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 하나 찍다가 죽는 게 소원이야”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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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찍다가 죽고 싶어>
  
  원로 탤런트 정한용을 만나 점심을 먹고 그의 얘기를 들었다. 배우답게 그가 겪은 얘기들을 바디 랭퀴지를 써 가면서 감칠맛 있게 잘 엮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세상살이의 단맛 쓴맛을 겪은 그의 말에는 이제 삶의 철학이 진하게 배어있는 것 같다.
  
  “나는 말이야 이제 좋은 영화 하나 찍다가 죽는 게 소원이야.”
  
  그의 내면에서 배우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자기의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처음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내가 정말 배우가 되어야 하나를 가지고 마음 속으로 고민했어. 그때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배우면 ‘딴따라’라고 하면서 일부러 낮춰보는 시각이 있었지. 드라마를 찍고 나서 거리를 나가면 아이들까지 나를 알아보고 반말 지꺼리를 하면서 웃어대는 거야. 그게 나를 좋아해서 친근한 의식이 든 팬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혼자 화가 나곤 했지. 한번은 지방에 촬영을 갔는데 꼬마들이 ‘정한용이다’라고 하면서 막 돌을 던지는 거야.”
  
  그의 마음이 어떤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에서 속칭 최고 명문이라는 학교를 다니면서 존중을 받아온 셈이다. 그가 그런 대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더러 술집을 가도 시비가 걸리는 수가 많았어. 우리 탤런트끼리 술을 마시고 있으면 꼭 와서 기분나쁘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어. 내가 아직 철이 없을 때 그런 건달 하나를 보고 화를 못 참아 손에 술병을 들었어. 그 놈을 때리려고 말이야. 옆에서 동료인 선배 하나가 얼른 귓속말로 ‘너 그렇게 하면 탤런트가 사람을 때렸다고 신문에 난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이번에는 술병을 그 놈을 주려고 했어. 차라리 나를 까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선배가 다시 귓속말로 나한테 ‘너 탤런트 아무개가 술병에 맞았다고 신문에 난다’라고 하는 거야. 생각해 보니까 그 말도 맞더라구.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지막에는 그 놈한테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으면서 ‘한잔 드시죠’ 하고 비위를 맞췄지. 탤런트의 입장이라는 게 그런 거야. 내가 잘못이 없는데도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어. 한번은 나와 상관없이 같이 술집에 갔던 후배들끼리 싸움을 한 적이 있어. 그런 경우도 자칫하면 신문에 탤런트 아무개 일행의 폭행이라고 날 수 있는 거야. 얼굴이 알려진 배우로 살기가 쉽지 않았어.”
  
  그런 게 스타들의 고통스러운 이면인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친구인 그는 이제는 다른 면도 오래 익은 장(醬)처럼 숙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 탤런트를 했을 때 제주도로 촬영을 간 적이 있어. 그때는 탤런트를 계속할까 말까 약간 까불거릴 때였지. 장소를 잡아 힘들게 촬영을 했는데 다른 장소를 가니까 감독이 거기가 더 배경이 좋다고 하면서 또 찍자는 거야. 출연료를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나는 별로였어. 그러다가 또 다른 좋은 장소가 나오면 감독이 새로 다시 찍자고 하는 거야. 마지막에는 내가 화가 치밀어서 대들었지. 형 나이뻘인 노련한 감독이 그런 나를 계속 달래더라구. 좋은 사람이었어. 그런데 말이지 그 때 감독이 단역이 필요해 현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연기의 기회를 주는 걸 봤어. 갑자기 배역을 맡은 사람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진지하게 연기하는 걸 보고 반성했지. 내가 감사를 모르고 까불었다고 말이야.”
  
  그의 말이 맞았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재연드라마를 찍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지하철역 직원으로 대사 한 마디를 하게 됐다고 너무 좋아하는 단역배우를 본 적이 있다. 그 한순간을 위해 그는 팔월의 뜨거운 태양으로 찜통같이 달구어진 버스 안에서 하루 종일 말 없이 자기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기의 역을 맡은 배우가 아닐까. 성경은 총연출을 맡은 하나님이 맡긴 역이 그 무엇이든지 충실하라고 했다. 절름발이 거지의 역할이라도 말이다. 그러면 연출을 맡은 그 분은 무대에서 그가 내려올 때 흡족해 하신다고 말이다.
  
[ 2021-06-13, 05: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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