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하룻만에 바꾼 해이스팅스 결전!
1066년 10월14일, 노르만 전사집단을 이끈 윌리엄공은 앵글로 색슨족 귀족을 일소하고 잉글랜드를 장악, 대영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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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스팅스 결전, 오늘의 세계를 만들다
  
  
   *윌리엄 정복왕이 떠난 항구에서
  
   노르망디의 디브 수 메르 항구는 1066년 9월,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공이 이끄는, 약 7000 명의 프랑스 어를 쓰는 기사들과 약 2000 마리의 말이 약 700 척의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필자는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해안 휴양지 도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베이유로 가는 길에 이 항구를 찾았다. 디브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평온한 모습의 작은 항구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그 흔적은 없었다. 주민에게 이곳이 그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1066년 윌리엄 공은 해롤드 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 원정을 결심한다. 자신이 王位(왕위) 계승권이 있다면서 교황청에 로비하여 지원을 약속 받고 기사들을 모집한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뿐 아니라 이웃한 브리타뉴, 프랑다스를 넘어 全유럽의 모험가들이 몰려 왔다. 모험심이 강한 유럽의 전사들에게 잉글랜드 원정은 일종의 벤처 투자 사업이었다. 윌리엄 공은 원정에 참여하는 기사들에게 성공하면 잉글랜드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정군을 편성,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軍需(군수)지원이 있어야 했다. 마크 모리스라는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디브 수 메르 항구에 집결한 7000명의 병력과 2000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하루 28t의 밀가루와 하루 3만 갤런(3.78리터)의 물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중세엔 상비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8월 초 노르만 군은 출항 준비를 끝냈지만, 날씨와 풍향이 맞지 않아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공은 속이 타 들어갔을 것이다. 700척의 대함대가 디브 항을 떠난 것은 9월12, 13일 중 하루로 추정된다. 바다는 거칠었다. 함대는 잉글랜드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노르망디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약160km를 항해, 생벨러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보름 정도 날씨의 好轉(호전)을 기다리다가 9월27일 저녁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하였다.
  
   노르만 군의 잉글랜드 점령 과정은 중세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사건이다. 베이유 자수에선 시각적으로 기록했고 여러 권의 從軍記(종군기)가 있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윌리엄 공이 탄 旗艦(기함)은 너무 빨리 나갔다. 28일 아침 잉글랜드 해안으로 다가가는 데도 後續 (후속)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공은 그래도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전한다. 곧 뒤따르던 함대가 나타나, 페븐시에 상륙했다.
  
   *영국의 운명,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을 하루에 결정한 해이스팅스 전투
  
   윌리엄 공은 배에서 바닷가에 내릴 때, 다리를 헛놓아 엎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면서 외쳤다고 한다.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그때 북쪽 요크셔 지방에 있었다. 윌리엄 공의 상륙 사흘 전 이곳에서 決戰(결전)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이 수백 척의 원정군을 데리고,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 또한 잉글랜드 왕좌를 노렸다. 남쪽에서 노르만 군의 상륙을 기다리던 해롤드 왕은 군대를 급히 북상시켜 스탬포드 다리에서 노르웨이 침략군을 만났다.
  
   ‘스탬포드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노르웨이의 바이킹 군대는 전멸하고 왕도 죽었다. 대승을 거둔 해롤드 왕에게 노르만 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0월1일 전후였다. 해롤드 왕은 강행군을 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앵글로-색슨 군대와 윌리엄 공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대는 해이스팅스에서 마주 섰다. 해롤드 왕이 언덕의 능선을 차지했다. 노르만 군은 敵을 올려 다 보는 위치여서 불리하였다. 특히 노르만 군의 자랑인 기병 돌격이 어렵게 되었다.
   노르만 군은 3열로 섰다. 첫째 列은 弓手(궁수), 둘째 열은 중무장 보병, 셋째 열은 기병. 윌리엄 공은 이 기병 열의 한복판에서 지휘하였다. 잉글랜드의 기병은 보통 때는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웠다. 이날 잉글랜드 군은 활 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이어 붙여 방벽을 만들고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노르만 군은 먼저 활로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은 방패로 화살의 폭우를 피했으나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노르만의 중보병이 앞으로 나와 잉글랜드 군을 덮쳤다. 방패와 방패,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 비명이 戰場(전장)을 진동했다. 잉글랜드 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과 도끼, 돌을 매단 몽둥이를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노르만은, 중보병의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기병을 보냈다. 기병돌격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라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적군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기병 및 보병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守備戰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잉글랜드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앵글로 색슨족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人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 지금의 영국은 침공을 당하는 나라였다. 로마, 앵글로, 색슨, 바이킹, 노르만 세력이 차례로 이 섬을 침공하였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는 나라의 성격이 침략 받던 나라에서 침공하는 나라로 바뀐다. 노르만 戰士들이 잉글랜드를 가장 잘 조직된 중앙집권 국가로 바꾸고 國力을 키운 덕분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배운 선진적 법치와 제도를 잉글랜드에 적용시켜 잡종강세의 하이브리드 나라로 개조하였다.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아일란드와 스콧랜드, 웨일즈까지 점령, 대영제국으로 키운 것도 노르만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주체성이 강하고 실용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 전투로 노르만 戰士집단이 지배층으로 굳혀지자 잉글랜드는 무자비한 바이킹이 설치던 北海 문화권에서 벗어나 유럽의 선진문화와 연결되면서 발전한다. 18세기에 가면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이 되고 산업혁명과 민주발전의 모범으로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시스템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해이스팅스 전투는 오늘의 세계를 만든, 역사상 가장 결정적 전투였다고 평가된다.
  
   그 원동력은 노르만 지배세력의 법치와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 통치술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노르망 왕조의 32대 후손으로 일컬어진다. 사망한 필립공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런던 근교의 윈저 宮은 정복왕 윌리엄이 짓기 시작한, 유럽에서 사용되는 궁전으론 가장 오래된 곳이다. 필립 공을 비롯한 王家의 남자들은 거의가 군 장교출신인 것도 노르만 戰士집단의 전통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2차 대전 때는 여군이 되어 자동차 정비를 맡았다.
  
   *전쟁은 외교와 정치가 수백 년 걸려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일거에 해결하는 힘이 있다.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고 한다. 선거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이다.
[ 2021-04-24, 19: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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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산     2021-04-25 오전 11:08
조갑제닷컴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기사를 읽을 수 있겠나?
땅에 엎어지고도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고 말한 그 재치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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