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지 말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부르면 와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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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대기실의 추억>
  
  이천팔년 팔월 이십이일 오전 열 시경이었다. 아침부터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바늘 끝 같은 날카로운 햇빛이 나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초동의 서울중앙지검 언덕을 올라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사백십삼호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의 책상 뒤에는 눈에 붉은 핏기가 도는 바짝 마른 검사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나를 고소한 여성이 나를 보고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혼소송의 의뢰인이었던 그녀는 나를 업무상 배임죄로 고소했다. 적(敵)인 남편과 내통해서 뒤로 상당한 이익을 제공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터무니없는 모략에 걸려 들었지만 나로서는 일단 수사를 받아야 하는 피의자가 됐다.
  
  “들어오지 말고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다 부르면 와요.”
  
  검사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눈길로 내뱉었다. 보통은 같은 법조인이면 말이라도 친절하게 하는데 그 검사에게서는 냉기가 돌았다. 나는 어두운 복도의 끝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벽 아래 길다란 검은 비닐 의자가 놓여 있는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상자 속 같은 밀폐된 공간이었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그곳에만 정지된 느낌이 들었다. 소환되어 오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속에서 그렇게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문득 예전에 사건을 맡았던 기업가가 말하던 내용이 떠올랐다. 수은주가 영하 십도 아래로 내려가 있던 추운 날 검사실에 소환됐었다고 했다. 아침부터 오후의 해가 설핏 지려고 할 때까지 대기실에 있다 보니까 몸이 마치 얼어붙은 동태같이 됐다. 그의 육체는 뜨거운 물 한 잔과 담배 한 개피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옅은 어둠이 내리려고 할 무렵 검사가 그를 불렀다.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채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의 책상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다시 구석의 접이식 철의자에 정물같이 대기해야 했다. 검사나 서기의 눈에는 자신이 투명인간인 것 같았다. 검사가 반쯤 남은 커피를 옆의 쓰레기 통에 버리고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맛있게 피웠다. 그는 자신이 재벌 회장인 것도 잊고 그냥 달콤한 커피 한잔과 담배 한 개피가 그리웠었다고 말했었다.
  
  ‘25시’라는 영화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수용소에서 배가 고픈 주인공은 경비 책임자의 옆에 놓인 냄비를 보고 ‘스튜님’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영혼을 바닥까지 내팽개쳐 인간성을 말살하게 하는 폭력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의 변호사였던 내가 피의자가 되어 그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조금은 종류가 다른 수모감이었다. 당시만 해도 같은 법조인이면 고시나 사법연수원의 기수, 그리고 나이에 따라 선후배로 동류의식을 느끼고 존중하는 풍토였다. 담당검사는 십 여년 아래인 것 같은 법조 후배라는 게 잠재되어 있던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거기서 오는 수모감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소를 당한 피의자일 뿐인데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았다. 막연한 백색이 앞에 펼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한참 후에 검사가 불렀다. 그가 나를 세워놓고 훈계조로 입을 열었다.
  
  “엄 변호사님은 가끔 우리 검찰을 부정적으로 쓰십니다만 우리 검찰 업무 이게 삼디업종에 속합니다. 검사가 아침부터 인상을 찡그리고 피의자나 참고인들과 싸웁니다. 검찰이 일을 안하고 팽개쳐 버리면 이 나라가 망합니다. 우리 검사들은 순수한 사명감에서 하는 거예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그 사명감에 추운 날 감옥에서 불려온 피의자의 얼음같이 얼어붙은 수갑을 잠시 풀어주고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잔쯤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형사소송법에서 검사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인권 옹호라고 배웠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사명감이 아니면 검사 이거 안 합니다. 왜 아침부터 핏대를 올리고 싸우겠습니까? 한 달에 수백 개의 사건에 그렇게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검찰을 막 욕하고 있잖습니까?”
  
  그는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 검사를 하는 이유가 국가를 위한 사명감만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몇 달이지만 나도 검찰청에서 검사일을 해 보았다. 턱없는 사회적 대접에 우쭐했었다. 교만해졌고 누구나 깔아뭉개고 싶었다. 그게 권력의 맛이라고 느꼈었다. 검사는 나에게 범죄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속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그 기회에 한 번쯤 뭉개고 혼을 내고 싶어하는 마음 같았다.
  
  그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 검사가 출마해서 당선되는 걸 봤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고 그는 소리쳤다. 그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는 당선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위원장이 되고 국회에 출석한 법조 선배인 법무장관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을 봤다. 다음날 신문에 재미있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법무장관이 국회 답변 후 혼잣말 같이 한 소리가 꺼지지 않은 마이크를 통해 이렇게 녹음이 됐다는 것이다.
  
  “저 양반 검사 시절 잡아도 여러 사람 잡았겠네”
  
  나는 중견 정치인이 된 그가 정말 국가를 위해 일하기를 바란다.
  
[ 2021-01-15, 13: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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