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머리를 빡빡 깎고 올 수 있나?"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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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갚을 사람에게 돈 꿔주는 친구>
  
  나이 칠십 고개에 아직 사회활동을 하는 대학 동기와 양재 시민의 숲 근처에 있는 양고기 집에서 만났다. 그는 ‘사회연대은행’이라는 사회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그 단체가 뭘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일반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주는 일을 하고 있지.”
  “그렇다면 돈을 주고 되돌려 받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소린데 뭘 보고 돈을 꿔주는 거야?”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가 그리고 그가 시도하려는 일이 성공할 수 있는가를 보는 거야. 먼저 인간 자체를 보는 거지. 그 다음에 투자한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보는 거야.”
  
  “그렇다면 그것도 거저 돈을 뿌리는 거네?”
  내가 따졌다. 복지정책이 강화되면서 세금이나 사회적 기부금들이 선심을 쓰는 것 같이 세상에 뿌려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는 않아. 실제로 해 보면 자금 회수율이 칠십 퍼센트를 넘어. 그리고 나머지 삼십
  퍼센트도 채권으로 존재하는 거지. 사람만 정확히 보고 돈을 준다면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사람을 정확히 감별하는 그 판단이 아주 중요한 거지 뭐.”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고전소설인 ‘허생전’이 떠올랐다. 빗물이 새는 초가집에서 책만 읽으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허생원이 어느 날 이웃의 부자를 찾아갔다. 그 부자는 담보도 없는 허생원의 인간 자체만을 보고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허생원은 그 돈을 밑천으로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넉넉히 갚는다는 내용이었다.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돈에 갈증을 느낀다.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쉽게 고난의 강물을 건널 수 있는데 그게 없어서 물 속으로 빠져드는 수가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앞이 막막하던 시절이었다. 취직은 힘들 것 같고 고시 공부는 일이 년이 더 걸려야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을 고시원에서 버틸 수 있는 생활비가 절실했다. 나는 장학금을 주는 한 단체를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사람을 뽑는 기준은 일이 년 이내에 고시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느냐였다. 나는 면접을 담당하는 사람 앞에 불려갔다. 마음이 위축되면서 돈을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 바로 건물 지하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빡빡 깎고 올 수 있나? 면도질까지 해서 중처럼 머리에서 새파란 빛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서 말이지.”
  면접을 담당한 사람이 말했다. 나의 각오를 보자는 요구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 때는 절박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오늘 이내로 우리가 지정하는 깊은 산골의 암자 뒷방으로 갈 수 있나? 그리고 우리가 허락할 때까지 일체의 외출이 금지되는데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나?”
  
  나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번은 그 장학재단의 책임자가 확인 겸 그 암자 밑의 마을에 있는 여관으로 왔다. 그가 묵는 방으로 불려 내려갔다. 몇 개의 반찬과 국과 밥이 놓인 그의 앞에 놓인 작은 밥상을 보면서 침이 넘어갔다. 당시 암자에서는 새벽이면 밀쌀이라는 걸 쪄서 지은 거친 밥과 막된장을 조금 풀어놓은 시래기국 그리고 소금만 절인 허연 김치를 먹었었다. 국과 밥을 담은 양재기가 얼어붙은 길다란 베니어로 만든 상 위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따뜻한 여관방에서 작은 자개소반 위에 올려진 제대로 된 밥상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었다. 대학 졸업 후 일 년 정도 받았던 장학금을 받을 때의 광경이었다.
  
  그리고 사십 오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간 자체를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준다는 친구가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넌 어떤 기준으로 돈을 줄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냐?”
  내가 물었다.
  
  “네가 장학금 받을 때하고 비슷하지. 뭐. 사람을 대하면서 그가 정말 자립할 의지가 있는 건지 그리고 능력이 되는 건지를 봐. 너 머리를 깎고 암자에 들어가게 한 테스트 잘한 거라고 나는 봐.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돈은 될 사람을 골라서 줘야 해.”
  
  
[ 2021-06-02, 09: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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