아직 금하고 있으나 쿠웨이트에선 취업을 장려, 많은 직장여성들이 탄생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결혼풍습에서 양쪽 집안끼리 미리 정혼해버리는 예약 결혼이 40퍼센트쯤이나 되는 등 전통성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문사에 여성부장이 있을 정도로 여성에 대한 사회의 문호는 넓게 열려 가고 있는 듯했다.
  
  1975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취업인구의 약 11퍼센트가 여자였다. 歐美 국가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랍 여자는 집안에서 바깥으로 아예 나오지도 못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깨드릴 수 있을 정도의 취업률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현상은 쿠웨이트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쿠웨이트에서 가장 큰 아랍어 신문인 "알·세야사"의 여성 부장인 사비·하수나 양은 우리와의 면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란은 남자와 여자의 기능상의 차이를 규정하고 있지만 여성의 불평등을 결코 인정한 적은 없다. 남자들이 코란을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29세인 사바양은 가자 지구에서 살다가 1956년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쫓겨나 부모를 따라 쿠웨이트에 옮겨온 팔레스타인 여성이며 미혼이다. 사바양은 이스라엘 공군기의 공습을 받아 집이 불타던 장면을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 '이슬람 종교가 잔혹한 것처럼 과장되고 아랍 여성의 지위가 실제 이상으로 비참하게 그려지고 있는 원인은 서구의 매스컴을 유대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바양은 여자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제안이 의회에서 부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투표권을 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여성의 사회진출이 왕성해질 것이다'고 했다.
  
  여자가 장관은 될 수 없으나 벌써 세 명의 현직 여자 차관이 활약하고 있다. 물론 아랍 여성들의 지위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성 독자들의 편지를 분석하면 왜 남자들보다 여자는 열등한가, 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았는가 등등의 회의를 던지는 질문이 매우 많다. 특히 부모들이 미리 定婚해버리는 습관에 대해서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곳 여성의 처우는 서구의 백년 전 수준과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서구화를 추구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의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우리의 지위를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978년의 결혼 통계에 따르면 4476명의 순수 쿠웨이트 여자들이 그 해 결혼을 했다. 그 가운데 약 90퍼센트인 4224명은 순수 쿠웨이트 남자와 결혼을 했고 약 9퍼센트는 非쿠웨이트 아랍인과 결혼했다. 非아랍인과 결혼한 쿠웨이트 여자는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다수 쿠웨이트 여성들이 상당한 사회 진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서만은 이슬람 교리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쿠웨이트 거리에선 가끔 3代의 여성들이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할머니는 눈만 내어놓은 검은 베일을 썼고, 어머니는 검은 가운은 입었지만 얼굴은 가리지 않았으며, 그 딸은 양장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옷차림과 함께 이슬람 식의 가치관도 바뀌어지느냐하는 것이다. KOTC 해운부장 아즈미 씨는 말했다.
  
   "나는 해외여행을 많이 하는데 꼭 아내를 데리고 간다. 도대체 누가, 왜, 여성이 열등하다고 말하는가. 나는 누구한테서 태어났단 말인가. 나의 아내, 어머니, 딸이 모두 여자인데 누가 여자를 열등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코란을 잘못 해석한 때문이다. 여성은 당연히 투표권을 가져야 하며 여성의 사회진출은 장려되어야 한다."
  
  쿠웨이트의 사회변동추세는 아즈미 씨와 같은 남자들의 숫자가 불어날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출처 : 마당
[ 2003-07-09, 13: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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